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 광세일소_한추영 - 1298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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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3화. 곤륜검객 초의공 (2)
귀면쌍살은 기하진의 공격을 여유있게 받아치려다가 돌연 웅혼한 기운이 자신의 왼쪽을 치받고 들어오자 간담이 서늘해지면서 손발이 다급해졌다. 서둘러 피한다고 피했지만 그만 뜻밖의 공격에 옷자락을 베이고 말았다.
귀면쌍살이 노하여 고개를 들고 쳐다보니 기하진을 도와 자신을 공격한 사람은 뜻밖에도 아미파의 제자인 남이가 아닌가?
“너는 아미파 제자렷다? 내가 자비를 베풀어 목숨을 살려준 것도 모르고 다시 되돌아오다니 네가 호랑이 간이라도 씹어 먹은 모양이구나!”
귀면쌍살이 노성을 터뜨렸다. 이에 남이도 지지 않고 맞섰다.
“무림의 해악을 없애는데 아미파가 뒤로 빠질 수는 없지!”
기하진은 남이가 평소 말이 없어서 내성적이라고 생각하다가 의외의 모습에 적지 않게 놀랐다.
사실 남이가 말이 적은 것은 평소 성격이 그럴 뿐, 불의를 보고 결코 뒤로 내빼는 성격은 아니었다. 이번에도 귀면쌍살을 기하진이 혼자서 맞서려고 하자 걱정이 되어 가까운 용봉단원 중 한 명에게 기하진의 명만 전하고 되돌아온 것이었다.
기하진은 혼자서 귀면쌍살과 맞서 싸우면서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남이가 와서 합세하자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러나 혼자서 싸우면서 워낙 기력을 소진한 터라 남이와 속도를 맞추어 공격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남이는 귀면쌍살을 공격할 때 기하진의 공격이 자연스레 이어지지 않은 것을 보고 기하진의 상태가 좋지 않음을 대번에 눈치챘다.
“단주, 괜찮아요?”
남이가 귀면쌍살을 향해 후속 공격으로 검을 대여섯 번이나 찔러 들어가며 기하진에게 물었다. 기하진은 남이가 돌아오자 든든했지만 도리어 큰 소리로 남이를 나무랐다.
“어떻게 된 거야? 왜 돌아왔어?”
기하진의 책망하는 듯한 말투에 남이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단원들 전원에게 뢰정을 추격하라고 일러뒀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기하진은 남이를 도와 귀면쌍살에게 검을 휘두르면서 소리쳤다.
“그 말이 아니잖아! 돌아오면 위험하다고 했잖아. 단주 명을 이렇게 안 들으니 단주의 면모가 안 서는 것이라고!”
기하진이 화가 난 듯 소리치자 남이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자기 딴에는 기하진이 염려되어 가다가 급히 되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와서 살펴보니 기하진은 귀면쌍살에게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다급한 마음에 앞뒤 가리지 않고 와락 뛰어들어 귀면쌍살을 공격해 들어갔다. 남이는 끊일 줄 모르던 기하진의 장대한 공력이 이어지지 않는 모습에 너무 놀랐다. 자신이 조금만 늦게 왔더라도 기하진은 귀면쌍살의 검 아래에 쓸쓸히 죽어갔으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조마조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런 자신의 마음도 모르고 지금 기하진은 도리어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런데 화를 내는 기하진의 속마음이 느껴졌다. 기하진은 자기 자신이 죽을 뻔한 것은 신경도 안 쓰고 지금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다. 속마음을 안 이상, 말투가 좀 서운하다고 어린애처럼 굴 수는 없었다.
“다음부터는 잘 들을게요. 하지만 이번에는 안돼요. 단주 혼자서는 너무 위험해요.”
남이의 말에 기하진도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말하는 와중에도 두 사람은 숨돌릴 겨를도 없이 귀면쌍살을 몰아쳐 갔다. 남이가 아미복마검으로 귀면쌍살을 공격하는 동안, 기하진이 창궁무애검으로 은밀히 남이의 빈틈을 철통같이 수비했다.
두 사람은 말로는 티격태격하면서도 한 사람이 공격하면 다른 사람이 보호해 주고, 또 공수를 서로 바꾸며 마치 음양이 서로 조화를 이루듯 공격과 수비에 전혀 빈틈이 없었다.
한편 귀면쌍살은 남이가 합세하면서 싸움의 양상이 바뀌자 속으로 상당히 놀라워했다. 남이가 비록 명문정파에서 수련을 착실히 쌓았다고는 하나 아직 자신에 비하면 공력이 턱없이 부족하고 실전경험이 부족해서 만약 일대일로 싸웠다면 일각도 안 되어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기하진과 합격을 하면서 서로 자신의 목숨은 돌아보지 않고 상대방을 보호하니 일거에 전세를 뒤집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수십 초식이 지나자 남이의 손발도 둔해지기 시작했다. 역시 관건은 공력이었다. 남이가 비록 정심한 검술을 펼치고 있었으나 내력의 깊이가 세 사람 중 가장 얕았기 때문에 가장 먼저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기하진은 남이보다는 사정이 나았으나 싸운 지는 훨씬 오래되어 역시 공력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만 귀면쌍살은 어찌된 영문인지 아무리 싸워도 공력이 줄지 않는 듯했다.
