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 광세일소_한추영 - 12797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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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7화. 몰려오는 먹구름 (1)
담예린은 또 보고야 말았다. 벌써 네 번째다. 사소혜가 수라각의 정문을 지키는 대원들에게 몽혼약을 쓰는 모습을.
처음에는 매질 백 대를 맞아 피떡이 되어 있을 석추명을 구해주어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랐다. 일개 수라대원에 불과한 자신은 감히 교주의 명을 어기고 수라각 안으로 들어가서 석 대주를 구해줄 용기가 없었다. 정말 그때는 눈물이 핑 돌만큼 고마웠다.
그 덕분인지 석 대주는 곧 정신을 차렸고 이제 건강을 거의 다 회복한 듯했다.
먼발치로 보이는 예전의 모습을 되찾은 석 대주의 모습에 담예린은 혼자 흐뭇한 미소를 짓곤 했다. 다행이다.
그런데 석 대주의 부상이 다 나았는데도 황연화와 사소혜가 계속 수라각을 들락거리는 이유는 뭘까?
특히 처음부터 사소혜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았던 담예린은 수라각을 계속 제집처럼 들락거리는 사소혜가 아니꼽기도 했고 질투가 나기도 했다.
‘흥,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왔나? 네년이 아무리 꼬리를 쳐봤자 석 대주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을걸? ’
이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슬며시 걱정되었다. 석 대주도 심신이 건강한 남자인데 사소혜 같은 여자가 유혹하면 그걸 버텨낼 수 있을까? 아무래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거울에 비친 볼품없는 제 모습을 보니 그런 불안감은 더욱 커지기만 했다.
사소혜는 아름답고 요염했다. 옷차림은 관능적이었고 목소리와 표정에서 애교가 철철 넘쳤다. 사소혜는 어떻게 하면 남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지 잘 알았다. 손짓 하나, 눈빛 하나로 남자의 애간장을 닳게 했다.
반면 자신에게는 그런 재능이 전혀 없었다. 사실 이전에는 남자에게 꼬리 치는 여자들의 모습을 보면 역겹기만 했다.
그런데 석 대주를 만나고 나서부터 자신도 어느새 석 대주의 관심을 받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꼬리를 치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석 대주의 따뜻한 관심이나 부드러운 말 한마디를 더 듣고 싶어서 자신도 모르게 응석이 나올 때가 가끔 있었다. 그러다가 석 대주의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들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럴 때는 문득 선머슴 같던 자신에게도 이런 면이 있었나 싶어 그런 자신이 마냥 낯설기도 했다.
황연화와 사소혜가 수라각 안으로 들어가나 싶더니 사소혜가 다시 밖으로 나왔다. 누가 올지도 모르니 경계를 서는 것이다.
‘흥. 불모님은 대체 왜 자꾸 석 대주와 저렇게 독대를 하시는 거지? 정말 소문대로 설마 석 대주를 홀리려고?’
담예린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불경한 생각에 깜짝 놀라 얼른 주위를 둘러보더니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미쳤군. 미쳤어.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내가 정말 미쳤나 보다. 석 대주가 그럴 리가 없잖아.’
담예린이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렇게 살살 때려서 머리가 터지겠어? 손이 필요하면 내가 좀 도와줄 수도 있는데.”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담예린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드니 어느새 옆에는 사소혜가 다가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소혜는 고양이같이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뭐, 뭐라고? 아니 그것보다 이렇게 수라각에 버젓이 다니면 어떡하겠다는 거야? 교주님 말씀이 무섭지도 않나?”
담예린이 사소혜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자 사소혜가 별걱정을 다한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으며 말했다.
“호호호. 우리가 석 대주를 보러 수라각에 들락거린 게 한두 번이 아닌데 새삼 그게 무슨 소리야? 교주님 말씀이야 무섭지만 난 불모님 명을 따라왔으니 그 걱정은 불모님이 하셔야지, 왜 내가 하니?”
새초롬한 사소혜의 말에 담예린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말 나온 김에 묻자.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수라각에 들락거리는 거지?”
담예린이 심각한 인상으로 사소혜를 노려보았다.
“그걸 몰라서 물어?”
사소혜가 입가에 조롱기 가득한 미소를 띠었다. 담예린은 그 미소에 자신도 모르게 손이 앞으로 튀어나갈까 봐 손에 잔뜩 힘을 주어야 했다.
“그래 모른다.”
“호호호. 정말 멍청하군. 그거야 불모님이 석 대주를 좋아하시니까 그렇지. 척 봐도 그렇게 보이지 않아?”
사소혜의 말에 담예린은 깜짝 놀라서 두 눈이 튀어나올 듯 휘둥그레졌다.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설마 지금까지의 모든 소문이 다 사실이란 말이야? 교, 교주님의 진노가 두렵지도 않단 말이야? 어, 어떻게 불모님이...? 불모님은 나이도 훨씬 더 많으시잖아?”
