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55화 (55/201)

#   55 - 광세일소_한추영 - 1300037

#

제 54화. 곤륜검객 초의공 (3)

“저놈의 장법이 심상치 않으니 장법을 쓸 기회를 아예 주지 말아야 하네.”

뢰정이 다시 초의공에게 귀면쌍살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뢰정은 일전에 임가장에서 귀면쌍살과 손을 섞은 경험이 있던 터라 귀면쌍살의 장력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았다.

뢰정이 말에 초의공이 고개를 끄덕이며 차가운 눈초리로 귀면쌍살을 바라보았다.

“나도 이 자의 공력이 기이할 정도로 높다는 말을 들었네. 하지만 공력이 높다고 꼭 이긴다는 보장은 없지. 우리 곤륜파의 검법을 한번 맛본다면 이자의 오만한 생각도 바뀌겠지.”

초의공의 말에 갑자기 귀면쌍살이 귀면탈 뒤로 ‘크헐헐’ 하고 목쉰 웃음소리를 냈다.

“곤륜검법? 태허도룡검과 뇌전벽력검이라는 검법 말이냐? 네놈의 사질이 6단계까지 완성했다는데 너는 몇 단계까지 완성했느냐? 16단계쯤 되느냐? 크하하하.”

귀면쌍살이 대놓고 비웃자 초의공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미 두 검법 맛은 본 모양이군. 걱정하지 말아라. 네놈에게 맛보여줄 검법은 아직 많으니. 그렇다면 이번에는 중천자미유성검(中天紫微流星劍)을 보여주마.”

중천자미유성검은 곤륜파 검법 중 극소수에게만 전해지는 중천자미검을 초의공이 독자적으로 다시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검법이었다. 그래서 당금 곤륜파 제자들 가운데 이 검법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초의공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귀면쌍살은 적에게 얕잡아 보이지 않으려고 큰소리를 치고 있었지만 사실 초의공이 살짝 드러낸 무공에 적지 않게 당황한 상태였다. 초의공 한 명만 하더라도 겨우 간신히 호각을 이룰 뿐인데 그 옆에는 초의공에 버금가는 실력의 뢰정까지 있었다. 만약 이 두 사람이 동시에 손을 쓴다면 자신이 내일도 해를 보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중천자미유성검이라.... 이름 한 번 거창하군. 좋다. 얼마든지 덤벼라. 하지만 명문정파로 이름난 곤륜파 고수께서 비겁하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협공하지는 않겠지?”

귀면쌍살은 미리 초의공의 자존심을 자극하여 뢰정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할 심산이었다. 초의공은 귀면쌍살의 속마음이 훤히 보였으나 자신도 뢰정과 이 대 일로 귀면쌍살을 공격할 생각은 없었다.

“흥! 그런 걱정은 붙들어 매도 좋다. 만약 네놈이 오늘 나를 이긴다면 오늘은 그냥 보내주마.”

초의공의 말에 그제야 귀면쌍살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났다.

“남아일언은 중천금이니 지금 한 말 반드시 지키거라.”

귀면쌍살은 초의공의 검술이 비록 놀랍기는 하지만 일 대 일로 싸운다면 절대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지난번 뢰정과 싸웠을 때도 결국 자신이 유리하지 않았던가?

그때 반쯤 의식을 잃고 있던 기하진이 쿨럭, 피를 토했다.

“단주!”

귀면쌍살과 초의공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던 남이는 정신이 번쩍 들며 얼른 기하진을 바닥에 앉히고는 기혈이 뒤집히지 않도록 혈도를 짚었다. 기하진은 즉시 공력을 불어넣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남이는 자신도 이미 중상을 입은 마당에 기하진에게 불어넣을 공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기하진이 다시 울컥, 선혈을 토해냈다. 그 모습을 본 초의공이 성큼 다가왔다.

“비키시오. 내가 좀 보겠소.”

