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 광세일소_한추영 - 1275472
#
제 44화. 표행(鏢行) (2)
귀문방주는 정말 압도적인 무위를 보였다. 칼을 뻗을 때마다 표객들이 나가떨어졌다.
귀문방주가 나타났다는 말에 이세충은 깜짝 놀랐다. 최근 산서성의 흑도 집단 수장들을 일신의 무공 하나로 각개격파하고 흑도무리를 통합한 자가 나타났다는 말을 이세충도 들었다.
흑도 집단은 원래 누구 아래로 들어가 지시받기를 싫어해서 하나로 잘 뭉치지 않았다. 특히 산서지역 흑도 방파는 규모가 크고 자존심이 세서 다섯 개의 세력들이 그동안 각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해왔는데 귀문방을 접수한 자가 나머지 네 개의 흑도 방파를 순식간에 접수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들리는 말에 따르면 다섯 개의 흑도 방파 수장들이 모두 단 몇 수만에 신임 귀문방주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신임 귀문방주가 어떤 자이기에 그 정도의 무위가 있는지 모든 사람이 궁금해했지만, 이세충은 믿지 않았다. 강호에는 워낙 허무맹랑한 소문이 많기에 또 그런 소문이겠거니, 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 귀문방주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방천화극을 잡은 이세충의 손에 땀이 맺혔다.
귀문방주가 단칼에 표객들을 베며 돌진하고 있었다. 방어선이 뚫리는 것은 시간문제.
문득 천린상단 장 총관의 차가운 눈빛이 떠올랐다. 물건을 잃을 시에는 물건값의 열 배를 보상한다.
‘젠장!’
여태껏 이세충은 왜 이렇게 많은 녹림 도적들이 달려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녹림 도적들도 나름 원칙과 의리가 있어서 남의 구역에는 잘 발을 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한 지역에서 여러 집단의 녹림을 만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혹시 만나더라도 그런 원칙을 잘 모르는 얼치기 녹림들뿐이었다.
그런데 이번 표행길은 그런 원칙이 통하지 않았다. 아까 흑살방도 그렇고, 지금도 어림잡아 대여섯 개의 녹림 집단이 동시에 공격해왔다. 그 이유를 이세충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마차 스무대에 가득 담긴 물건이 모조리 은자라니! 녹림 도적이 꼬이지 않는 게 더 이상한 노릇이로군.’
그러나 한탄만 하고 있기에는 상황이 너무 급했다. 산서 흑도오련의 주인이라는 놈을 꺾지 않고는 부나방처럼 달라드는 녹림도적들을 물리칠 방도가 없어 보였다.
“네 이놈! 화룡표국의 다비웅이라고 들어는 보았느냐?”
말과 함께 이세충이 한 손으로 비도 세 자루를 귀문방주에게 날렸다.
쌩, 하는 소리와 함께 비도 세 자루가 세찬 바람을 일으키며 귀문방주의 등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그러나 귀문방주가 뒤돌아보지도 않고 손에 든 검을 가볍게 휘두르니 비도 세 자루가 모조리 힘을 잃고 땅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지는 게 아닌가!
이세충은 깜짝 놀랐다. 자신이 던진 비도를 감히 보지도 않은 채 칼질 한 번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 고수가 녹림에 있단 말인가!
이세충이 방천화극을 앞으로 길게 빼 들고는 말에 박차를 가해 귀문방주에게 달려갔다. 귀문방주는 이세충이 다가왔지만 여전히 등을 보인 채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만큼 자신을 얕잡아 보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세충은 귀문방주가 자신을 무시하자 화가 나서 방천화극을 크게 휘둘렀다.
방천화극이 귀문방주의 등을 베려는 순간, 귀문방주의 빈 소맷자락이 펄럭이더니 맹렬한 바람이 가슴으로 들이닥쳤다. 그와 동시에 귀문방주가 등을 돌린 채 검을 휘두르니 방천화극의 기다란 자루가 순식간에 댕강 하고 잘려나갔다.
귀문방주의 놀라운 무공을 확인한 이세충은 어안이 벙벙해서 잘려나간 방천화극의 자루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그때 귀문방주가 이세충에게 고개를 돌렸다.
“다비웅. 잘 지냈는가?”
어디선가 들어본 듯 익숙한 목소리에 이세충이 눈을 비비고 살펴보니 귀문방주는 뜻밖에 개방의 장로였던 단비개 당두걸이 아닌가! 어쩐지 무공이 절륜하다고 했더니 개방의 무공교두를 맡았던 당두걸일 줄이야!
이세충은 거대 표국의 국주로서 천하를 주유했기 때문에 흑도의 수장뿐만 아니라 정파의 무림 인사들과도 교분이 많았다. 당연히 구파일방과 오대 세가와도 교분이 있었는데 개방 장로였던 당두걸도 만난 적이 있었다. 오래전 강호에서 홀연히 사라져서 의아하기 짝이 없었는데 여기서 흑도 방파의 수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니 놀랍기 그지 없었다.
