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41화 (41/201)

#   41 - 광세일소_한추영 - 1265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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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0화. 의심

백련신교 교주 남무궁은 자신의 앞에 엎드려 있는 맹환을 바라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놈, 역시 생각대로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군.

“그래서 석추명이 뢰정을 붙잡고도 그냥 놓아주었다는 말이냐?”

교주의 목소리가 텅 빈 교주전에 울렸다. 특별히 공력을 주입하지 않아도 듣는 것만으로도 왠지 주눅 들게 하는 목소리였다.

“그, 그렇습니다. 교주님.”

“흠. 석 대주가 교주의 말을 우습게 여기는구나.”

교주가 냉소를 짓자 오싹 한기가 일었다. 맹환은 자신도 모르게 손이 덜덜 떨려와 떨지 않으려고 양손에 힘을 주어야 했다.

“알았다. 앞으로도 계속 예의주시하라.”

“예. 교주님. 그리고 또...”

맹환이 머뭇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자 교주의 두 눈썹이 대번에 위로 치켜 들렸다.

“또 무엇이냐?”

“그, 그것이 일전에 장가방을 쳤을 때도 한 명도 남겨두지 말고 모조리 없애라는 교주님의 말씀을 어기고 장일웅의 아내를 살려두려 한 정황이 있었습니다”

“그래?”

교주의 눈초리가 올라갔다.

“그, 그렇지만 제가 깔끔하게 처리했습니다. 다시 비수를 날려 장일웅 아내의 목숨을 거두고 죽은 것을 확인했습니다.”

마치 어린 학생이 자기가 한 일을 미주알고주알 자랑하듯 보고하는 맹환을 바라보며 교주는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저런 녀석을 부대주랍시고 앉혔다니....

교주는 잠시 눈살을 찌푸리다가 다시 피며 말했다.

“잘했다. 계속 주시하고 이상한 낌새가 있으면 보고하라.”

“존명!”

****

늦은 밤인데도 백련신교 총단의 의사청에는 불이 환히 밝았다.

단상의 교주 옆으로 마립, 신갈 두 장로가 보좌하듯 서고, 교주의 뒤편에는 명왕대주가 예의 그 오만하고 차가운 인상을 한 채 교주를 옹위하고 있었다. 단상 아래에는 탈명대, 참룡대, 광풍대의 대주와 부대주가 늠름하게 서 있었다.

이번 임무에서 뢰정을 놓아준 석추명을 단죄하기 위해 신교의 수뇌부 회의가 소집되었던 것이다.

의사청의 차가운 마룻바닥에는 결박된 채 꿇고 앉은 석추명은 눈을 들어 눈앞의 사람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저들 중에 스승인 뢰정 장로를 변호해줄 사람이 있을까? 교주의 면전에서 뢰정을 비호하려면 목숨을 내놓아야 할 텐데 그럴 만한 사람이 있을까? 석추명은 절망감이 들었다. 이제 모든 것은 끝이다.

총관이 석추명의 죄상을 고하려고 하자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황연화가 들어왔다. 그 바람에 그 자리에 모여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황연화와 뒤따라 들어오는 사소혜에게 집중되었다.

“저도 오늘 회의에 참석하겠어요.”

신교에서 황연화의 지위가 교주 다음으로 높긴 하지만 지금까지 수뇌부 회의에 직접 참석했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런 전례를 깨고 이번에 황연화가 직접 참석하기로 한 것이다.

남무궁은 황연화를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이 여기까지 오다니 실로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로군. 좋도록 하시오. 총관은 다시 죄상을 고하도록 하라!”

교주의 추상같은 명령이 떨어지자 총관이 석추명의 죄상을 읊었다.

“죄인 석추명은 수라대주의 몸으로 죄인 뢰정을 추격하여 사로잡을 기회가 있었으나 죄인을 붙잡기는커녕 오히려 죄인에게 살길을 열어주었다. 이는 지엄하신 교주님의 명을 어긴 불충죄와 아울러 대주로서의 임무를 소홀히 여긴 태만죄를 범했다.....”

“잠깐, 총관! 뭐가 그렇게 구구절절한가?”

총관이 죄상을 주절주절 늘어놓자 남무궁은 짜증이 난다는 듯이 손을 들어 총관의 말을 가로막았다. 교주의 질책에 총관이 움찔거리며 물러나자 남무궁이 직접 석추명에게 물었다.

“석 대주, 최근에 강호에서 뢰정이 중양신공으로 귀면쌍살을 상대했다는 소문이 내 귀에 들리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아느냐?”

