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44화 (44/201)

#   44 - 광세일소_한추영 - 1270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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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3화. 표행(鏢行) (1)

부맹주에게 보내는 칠보영환과 만년설삼, 그리고 은자 20만 냥이 담긴 궤짝을 실은 마차가 드디어 임가장에서 출발했다.

표행을 담당한 표국은 남경 3대 표국의 하나라는 화룡표국(火龍鏢局).

국주 이세충(李世忠)은 덩치가 크고 여섯 자루의 비도를 잘 써서 다비웅(多臂熊)이라는 별호가 붙어 있었다. 이세충은 천린상단의 의뢰를 받아 표국에서 가장 뛰어난 표사 50여 명을 선별하여 이번 표행에 따르게 했다.

게다가 천린상단의 무력부대인 호천대 50여 명이 표객으로 분장하여 일봉의 지휘 아래 이번 표행에 직접 참가했고, 무림맹의 제 일단인 용봉단 100여 명을 이끌고 단주 기하진, 부단주 천옥랑이 뒤에서 은밀히 따라가고 있었다.

이번 표행의 표물이 워낙 고가품이라 부맹주 천계심은 정주에서부터는 남천단 단주 원무개가 직접 표물을 인수하여 오도록 했다.

마차 한 대당 은자 200냥짜리 궤짝 50개씩, 은자를 실은 마차만 20대였다. 거기다가 칠보영환과 만년설삼을 싣고 또 표행에 필요한 물자를 실은 마차 등, 마차 수만 총 25대에 육박했다.

마차마다 표객 네 명이 붙어서 호위하고, 행렬의 제일 앞에는 화룡표국의 깃발과 함께 국주 이세충이 친히 방천화극을 잡고 행렬을 이끌었다.

백여 명이 넘는 표객이 검을 들고 표물을 수송하는 모습은 일대 장관이었다. 하지만 이번 표행은 어두운 밤과 이른 새벽에 인적이 드문 곳으로만 움직였기에 사실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이세충은 이번 표행에 표국의 사활이 걸려있다고 믿었다. 잘되면 한밑천 단단히 잡을 것이고 못되면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천린상단의 총관이 자신을 직접 찾아와 몇 년을 벌어야 할 파격적인 금액을 제시하며 물건 운송을 부탁했다. 그러나 까다로운 조건이 있었다.

첫째, 표물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 말 것. 둘째, 천린상단이 이번 표행을 의뢰한 것을 비밀로 할 것. 셋째, 가급적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은밀히 움직일 것. 넷째, 물건을 잃어버리면 물건값의 열 배를 보상할 것, 등이었다.

이세충은 천린상단의 호천대가 따로 따라붙는다는 말에 불쾌하여 처음에는 이번 표물을 받지 않으려고 생각했다. 표물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도 찜찜했지만 표객 수만큼의 호천대가 동행한다는 얘기를 듣자 자신들을 못 미더워하는 천린상단의 행태가 기분 나빴기 때문이다. 표국을 믿지 못한다면 자신들이 직접 수송을 하면 되지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딱 잘라 거절하기에는 제시된 액수가 너무 컸고, 또 호천대가 따라온다면 그만큼 안전하게 운송할 수 있다는 뜻이니 딱히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표객만 백여 명에 달하는 특급 표행이 시작된 것이다.

과연 길을 나서자마자 어두운 숲속에 몸을 숨긴 채 표물을 뒤쫓는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럴수록 이세충은 오른손에 움켜잡은 방천화극에 힘을 주었다. 웬만한 녹림도적들은 화룡표국이라는 깃발 하나만으로 두려워 섣불리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화룡표국의 위상은 드높았다.

그러나 오늘 밤 표물의 뒤를 쫓는 사람들에게 화룡표국의 깃발은 아무런 인상도 주지 않는 듯했다.

‘어허. 큰길을 놔두고 좁은 산길로만 다녀야 한다니. 아무래도 조만간 한판 크게 벌어질 듯하구나.’

