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 광세일소_한추영 - 126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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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8화. 불청객 (1)
천계심을 만나고 온 임풍은 사흘을 꼬박 두문불출했다. 식사도 하지 않고 가족이나 외부인 모두 일절 만나지 않았다.
임예린은 임풍이 걱정되어 손수 음식을 장만하여 들고 갔다. 임풍의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아버지, 저 예린입니다. 직접 음식을 좀 만들어 왔습니다.”
“일없다. 그냥 가지고 돌아가거라.”
방 안에서 들려오는 임풍의 목소리는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그러지 마시고 방문을 좀 열어주세요. 아버지 얼굴만이라도 뵙고 가겠습니다.”
“어허, 일없대도!”
임풍이 방안에서 역정을 냈다. 그러나 벌써 사흘째다. 오늘은 이대로 물러날 수 없다.
“아버지, 저는 지금까지 아버지를 친아버지로 여겨 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여전히 마음에 담을 쌓고 저를 친딸로 여기지 않으시니 서운하기 짝이 없습니다.”
예린이 작심한 듯 말을 쏟아냈다.
“그것이 무슨 말이냐? 내가 언제 너를 친딸로 여기지 않은 적이 있더냐?”
“가족이라면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서로 의지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힘든 일이라 하여 혼자서만 짊어지시려고 하니 이는 분명히 저를 가족으로 대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까?”
임예린의 말에 방 안에서 잠시 한숨 소리가 나더니 덜컥, 하고 방문이 열렸다.
“들어오너라.”
사흘간 제대로 먹지 못한 임풍의 얼굴은 초췌했고, 눈빛은 침울하기 짝이 없었다. 그 모습에 임예린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러십니까? 제가 큰 도움은 안 될지라도 펼쳐놓고 같이 얘기하다 보면 좋은 수가 생길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임풍은 딸의 얼굴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딸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살다 보면 그럴 수 없는 것도 있었다.
이번 일이 그랬다. 행여라도 딸자식에게까지 해가 미칠까 봐 임풍은 선뜻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그런 임풍을 가만히 보던 임예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한번 맞혀 볼까요? 부맹주가 아마 사적인 목적으로 돈을 요구했을 테지요. 아버지께서 감당하기 어려운 거액을 요구했을 겁니다. 아마 그 금액을 마련하려면 불의한 방법을 써야만 가능하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아버지?”
임예린의 말에 임풍은 대답은 하지 않고 다시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게다가 돈을 요구한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발설한다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고 했겠지요. 아마 맹주님을 예로 들었을 테지요. 그렇지 않으면 부맹주가 아버지와 몰래 만날 일은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아버지뿐만 아니라 우리 임가장과 천린상단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 협박했겠지요.”
마치 훤히 내다본 것 같은 임예린의 말에 임풍을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얼마를 요구하던가요?”
“황금 일만 냥과 백은 백만 냥이다.”
임풍의 말에 임예린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 이리떼 같은 자들이다. 그 돈을 벌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 피땀을 흘려야 하는지 그자들은 전혀 모를 것이다.
그저 자신의 눈앞에 있는 먹잇감에만 신경 쓸 뿐. 그런 자들이 정파의 기둥이라고 하는 무림맹의 수뇌부라는 사실에 임예린은 몸서리쳤다.
“아버지, 저에게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방법이라니?”
평소에도 똑똑하기 그지없는 딸아이가 방법이 있다고 하니 임풍은 귀가 번쩍 뜨이는 것만 같았다.
“그 많은 돈은 저희 상단으로서도 당장 마련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일단 은자 20만 냥만 먼저 현금으로 준비하는 겁니다.”
“나머지는 어떡한단 말이냐?”
“저들은 무림인들이 아닙니까? 무림인들이라면 기이한 영약에 환장하지요. 마침 우리 상단에는 황제께 진상하기 위한 칠보영환(七寶靈丸)과 만년설삼이 있지 않습니까? 칠보영환 한 알의 값이 자그마치 은자 십만 냥을 훨씬 넘습니다. 게다가 만년설삼은 한 뿌리에 황금 천 냥에 달하지요. 그걸 주는 겁니다.”
칠보영환은 소림사의 대환단에 버금가는 영약으로 일곱 가지 진귀한 약재로 만들어 한 알을 복용하면 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 있으며, 무림인이 복용할 경우, 자그마치 20년에 달하는 공력 증진의 효과를 볼 수 있었다.
만년설삼도 진귀하기는 마찬가지이며 특히 칠보영환을 복용할 때 생기는 지독한 고통을 중화시켜주는 역할을 하기에 두 영약은 꼭 쌍으로 복용해야 했다.