남이의 팔다리가 조금씩 둔해지면서 귀면쌍살의 검날이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몇 번의 위기가 찾아왔다. 기하진은 다시 패색이 짙어지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정녕 귀면쌍살의 칼날 아래 목숨을 잃게 되는가 싶었다.
싸우면서 힐끗 곁눈질로 보니 남이도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자신을 구하러 왔다가 도리어 위험에 빠진 남이를 보자 미안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래.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남이와 곤륜파 제자 두 명은 달아나도록 해야지.’
기하진은 귀면쌍살을 노려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기하진의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귀면쌍살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슬슬 끝을 내어보자꾸나.”
귀면쌍살이 벼락같이 소리치며 남이를 향해 좌장을 풍차 돌리듯 휘둘렀다.
남이는 귀면쌍살의 검을 정신없이 막아내다가 돌연 자신의 복부로 귀면쌍살의 장이 파고 들어오자 깜짝 놀랐다. 어느샌가 귀면쌍살이 다섯 손가락을 쫘악 펼치고 기이한 각도로 손을 꺽으며 좌장을 떨쳐낸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허공을 격하고 때려오는 장은 도저히 피할 여지가 없었다.
“앗!”
남이는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이를 예견한 귀면쌍살은 이미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귀면쌍살의 장이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왔다. 남이는 돌연 끝났구나, 싶어서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퍽! 장력이 정확히 인체를 가격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통으로 맞은 듯한 소리는 육중했고, 뒤이어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윽!”
그러나 남이 자신은 아무런 고통도 느낄 수가 없었다. 이상한 느낌에 두 눈을 떠 보니 기하진이 어느새 자신을 감싸 안아 보호하며 귀면쌍살의 좌장에 오른쪽 등짝을 내어주고 있는 게 아닌가! 자신의 복부를 때린다 싶었던 귀면쌍살의 좌장은 기하진의 등을 정통으로 가격했던 것이다.
당황한 남이의 코끝으로 기하진의 체취가 흠씬 올라온다 싶더니 기하진의 몸이 자신 앞으로 쏠리며 그만 축 늘어지고 말았다.
“단주!”
남이는 놀라서 기하진의 몸을 붙잡았다.
“흥! 끝까지 나를 방해하겠다?”
귀면쌍살은 남이를 노리던 공격이 기하진에게 가로막히자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는 다시 손바닥에 공력을 모으고 벼락같이 내질렀다.
“이놈! 이번에는 비켜 갈 수 없다.”
“헉!”
귀면쌍살이 다시 자신을 향해 장을 휘두르자 남이는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뜻밖의 상황에 놀라고 당황한 나머지 생각대로 몸이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이다.
또다시 귀면쌍살의 장력이 남이를 향해 쏟아졌다. 그런데 정신을 잃었다고 생각했던 기하진이 돌연 남이를 다시 밀어내며 힘겹게 손을 들어 귀면쌍살의 장력을 받아냈다.
“우욱!”
귀면쌍살의 장력을 받아내는 순간, 기하진이 울컥, 하고 붉은 피를 토해냈다. 이미 한 차례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다시 장력을 받자, 내기가 걷잡을 수 없이 진탕했다.
다른 사람이 귀면쌍살의 장력을 두 번이나 받았다면 바로 절명했겠지만, 기하진은 중양신공으로 쌓은 막강한 내력이 전신에 퍼져 있어서 귀면쌍살의 철산장을 두 번이나 받고도 숨이 끊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남이는 기하진이 다친 상황에서 또다시 자신을 보호하려고 귀면쌍살의 장력을 받아내자 가슴 속에서 무엇인가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저릿하고, 아프고,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떨림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뜨거운 눈물이 치솟았다.
“단주!”
남이가 소리치자 기하진이 힘겹게 눈을 떠서 남이를 바라보았다. 귀면쌍살의 그 무서운 철산장을 두 번이나 맞은 기하진의 안색은 핏기가 없어 밀랍처럼 새하얬고, 입가에는 검붉은 핏물이 묻어 있었다.
“도, 도망가....”
힘없이 외치는 기하진을 바라보며 남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주르르 흘리고 말았다.
“가긴 어딜 간단 말이냐? 기 단주는 살려주더라도 너는 살려줄 수 없지. 너는 아미파의 적전제자가 아니냐?”
싸늘한 귀면쌍살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더니 귀면쌍살의 검이 남이를 베어왔다.
그 순간, 번쩍, 하고 빛이 나더니 창가에서 검 한 자루가 유성처럼 빠른 속도로 귀면쌍살을 찔러 들어왔다. 검이 저절로 사람을 찔러 들어오다니, 그런 일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터라 귀면쌍살은 깜짝 놀랐다.
휘리릭. 검이 순식간에 귀면쌍살을 한번 찌르더니 그대로 돌아서 다시 원래 날아온 창가 쪽으로 되돌아갔다.
