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51화 (51/201)

#   51 - 광세일소_한추영 - 1285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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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0화. 몰려오는 먹구름 (4)

천옥랑은 일봉을 앞에 두고도 느긋했다. 검을 잡고도 한 손은 여전히 뒷짐을 진 채 일봉을 보고 한 번 싱긋 웃는 여유까지 보였다.

“자, 내가 3초를 양보하리라. 얼른 공격해보시오. 일봉 대주가 자신의 약점을 깨달을 수 있도록 내 성심을 다하리다. 앞으로 두 집안이 그 어느 집보다 가까운 사이가 될 터인데 나도 임 소저를 위해 뭔가 할 일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일봉 대주의 실력이나 한번 점검해봐야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소. 임 소저의 호위를 계속 맡겨도 될지 어떨지 퍼뜩 가늠이 안 돼서. 하하하. 너무 기분 나쁘게 듣지 마시오.”

천옥랑은 아까부터 계속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만 했다. 일봉은 천옥랑을 무뚝뚝하게 쳐다보며 검을 잡은 두 손을 두 눈썹 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말씀 끝났으면 시작하겠소이다.”

일봉의 검이 직선으로 찔러 들어왔다. 한 점 군더더기가 없는 깔끔한 솜씨였다.

일봉은 요혜신니에게 잠깐 가르침을 받고 난 이후 상승무공의 위력을 깨닫고 상승무공에 대한 갈증이 점점 커졌다. 평범한 검법으로는 아무리 수련해도 그 간극을 메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그런 무공을 가르쳐줄 사부가 없기에 평범한 강남검법의 위력을 높이기 위해서 일봉은 고련을 거듭해왔다. 그 결과, 비록 요혜신니가 몸소 전수한 아미복마검 일 초 만큼의 위력은 아니지만 강남검법도 예전에 일봉이 휘두르던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발전했다.

천옥랑은 실실 웃으며 일봉을 상대하다가 자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일봉의 검 끝이 양미간 사이를 찔러 오자 깜짝 놀라서 간담이 서늘해졌다. 자신이 해도 그 이상 펼칠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하고도 신속한 수법이었다.

천옥랑이 일초를 피하자 일봉의 검이 쾌속하게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으며 천옥랑의 가슴을 공격해 들어갔다. 역시 군더더기를 극도로 절제한 공격수법이었다. 천옥랑이 한 발 뒤로 물러서며 황급히 검을 들어 올려 일봉의 검을 막았다.

휘리릭, 일봉의 거친 공격에 천옥랑의 옷자락이 조금 잘려나갔다. 천옥랑의 얼굴에서 어느새 웃음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땅!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천옥랑에게는 친목을 위한 비무이겠으나 일봉의 눈에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거듭해서 자신을 무시하는 천옥랑에게 결코 지고 싶지 않은, 무인의 자존심이 걸린 한판 대결이었다.

순식간에 수십여 초가 지나고, 두 사람이 비무를 한다는 얘기가 퍼져나가자 구경꾼들이 점점 몰려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비무를 한다는 이야기는 임예린의 귀에도 들어갔다. 임예린의 몸종이 쪼르르 달려와서 그 얘기를 전한 것이다. 임예린은 그 얘기를 듣자마자 천옥랑의 의도가 눈에 훤했다.

‘보나 마나 나한테 잘 보이려는 수작이겠지. 그나저나 일봉이 고생 좀 하겠네.’

“지금 사람들이 모두 비무 구경 간다고 난리예요. 아가씨는 보러 안 가세요?”

“너나 갔다 오렴. 나는 별로 궁금하지 않구나.”

“호호호. 그래도 될까요? 저는 아직 일봉 대주가 칼 휘두르는 모습을 못 봐서요. 아가씨, 그럼 금방 다녀올게요. 잠시만 계세요.”

몸종이 총총걸음으로 나가자 소란스럽던 방 안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해는 져서 밖은 이미 어두웠고 하늘에는 손톱보다 작은 실금 같은 초승달이 떠 있었다.

창밖으로 달을 잠시 바라보던 임예린의 머릿속에 지난번에 숨어서 지켜봤던 석추명의 모습이 떠올랐다. 훤칠한 미장부로 변해서 이름을 듣지 못했다면 길에서 만나더라도 알아볼 수가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련신교의 대주라고 했던가? 한 번 봤으니 또 볼 날이 오겠지?

강호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임예린은 이번 참에 각종 문파에 대해 좀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관련 책을 좀 읽던 중이었다.

임예린이 다시 시선을 거두어 책을 보는데 문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벌써 돌아온 거야? 비무가 생각보다 시시했나 봐?”

임예린은 여전히 책에서 시선도 거두지 않고 말했다. 보나 마나 몸종이 돌아왔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금방이라도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와야 하는데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제야 뭔가 이상한 기색을 눈치챈 임예린이 책에서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바라보려는 찰나, 돌연 누군가가 문을 열고 바람처럼 신속하게 들어와서 임예린의 수혈을 짚었다. 암살을 전문으로 하는 살수처럼 대담하고도 정확한 수법이었다.