임풍이 들어보니 아주 일리가 없지는 않았으나 또한 걱정스러운 부분도 있었다.
“저들이 그걸 받아들이겠느냐?”
“저들도 우리가 당장 은자 백만 냥을 마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 겁니다. 우리 상단에 있는 돈을 모두 긁어모아 당장 은자 백만 냥을 마련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면 우리 상단은 문을 닫아야 하니 그건 저들도 피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저들도 단맛을 오래오래 빨고 싶을 테니까요.”
임예린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영약의 값만으로도 저들이 요구한 금액은 얼추 되는 셈입니다. 게다가 은자 20만 냥이라는 거금을 더 얹어주니 저들이 싫어할 리가 없지요.”
“은자 20만 냥이라. 그 금액도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거늘...”
“그 돈은 반드시 준비해야만 합니다. 은자 20만 냥을 옮기려면 은자 200개가 들어가는 궤짝만 일천 개입니다. 그 궤짝을 나르는 것만 해도 적지 않은 인력이 필요할 겁니다. 그래서 저희는 그동안 무림맹에 전표로 끊어주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러나 전표는 저들의 행적이 탄로 나니 반기지 않을 것이고, 반드시 현금으로 줘야 할 것인데 그러려면 부득이 수송인력이 늘어날 수밖에 없지요.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임예린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강호에 영약이 출현했다는 소문을 내는 것이지요. 그 영약과 백은 이십만 냥을 수송하는 행렬이 모월 모일에 어느 곳을 지난다는 소문을 은밀히 내는 겁니다. 사람들은 영약과 막대한 현금에 눈이 멀어 반신반의할 겁니다.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은자를 담은 궤짝 하나가 실제로 마차에서 굴러떨어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승냥이 떼처럼 달려들겠구나.”
임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맹주는 고기를 노리고 달려드는 승냥이 떼와 싸우느라 진이 빠질 겁니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이 소문은 맹주의 귀에도 흘러 들어가겠지요.”
“좋은 생각이긴 한데....”
“아버지께서는 은자와 영약을 넘겨주시면서 돈을 다 받았다는 부맹주의 확답을 반드시 받아오셔야 합니다. 저들이 절대 두말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물건을 넘기고 나서 은자 운반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은근히 걱정해주는 척하면 부맹주는 오만한 자라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칠 겁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그대로 그 자리를 떠나시면 됩니다.”
“흠....”
“맹주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부맹주에 대해 적절히 조치를 취하겠지요.”
“그러실 테지....”
임예린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임풍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맹주는 과연 믿을만한 사람입니까? 돈 앞에 장사 없다고 이리떼를 쫓으려다가 범을 부르는 것은 아닐까 걱정됩니다.”
“그리 걱정할 것 없다. 맹주는 전혀 모르는 어린 청년을 치유하기 위해 자신의 내공과 무림맹의 영약을 아낌없이 쓸 정도로 인자하고 의로운 사람이라더구나. 그러니 그 점은 너무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다.”
임풍과 임예린이 방안에서 계책을 짜고 있는데 갑자기 창가에 돌이 하나 와서 톡 부딪쳤다. 그 소리에 임풍이 놀라 창문을 열고 소리쳤다.
“누구냐?”
창밖은 어둠에 잠겨 고요하기만 했다. 그때 문득 임풍의 귓가에 사람 소리가 들렸다.
- 풍이, 날세. 정이네.
그 말에 임풍은 깜짝 놀랐다. 자신을 풍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어린 시절 막역한 친구들밖에 없는데, 정이라면 지난 십 년간 한 번도 연락이 없었던 뢰정이 아닌가!
임풍은 밖을 두리번거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있는가? 어서 들어오게.”
그 말이 끝나자마자 무엇인가가 창 안으로 휙 하고 들어온다 싶더니 어느새 중년 문사가 눈앞에 서 있었다. 예나 다름없이 여전히 단아한 모습이었으나 먼 길을 온 듯 옷에는 먼지가 좀 묻어 있었다.
임풍은 뢰정을 보자 다가가 반가운 마음에 덜컥 손을 붙잡았고 흔들었다.
“정이, 이 사람! 하도 연락이 없기에 아직 살아있는지 궁금했었다네.”
“미안하네. 괜히 내 존재가 자네에게 걸림돌이 될 것만 같아서 그동안 일부러 연락을 피했다네. 이런, 이 아리따운 소저는 누구인가?”