이세충은 속으로 천린상단의 장 총관이 원망스러웠다. 어두운 밤에, 인적이 드문 곳으로만 다녀야 하니, 녹림 도적들에게 어서 와달라고 초청장을 내미는 거나 다름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관도를 벗어나 산길로 들어서자마자 벌써 수십 명의 무리들이 과감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뒤따라 오기 시작했다.

“표객들은 즉시 원진(圓陣)을 펼쳐 표물을 보호하라!”

이세충의 말에 백여 명에 달하는 표객들이 표물을 가운데 두고 타원형으로 둥글게 감싸며 방어태세를 취했다. 호천대 50여 명도 표객으로 위장한 만큼, 일봉이 따로 지시를 내리기 전까지는 이세충의 말을 듣기로 되어 있었다.

표객들이 진을 형성하기가 무섭게 뒤따라 오던 수십 명의 무리가 드디어 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우하하하, 이 지역을 지나려면 당연히 터주대감인 이 흑살방주님께 허락을 받았어야지!”

흑살방(黑殺幇)은 하북지역에 꽤 악명을 떨치는 녹림집단이었다. 규모가 큰 녹림 집단의 경우, 표국들은 표행에 앞서 미리 소정의 사례금을 보내어 불필요한 싸움을 미연에 막곤 했다. 그래서 사실 웬만한 표국의 국주들은 사업상 각 지역의 유명한 녹림대도들과도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항상 변수는 있었다. 표물의 액수가 클 경우에는 미리 사례금을 받더라도 안면을 몰수하는 경우도 많았고, 신생 녹림 집단의 경우는 일일이 챙기기도 어려웠다. 그럴 때는 역시 무력으로 해결했는데 화룡표국은 무공이 뛰어난 표객들이 많아서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물건을 수송한 확률이 구 할이 넘었다. 이런 든든한 실적을 바탕으로 화룡표국은 남경의 3대 표국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천린상단의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표물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표행길에 나서게 되어 관례처럼 흑살방에 미리 양해를 구하지 않았다.

이세충은 흑살방과 이미 여러 차례 싸운 전력이 있던 터라 흑살방이 웬만해서는 화룡표국이 운송하는 표물은 건드리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흑살방이 감히 분수도 모르고 도발을 해 온 것이다.

“이놈들이 그동안 오냐오냐 따라주었더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뭣들 하느냐? 당장 저놈들을 쓸어버리지 않고!”

공격해온 놈들이 흑살방인 걸 알자 이세충은 해볼 만한 싸움이라고 생각하며 앞장서서 방천화극을 휘둘렀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수십 명의 흑살방 방도들이 공격해 들어왔다. 뒤에서 몸을 숨긴 채 뒤따르던 천옥랑이 그 모습에 달려나가려고 하자 기하진이 손을 들어 저지했다.

“아직 우리가 나설 때가 아니야. 저런 잔챙이들은 화룡표국과 호천대에 맡겨도 충분해. 괜히 우리 정체를 미리 드러내서는 좋을 게 없어.”

기하진의 예측은 정확했다. 흑살방 수십 명이 대도를 휘두르며 달려들었지만 이세충의 방천화극과 호천대의 검날 앞에 일각도 안 되어 쫓겨 달아나고 말았다.

단번에 흑살방 수십 명을 격퇴한 이세충은 자신감이 붙어 기세등등했다.

“누구든지 오기만 해라. 단번에 두 동강을 내줄 테니! 껄껄껄.”

이세충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밤하늘에 퍼져나갔다.

흑살방이 일각도 안 되어 박살이 났지만 표행을 뒤쫓는 무리는 점점 더 늘어만 갔다. 흑살방처럼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고 표행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은밀히 움직였지만 워낙에 많은 무리가 움직이는 터라 이들을 감지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한참을 가자 구불구불 이어지던 산길이 끝나고 드디어 확 트인 평야 지대가 나왔다. 사방이 트인 곳은 물건을 지키기는 어렵고 공격하기는 쉬워서 표물을 뒤쫓던 녹림 도적들에게는 더없이 행동하기 좋은 장소였다.

“모두 다시 원진을 구축하고 표물을 보호하라!”

이세충의 명이 떨어졌다. 주위의 관목숲에서 사람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듯 풀잎이 스치는 소리가 쉬지 않고 들려왔다.

