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49화 (49/201)

#   49 - 광세일소_한추영 - 128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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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8화. 몰려오는 먹구름 (2)

교주 남무궁은 석추명을 힐끗 쳐다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재미있지 않아? 클클클. 자기네들 손으로 뽑은 맹주를 제거해 달라니 말이야. 흥, 명문정파 놈들, 뒷구멍으로는 온갖 협잡질을 다 하면서도 앞에서는 정의와 협의를 내세우는 더러운 놈들이지. 그런 놈들을 빨리 싹 갈아엎어야 이 무림이 깨끗해질 텐데 말이야.”

교주는 갑자기 명문정파의 위선적인 행태에 넌더리가 난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석 대주 자네는 맹주 살해를 누가 의뢰했는지 알겠나?”

“그야 아마도 맹주 자리를 노리는 자가 아니겠습니다. 혹시 구대 문파나 오대 세가의 수장이 아닐지요?”

석추명의 말에 교주는 기분이 좋은 듯 껄껄 웃음을 지었다.

“보기보다 석 대주가 머리가 잘 돌아가는 편이로군. 맞아. 차기 맹주직을 노리는 자, 바로 부맹주 천계심이라는 놈이지.”

“맹주는 자신의 바로 코밑에 적을 둔 셈이로군요. 맹주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요?”

“강호에 맹주는 시시대협(是是大俠)이라는 평이 파다해. 이래도 흥, 저래도 흥, 줏대 없이 모든 사람의 말을 다 들어준다는구먼. 그래서 사실 부맹주가 실권을 쥐고 있다고 모두 생각하지. 무림맹 내에서도 부맹주가 맹주 자리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모양이야.”

“그건 이를테면 모반이 아닙니까?”

석추명이 조심스레 의견을 내자 교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래서 제일 윗대가리에 누가 앉아 있나가 중요한 거야. 그 자리를 차지했으면 여지를 주지 말아야지. 하지만 말이야, 내가 겪은 맹주 남궁진악은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었어.”

교주가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계속 말을 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무공 하나만 보더라도 절대 부맹주 천계심 따위가 넘볼 수 있는 실력은 아니지.”

남무궁은 삼십 년 전에 화산에서 벌어졌던 무림맹과 신교 간의 싸움을 회상하며 말했다.

“무공뿐만 아니라 기지와 계략에도 아주 능한 자였다. 천계심이 자기 자리를 넘보는 것은 진즉부터 눈치챘을 테지.”

석추명은 맹주에 대한 교주의 평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자신이 직접 겪어보지 못한 터라 뭐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교주가 문득 석추명에게 눈길을 돌렸다.

“자네 맹주의 목숨값으로 우리가 얼마를 요구했는지 아나?”

석추명은 맹주의 목숨값이 얼마나 될지 짐작이 되지 않아 잠자코 있었다.

“황금 일만 냥과 은자 오십만 냥이야.”

은자 열 냥이면 4인 가구가 일 년을 넉넉히 먹고살 수 있었지만 오십만 냥이라면 얼마나 큰 금액인지는 얼른 감이 오지 않았다.

“한 사람의 목숨값으로 그 정도면 나쁜 금액은 아니지. 아무리 맹주라 하더라도 말이야. 그런데 천계심 그놈은 나보다 한술 더 떴어. 배포 하나만큼은 아주 큰 놈이지. 하하하.”

남무궁은 웃더니 석추명을 바라보았다.

“천계심 그놈이 천린상단의 팔을 비틀어 그 두 배를 요구했다.”

“두 배라면 은자 백만 냥과 황금 이만 냥 아닙니까?”

천문학적인 숫자가 주는 비현실감에 석추명은 숫자를 말하면서도 피부에 와 닿지 않았다. 당시 명 황실이 일 년간 나라 살림에 쓰는 돈이 은자 이삼백 만냥이었으니 그 규모로 보면 천계심이 얼마나 많은 돈을 요구했는지 알 수 있었다.