임예린은 순식간에 정신이 아득해져서 침입자가 누군지 확인할 새도 없이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바닥에 떨어뜨린 채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임예린의 방에 몰래 잠입했던 복면인은 준비한 자루를 꺼내 임예린을 넣고는 창문을 통해 유유히 지붕으로 날아 올라갔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

일봉은 사력을 다했지만 일초 반식의 차이로 결국 천옥랑에게 지고 말았다.

사실 두 사람의 실력이 크게 차이 나지는 않았다. 천옥랑은 초식이 심오하고 일봉보다 공력이 높았지만, 일봉은 실전에서 터득한 본능과도 같은 움직임이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 요혜신니의 가르침으로 깨달은 바도 적지 않아 천옥랑은 예상외로 금방 승기를 잡지 못하고 수백 초식을 겨루어야 했다.

하지만 상승무공은 역시 명불허전이었다. 일봉은 수백 초식 만에 결국 천옥랑에게 허점을 보인 것이다.

“졌소이다.”

일봉이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다. 중간에 복마검 일 초를 사용할 때는 천옥랑도 당황하여 쩔쩔맸다. 만일 복마검을 연이어 펼칠 수만 있었다면 승자는 바뀌었으리라.

하지만 일봉이 아는 상승무공이라고는 복마검 일 초가 전부였다.

“하하하. 승리는 예견된 것이기는 했지만, 일봉 대주의 실력이 내 예상보다 놀랍구려. 절대 상단의 일개 호위무사가 낼 수 있는 실력은 아니오.”

칭찬인지 조롱인지 모를 말이 천옥랑의 입 밖으로 나왔다. 사람을 세워놓고 면전에서 타박하는 것은 천옥랑의 버릇이었지만, 정작 천옥랑 자신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늘 세상은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자기가 하는 말에 상대방이 불쾌해할 수도 있다는 인식 따위는 아예 없었다.

“이번에는 졌지만 다음에 다시 도전하겠소.”

일봉의 말에 천옥랑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든 좋소. 하하하. 앞으로는 더욱 자주 보게 될 테니 기회야 많지 않겠소?”

그때 안채에서 임예린의 몸종이 사색이 된 채 일봉에게 달려왔다.

“대, 대주님, 큰, 큰일 났어요. 아가씨가 보이지 않아요!”

몸종의 말에 일봉의 머리가 내당 쪽으로 홱 돌아갔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생각보다 비무시간이 많이 걸렸다. 비무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임예린의 옆에서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다.

발을 동동 구르는 몸종을 뒤에 남겨둔 채, 일봉이 땅바닥을 박차며 내당 쪽으로 급히 신법을 전개했다. 뒤에서 천옥랑이 놀라서 몸종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

“없어지시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여기저기 잘 찾아보았느냐?”

“예. 가실 만한 곳은 빠짐없이 다 찾아봤어요. 그런데 안 계세요. 아가씨가 말도 없이 나갈 분은 아니시거든요.”

몸종의 불안해하는 목소리가 이미 임예린의 방 안으로 들어서는 일봉의 귀에 잔상같이 달라붙었다.

방안의 풍경을 잠시 살피던 일봉의 눈에 바닥에 떨어진 책자가 들어왔다. 책을 집고 보니 요즘 임예린이 읽는 강호문파를 소개하는 책이었다.

예린의 부탁에 자신이 직접 가져다준 책이라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임예린은 책을 보다가 절대 책을 아무렇게나 두고 나가지 않는다. 뭔가 변고가 생겼음이 틀림없다.

게다가 창문턱에 아주 희미하기는 했으나 낯선 발자국이 하나 남아있었다. 누군가 창턱을 밟고 나간 것이다. 무공이 고강해서 발자국이 거의 남지 않았지만 무엇인가를 메고 있으니 그 무게로 자연히 희미하게나마 묻은 것이다. 아마 임예린을 메고 있었으리라.

그 생각이 미치자 일봉은 즉시 창문으로 나가 가까운 전각의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어디에서도 적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임예린의 방 안으로 천옥랑이 다급하게 들어왔다.

“임 소저! 임 소저!”

일봉은 천옥랑의 목소리를 듣자 갑자기 퍼뜩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일봉은 즉시 몸을 날려 다시 임예린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당신, 오늘 왜 나에게 갑자기 비무를 하자고 했지?”

일봉이 천옥랑을 뚫어지게 노려보며 소리쳤다.

“뭐,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요?”

천옥랑은 일봉이 하는 질문의 의도를 알지 못해 당황해했다.

“내가 아가씨 옆에 없는 틈을 타서 누군가 아가씨를 납치했어. 당신이 오늘 내게 비무신청을 해서 내가 자리를 비울 거라는 사실을 아는 놈의 짓이 분명해. 당신, 정체가 뭐야?”

일봉의 소리에 천옥랑이 황당하다는 듯 일봉에게 다시 되받아쳤다.

“그게 무슨 소리요? 내가 설마하니 임 소저 납치를 도왔다는 거요? 아니, 그런 억지가 어디 있소?”