교주의 추궁에 석추명은 난감했다. 당시 뢰정은 숨어있던 임가장에 갑자기 귀면쌍살이 나타나 사람들을 죽이자 친우를 돕기 위해 무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귀면쌍살이란 자의 무공이 대단하여 다른 무공으로는 승부를 다툴 수가 없어 부득이 중양신공을 썼다.

그런데 귀면쌍살이 도망가면서 간악하게도 강호에 온통 마교의 수라검이 중양일지를 가지고 있다고 손문을 낸 것이다. 그 바람에 뢰정은 지금 신교와 무림맹, 양쪽의 추격을 모두 받게 되었고 그 소문이 교주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된 것이다.

석추명이 답을 못하자 남무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신공을 빼돌려 도망치는 주제에 감히 그 신공을 강호에서 여봐란듯이 쓴다는 게 말이 되느냔 말이다!”

“그, 그것은....”

“이제 뢰 장로가 중양일지를 가지고 있음은 전 강호가 알게 되었다. 그런데도 너는 죄인을 붙잡았다가 일부러 풀어주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느냐?”

교주의 노한 목소리가 의사청을 쩌렁쩌렁 울렸다. 교주가 화를 내자 두 호교 장로를 비롯한 좌중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모두 머리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남무궁은 석추명이 만약 말도 안 되는 핑계거리를 댄다면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즉시 일장에 때려죽이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인정합니다.”

석추명의 입에서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뜻밖에도 석추명은 아무런 변명도 없이 순순히 자신의 죄를 자백했다.

“제자 된 자로서 감히 스승님을 잡아들일 수 없어서 한 번 놓아드렸습니다. 그것이 스승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주님의 명을 어겼으니 죄를 달게 받겠습니다.”

교주는 석추명이 순순히 자백하자 요놈 봐라, 하는 눈빛으로 석추명을 바라보았다.

“석 대주가 사사로운 정리 때문에 내 명을 어겼으니 이는 신교에 대한 배신에 해당한다. 마 장로, 본교에서 배신자는 어떤 벌에 처하나?”

그러자 교주 옆에 시립하고 있던 마립이 지체하지 않고 답을 올렸다.

“사지근맥을 자르고 지하 뇌옥에 처넣습니다.”

그 말을 들은 석추명의 몸이 움찔했다. 불현듯 머릿속에 십여 년째 지하 뇌옥에 갇혀 있던 황보의 참혹한 모습이 떠올랐다. 비록 각오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오싹 한기가 온몸을 감고 돌았다. 석추명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심장 박동이 얼마나 빨리 뛰는지 쿵쿵대는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석추명이 두 눈을 뜨자 문득 맹환이 눈에 들어왔다. 저 녀석이 밀고만 하지 않았더라도 이 지경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맹환은 석추명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도 모르고 이제 곧 자신이 수라대 대주가 되리라는 생각에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연신 입을 꿈틀댔다.

잠시 맹환을 쳐다보던 석추명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은 좀 더 신중하지 못한 자신의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무궁이 석추명을 쳐다보며 말했다.

“석 대주는 더 할 말이 있나?”

석추명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스승을 잡아들이라는 명을 들었을 때부터 어차피 최악의 상황을 생각했었다. 지금에 와서 맹환을 원망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니 오히려 마음이 담담했다.

“없습니다.”

“좋다. 지금 당장 석 대주의 직위를 박탈하고 신교의 규정대로 엄중히 행하라.”

“존명!”

교주의 지엄한 명령이 떨어지자 수하들이 머리 숙여 답을 하고는 석추명을 결박하기 위해 다가갔다.

“잠깐만!”

그때 돌연 황연화가 벌떡 일어서더니 교주가 앉은 자리 앞으로 다가왔다.

“교주님. 교주의 명은 지엄하니 반드시 지켜야만 합니다. 그러나 교주님께서는 지금 상황을 살피지 않으시고 처벌을 내리어 오히려 신교에 다시없을 충신을 벌하고, 또 신교 십만 교도들에게 잘못된 선례를 남기고 계십니다.”

황연화가 자신을 변호하자 석추명은 놀라서 고개를 들고 황연화를 바라보았다. 교주의 부인인 황연화가 자신을 비호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신교 수뇌부들도 황연화의 행동에 놀라 눈이 둥그레졌다.

황연화의 말에 남무궁이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요?”

“교주님께서는 지금 충성을 다하는 진정한 신하를 못 알아보고 계십니다. 생각해 보세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고 했습니다. 스승을 해할 수 있는 사람은 주군도 해할 수 있다고 봐야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황연화는 말을 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장로니 대주니 하는 작자들이 교주 앞이라고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모습에 화가 났다.