당두걸은 요혜신니에게 한쪽 팔을 잃고 나서 자신의 악행이 드러나자 개방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20년 가까이 숨어 살아야 했다. 개방은 방의 이름에 먹칠을 한 당두걸을 죽을 때까지 쫓는다는 종신추격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제 세월이 20년 정도 흐르다 보니 개방 내에 당두걸을 모르는 사람도 많고 방에 다른 중요사안들이 많이 발생하여 당두걸은 자연스럽게 잊혀 갔다.
그러자 당두걸은 최근에 녹림 방파를 하나 접수했다. 녹림의 수령 노릇이 개방의 장로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자 당두걸은 더욱 욕심을 키웠다. 녹림 전체를 통합하여 마교의 교주처럼 천하의 모든 녹림 방파를 자신의 발아래에 두겠다는 야심을 품게 된 것이다. 산서 흑도오련은 그렇게 해서 생겨났다.
당두걸은 이세충을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
“내가 누군지 알고도 감히 내게 반항하겠느냐? 당장 얌전히 표물을 내게 바쳐라.”
이세충이 식은땀을 흘리며 우물쭈물하는데 멀리서 그 광경을 본 일봉은 이세충이 위험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쌍검을 들고 벼락같이 당두걸을 공격해 들어갔다.
“국주님, 피하십시오!”
일봉이 바람처럼 몸을 놀리며 순식간에 일고여덟 차례나 검을 찔러 들어갔지만 놀랍게도 당두걸은 아무렇지도 않게 검을 휘둘러 모두 막아내었다. 지금까지 일봉이 겪은 녹림 도적 가운데 이처럼 무공이 높은 자는 없었다. 무공의 수위만 놓고 본다면 천산산맥에서 만났던 설랑보다 훨씬 우위인 듯했다.
일봉은 눈앞에 대적을 두자 정신이 번쩍 들며 요혜신니가 전수한 복마검 일초를 전개했다.
일봉의 검끝이 무거워진다 싶더니 돌연 강맹한 기세가 검에서 뿜어져 나오며 검이 아래에서 위로 반월을 그렸다.
화르르. 검이 지나가면서 불꽃이 이는 듯 검기가 폭증했다. 일봉을 단순히 표객이라고만 생각하던 당두걸은 일봉이 아미복마검 일초를 구사하자 깜짝 놀랐다. 자신의 왼팔을 잘라버린 복마검의 이 일 초를 당두걸이 어찌 못 알아보겠는가.
“네놈이 어찌 아미복마검을 아느냐?”
당두걸은 번개같이 일봉의 공격을 피한 뒤 검을 들고 수십 번 공격하더니 돌연 검을 철퇴삼아 일봉의 면전으로 내리쳤다. 당두걸은 아미파의 복마검을 대하자 팔을 잃은 원한이 새삼 사무쳐 조금도 사정을 봐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일봉은 당두걸의 검이 어마어마한 위력으로 떨어져 내리자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너무 가까워서 피할 수도 없었다.
챙강. 일봉이 쌍검을 교차하여 사력을 다해 당두걸의 검을 막았다. 당두걸의 검이 자신의 쌍검과 부딪치는 순간, 손목이 부러질 듯 시큰거렸다.
“네놈은 표객이 아니로구나. 누구냐?”
당두걸이 일봉을 노려보며 검을 쥔 손에 공력을 더하자 당두걸의 검이 조금씩 일봉의 면전으로 점점 더 가까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일봉은 안간힘을 쓰며 두 손으로 당두걸의 검을 간신히 막고 있었지만 더 이상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당두걸의 무지막지한 공력을 이기지 못한 검신(劍身)에는 이미 자그마한 실금이 거미줄처럼 퍼지고 있었다.
“말하지 못할까, 이놈!”
당두걸이 다시 한번 손에 공력을 모아 누르자 챙, 소리와 함께 일봉의 검이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그리고 당두걸의 검은 무거운 철추처럼 곧장 일봉의 얼굴로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죽었다고 생각한 순간, 누군가가 뒤에서 자신을 휙 끌어냈다. 간발의 차이로 당두걸의 검이 자신의 얼굴을 지나가고 대신 옷자락이 검날에 길게 베이고 말았다.
뜻밖에도 자신을 구해준 사람은 임예린 앞에서 자신의 무공을 조롱하던 천옥랑이었다.
“고마워할 필요는 없소. 약자를 돕는 것은 무림인의 의무이니.”
일봉을 바라보는 천옥랑의 얼굴에 가소롭다는 미소가 떠올랐다. 일봉은 천옥랑의 도움만큼은 받고 싶지 않았기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한편, 당두걸은 천옥랑이 느닷없이 끼어들자 천옥랑을 노려보았다.