“예린아, 인사드리거라. 이 아비의 막역지우이다.”
임풍의 소개에 임예린은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내 딸 아이라네. 그나저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겐가?”
십 년 만에 만난 친구가 한밤중에 창문으로 들어오자 임풍은 뢰정이 염려스러웠다.
“면목 없네만 며칠만 자네 집에서 신세를 좀 지고 싶네. 다만 내가 자네 집에 머물고 있다는 것은 철저하게 비밀로 좀 해주게나.”
뢰정은 임풍이 어릴 때부터 알던 절친한 벗이었으나 자신의 일에 깊이 개입되면 오히려 해를 입을까 두려워 자세한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다. 임풍도 더 이상 연유를 캐묻지 않았다.
“알겠네. 자네가 오늘 여기 온 것은 나와 내 딸 아이만 아는 사실로 하고 아랫사람들은 입단속을 철저히 시키겠네. 자네가 있고 싶은 만큼 머물게나.”
“고맙네. 풍이!”
뢰정은 십 년 만에 만난 친구가 어릴 때와 전혀 다름없이 자신을 반겨주자 마음이 뭉클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뢰정의 존재를 아랫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기 위해서 뢰정의 수발은 임예린이 직접 담당했다.
임예린은 뢰정과 얘기를 하다 보니 사람됨이 담백하고 소탈했으며 아는 것이 많으면서도 겸손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임풍의 어릴 적 얘기를 듣는 재미가 쏠쏠하여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뢰정도 임예린이 예쁘기도 하지만 똑똑하고 눈치가 빠르며 생각이 곧아서 마음에 들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자신의 제자인 석추명과 잘 어울리는 짝이 되겠다 싶은 생각이 은연중에 들다가 돌연 마음이 무거워졌다. 석추명이 자신을 쫓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한편, 임풍은 임예린이 말한 대로 돈과 물건을 착착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천계심이 요구한 대로 은밀히 일을 진행할 수 있도록 믿을 수 있는 표국을 선정하고 몰래 사람을 심어 은자 궤짝을 떨어뜨리도록 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다.
천계심이 약속한 날짜가 어느덧 사흘 후로 다가왔다. 막대한 은자와 진귀한 보물을 준비하는 터라 임가장은 그 어느 때보다 경계가 삼엄했다.
“대방 어른, 문밖에 웬 사람이 와서 대방 어른을 뵙자고 합니다.”
장 총관이 임풍에게 허겁지겁 달려와서 누군가 찾아왔다고 고했다.
“어허, 당분간 외부인은 아무도 만나지도 않을 것이며, 아무도 들이지도 말라고 내 분명히 얘기하지 않았던가?”
임풍이 장 총관을 엄히 꾸짖었다.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도 워낙 막무가내입니다.”
장 총관이 쩔쩔매며 난처한 기색으로 말했다. 장 총관은 지금까지 이런 일은 눈치껏 잘 처리해왔는데 대사를 앞두고 오늘따라 쩔쩔매는 모습이 한심하게만 여겨졌다. 임풍은 한숨을 내쉬며 장 총관에게 말했다.
“호천대 몇 명을 데리고 가서 쫓아 버리게.”
임풍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밖에서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깟 애송이 몇 명을 누가 무서워한단 말이냐?”
낯선 말소리에 임풍이 즉시 문을 열고 나가자 마당 한가운데 커다란 방갓을 내려쓴 사람이 칼 한 자루를 가슴에 품고 서 있었다. 호천대원 수십 명이 그 사람을 부채꼴로 빙 둘러 에워싸며 경계를 했다.
임풍은 부맹주와의 대사를 앞두고 갑자기 낯선 사람이 들이닥치자 가슴이 철렁하며 수상한 생각이 들었다.
“누구시오?”
사내는 방갓을 눌러써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흐흐흐. 이 집이 중원 제일의 부잣집이라 하여 내 돈푼이나 좀 얻을까 해서 왔소이다.”
임풍은 기도 차지 않아 호천대주에게 불호령을 내렸다.
“언제부터 내 집에 저런 부랑아들이 마음대로 들락거렸단 말이냐! 당장 다리 몽둥이를 부러뜨려 쫓아내시게!”
“송구합니다. 대방 어른.”
풍천숙이 직접 대도를 빼 들고 앞으로 나서자 검을 빼 든 호천대원들은 뒤로 물러나며 오히려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마당이 소란스러워지자 뢰정과 임예린도 방문을 빼꼼히 열고 무슨 일인가 싶어 내다보았다.