초의공의 말에 남이가 주저하며 비키자 초의공은 그대로 기하진의 뒤에 좌정하고 앉았다. 그리고는 뢰정에게 말했다.

“정이, 내가 잠시 이 아이의 상처를 볼 때까지만 귀면쌍살 저놈을 좀 봐주게나.”

“그러지.”

뢰정은 초의공의 말에 시원스럽게 대답하더니 팔짱을 끼고 그대로 귀면쌍살을 노려보았다. 귀면쌍살은 어이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지금 도망갈 수도 없었다. 만약 도망가려고 한다면 뢰정과 초의공이 동시에 자신을 공격할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오늘 살아나갈 수 없다. 차라리 둘 중 한 사람과만 싸워야 어쨌든 달아날 가망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기하진, 저놈을 치료하느라고 공력을 쓴다면 자신과 싸울 때는 그만큼 더 힘이 빠져있을 테니 자신이 훨씬 유리했다. 그 생각이 들자 귀면쌍살은 짐짓 대범한 척 큰소리를 쳤다.

“걱정하지 말아라. 아무리 오래 걸리더라도 이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네놈을 기다리마.”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그 말에 초의공은 안심한 듯 기하진의 등 뒤 명문혈에 손바닥을 대고 공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정순한 곤륜파의 내가 공력이 들어오자 순식간에 기하진의 중양신공과 융화되면서 기혈이 돌기 시작했다. 서로 성질이 다른 기운은 이렇게까지 빨리 융화되기 어렵지만 두 사람의 공력이 모두 바탕을 도가 계열에 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차 한 잔쯤 마실 시간이 지나자 기하진이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그리고는 검은 핏덩이 서너 개를 와락 내뱉었다.

“이제 정신이 드느냐?”

초의공의 말에 기하진은 뒤를 돌아보았다. 구레나룻이 멋진 처음 보는 중년의 도사가 자신의 뒤에 앉아 있었다. 정신을 잃기 전, 소일기가 ‘사숙’이라고 외쳤던 사람이 분명했다.

기하진은 즉시 허리를 굽히며 공손하게 포권을 취했다.

“선배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귀면쌍살은 자신의 철산장을 두 번이나 정통으로 맞은 기하진이 불과 일각 만에 내상을 치유하자 믿을 수가 없어서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이라 할지라도 그 정도의 내상을 입고 완쾌되려면 적어도 사흘은 요양이 필요했다.

기하진의 무공도 사실 절대 우습게 볼 실력은 아니었다. 귀면쌍살은 자신이 상대해야 할 적이 또 하나 늘자 속으로 침을 삼키며 슬쩍 곁눈질로 기하진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득보다 실이 많을 성싶었다.

‘초의공 저놈의 힘이 빠졌을 때 저놈을 격퇴하고 약속을 지키라고 우길밖에.’

귀면쌍살이 오른손에 공력을 모으며 초의공을 향해 소리쳤다.

“지루하기 짝이 없구나. 언제까지 기다려 주랴?”

귀면쌍살의 속셈을 알고 있는 초의공이 냉소를 지었다. 평소에도 워낙 차갑고 무뚝뚝한 표정인데 냉소를 지으니 더욱 인상이 차가웠다.

“기대에 부응해 줘야겠지.”

초의공이 스르릉, 소리와 함께 검집에서 검을 빼 드는가 싶더니 돌연 검광이 번쩍, 하고 일었다.

“앗!”

초의공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기이할 정도로 빠른 속도에 놀라 모두 소리를 질렀다. 귀면쌍살은 단단히 준비하고 있었음에도 어느새 검이 눈앞을 찔러 들어오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검이 어찌나 빠른지 검이 지나간 자리가 유성처럼 빛을 내며 길게 이어졌다.

