소설리스트

광세일소-56화 (56/201)

#   56 - 광세일소_한추영 - 1304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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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5화. 곤륜검객 초의공 (4)

기하진이 검을 수평으로 들고 뢰정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뢰정을 바라보는 기하진의 눈빛이 곱지 않았다.

“이게 뭣 하는 짓인가?”

기하진의 뜻 모를 행동에 초의공이 노하여 언성을 높였다.

“곤륜파 대선배님께서 저의 목숨을 구해주신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공사(公私)의 구분은 분명해야 한다고 봅니다. 제게 은혜를 베푸신 것은 제 개인적으로 갚아야 할 일이지만, 이 자는 마교 수뇌 중의 한 명으로 맹주께서 즉시 체포하라고 명을 내리신 지 이미 오래입니다.”

기하진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2층 누각에 울러 펴지자 잠시 좌중에 적막이 흘렀다.

뢰정은 기하진이 무림맹의 신임 용봉단주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심각한 내상에서 회복되자마자 이렇게 자신을 추포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게다가 초의공이 기하진을 치료하는 동안 자신이 귀면쌍살에게서 이들을 보호했기에 잠깐이긴 했지만 기하진 등에 대해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만의 착각이었던 것이다.

뢰정이 기가 막힌 듯 허탈하게 웃었다.

“일전에 내가 귀면쌍살과 잠시 손을 섞은 적이 있는데 그 후, 내가 중양일지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강호에 파다하더군. 맹주께서도 아마 그 소문을 믿고 나를 잡아들이라고 하신 것이겠지?”

백련신교의 호교사자요 군사(軍師)답게 뢰정은 맹주가 무엇 때문에 자신을 체포하려고 하는지 단번에 꿰뚫어 보았다.

그러나 사실 기하진에게 있어서 이유는 그뿐만은 아니었다. 신교의 고수들에게 부모를 잃은 기하진은 신교는 마교요, 마교의 수뇌부라고 하면 이가 갈리도록 싫어했다. 잡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단칼에 베야 할 존재였다.

귀면쌍살이 친구 백무결의 원수이기는 했으나 증오심의 정도로만 따진다면 부모의 원수만 하겠는가. 그런 기하진이 뢰정에게 존칭을 쓴 것 자체가 이미 초의공을 많이 배려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뢰정이 한 손을 뻗어 기하진의 검을 살짝 밀어냈다.

“요즘 기 단주의 명성이 욱일승천(旭日昇天)하고 있다는 말은 나도 들었지만 내상을 입고 회복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과연 나를 잡을 수 있겠소?”

뢰정도 기하진에게 존칭을 써서 무림의 선배가 후배에게 이르는 말이 아니라 신교의 장로가 무림맹의 단주에게 말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뢰정의 말에 기하진이 냉소를 지었다.

“그것은 수라검께서 걱정할 것이 아닌 듯합니다. 수라검을 잡으려는 사람은 저 혼자가 아니니까요.”

그 말에 초의공이 성큼성큼 창가로 걸어가 창밖을 내다보니 어느새 모여들었는지 백여 명도 훨씬 넘는 용봉단원들이 이미 주루를 빙 둘러 몇 겹으로 포위하고 있었다. 주변 전각의 지붕 위 곳곳에도 짙은 남색 옷을 입은 용봉단원들이 쫙 깔려있었다. 자신이 귀면쌍살과 싸우는 동안 용봉단원들이 은밀히 이 주루를 포위한 것이 분명했다.

초의공이 뢰정에게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며 나직한 탄식소리를 냈다. 그러자 뢰정도 상황이 엄중함을 알아채고 인상이 굳었다.

“신교의 사대검왕 중 한 분이신 수라검께 미칠 바는 아니지만 있는 힘을 다해 수라검을 체포할 생각입니다.”

기하진이 검에 내력을 불어넣자 검이 저절로 우웅, 하고 울기 시작했다. 기하진과 뢰정이 부딪친다면 둘 중 하나는 크게 다칠 것이 분명했다. 그 생각이 들자 초의공이 낮은 침음을 내뱉더니 마음을 정한 듯 기하진을 바라보았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선배로서 마땅치 않지만 어쨌든 기 단주의 목숨을 살리는데 내가 부족한 내력이나마 보탰으니, 나를 봐서라도 이번만큼은 그냥 보내주면 안 되겠는가?”

