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50화 (50/201)

#   50 - 광세일소_한추영 - 1283018

#

제 49화. 몰려오는 먹구름 (3)

“부맹주님께서는 역시 말씀이 통하시는 분이군요.”

임호가 천계심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능글맞아 보이는 눈빛이 어딘지 모르게 닳고 닳아 보이는 웃음이었다. 그 웃음에 천계심은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흥, 비열한 장사꾼 놈이 감히 누구와 맞먹으려는 것이냐.

“그자가 말하기를 임 대방 측 사람이 모월 모일 모시에 백만 냥이나 나가는 영약이 어느 지점을 지날 것이라고 흑도 무리들에게 은밀히 얘기하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뭣이라!”

임호의 이야기를 들은 천계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임풍 그놈의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이냐?

화를 이기지 못한 천계심이 옆에 있던 탁자를 한 손으로 내려치자 두께만도 세 치가 넘는 자단목 탁자에 쩍, 하고 금이 갔다. 그 모습에 임호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흥. 이 일을 입 밖에 내면 내가 한 사람도 살려두지 않겠다고 했거늘, 감히 임풍 그 작자가 내 말을 우습게 여기다니!”

돌연 천계심의 몸에서 얼음송곳 같은 살기가 뻗쳐 나왔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임호는 그 살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부, 부맹주님, 고정하십시오. 지금 임가장을 모조리 처단하는 것은 계란 한 알을 얻자고 닭을 잡는 것과 같이 아주 어리석은 방법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천계심의 눈초리가 임호를 향했다.

“천린상단은 중원 천하 각지에 퍼져있고, 중원뿐만 아니라 변방과도 활발한 교역을 하고 있습니다. 상단에서 취급하는 물품 종류만 해도 일천여 가지에 육박하고 매년 조정에 물건을 꼬박꼬박 납품하는 탓에 가만히 내버려만 두어도 매년 수십만 냥은 저절로 생깁니다. 이 좋은 돈줄을 한 번의 분을 못 이겨서 잘라버린다면 그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겠습니까?”

듣고 보니 임호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오?”

“천린상단이 부맹주님의 든든한 자금줄이 되겠습니다. 언제든지 필요한 만큼 가져다 쓰실 수 있도록 항상 만반의 준비를 해놓겠습니다.”

난데없는 제안에 천계심이 구미가 당긴 눈초리로 임호를 바라보았다. 임호는 이마의 땀을 끊임없이 닦으며 능글맞게 천계심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제가 천린상단의 주인이 되어야겠지요.”

임호가 속내를 얘기하자 천계심은 잠시 임호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호탕하게 껄껄 웃었다.

“알고 보니 임 도방께서도 배포가 크시구먼. 하하하. 어쩐지 첫인상부터 낯설지가 않더라니. 좋소이다! 그래, 내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소? 단칼에 임풍을 베어드리리까?”

천계심의 말에 임호가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그랬다가는 천린상단의 원로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당장 임 대방이 죽으면 원로회에서 진상을 조사할 것이고, 오히려 제가 대방 자리를 차지하게 될 기회는 더욱 멀어질 것입니다.”

“흠, 그도 그렇겠군.”

“임 대방에게는 딸자식이 하나 있습니다. 사실 친딸도 아니지요. 어릴 때 잃어버린 제 친딸과 비슷하다 하여 데려왔는데 임대방 내외가 그 아이를 끔찍이도 아낍니다. 게다가 요즘에는 곧잘 상단의 실무를 맡기는 걸 보면 상단까지 나중에 물려줄 생각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임씨의 피라고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근본도 모르는 아이에게 천하제일 상단을 물려주다니요, 그게 말이나 될 법한 소리이겠습니까?”

“그야 당연한 소리지.”

천계심이 맞장구를 쳐주자 임호는 더욱 기세등등하여 임풍에 대한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상단이 어찌 임풍 개인의 것이겠습니까? 부맹주님 앞에서 송구스런 표현이오나, 임풍 그놈은 그 아이에게 상단을 넘길 마음을 먹고 있는 것이지요. 사실 그 아이에게 상단의 소유권과 운영권을 넘기는 것은 원로회에서도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로회도 내심 그 아이가 없어지기를 바라고 있지요.”

“그러니 내가 그 아이를 처리해주면 되겠는가?”

이제야 말뜻을 알겠다는 듯이 천계심이 임호를 바라보자 임호가 예의 그 비굴한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천계심은 임호에게 은근히 하대하고 있었지만, 임호는 오히려 그것을 자신이 부맹주의 신임을 얻은 것으로 생각하여 전혀 괘념치 않고 오히려 더욱 자신을 낮추었다.

“예. 그 아이를 무림맹에서 잠시 맡아주십시오. 그리고 그 몸값으로 은자 백만 냥을 요구하시는 겁니다. 아마 선뜻 주지는 못해도 형님 성격으로는 돈을 마련하려고 무리수를 두게 될 겁니다. 결국 원로회와 맞서게 되겠지요. 그러면 그때 제가 자연스럽게 형님과 맞서면서 원로회의 신임을 얻겠습니다. 그때 가서는 임풍이 어디서 죽어 나자빠진들 누가 신경이나 쓰겠습니까? 부맹주님께서는 든든한 자금줄을 만드시고, 저는 상단을 차지하게 되니 이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게 아니겠습니까?”