“그러나 석 대주는 천륜을 저버릴 수 없어 감히 스승을 잡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인을 놓아준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으니 교주님을 속인 것도 아닙니다. 스승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자가 주군에 대한 의리를 지키지 않겠습니까? 교주님은 어째서 눈앞의 사소한 잘못으로 신교의 충신을 못 알아보시고 도리어 죄를 물으십니까?”

교주 남무궁은 성격이 괴팍하고 독선적이라 남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한 말에 누군가 이의를 제기하면 이를 조금도 참지 못했다. 오죽하면 신교의 교도들이 교주와 눈이 마주칠까 봐 전전긍긍하겠는가.

황연화가 비록 교주의 부인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공개석상에서 교주의 말에 이의를 제기한 것은 그야말로 목숨을 건 행위였다. 황연화의 발언으로 분위기가 냉랭하게 가라앉아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좌불안석이었다.

황연화는 말을 끝내면서 석추명을 힐끗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빛이 잠시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황연화가 걱정되어 석추명이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황연화는 자신에 대해서는 걱정 말라는 듯이 눈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단상 위에 앉아 황연화의 말을 듣던 남무궁은 황연화와 석추명이 그 짧은 순간 나누는 눈빛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이제 보니 황연화가 그동안 한 번도 참석하지 않던 수뇌부 회의에 들어온 것도 다 저놈을 변호해주기 위해서가 아닌가! 게다가 저 눈빛! 도대체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면서 무슨 음탕한 생각들을 했을까? 내 저 연놈들을 당장!

남무궁은 질투심이 불같이 끓어올랐다. 의심이 많은 남무궁의 머릿속에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발칙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남무궁이 결국 분을 이기지 못하고 손을 들어 옆에 놓인 협탁을 쾅, 내리쳤다. 협탁의 모서리가 순식간에 부서져 나갔다.

“불모께서는 감히 내 앞에서 저 죄인 편을 드는 것이오?”

교주의 노한 음성이 의사청을 쩌렁쩌렁 울렸다. 석추명은 교주가 분노하여 혹시라도 황연화에게 피해가 갈까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황연화를 비호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오히려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까 두려워 그럴 수도 없었다.

교주가 화를 내었지만 황연화는 조금도 기가 죽지 않고 교주를 똑바로 쳐다보며 또랑또랑 말했다.

“지금 교주께서 석 대주를 벌하시게 되면 신교에 불충 불의한 자들만 가득 차게 됩니다. 제 부모나 스승을 죽이고 버젓이 활보하는 자들이 신교에 가득 차는 꼴을 두고 보시렵니까?”

“듣기 싫소!”

남무궁이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황연화는 물러서지 않았다.

“듣기 싫어도 들으셔야 합니다. 교주님께서 올바른 소리에 귀를 막으시니 주위에 충신이 남지 않는 게 아니겠습니까? 지금 석 대주의 죄를 단죄하시면 교주님께서는 돌이킬 수 없는 큰 과오를 범하시는 겁니다. 제발 돌이켜 생각하세요.”

황연화가 갑자기 남무궁 앞에 무릎을 꿇었다. 교주의 부인은 교주와 가장 가까운 사이라 이렇게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앞에서 교주에게 무릎을 꿇는 것은 불모의 체면을 모조리 내팽개친 행위라고도 볼 수 있었다.

석추명은 황연화가 목숨을 걸고 이렇게까지 자신을 감싸자 감동하여 가슴이 뭉클했다. 사실 황연화와는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속에 있는 얘기를 주고받을 만큼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다. 두 사람은 그저 뢰정에 대한 생각이 서로 같다는 공통점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황연화는 지금 석추명 자신을 위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교주에게 맞서고 있었다. 석추명은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러나 더 두고 보았다가는 교주 성격에 아무리 자기 아내라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 듯했다.

“불모님,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지엄하신 교주님의 명을 수행하지 못한 죄인입니다. 교주님의 단죄를 달게 받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 더 이상 교주님의 성심을 어지럽히지 마십시오.”

교주 남무궁은 석추명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이것들이 아주 끼리끼리 작당을 하고 나를 놀리는구나 싶었다.

“좋소이다. 불모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내, 불모의 체면도 세워드려야지. 집법장로는 들으라. 죄인 석추명의 처벌을 태형 일백 대와 육 개월간 수라각 감금으로 경감한다.”

집법장로를 겸하고 있는 탈명검 마립이 두 손을 맞잡고 공손히 명을 받들었다.

그러나 남무궁은 황연화의 얼굴을 한번 노려본 뒤,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그대로 황연화를 지나쳐 의사청을 빠져나갔다.

교주의 시선을 의식한 황연화는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은 듯 파랗게 질린 채 몸을 파르르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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