초의공이 까마득한 후배인 기하진에게 부탁했다.

옆에서 그 말을 듣던 곤륜 제자들의 낯빛이 변했다. 초의공은 곤륜파 장문인의 사제요, 검법으로는 곤륜 제일인데 이런 무림의 대선배가 약관이 갓 지난 일개 단주에게 고개를 숙이다니, 무림사에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많은 사람 앞에서 곤륜파의 체면과 명성을 깎는 일이기도 했다.

“사숙님!”

보다 못한 소일기가 초의공을 부르며 앞으로 나오려고 하자 초의공이 팔을 들어 제지했다.

기하진은 초의공의 말에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딱 부러지게 거절했다.

“그건 어렵습니다.”

그 말에 뢰정이 초의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의공, 그럴 필요 없네. 맹주가 귀면쌍살의 말을 듣고 나를 추격한다는 사실 자체가 맹주의 위인 됨을 보여주는군. 괜히 나 때문에 자네의 입장만 곤란해질까 봐 걱정스럽구먼.”

뢰정의 말에 기하진이 노성을 내질렀다.

“감히 어디서 그런 망발이오?”

“하하하. 그런데 기 단주는 궁금하지 않으시오? 맹주께서 귀면쌍살의 말을 어떻게 듣게 되었는지? 맹주나 되시는 분이 풍문 따위나 듣고 그런 결정을 내리지는 않으셨을 테고, 누구에게 들었을까? 귀면쌍살이 나와 일전을 겨룬 사실을 아는 자는 당사자인 우리 두 사람을 빼면 신교의 수라대주, 그리고 임가장의 몇 명뿐인데 그중에 누가 맹주에게 그 사실을 고했을 것 같소? 설마하니 천린상단의 임 대방이 그랬을까? 하하하하.”

듣고 보니 이상했다. 수라검 뢰정이 중양일지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은 임가장에서 뢰정과 귀면쌍살이 서로 결투를 벌인 후 났다. 만일 그 소문을 귀면쌍살이 의도적으로 퍼뜨린 것이 아니라면 누가 퍼뜨렸을까?

다른 사람이 퍼뜨렸다면 무엇보다도 뢰정이 중양신공을 익힌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기하진 자신도 중양신공을 오랫동안 수련해왔지만 무림맹에 있는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다. 강호 모든 문파의 무공을 훤히 꿰뚫고 있는 천림원주인 소림사 공각대사나, 무당파 장로 허각 도장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 무공은 익힌 사람만이 알아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자신이 처음 귀면쌍살과 겨루었을 때, 기하진은 귀면쌍살이 익힌 내력이 중양신공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생각했었다. 귀면쌍살도 이상함을 느꼈던지 자신에게 사문이 어디냐고 묻지 않았던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귀면쌍살 외에는 맹주에게 이 사실을 말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면 맹주에게 말한 사람이 귀면쌍살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귀면쌍살은 무림 공적으로 모든 문파에서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는데 그런 귀면쌍살이 어떻게 맹주 앞에 버젓이 나타나 그 사실을 고한단 말인가?

혹시 누군가 그 사실을 대신 맹주에게 전해주었을까?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귀면쌍살의 말을 맹주가 믿을 리 없었다. 그리고 그렇다면 누군가가 귀면쌍살과 맹주 사이에 다리를 놓아준 게 되는 데 그것도 말이 안 되기는 매한가지였다.

기하진은 자꾸만 머릿속을 파고드는 불길하고 불경한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요사스러운 말 몇 마디로 맹주님을 의심하게 하다니 과연 마교의 수뇌부답군요. 이제 말장난은 그만하고 제 칼을 받으시지요.”

기하진은 말을 함과 동시에 창궁무애검을 펼쳐냈다. 검이 용울음 소리를 내며 뢰정의 심장부를 곧장 찔러 들어갔다. 모든 군더더기를 제거하여 단순하지만 위력적인 공격이었다.