듣고 보니 과연 일리가 있었다. 조카를 이용하자는 생각이 비열하기는 했으나 친조카가 아니라니 따지고 보면 그렇게 비열한 것도 아니었다. 결국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지 않은가!

천계심은 임호의 계책이 만족스러워 흐뭇했다.

“알겠네. 내 즉시 은밀히 사람을 시켜 일을 진행하겠네.”

“그럼 소인은 부맹주님만 믿고 있겠습니다.”

****

요즘 천옥랑은 허파에 바람이라도 든 양 혼자서 실실거리고 웃을 때가 많았다. 가만히 앉아서 창밖을 내다보다가 웃고, 밥 먹다가 웃고, 길을 가다가도 혼자서 빙긋빙긋 미소를 지었다. 연공할 때도 집중하지 못하고 종종 넋이 나간 표정일 때가 많아서 아버지인 천계심에게 혼쭐이 난 적도 여러 번이었다.

예전 같으면 기하진이 하는 일이라면 사사건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반대할 텐데 요즘에는 딱히 반대도 하지 않고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을 때가 많았다.

밤이나 낮이나 천옥랑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오직 하나였다.

천린상단의 임예린.

임예린의 부드럽고 화사한 미소가 눈앞에 떠오르면 천옥랑은 옆에 누가 있건 상관없이 실실거리며 웃었다. 가슴이 콩닥콩닥 옆 사람에게 들릴 만큼 빨리 뛰기도 하고, 돌연 마음 한구석이 싸하고 아려오기도 했다.

그렇다. 천옥랑은 임예린에게 한눈에 반한 것이다.

그러니 요즘 천옥랑의 관심사는 어떻게 해야 임예린을 한 번 더 볼까 하는 것이었다. 자기 아버지가 어떻게 천린상단의 팔을 비틀었고, 또 앞으로는 어떻게 숨통을 죄일지는 전혀 모른 채.

얼마 전에도 임가장에 다녀온 천옥랑이 그새를 참지 못하고 또 임예린을 보러 갈 구실을 만들었다.

남자나 여자나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잘 보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라 천옥랑은 새로 지은 비단옷에 갓신을 신고 옥 요대를 두르는 등 오늘도 옷차림에 남다른 공을 들였다.

입발린 소리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주위에서 송옥이나 반안이 울고 갈 정도라느니, 황제 폐하의 부마 자리도 따놓은 당상이라느니 하면서 천옥랑을 한껏 추켜세웠다.

천옥랑은 그 소리에 기분이 좋아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면서 ‘오늘은 임 소저에게 고백을 해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딜 나가는 게냐?”

한참 들떠있던 천옥랑의 귓가에 돌연 부친 천계심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즐거운 상상이 얼어붙은 호수 면이 깨지듯 순식간에 산산이 조각나면서 천옥랑은 현실 세계로 강제 소환되었다.

“아, 아버지, 언제 오셨습니까?”

천옥랑이 얼른 허리를 숙였다. 천계심은 천옥랑의 방으로 들어와 상석을 차지하고 앉았다.

“그렇게 한껏 빼입고 어디를 가는 게냐?”

부친의 엄한 눈길을 받자 천옥랑은 임가장으로 간다는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 그것이... 저....”

“임가장엘 가느냐? 임예린이라는 그 아이를 보러?”

천계심이 정곡을 콕 찍자 천옥랑은 당황하여 말이 헛나와 버렸다.

“그, 그것이 아니옵고....”

“그것이 아니라니, 임가장에 가는 길이 아니란 말이냐?”

“아, 아닙니다. 임가장에 가는 길은 맞지만 임 소저를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아니라?”

천계심이 캐묻는 천옥랑을 쳐다보자 천옥랑은 등골이 오싹하여 그만 딸꾹질까지 나왔다.

“딸꾹. 그게.... 딸꾹. 호, 호천대에서, 딸꾹.”

천옥랑의 모습을 바라보던 천계심이 한심하다는 듯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임가장에는 왜 가는 것이냐고 아비가 묻지 않느냐? 사내놈이 이게 무슨 못난 꼴이야!”

천계심이 호통을 치자 당황한 천옥랑은 엉뚱한 이야기를 둘러대고 말았다.

“호천대 대주 일봉이라는 자와 비, 비무를 하기로 했습니다. 딸꾹.”

천옥랑의 뜬금없는 소리에 천계심이 한참 천옥랑을 쳐다보았다. 천옥랑은 자신도 하필이면 왜 그 소리가 입 밖으로 나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천계심이 말없이 천옥랑을 쳐다보는 가운데 천옥랑의 딸꾹질 소리만 방안에 울려 퍼지면서 두 부자 사이의 긴장감이 묘하게 더욱 고조되었다.

“비무라... 그렇군. 천린상단과는 앞으로 각별한 관계로 맺어질 터이니 잘 사귀어두도록 하여라.”