일봉은 억울하다며 소리치는 천옥랑을 다시 한번 노려보더니 밖으로 나가서 호천대원들을 모조리 소집했다. 임가장의 전각에 모조리 불이 밝혀지고 임예린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 호천대원들이 집안과 집 바깥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

임예린이 사라진 지 사흘째.

처음에 딸이 사라졌다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임풍은 노발대발했다. 아니, 다른데도 아니고 자신의 방에 있다가 어찌 납치를 당한단 말이냐? 그것이 천하제일상단의 대방인 자기 집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그때까지 그 많은 호천대원들과 대주는 뭘 했단 말인가?

임풍은 당장 일봉에게 임무 태만죄를 물어 목을 치려 했다. 그러나 일봉은 벌을 받더라도 아가씨를 찾아온 다음에 받겠다며 임가장으로 복귀하지도 않고 계속 임예린의 흔적을 추적했다.

친딸은 갓난아기 때 잃어버리고, 그것을 불쌍히 여겨 하늘이 보내준 수양딸마저 잃어버리자 임풍 내외는 발만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했다. 임예린이 어떤 딸이던가? 생각이 깊고 하는 짓마다 임풍의 마음에 쏙 들어서 차기 상단의 대방으로까지 생각하던 아이였다.

예린이 납치를 당했다는 이야기에 임풍의 아내는 앓아누웠다. 임풍도 억장이 무너지기는 매한가지였다. 지난번 영약탈취 사건에 이어 임예린의 납치 사건까지 불미스러운 일들이 줄줄이 일어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사실 압도적인 무력이 뒷받침되지 않아서 발생한 일들이었다.

뒤늦은 자책이 임풍의 마음을 쓰리게 했다.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다. 지난번 곤명호에서 부맹주를 만났을 때나 귀면쌍살이라는 자가 집안에 침입하여 풍천숙을 살해했을 때 좀 더 발 빠르게 조치했어야 했다.

누굴까? 누가 내 딸아이를 데려갔을까? 누군지는 몰랐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임풍 자신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

맹주전의 후원.

전지용 가위를 들고 꽃나무를 살펴보는 남궁진악의 손길이 섬세했다. 여린 잎사귀와 꽃봉오리를 어루만지는 손길은 무인의 손길이라기보다는 오랫동안 화초를 길러온 농부와 같았다.

기하진은 그런 맹주의 모습을 묵묵히 보며 지난번에 있었던 천린상단의 물품 호송과 탈취 건에 대해서 보고하던 참이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조심스럽지만 아무래도 부맹주와 천린상단 간에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은밀히 조사해 본 결과, 지난달에 부맹주가 임풍 대방을 곤명도로 불러내어 독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한 달이 채 되지 않아서 천린상단측에서는 부맹주 개인에게 은자 이십만 냥을 보냈습니다.”

기하진의 보고내용이 놀랍기 그지없었지만, 맹주는 어쩐 일인지 태연했다.

“그래?”

맹주가 썩은 가지를 가위로 잘라내며 물었다.

“예. 그런데 은자보다도 더 중요한 물품이 마차에 있었습니다. 그날 영약이 든 것으로 추정되는 옥함을 빼앗기 위해서 개방의 전대 장로였던 당두걸, 귀면쌍살, 그리고 청성사로가 서로 맞붙었습니다만 결국 귀면쌍살이 청성사로에게 부상을 입히고 그 옥함을 탈취해갔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귀면쌍살 추격대의 수를 늘리고 뒤를 쫓아야 할 줄로 압니다.”

“그럴 필요 없네. 귀면쌍살은 내버려 두고 자네는 중양일지를 가지고 있다는 뢰정이라는 놈을 추격해.”

남궁진악이 기하진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전지가위로 연신 가지를 쳐내며 말했다. 맹주의 반응이 전혀 뜻밖이라 기하진은 살짝 당황했다.

“맹주님, 귀면쌍살은 그동안 저희 용봉단에서 추격해왔습니다만?”

“귀면쌍살 처리는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 기 단주가 신경 쓸 거 없어.”

“하지만 귀면쌍살은 워낙 신출귀몰한지라 지금 와서 추격자를 바꾸게 되면 큰 혼선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어허!”

맹주가 잠시 가위질을 멈추고 기하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맹주의 질책 어린 눈길을 받고서야 기하진은 시선을 떨어뜨리며 공손히 포권을 취했다.

“알겠습니다. 명 받들겠습니다.”

그러자 맹주는 다시 꽃나무로 시선을 옮겼다.

“부맹주는 어떻게 할까요? 계속 지켜볼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기하진의 말에 맹주가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그렇게 해. 단, 부맹주가 뭘 하자고 하면 최대한 협조해 줘. 부맹주가 의심하지 않도록. 알아듣겠나?”

맹주는 두 손으로 전지가위를 쳐들고 윗부분에 있는 나뭇가지를 쳐내며 말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가보도록 해. 상의할 일이 있으면 총군사와 얘기하도록 하고.”

“존명.”

기하진은 다시 한번 맹주에게 공손히 허리를 굽히고 몸을 돌려 맹주전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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