교주는 그런 석추명의 표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천린상단은 현금으로 그 막대한 금액을 다 준비할 수가 없어서 그만한 가치의 현물을 준비했지. 그게 바로 칠보영환과 만년설삼이다.”

석추명은 그 두 가지 영약이 어떤 것인지 알지도 못했지만 두 영약의 가치가 은자 백만 냥과 황금 이만 냥에 버금간다는 교주의 말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어떤 효과를 지닌 영약이기에 그렇게나 비싸단 말인가?

“그런데 그 두 가지 영약을 귀면쌍살이라는 놈이 훔쳐 가버렸단 말이야.”

석추명은 잠자코 교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교주가 손가락으로 이마를 톡톡 두드리며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귀면쌍살이라는 놈이 혼자서 움직이는 것 같지는 않아. 분명히 맹주와 관련이 있다.”

교주는 잠시 말을 끊더니 석추명을 바라보며 드디어 명을 내렸다.

“석 대주는 지금 즉시 은밀히 귀면쌍살을 추격해서 맹주와의 관계를 파악하라. 귀면쌍살과 직접 손을 맞대는 일은 절대 피해야 할 것이야. 그놈과 맞닥뜨리게 되면 우리가 그놈 뒤를 캐는 것을 맹주가 알아챌 뿐만 아니라, 자네 목숨도 보장할 수 없으니 말이야. 인원이 많으면 들통나기 쉬우니 수라대원은 데려가지 말고 필요한 연락은 명왕대를 통해서 하도록 하라.”

“존명!”

석추명은 교주에게 머리를 숙이고 교주전을 벗어났다.

석추명은 수라각으로 돌아와 즉시 짐을 싸기 시작했다. 담예린은 석추명이 다시 임무에 투입된다고 하니 좋았으나 비밀임무 수행이라 자신은 함께 갈 수 없어 불만이었다.

“대주님, 이번에는 정말 꼭 한 건 하십시오.”

담예린의 말에 석추명이 빙긋 웃었다.

“그렇게 속없는 사람처럼 웃지만 말고 이번에는 화끈하게 한 건 해서 꼭 교주님 마음에 들란 말입니다!”

자신은 이렇게나 조바심이 나는데 정작 당사자인 석추명은 느긋한 것만 같아서 담예린은 자신도 모르게 꽥, 목소리를 높였다.

“어이쿠, 나 귀 안 먹었다.”

석추명이 두 손으로 귀를 막는 시늉을 했다. 왠지 모르게 얄미운 느낌이 들었다.

“몸, 몸조심하십시오. 대주님 실력이야 제가 잘 알지만 요즘 강호가 워낙 흉흉하다보니....”

담예린이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었다. 담예린의 말에서 진심 어린 걱정이 느껴져서 석추명은 담예린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는 가만히 담예린을 바라보았다.

“담 대원 지금 대장 걱정해주는 거야?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올 테니 걱정 마.”

담예린은 두 손이 잡히자 부끄러운 듯 석추명의 눈길을 피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보고 싶을 거라는 말, 항상 같이 있고 싶다는 말....

그때 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사소혜가 들어왔다.

“석 대주님, 임무에 투입된다면서요?”

난데없이 사소혜가 나타나자 담예린은 당황하여 얼른 석추명에게 잡힌 손을 뺐다. 사소혜는 두 눈을 샐쭉하게 뜨고 그 모습을 지켜보며 한마디 했다.

“임무에 투입될 때 원래 대주와 대원 간에 이렇게 석별의 정이 뜨거워요?”

그 말에 석추명이 껄껄 웃었다.

“이런 걸 전우애라고 하지.”

사소혜가 온 힘을 다해 석추명을 치료한 이후 두 사람은 격의 없이 지내고 있었다. 사소혜 자체가 워낙 생기발랄하고 엉뚱했고, 석추명도 사소혜가 자신을 구해준 이후 늘 사소혜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사소혜가 엉뚱한 소리나 행동을 해도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할 뿐이었다.