천옥랑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불호령이 떨어질 줄 알았던 아버지가 오히려 자신을 두둔하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게다가 각별한 관계로 맺어지다니! 두 집안이 혼인 외에 각별한 관계로 맺어질 수 있는 다른 방법이 무어란 말인가. 드디어 아버지도 이 아들의 마음을 이해하신 것이 틀림없다.

임가장으로 향하는 천옥랑의 발걸음이 그날따라 가볍기 짝이 없었다. 오늘은 아버지의 뜻대로 일봉과 한판 진하게 대련을 해야겠다. 그러고 나서 임 소저에게 아버지의 뜻을 넌지시 내비쳐야겠다. 천옥랑의 머릿속에는 이미 자신과 임예린의 혼례가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리 오너라.”

임가장 대문 앞에 다다른 천옥랑이 어깨에 힘을 잔뜩 준 채 소리를 질렀다. 잠시 후 문지기가 문을 열고 나와서는 아는 체를 했다. 천옥랑이 이미 서너 번 다녀간 후라 문지기도 얼굴을 알았다.

“천 공자 오셨습니까요? 임 소저께 기별을 넣을까요?”

문지기가 넘겨짚자 천옥랑이 한 손을 들고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아닐세. 오늘은 일봉 대주를 만나러 왔네.”

천옥랑이 임예린이 아닌 일봉을 만나겠다고 하자 문지기는 뜻밖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천옥랑이 별채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잠시 후 일봉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천옥랑을 만나러 나왔다.

“천 공자께서 저에게 무슨 용무가 있으십니까?”

무림맹 사람, 특히 부맹주와 관련된 사람이라면 치를 뜨는 일봉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호위무사 따위가 어쩌고저쩌고하면서 대번에 노발대발할 천옥랑이었지만 오늘만큼은 다른 사람 같았다.

“하하하, 내가 오늘 일봉 대주와 함께 무공을 좀 논하려고 왔소이다.”

뜬금없는 천옥랑의 말에 일봉은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천옥랑을 쳐다보았다. 난데없이 나타나서 무공을 논하자니...?

“지난번 표물 운송 때 우리가 서로 한 번씩 목숨을 구해주지 않았소? 원래 내가 일봉 대주의 도움을 받을 사람은 아닌데 암튼 그게 내내 좀 찜찜했소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 두 사람이 확실하게 무공을 겨루어 보는 게 어떻소? 사내란 원래 싸우면서 정드는 법이니 우리 오늘 다시 한번 화끈하게 싸워봅시다. 그래서 진 사람은 이긴 사람에게 깍듯이 대하는 거요. 앞으로 천린상단과 우리 천씨 집안이 긴밀한 관계가 될 터인데 내 일봉 대주와도 미리 좀 친해져야겠기에 그러오.”

천옥랑은 머릿속으로 일봉이 자신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미리 기를 좀 눌러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뒤에 자신이 넓은 아량을 베풀어 상승무공을 한두 초식쯤 가르쳐 주면 일봉 제 녀석도 감동하지 않고는 못 배기리라.

그리고 임예린에게 그 사실을 자랑하면 임예린도 아마 좋아하리라. 일봉의 기도 죽이고 임예린의 점수도 따고 그야말로 일석이조로구나!

천옥랑은 혼자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치고 있었지만, 영문을 모르는 일봉은 천옥랑의 저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 게다가 싸우면서 정드는 법이라니, 누가 당신과 정이 들고 싶단 말인가?

“낮술이라도 하신 겁니까? 도통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군요.”

“하하하. 술도 좋지. 사내란 술도 마실 줄 알아야지. 우리 비무 뒤에 독한 술도 한 통씩 마셔봅시다.”

일봉이 계속 뜨악한 눈길로 자신을 쳐다보자 천옥랑이 싱글벙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마시오. 내 일봉 대주의 수준에 맞추어 살살 하겠소이다.”

천옥랑의 말에 일봉의 자존심에 금이 갔다. 본래 차가운 표정이 더욱 무뚝뚝해졌다.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더 이상 피하는 것은 사내가 할 짓이 아니었다. 천옥랑이 비록 자신보다 무공이 높기는 하지만 실전 경험은 자신이 더욱 많을 것이다. 싸움이라는 것이 무공이 높다고만 이기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려주어야만 할 것 같았다.

“좋소이다. 오늘 제대로 한 번 붙어봅시다. 따라오시오.”

딴에는 그동안 천옥랑에게 쌓였던 울분을 이런 기회를 통해 한번 표출하고 싶기도 했다.

일봉과 천옥랑이 연무장에 서로 마주 보고 선 채 포권을 취했다. 매서운 눈길로 상대방을 노려보는 일봉과는 달리 천옥랑은 나사가 빠진 사람처럼 혼자서 싱긋싱긋 미소를 지었다. 전혀 싸움에 임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

일봉은 그런 천옥랑의 모습은 바로 자신을 무시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에 받은 모욕도 아직 생생했다. 반드시 네놈을 눌러주마. 일봉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