이세충을 비롯한 화룡표국 표객들은 검을 움켜잡고 주위의 동정에 귀를 잔뜩 기울이고 있었다. 극도의 긴장감으로 공기가 팽팽하게 수축하여 숨 쉬는 것조차 버거울 지경이었다.

“빠른 속도로 여기를 벗어난다. 모두 말에 박차를 가하라!”

이세충의 명이 다시 떨어졌다. 마차를 끄는 마부들의 채찍이 공기를 가르며 말의 엉덩이를 때렸다.

사사삭! 풀숲이 스치는 소리가 점점 더 커지더니 우측에서 수십 명의 괴한이 뛰쳐나왔다.

“우측이다! 우측을 경계하라!”

이세충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좌측에서 다시 검은 옷을 입은 수십 명의 무리가 쏟아져 나왔다.

“좌측에서도 쏟아진다. 모두 정신 바짝 차려라!”

그러나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뒤쪽에서도 수십 명의 흑의인이 질풍같이 말을 달리며 표행을 공격해 들어왔다. 화룡표국의 표행이 삼면에서 동시에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적의 수만도 족히 수백 명은 될 듯했다.

“웬 놈들이냐! 감히 화룡표국의 표행을 방해하다니, 모두 살기를 포기한 게로구나!”

이세충이 성난 사자처럼 노성을 지르며 방천화극을 바람개비처럼 휘둘렀다. 과연 녹림대도들을 벌벌 떨게 한다는 다비웅의 명성에 걸맞게 방천화극이 닿는 곳마다 적들이 제대로 저항도 못 하고 속속 쓰러졌다. 전후좌우를 가로지르는 이세충의 용맹한 모습은 여포의 화신을 보는 듯했다.

이세충 못지않게 바람을 가르며 적을 압도하는 사람이 또 한 명 있었다. 쌍검을 휘두를 때마다 적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거나 말에서 떨어졌다. 바로 호천대의 임시 대주인 일봉이었다.

일봉은 말을 타고 표물 행렬의 앞뒤를 왔다 갔다 하며 위기에 빠진 표객이나 호천대원들이 보이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구해주었다. 싸움의 주도권은 표객들과 호천대가 쥐고 있었으나 적의 수가 워낙 많아 베어도 베어도 끊임없이 달려들어 싸움의 양상은 점점 더 치열해지고 있었다.

뒤에 숨어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천옥랑이 검을 부여잡으며 앞으로 튀어 나가려고 하자 기하진이 다시 붙잡았다.

“아직 때가 아니다.”

“젠장, 그놈의 때는 대체 언젠데? 적들의 수가 눈에 안 보여? 표객들이 다 죽고 난 다음에, 표물을 다 잃고 난 다음에 싸움에 뛰어들 거야?”

천옥랑의 불만 가득한 말투에 기하진이 천옥랑을 노려보았다.

“천 부단주, 지금 감히 단주에게 항명을 하겠다는 것이냐?”

기하진이 엄한 목소리로 추궁하자 천옥랑은 앞으로 달려나가려다가 말고삐를 늦추며 ‘젠장!’하고 혼잣말을 했다.

“수는 많아 보이지만 아직까지 잔챙이들이야. 분명히 이 상황을 지켜보는 다른 무리들이 있을 거야. 지금 성급히 뛰어들었다가는 우리 정체만 노출하는 꼴밖에 안 돼.”

기하진은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주위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싸움이 점점 더 치열해지고 쌍방에 부상자와 사망자와 속출하고 있었지만, 다행히 아직 마차 한 대도 적들의 수중에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때 갑자기 제일 끝쪽에서 달리던 마차의 말 한 마리가 검에 찔리기라도 했는지 히힝거리며 두 발을 높게 쳐들었다. 그 바람에 마차가 덜컹거리며 심하게 요동을 치더니 마차 안에서 궤짝 하나가 굴러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굴러떨어져 뚜껑이 열린 상자에는 뜻밖에도 번쩍번쩍 빛나는 은자가 가득했다.

기하진은 순간 제 눈을 의심했다. 왜 궤짝에 은자가 가득 담겨 있을까? 설마하니 수십 대의 마차에 가득 실린 궤짝들이 모두 은자란 말인가?