귀면쌍살은 허겁지겁 뒤로 물러서다가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자 급기야는 바닥에 몸을 굴려 위기를 모면했다. 땅바닥을 구르는 것은 삼류 무사들이나 하는 신법으로, 사실 신법 축에도 들지 못했다. 그래서 무공 수준이 이류만 되어도 볼썽사납게 땅바닥을 구르지는 않는데 구대문파의 쟁쟁한 고수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천하의 귀면쌍살이 연이어 오는 날카로운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삼류 무사들이나 하는 신법을 쓴 것이다.

“잘도 구르는구나. 기왕이면 개똥밭에서 굴렀으면 더 좋았을 것을. 하하하.”

귀면쌍살이 체면도 벗어던지고 바닥을 구르자 지켜보던 뢰정이 비웃으며 껄껄 웃었다. 평소에 이와 같은 비웃음을 받아본 적이 없었던 귀면쌍살은 대번에 얼굴이 시뻘게졌지만, 다행히 귀면탈을 쓰고 있어서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

분통이 치민 귀면쌍살은 이를 악물고 철산장을 휘두를 기회만 호시탐탐 노렸다.

그러나 초의공은 마치 귀면쌍살의 속마음을 훤히 읽기라도 하듯 귀면쌍살이 장법을 쓰려고만 하면 검을 휘두르는 속도를 더욱 높여 장법을 아예 쓰지 못하게 했다.

초의공은 기하진을 치료하면서 공력을 적지 않게 썼을 텐데도 공격의 속도나 힘에 전혀 지장을 받지 않은 듯했다.

귀면쌍살은 초조해서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대로 간다면 초의공의 검에 결국 당하고 말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한참 머리를 굴리는데 문득 바닥에 쓰러진 곤륜 제자 두 명이 눈에 들어왔다.

귀면쌍살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허겁지겁 초의공의 검세를 막아내는 척하면서 한 발, 한 발 교묘히 곤륜 제자들이 있는 쪽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초의공은 귀면쌍살의 의도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단지 귀면쌍살이 철산장을 쓰지 못하도록만 할 요량으로 검세를 사정없이 퍼붓기만 했다.

뒤에서 지켜보던 뢰정은 귀면쌍살의 움직임이 수상쩍어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귀면쌍살이 곤륜 제자 근처까지 가자 갑자기 귀면쌍살의 의도를 파악하고는 크게 소리쳤다.

“조심하게나!”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귀면쌍살이 심미방을 부축하고 있던 소일기의 어깨를 붙잡더니 초의공에게 힘껏 집어던졌다.

“검을 내려놓아라!”

초의공은 사정없이 검을 휘두르다가 돌연 자신의 사질인 소일기가 공격 범위 안으로 들어오자 대경실색했다. 검을 회수하지 않으면 소일기가 자신의 검에 대번에 산 채로 분해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모든 무공이 다 그렇지만 검법도 물 흐르듯 유연하고 거침이 없어야 하는데 돌연 검을 황급히 회수하자 공격이 끊어지며 허점이 생기고 말았다.

귀면쌍살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즉시 장을 찔러 넣었다. 바로 무림을 두려움에 떨게 한 철산장(鐵山掌)이었다. 한 손으로 소일기를 붙잡은 초의공은 도저히 검을 떨칠 형편이 되지 않아 부득이 자신도 장력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다.

초의공이 급히 곤륜파의 내가 공력인 대안공(大雁功)을 끌어올려 귀면쌍살의 쌍장에 손바닥을 부딪쳤다.

펑! 소리가 나며 소일기를 붙잡은 초의공의 몸이 공중으로 붕 뜨더니, 십여 척이나 뒤로 주르르 밀렸다. 초의공이 급히 천근추를 전개하여 양다리에 힘을 주며 버티자 그제야 몸이 멈추어 섰다.

그러나 그다음 순간, 쾅, 소리와 함께 누각의 바닥에 커다란 구멍이 두 개 생기고 말았다. 초의공의 천근추 공력을 나무로 된 마룻바닥이 감당하지 못하고 구멍이 뚫린 것이다.