사소혜가 그런 담예린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사람 마음이 자기 뜻대로 되는 것 봤어? 너만 하더라도 석 대주를 바라볼 때마다 두 눈에 애정이 철철 넘쳐 흐르잖아. 호호호.”
사소혜가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짚어내자 담예린은 순식간에 얼굴이 홍시가 되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애먼 사람 잡지 마!”
“솔직하지 못하긴.”
사소혜가 두 눈을 초승달같이 휘며 담예린을 비웃었다. 담예린은 그 자리가 불편하여 얼른 자리를 벗어나며 말했다.
“곧 경계조 교대시간이야. 다른 조원들이 오기 전에 어서 불모님을 모시고 가. 불미스러운 소문 더 퍼지기 전에.”
담예린의 말에 사소혜가 피식 웃더니 수라각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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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추명은 방금 황연화가 했던 말을 묵묵히 떠올렸다. 자신의 스승인 뢰정이 지하뇌옥에 갇힌 황보 장로를 구하기 위해 조만간 신교로 은밀히 올 테니 그때 안에서 대응을 해주면 좋겠다는 말이었다.
스승 뢰정은 별호가 수라신검(修羅神劍)인 만큼 검법 하나는 신교 내에서 따라올 자가 없었다. 마황신뢰, 네 명의 장로가 모두 검에 일가견이 있어서 신교의 사대검왕이라 불리지만 뢰정은 그중에서도 독보적인 존재였다. 아마 검법만으로 겨룬다면 다른 세 명의 장로들도 결코 스승에게는 미치지 못하리라.
그렇지만 신교에 몰래 잠입하여 그것도 경계가 철통같은 지하 뇌옥에서 사람을 빼 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차라리 염라대왕이 있는 저승에서 사람을 빼 가는 것이 더 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 석 대주, 위험한 일이란 것은 잘 압니다. 만약 이 일에 발각된다면 우리 모두 살아날 수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뢰 사형의 말대로 중양신공이 교주의 손에 들어가는 것은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교주가 지난 십여 년간 심혈을 기울여온 차시환혼대법(借屍還魂大法)의 완성이 드디어 막바지에 도달했어요.
- 차시환혼대법? 그게 뭡니까?
- 사람의 기억, 감정,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정보를 빼낼 수 있는 무시무시한 대법이랍니다. 사람의 혼이 바뀐다 하여 차시환혼(借屍還魂)이라고 하죠.
황연화의 말에 석추명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혼을 바꾼다니,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 반드시 막아야 해요. 대법이 완성되면 그 첫 번째 희생자가 황보 장로가 될 거에요. 황보 장로의 무공과 해박한 지식이 송두리째 교주의 손아귀에 들어오는 것이죠. 인간성은 상실된 채 교주의 뜻대로만 움직이게 됩니다.
- 교주님은 이미 신공이 천하제일이신데 어째서 굳이 그런 위험한 대법을 연구하신 겁니까?
- 교주는 오랫동안 신교 무림일통의 꿈을 꾸어왔죠. 무림맹과 구대문파, 오대세가를 비롯해서 녹림 등 모든 방파들을 모두 자신의 발아래 두려고 해요. 그 압도적인 무위를 바탕으로 결국 황제를 몰아내고 자신이 직접 황위에 앉는 게 꿈이죠.
황연화의 말에 석추명은 아연실색했다.
신교의 목표는 제세구민(濟世救民)이었다. 어지러움에 빠진 세상과 불쌍한 백성을 구제하고 탐관오리를 타도하자는 목표는 뜻있고 재주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았고 그리하여 생겨난 것이 바로 신교였다. 그리고 신교의 힘으로 세상이 바뀌더라도 결코 관직이나 공명심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 신교의 중심 강령이었다.
그런데 교주 자신이 황위를 노리고 그 수단으로 인간의 혼을 제압하는 방법을 연구하다니, 귀로 듣고도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 황보 장로는 십여 년 전에 이미 교주의 야심을 꿰뚫어 보고 중양일지를 넘기지 않았어요. 교주의 손에 중양일지가 넘어간다면 그야말로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라고 생각했어요. 강호 전체와 백성들의 평화를 위해 황 장로는 자신이 비록 지하뇌옥에 갇혀 평생을 썩더라도 교주님께 맞서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황연화의 말을 듣던 석추명의 머릿속에 깡마르고 볼품없던 황보의 모습이 떠올랐다. 십여 년 동안 얼마나 많은 고초를 당했는지는 눈이 있다면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모든 고초를 감내한 것이 바로 천하 만민을 위한 것이라니...!