“네놈은 또 누구냐?”
천옥랑이 대답 대신 차갑게 웃으며 검을 세 번 섬전 같이 찔러 넣었다. 당두걸은 눈앞에서 뭔가 희번덕거린다 싶더니 돌연 차가운 한기가 상반신을 감싸고 들어오자 말 등을 박차고 얼른 공중으로 몸을 띄웠다.
파바박. 천옥랑의 검기가 말 등을 스치고 지나가자 말이 놀라서 울부짖었다.
섬뢰삼식(閃雷三式).
바로 청성파의 유명한 검법, 섬뢰선검(閃雷仙劍)의 절초였다.
당두걸이 눈을 부릅뜨고 천옥랑에게 소리쳤다.
“화룡표국이 언제부터 청성파와 손을 잡았지?”
천옥랑은 당두걸이 개방의 장로였다는 사실은 모르고 단지 녹림 도적이라고만 생각하여 오만하게 웃었다.
“하하하. 산도둑놈 주제에 제법 견식이 있구나. 그러나 네놈 한쪽 팔로 청성파의 비전절기를 받아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천옥랑의 말에 당두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딱 네놈 꼴이로군.”
당두걸이 빈 소맷자락을 휘두르며 위에서 아래로 천옥랑을 공격해왔다. 천옥랑은 녹림 도적이라고 경시하다가 거센 바람이 가슴을 짓눌러오자 그때야 비로소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절대 녹림 도적 따위가 낼 수 있는 공력이 아니었다.
당두걸의 검에서 웅웅, 하고 검명이 울리더니 번개같이 천옥랑의 머리를 베어왔다. 천옥랑은 두 손으로 검을 잡고 비스듬히 들어 올리며 막았지만, 상대방의 검과 부딪치자마자 곧장 두 팔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이놈, 다시 한번 떠들어 보거라!”
당두걸의 검이 돌연 빙그르르 돌면서 이번에는 횡으로 천옥랑의 목을 쳐 왔다. 수직으로 내리누르다가 순식간에 횡으로 공격을 전환하는 것은 공력이 절정에 달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공격 방식이었다.
천옥랑은 팔이 부러져나갈 각오로 서둘러 검을 수직으로 곧추세우며 당두걸의 검을 막았다. 그러자 그때를 노린 듯 당두걸의 빈 소매가 또다시 요란한 바람을 일으키며 천옥랑의 가슴으로 달려들었다. 상황이 워낙 절묘하여 이번에는 도저히 피할 길이 없었다.
“아!”
천옥랑이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는데 누군가가 갑자기 자신을 밀어내며 당두걸의 소맷자락 공격을 대신 받아내는 것이 아닌가!
천옥랑이 깜짝 놀라서 쳐다보니 자신을 구해내고 대신 당두걸의 공격을 받은 사람은 일봉이었다. 당두걸은 빈 소맷자락에 공력을 주입하여 채찍처럼 사용했는데 수십 년 공력이 깃든 공격을 일봉이 대신 받아내고 있었다.
일봉은 자존심이 세서 비록 천옥랑보다 무공이 낮기는 하지만 천옥랑에게 목숨 빚을 지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 마침, 천옥랑이 죽을 위기에 처하자 대번에 자신이 나서서 천옥랑을 구해내려 한 것이다.
천옥랑도 그런 일봉의 속마음을 짐작하고 어이없는 눈으로 일봉을 쳐다보았다. 세상에 이 자처럼 자존심이 센 사람이 있을까!
수백 근의 힘이 실린 빈 소맷자락이 일봉의 가슴을 강타했다. 일봉은 자신의 공력으로는 당두걸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해 순식간에 늑골이 부러지고 내상을 입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 순간, 갑자기 일봉의 등 뒤를 통해 뜨끈한 기운이 장강대하처럼 몰려들었다.
일봉은 어느 고인이 갑자기 자신을 도와주는 줄 알고, 정신이 번쩍 들어 투지를 불태우며 당두걸의 공격에 대항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뜻밖에도 자신을 구해준 사람은 기하진이었다.
기하진은 일봉을 몰랐지만 일봉은 기하진이 누군지 잘 알았다. 어릴 때부터 임예린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일봉은 임예린이 늘 그리워하는 두 사람에게 질투를 느꼈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기에 십 년의 세월이 지나도 임예린이 잊지 못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바로 기하진이었다. 옥을 깎아놓은 듯 귀티 나는 외모에 무공 또한 자신보다 훨씬 뛰어났다. 게다가 자신의 등을 타고 흘러드는 기하진의 공력은 일봉이 죽었다 깨어나도 흉내조차 낼 수 없을 정도였다.
일봉은 새삼 자괴감과 열등감이 들어 적이 앞에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조심하시오.”
그 순간, 기하진이 일봉에게 소리쳤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