기하진은 이번에 수송하는 표물들이 맹으로 들어가지 않고 부맹주의 사택으로 가는 물건들이라고 들었다. 기하진은 단주의 업무를 맡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또 윗분들이 하시는 일이라 별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많은 표물들이 모두 은자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천린상단은 이미 맹에 엄청난 거액을 기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또다시 이런 거금을 부맹주에게 개인적으로 보낸다?

뭔가 구린 냄새가 났다. 맹주님과 사마 총군사님도 이 사실을 알고 계실까? 이렇게 밤에 인적이 드문 길을 이용해 몰래 운송하는 이유가 설마 맹의 눈길을 피하기 위한 건 아닐까?

그러나 기하진은 정작 마차 스무대 분량의 은자보다 더욱 막대한 가치를 지닌 물건도 함께 운송되고 있음은 전혀 몰랐다.

은자를 바라보며 기하진이 이런 의심을 하는 동안 적들이 사방에서 은자를 차지하려고 달려들었다.

“우하하하. 그 소문이 진짜인지 긴가민가했더니 역시 정말이로구나.”

우측에서 수십 명의 괴한을 이끌던 적의 두목이 기쁨에 들떠 소리쳤다.

“이 마차들이 모두 은자로 가득 차 있다. 오늘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모두 탈취해라!”

은자를 실제로 목격한 적들은 탐욕에 눈이 멀어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다.

한편 은자 궤짝이 마차에서 떨어지자 천옥랑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게다가 궤짝 뚜껑이 열려 은자가 가득 담긴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 게 아닌가. 천옥랑은 자신도 모르게 옆에 있는 기하진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제길. 저놈들이 일 처리를 어떻게 한 거냐? 이제 기하진 저놈의 의심은 피하기 어렵겠군.’

천옥랑은 은자 궤짝을 주우려고 수십 명의 적이 달려들자 기하진에게 일부러 들으라는 듯 소리를 냈다.

“아니, 저놈들이!”

그러더니 천옥랑이 순식간에 은자 궤짝이 떨어진 곳으로 신형을 날렸다.

휘리릭 소리가 나나 싶더니 천옥랑이 말의 등을 발로 박차고 허공을 날아오르는 독수리처럼 마차를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그동안 기하진의 무공에 가려져 빛을 보지 못했던 천옥랑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놀랍기 짝이 없는 경공을 선보였다.

천옥랑이 지옥에서 올라온 아귀들처럼 마차에서 굴러떨어진 은자 궤짝에 손을 내미는 적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검광이 번쩍인다 싶더니 순식간에 적 서너 명의 팔이 싹둑 잘렸다.

“으악!”

팔을 잃은 괴한들의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그때 표행의 우측 뒤에서 검은 무복에 흰 띠를 맨 수십 명이 질풍같이 말을 몰며 출현했다.

“산서 흑도오련(黑道五聯)의 주인인 귀문방(鬼門幇) 방주님이시다. 모두 길을 비켜라.”

흰 띠를 맨 적들이 말을 달리며 소리쳤다. 그러자 싸움터에 먼저 뛰어들었던 검은 무복을 입은 자들이 좌우로 물결 갈라지듯 쩍 갈라지며 뒤에 나타난 적들에게 길을 내어주는 것이 아닌가!

‘귀문방?’

기하진이 들어본 적 없는 방파였다. 신진 문파이거나 별 볼 일 없는 문파일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기하진은 대단한 적은 아닐 거로 생각했다.

흰 띠를 맨 적의 제일 앞에서 말을 달리는 귀문방주라는 자는 놀랍게도 외팔이였다. 귀문방주는 하나 남은 손으로 검을 들고 있어서 말 고삐도 잡지 않은 채 말을 타고 있었다.

그러나 말이 달리면서 요동을 쳐도 말 등에 얹힌 몸이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 일신의 무공이 대단해 보였다. 저 정도의 무공이면 절대 무명 소졸일 리가 없었다.

별 볼 일 없는 작자라고 생각했던 기하진은 눈을 크게 뜨고 귀문방주라는 작자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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