석추명은 숙연한 기분과 함께 말할 수 없는 죄책감이 들었다. 그런 분인지도 모르고 자신이 철 채찍을 들어 황보를 내리쳤었다. 게다가 황보는 자신을 구해준 은인이기도 했다.
당시는 교주의 명을 받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신임 대주에게 교주의 명은 태산보다 무거웠다. 교주의 신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철채찍으로 황 장로를 벌하라는 교주의 명이 지나치다고 생각했지만, 감히 교주의 명에 맞설 생각을 못 했었다.
석추명은 황 장로에 비해 자신의 그릇이 얼마나 작은지,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이며 나약한 사람인지 새삼 절실하게 깨달았다. 돌연 울컥한 마음과 함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 불모님, 제가 그것도 모르고 황 장로님께 못 할 짓을 했습니다.
석추명은 지난번 교주와 함께 지하뇌옥에 갔다가 황 장로를 징계하라는 교주의 명을 차마 거역하지 못하고 그대로 이행했던 일을 황연화에게 모두 고백했다.
그때 철채찍이 황 장로의 왜소한 몸뚱아리에 떨어질 때마다 철채찍에 난 가시에 황장로의 살점이 뜯겨 올라오던 생경하고 끔찍한 느낌이 그대로 떠올랐다.
죄책감에 몸부림치는 석추명의 등을 황연화가 가만히 두드려 주었다.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석 대주의 죄가 아닙니다. 죄가 있다면 이 혼란한 시기에 태어난 죄 밖에 없어요.”
황연화의 위로가 사막 한가운데 있는 오아시스처럼 석추명의 가슴을 촉촉이 적셨다.
황연화가 나간 지 한참이 지났지만 아직도 방안에는 황연화의 체취가 은은하게 남아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던 황연화의 부드러운 눈빛이 떠오르자 석추명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얼른 고개를 도리질 치며 흔들었다.
그때 문밖에서 담예린의 소리가 들렸다.
“대주님, 저 예린입니다.”
“무슨 일이냐?”
“교주님께서 찾으신다고 합니다.”
수라각에 감금된 지 석 달 만이었다. 그러나 교주의 진면목을 알고 난 지금, 이제 교주를 어떻게 봐야 할지 석추명은 자신이 없었다. 티를 내지 않을 수 있을까?
‘스승님이 황 장로를 꼭 구해낼 수 있도록 도와드려야겠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하자. 그것만이 그분께 사죄드리는 방법이다.’
석추명은 마음을 다잡으며 교주전으로 갔다.
교주는 높은 단상에 놓인 자리에 혼자 앉아 있었다. 심리적인 거리 때문인지 교주의 자리는 늘 까마득하게 멀어 보였다.
“찾으셨습니까? 교주님?”
“그래. 그동안 감금생활을 해보니 할 만하던가?”
“송구합니다. 교주님.”
교주의 웃음소리가 잠시 들렸다.
“석 대주, 자네가 할 일이 생겼다.”
“하명하십시오.”
“귀면쌍살과 손을 섞은 적이 있지?”
귀면쌍살이라면 임가장에서 한번 검을 겨룬 적이 있었다. 귀면쌍살에게서 중양신공의 기운이 느껴져서 더욱 수상한 생각이 들던 놈이었다.
“예.”
“그놈 실력이 어떠하더냐?”
“공력이 저보다 훨씬 고강했고 초식 또한 뛰어났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저보다 훨씬 고수인 것 같습니다.”
“그게 이상하단 말이야.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강호에 그런 놈이 없었는데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을까? 석 대주는 뭔가 이상한 느낌을 못 받았나?”
교주의 눈초리가 날카롭게 석추명을 스치고 지나갔다. 석추명은 귀면쌍살에게서 중양신공의 기운을 느꼈다고 말했다가는 사태가 더욱 커질 듯하여 그 말은 꾹 삼키고 말았다.
“제 생각에는 강호에 얼굴이 알려진 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석 대주도 그런 생각이군. 나는 말이야, 그놈이 명문정파의 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교주의 말에 석추명은 놀라서 교주를 쳐다보았다. 귀면쌍살은 지금까지 명문정파의 뛰어난 후기지수들만 골라서 살해했기 때문에 지금 무림공적으로 지명된 상태였다. 그런데 그 범인이 명문정파라니,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석추명은 교주의 의중을 몰라 잠시 교주를 쳐다보았다.
“내 생각에는 말이지, 그놈이 맹주와 뭔가 모종의 관련이 있는 놈이 아닐까 생각이 된단 말이야.”
“예엣?”
석추명이 깜짝 놀라자 교주가 석추명을 잠시 쳐다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일전에 말이야, 무림맹에서 맹주를 제거해달라는 요청이 우리에게 들어왔었다.”
석추명은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오늘 교주가 하는 말은 무림맹의 모든 치부가 드러나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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