담예린은 여전히 얼굴을 홍시처럼 붉히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사소혜가 그런 담예린에게 빈정대며 말했다.

“불모님께서 석 대주를 뵙고자 하니 잠깐 자리를 좀 비켜주시지? 아랫사람이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그 말에 담예린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소혜 뒤에 단아한 모습으로 서 있는 황연화가 보였다.

담예린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 방에서 나왔다. 담예린이 나가자 사소혜가 문을 닫았다. 밖에 홀로 내 버려진 담예린은 문득 지난번에 사소혜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 그거야 불모님이 석 대주를 좋아하시니까 그렇지.

문득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느껴졌다. 지금도 자신은 제외한 채 세 사람만 방 안에 있다고 생각하니 새삼 질투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담예린은 문틈에 살짝 귀를 대고 엿듣기 시작했다.

“이번 임무는 수라대원들의 투입은 없다고 들었습니다. 강호에서는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 혼자보다는 누군가 돕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지요. 소혜를 데려가세요. 비록 천방지축이기는 해도 쓸모가 있을 겁니다.”

사소혜를 데려가라는 황연화의 말이 들렸다. 그 말을 듣자 담예린은 당장 방안으로 달려 들어가고 싶은 심정을 억지로 억눌러야 했다. 직속 수하인 나도 같이 못 가는데 저 여우 같은 계집애를 데리고 가라니, 불모님은 정신이 있으신 건가, 없으신 건가? 당장 그럴 수 없다고 얘기하세요, 대주님!

“소혜와 함께 다니면 저야 좋지요. 싹싹하고 솜씨 좋고 일 처리도 빠르고. 게다가 밤에 심심하지도 않을 테고.”

석추명의 말에 사소혜가 호들갑 떠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 밤에 심심하지 않다니요? 석 대주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불모님 앞에서 응큼하게.”

“너야말로 불모님 면전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밤에 혼자 밥을 먹지 않아도 되니 심심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을 뿐인데.”

석추명과 사소혜가 토닥거리는 소리에 담예린은 질투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뭐야, 저 여우 같은 계집과 앞으로 단둘이 같이 다니겠다는 건가? 하, 세상에 믿을 사람 한 명 없다더니 설마 석 대주도 그새 저년의 미모에 넋이 나간 건가?

“하지만 소혜는 불모님 곁에 있는 것이 더 나을 듯합니다. 소혜가 없다면 불모님께서 적적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고 이번 임무는 워낙 은밀히 진행해야 해서 혼자 움직이는 것이 편합니다.”

“하긴 그렇기도 하겠군요.”

황연화가 석추명의 말에 수긍하자 사소혜의 볼멘소리가 뒤따랐다.

‘휴!’ 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담예린의 귀에 목소리를 한층 더 낮춘 황연화의 다음 말이 들려왔다. 신중한 말투로 보아 뭔가 중요한 내용임이 분명했다. 담예린은 더욱 귀를 쫑긋 세웠다.

“그리고 이번에 강호에 나가면 뢰 사형의 행방도 한번 수소문해보세요. 이번 일은 반드시 철저하게 준비해서 진행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황 장로는 물론이고 우리 모두 살아날 수 없을 겁니다.”

담예린은 깜짝 놀랐다. 설마 지금 자신이 들은 황 장로가 지하뇌옥에 갇힌 응룡검 황보 장로? 아니 지금 석 대주가 무슨 일을 꾸미는 거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을 꾸미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아도 교주의 눈 밖에 난 석 대주가 정말 죽을 작정을 한 건가? 이번 일은 막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석 대주의 목숨이 위험해.

방안에서 사람들이 나오는 기척이 나자 담예린은 얼른 귀를 벽에서 떼고 태연한 척 가장했지만 이미 속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

부맹주 천계심은 귀면쌍살에게 칠보영환과 만년설삼을 빼앗긴 일로 이를 바드득 갈고 있었다.