창가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구레나룻을 멋지게 기른 늠름한 체구의 중년인이 당당하게 서 있었다. 중년인은 검이 되돌아오자마자 검을 잡고 그대로 다시 귀면쌍살을 공격해 들어갔다.
귀면쌍살은 자신을 공격해 들어오는 사람의 기세가 범상치 않은 것을 보고 경공을 전개해 황급히 뒤로 물러났지만 공격해 들어오는 사람의 속도는 눈으로 보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뭔가가 번뜩한다 싶더니 귀면쌍살은 그만 옷 앞자락이 검에 길게 베이고 말았다. 검이 반 치만 더 깊게 들어왔더라도 옷이 아니라 자신의 뱃가죽이 저렇게 길게 베였으리라.
귀면쌍살은 일격에 자신을 이렇게까지 당황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다. 실로 검술이 신의 경지였다.
“누구냐?”
귀면쌍살은 난데없이 나타난 중년인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중년인은 검을 다시 검집에 꽂아 넣고는 귀면쌍살을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때 중년인을 발견한 소일기가 소리쳤다.
“사숙!”
중년인은 곤륜제일검객으로 이름 높은 설영객(雪影客) 초의공(草衣工)이었다. 초의공은 곤륜파 장문인 운진자의 막내 사제로 검술로는 강호 최고의 고수이자 대선배인 화산파의 태상장로, 비천검 독고양에 비견되는 고수였다.
“사숙, 저놈에게 성학이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흑흑.”
소일기는 감정이 격해진 듯, 말을 하다가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뭣이라고! 귀면쌍살, 이놈!”
소일기의 말에 초의공의 눈에서 안광이 폭사하더니 그대로 발을 굴려 귀면쌍살에게 몸을 날렸다. 주위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초의공이 검을 빼 드는 모습을 보지도 못했는데 어느새 오른손에는 검이 쥐어져 있었다.
희뿌연 검광이 일어난다 싶더니 검은 보이지도 않은 채 검이 부딪치는 소리만 요란하게 들렸다.
귀면쌍살에게는 수라검 뢰정 이후 처음 맞는 강적이었다. 그러나 지금 귀면쌍살이 느끼는 당혹감은 수라검 뢰정 때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검이 움직이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눈알이 핑핑 돌 지경이었다.
초의공이 한차례 폭우가 치듯이 인정사정없이 검광을 쏟아내며 공격하다가 돌연 검을 멈추고 우뚝 섰다.
“네놈의 무공이 절대 사마외도는 아니로구나.”
초의공의 말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천하의 흉신악살인 귀면쌍살이 사마외도가 아니라니, 그럼 무엇이란 말인가!
귀면쌍살도 초의공의 말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는 곧 당황한 기색을 숨기려는 듯 일부러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우하하하. 사마외도는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웅혼한 내력과 정밀한 초식으로 뒷받침되고 있으니..... 이건 아무래도 구대문파나 오대세가 중의 하나가 아니면 절대 펼칠 수 없는 검법이다.”
초의공의 말에 듣고 있던 소일기가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사숙!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저놈은 구대문파의 제자들만 골라서 죽이는 살인마입니다. 그런 놈이 어찌 명문정파의 제자이겠습니까?”
그러나 초의공은 가면 뒤에 숨겨진 귀면쌍살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푸른 하늘에 한점 거칠 것이 없는 검세.... 네놈은 남궁세가와 무슨 관계냐?”
초의공의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소일기와 남이는 깜짝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의식을 거의 잃고 쓰러져 가던 기하진마저 두 눈을 떴다.
남궁세가와 관계가 있다니.... 남궁세가면 오대세가 중에서도 으뜸인 문파요 당금 무림 맹주의 가문이 아닌가! 그런 남궁세가와 강호의 공적인 귀면쌍살이 모종의 관계가 있다면 그것이 가져올 결과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강호에 엄청난 회오리바람이 불어닥칠 것이 분명했다.
귀면쌍살은 초의공의 말에 잠시 움찔하더니, 곧 다시 어이가 없다는 듯 껄껄 웃었다.
“남궁세가라니? 네놈의 그따위 망발을 누가 믿는단 말이냐?”
그때 갑자기 휙 하고 누군가가 다시 창문을 통해 누각 안으로 날아 들어왔다. 감탄이 저절로 나올 만큼 경쾌하기 그지없는 신법이었다.
“내가 믿지. 네놈의 검법은 분명히 남궁세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려 누군지 바라보았다. 남이도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말한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동공이 확장되었다.
“앗! 당신은...!”
남이의 입에서 짧은 경악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훌쩍 큰 키에 탈속한 듯한 중년 문사 차림. 바로 수라검 뢰정이었다.
뢰정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초의공 뒤에 섰다.
“저놈의 장법을 조심하게나. 무지막지한 공력으로는 저놈을 당할 자가 없을 것이네.”
놀랍게도 뢰정의 말에 초의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보더라도 그 모습은 절친한 지기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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