기하진의 검이 쐐액,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찔러 들어오자 뢰정은 황급히 검을 수직으로 들어 올리며 기하진의 검을 막았다. 왼손으로 검날을 눌러 기하진이 공격하는 힘을 분산했다.

쩡, 하는 금속성이 귀를 때렸다.

뢰정은 기하진의 공격을 막았으나 반격하지 않고 다음 순간 창가로 몸을 날렸다. 이 자리에서 기하진과 싸우게 되면 자신을 도와주려고 했던 초의공의 입장만 난처하게 될 것이 너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뢰정이 달아나려고 한다고 판단한 기하진이 단원들에게 명을 내렸다.

“뢰정을 잡아라!”

사실 ‘전원 뢰정을 추격하라’라는 명을 받은 용봉단원들은 뢰정이 초의공과 만날 때부터 뒤를 쫓았다. 그러다가 두 사람이 산당루에 들어서자 은밀히 주루를 포위했다. 뢰정과 초의공은 귀면쌍살과의 대결에만 집중하느라 용봉단원들이 주루를 포위하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기하진의 명이 떨어지자 주루를 에워싸고 있던 용봉단원들이 뢰정을 향해 오른팔을 번쩍 쳐들었다. 그러자 짧은 화살 수십 대가 일제히 허공을 가르며 뢰정을 향해 날아갔다. 용봉단원들은 모두 소매 속에 짧은 화살인 수리전(袖裡箭)을 감추어 두고 있었다. 수리전은 크기는 작으나 속도가 워낙 빨라서 막아내기 여간 어렵지 않았다.

타다다닥. 뢰정이 검을 빙그르르 풍차처럼 돌려 화살을 쳐내자 튕겨 나간 화살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2층 누각의 지붕과 벽면에 꽂혔다.

뢰정은 쏟아지는 화살을 막아내며 그 기세 그대로 몸을 날려 건너편 전각의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또 한차례, 뢰정의 움직임을 따라 수리전이 발사되었다. 수십 대의 화살이 타다다닥, 콩 볶는 듯한 소리를 내며 전각의 벽면과 지붕에 날아가 꽂혔다. 일부는 전각 안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검진을 형성하라!”

뢰정이 지붕 위로 올라가자 용봉단주 기하진의 명이 또 떨어졌다. 그러자 인근 전각 지붕에서 대기하던 용봉단원 십여 명이 쏜살같이 몸을 날리며 뢰정을 향해 검을 내찔렀다.

일 대 일로 싸운다면 용봉단원 누구도 뢰정의 적수가 될 수 없지만 수십 명이 동시에 공격해 들어오자 뢰정도 바짝 긴장했다.

밑에서 초의공이 바라보니 용봉단원들은 하나같이 뢰정을 향해 살수를 펼치는 반면, 뢰정은 용봉단원을 해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 바람에 뢰정은 손발이 묶인 듯 몸놀림이 자유롭지 못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용봉단원들이 다치기라도 하면 같은 무림맹의 일원이기도 한 자신에게 누가 될까 봐 걱정하는 것이다.

초의공이 곤륜파가 자랑하는 경공신법, 운룡대팔식을 극상승으로 펼쳐내며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발을 한 번 구른다 싶었는데 순식간에 2층 누각에서 사라져 산당루를 에워싸고 있던 용봉단원들 앞에 불쑥 나타났다.

일검필격(一劍必擊). 초의공의 검이 용봉단원들을 바람처럼 훑으며 지나갔다.

검을 내뻗을 때마다 그 많은 용봉단원들이 제대로 한 번 반격도 못 하고, 시간이 정지한 듯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용봉단원 모두가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의 내로라하는 쟁쟁한 고수들인데도 초의공의 검은 두 번 지나는 법이 없었다.

용봉단원들이 눈앞에서 옷자락이 펄럭인다고 생각한 순간, 어느새 초의공은 앞에 보이는 전각 위로 날아오르며 다시 종횡무진으로 검을 떨쳤다.

그 전각 지붕에 있던 용봉단원 십여 명은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못 박힌 듯 역시 꼼짝하지 못했다.

이들은 하나같이 목 아래에 빨간 점 한 개가 생겼다.