천계심은 귀면쌍살이 임가장에 나타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귀면쌍살이 영약을 다시 뺏으러 올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귀면쌍살을 잡기 위해 사문의 장로들인 청성사로를 특별히 불러들였다. 청성사로는 각자가 일파 장문인에 버금가는 무공을 가진 만큼 귀면쌍살이 제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를 가졌기로서니 청성사로가 한꺼번에 공격한다면 결코 막아낼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귀면쌍살 그놈이 자신을 비웃듯, 예상과는 달리 청성사로의 손에 붙잡히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영약을 훔쳐 달아났다.

게다가 이번 싸움이 너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진 터라 천린상단에서 자신에게 은밀히 뇌물을 갖다 바쳤다는 소문이 무림맹 뿐만 아니라 일부 구대문파 장문인의 귀에도 들어갔다. 더욱 큰 문제는 당장 마교에 지급해야 할 돈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천계심은 그 책임을 엉뚱하게도 기하진에게 전가했다.

“변변찮은 놈. 무림맹의 최정예라는 용봉단이 직접 호송했는데도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다니. 무림맹의 명성을 땅에 떨어뜨려도 분수가 있지, 어허 이거야 참.”

혼잣말하며 화를 삭이는 천계심에게 밖에서 누군가 고했다.

“부맹주님, 천린상단의 임 도방이라는 자가 은밀히 부맹주님 뵙기를 청합니다.”

임 도방? 도방이라면 대방의 바로 아래 직책이었다.

“임 도방이라니, 그자가 누군데 나를 찾는단 말이냐?”

“임 도방은 임풍 대방의 동생으로 임호라는 자입니다.”

임풍의 동생이 자기를 찾아왔다? 시기가 뭔가 공교로웠다. 천계심이 한 손으로 수염을 훑었다.

“안으로 뫼셔라.”

천계심의 말과 함께 방문이 열리고 중키에 살이 뒤룩뒤룩 찐 중년의 사내가 들어왔다. 배가 앞으로 툭 튀어나왔고 두 갈래로 기른 턱수염은 하도 쓰다듬어 반질반질 윤이 날 지경이었다. 사내는 더운 듯 이마에 살짝 땀이 배어있었는데 이리저리 좌우를 살피느라 쉬지 않고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천계심은 사내를 보자마자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그래, 임 도방께서 본인을 무슨 일로 찾아오셨소?”

임호는 천계심에게 공손히 허리 숙여 절을 한 다음 자리에 앉았다.

“부맹주님께 긴밀히 말씀드릴 일이 있어서입니다.”

“긴밀히 할 이야기라? 어디 한번 해 보시오.”

부맹주의 말에 임호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살짝 훔치며 말했다.

“저희 상단에서 부맹주님께 보내어 드리던 물건을 중간에 귀면쌍살이라는 자가 강탈해갔음은 이미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자가 그 정보를 어찌 얻게 되었는지 의심해보신 적은 없으십니까?”

임호의 말에 천계심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사실 안 그래도 천계심은 이번 일이 어떻게 누설되었는지 그게 의아했다. 게다가 귀면쌍살은 은자는 내버려두고 영약만 훔쳐서 달아났다. 천린상단에서 은자 대신 영약을 준비한 것은 천린상단과 자기 쪽의 극소수만 알던 사실인데 그 사실이 어떻게 새어 나갔을까? 당시 영약을 은밀히 마차에 실어 호송하는 사실은 마차를 호송하던 사람들도 모르고 있었다.

“그 말은 임 도방께서는 알고 있다는 말이오?”

천계심의 냉랭한 목소리에 임호는 주눅이 든 듯 살짝 목소리를 낮추었다.

“가끔 제일을 도와주어 제가 잘 아는 흑도 인사가 있습니다.”

그 말에 천계심이 흥미롭다는 듯이 임호를 쳐다보았다. 임호도 천계심의 눈빛을 의식했는지 입가에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맹주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일을 하다 보면 주먹깨나 쓰는 놈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도 있지요.”

“그거야 그렇지. 하하하. 임 도방께서 일을 할 줄 아시는군.”

천계심이 웃으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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