바닥이 뚫리며 구멍이 나자 먼지와 함께 나뭇조각이 우수수 떨어지고 그와 함께 아래층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아이고, 무사님들! 제발 살살 하세요. 우리 집 다 무너지겠습니다요!”

가뜩이나 2층에서 싸움이 벌어지자 가슴을 졸이며 이를 지켜보던 주루의 주인이 깜짝 놀라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사정했다.

귀면쌍살의 쌍장을 받은 초의공은 대번에 기혈이 뒤집히고 경락이 막힌 듯 얼굴이 새하얘졌다. 그 모습을 본 귀면쌍살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자신의 공격이 성공한 것이다.

“내가 이겼으니 이 몸은 이만 물러가시겠다. 명문정파의 협객들이시니 한 입으로 두말하지는 않겠지.”

귀면쌍살의 말에 초의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만에야 겨우 ‘후’, 하고 숨을 뱉은 초의공이 한쪽으로 물러나며 비켜섰다.

“내가 한 약조는 지키마. 오늘은 쫓지 않겠지만 조만간 곤륜 제자와 구대문파 후배들의 목숨값을 받으러 가겠다.”

초의공은 자신이 약조한 이상, 그 약조는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런 사심 없이 귀면쌍살이 지나갈 수 있도록 비켜선 것이다.

기하진은 초의공의 모습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상대방이 비록 악인이라 하더라도 자신이 한 말을 지키려는 초의공의 모습은 진정한 협객의 자세였다.

귀면쌍살은 귀면탈을 통해 ‘크헐헐헐’하고 기묘한 웃음을 웃으며 2층 누각의 창가에 다가갔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 초의공을 보며 비웃었다.

“글쎄, 그게 과연 네놈 뜻대로 되겠느냐? 크흐흐흐.”

그와 동시에 귀면쌍살이 2층 누각에 있던 사람들을 향해 돌연 오른손을 홱 뿌렸다. 그때까지 계속해서 귀면쌍살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던 기하진은 귀면쌍살의 어깨가 움직이자 귀면쌍살이 우모침을 쏘려는 것을 눈치채고 즉시 소리쳤다.

“독침입니다!”

기하진의 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뢰정이 검을 바람개비처럼 회전시키며 자신과 초의공, 곤륜제자들을 향해 날아오는 우모침을 쳐냈다.

기하진도 다급히 검을 들어 자신과 남이를 향해 날아오는 우모침을 막았다. 어찌나 다급했던지 검을 검집에서 뺄 겨를도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검막에도 불구하고 우모침을 맞은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이미 목숨이 끊어진 추성학이었다. 추성학의 몸에 다시 우모침 두 개가 타닥 박혔다.

“역시 죽고 나면 끝이구먼. 사문에서도 더 이상 신경을 안 쓰는 걸 보니. 하하하하.”

귀면쌍살이 웃음소리를 길게 남기더니 훌쩍 몸을 날려 밖으로 달아났다. 초의공은 추성학의 몸에 다시 우모침이 꽂혀 상처가 더욱 새카매지자 침통한 빛을 감추지 못했고, 소일기만 울먹이는 소리로 애타게 외쳤다.

“사제!”

이 모든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던 뢰정이 초의공에게 말했다.

“자네 사질이 목숨을 잃게 되어 유감이네. 자네가 사문의 일을 정리하는 대로 다시 오겠네. 그때 다시 얘기하세나.”

그러자 초의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

뢰정이 몸을 돌려 2층 누각 창가로 가자 갑자기 기하진이 검을 빼 들고 뢰정의 앞을 가로막았다.

“수라검께서는 저희와 함께 가셔야겠습니다.”

뜻밖의 상황에 초의공을 비롯하여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기하진에게 집중되었다. 뢰정도 뜻밖이라는 듯 눈빛으로 기하진을 쳐다보았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