초의공이 검봉점혈(劍鋒點穴)을 시전하여 검 끝으로 용봉단원들의 혈도를 찍은 것이다.

날카로운 검봉으로 혈도를 찍는 것은 위험하기 이를 데 없는 행위였다. 검에 쏟는 힘줄기나 상대방과의 거리 등, 조금만 오차가 있어도 혈도를 찍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초의공은 바람처럼 빠르게 몸을 놀리면서, 그것도 위험하기 그지없는 목 아래 천돌혈을 검 끝으로 찍은 것이다. 게다가 한 명도 검에 찔리거나 다치지 않았다. 검법이 극의에 달하지 않으면 절대 펼칠 수 없는 수법이었다.

지켜보던 기하진은 눈으로 보면서도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수수방관한다면 뢰정이 달아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기하진은 즉시 신법을 전개하여 뢰정이 있는 맞은편 전각 지붕 위로 올라갔다. 기하진이 몸을 날리자 어느새 공력을 회복한 남이도 함께 몸을 날렸다.

뢰정은 여전히 용봉단원 십여 명과 싸우고 있었지만 양측의 기세가 팽팽히 맞설 뿐 아직 어느 쪽도 이렇다 할 승기를 잡지 못한 상황이었다.

기하진이 용봉단원들과 합세할 요량으로 천마신검을 전개하며 일검을 내찔렀다.

챙! 하지만 기하진의 검은 뢰정에게 미처 닿기도 전에 제 3자에 의해 차단되고 말았다. 바로 초의공이었다.

“아니, 어찌 이러십니까? 지금 적을 돕고자 하십니까?”

기하진이 부르짖었다.

“기 단주, 곤경에 빠진 친우를 내버려 둘 수 없네. 꼭 뢰정을 잡아가겠다면 나를 이기고 잡아가시게.”

“설영객께서 무림의 대선배요 제 생명의 은인이시지만 맹의 일을 방해하신다면 맹에 보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뒷일을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하하, 걱정 말게나. 원래 내가 뒷일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아닐세.”

기하진이 다시 검을 내찔렀지만 뻗어내는 족족 초의공의 검에 모두 막혀버렸다.

“남이 대원, 같이 공격하자.”

남이가 합세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하기야 자신보다 무공이 월등히 높은 귀면쌍살도 초의공의 검 앞에서 꼼짝 못 하지 않았던가.

기하진이 이를 악물고 초의공을 향해 할 수 있는 모든 공격을 다 쏟아부었다. 창궁무애검과 천마신검을 연달아 펼쳐냈지만, 시종일관 초의공의 검 한 자루에 모두 막히고 말았다.

띠디디딩. 초의공의 검 끝에서 시퍼런 불길이 일어난다 싶더니 돌연 기하진의 한쪽 어깨가 뜨끔했다. 기하진마저 초의공의 검봉점혈에 당한 것이다. 초의공은 기하진을 제압하는데 예상외로 시간이 오래 걸리자 기하진의 무공에 상당히 놀라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기지수들 중에는 따라갈 자가 없겠군. 과연 용봉단 신임단주답구먼.”

그다음 순간, 초의공의 검이 뢰정과 싸우던 용봉단원 두어 명을 향해 휘리릭 움직였다. 다시 놀라운 검봉점혈 수법이 재연되고, 두 명의 용봉단원은 그만 싸우던 자세 그대로 몸이 굳고 말았다. 열 명 중 두 명이 빠지자 전세는 급격하게 뢰정 쪽으로 기울었다.

뢰정은 나머지 여덟 명을 손쉽게 물리치고 몸을 내뺐다.

“의공, 고맙네. 그럼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조만간 다시 오겠네.”

뢰정은 초의공과 재회를 약속하며 허공으로 몸을 날리더니 금방 시야에서 사라졌다. 거의 잡을 뻔했던 뢰정을 초의공의 개입으로 놓친 것이다.

뢰정이 사라지자 초의공은 기하진과 용봉단원들의 혈도를 풀어주며 말했다.

“본의 아니게 미안하네. 오해들 마시게.”

그러나 이 사실을 맹주에게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 생각하던 기하진의 안색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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