“하하하, 중원 제일의 금고를 지키는 것이 호랑이가 고양이라 하더니 과연 그 말이 틀리지 않았군.”
방갓 쓴 사내의 말에 풍천숙의 얼굴이 삽시간에 구겨졌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번 원무개에게 당한 모욕 때문에 화병이 나서 미칠 지경인데 이런 떠돌이 낭인조차도 자신을 무시하나 싶어 참을 수가 없었다.
“죽고 싶어 환장한 놈이로구나. 오냐, 네놈 뜻대로 해주마.”
풍천숙이 땅을 박차며 사내를 향해 대도를 휘둘렀다. 참마객(斬馬客)이라는 별호답게 무시무시한 칼바람이 살을 에며 사내의 얼굴에 불어닥쳤다. 어른 키보다 큰 대도를 두 손으로 잡고 휘두르는 풍천숙의 팔근육이 터질 듯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사내는 가소롭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더니 품에 안고 있던 검을 빼서 한 손으로 아무렇게 휘둘렀다.
챙. 풍천숙의 대도와 사내의 검이 부딪치자 풍천숙의 검이 대번에 부러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사내는 매가 병아리를 채가듯 눈 깜짝할 사이에 한 손으로 풍천숙의 뒷덜미를 잡더니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그 모습에 호천대원들과 임풍은 놀라서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풍천숙은 무공이 비록 강호제일은 아니지만 지난 수십 년 동안 강호를 누비며 살아온 고수였다. 그런 사람을 마치 어른이 어린아이를 들듯이 순식간에 제압하여 들어 올리니 믿을 수가 없었다.
“흐흐흐, 이따위 재주를 믿고 지금까지 막대한 물건과 돈을 거래해왔다니, 임 대방도 참 대단한 배짱이구먼.”
풍천숙은 지난번 남무개에 이어 이번에도 이렇게 조롱을 받자 당장 죽지 못하는 것이 원통할 따름이었다.
임풍은 눈앞의 사내가 결코 이름 없는 낭인 따위가 아니라는 생각에 오히려 차분해졌다.
“원하는 게 무엇이오?”
“흐흐흐. 진작 그렇게 나올 일이지.”
사내가 풍천숙을 땅바닥으로 내던졌다. 풍천숙은 사내가 자신을 내던지자 공중에서 몸을 틀어 제대로 착지하여 낭패한 꼴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땅바닥에 발이 닿는 순간, 또다시 거센 기운이 파도처럼 연이어 몰려오는 통에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풍천숙은 얼굴이 화끈해졌다.
사내가 풍천숙을 던질 때 기운을 교묘히 조절하여 던진 기운이 사라질 때쯤 제2, 제3의 여파가 밀려들게 한 것이다. 당당한 호천대의 대주이자 천린상단의 물품 수송을 책임지는 호위대장이 부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엉덩방아를 찧은 것이다. 풍천숙에게 이보다 더 치욕스러운 일은 없었다.
풍천숙은 땅바닥에 나뒹굴자 죽기를 각오하고 벌떡 일어서서 대갈일성을 터뜨리며 다시 사내를 공격해 들어갔다.
“안돼!”
문틈으로 지켜보던 뢰정이 풍천숙의 무모한 행동에 짧게 탄식을 내질렀다. 아니나 다를까, 머리끝까지 추켜 올렸던 풍천숙의 대도가 사내의 방갓 위로 떨어지기도 전에 사내는 검을 수평으로 들고 빙글 몸을 돌리며 풍천숙을 스쳐 지나갔다.
“허억!”
풍천숙의 가슴이 쫙 갈라지더니 금세 시뻘건 핏물이 주르르 나왔다.
“풍 대주!”
그 모습에 임풍이 놀라서 고함을 쳤다. 풍천숙은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가슴을 쳐다보더니 손에 든 대도를 툭, 땅에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다리에 힘이 빠지는 듯 천천히 쓰러졌다.
사내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
“껄껄껄. 기껏 살려주었더니 제 명을 스스로 재촉했구나. 분수를 모르는 놈들은 역시 어쩔 수가 없어.”
풍천숙이 이토록 허망하게 쓰러지자 호천대원들은 겁에 질려 발이 땅에 붙은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노옴!”
풍천숙이 쓰러지자 어딘가에서 일봉이 튀어나왔다. 일봉은 임예린의 호위를 위해서 몸을 숨기고 있다가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풍천숙이 쓰러지자 이성을 잃고 달려 나온 것이었다.
“우하하하. 이젠 날파리들이 달려드는 것이냐?”
일봉은 달려들며 쌍뢰격호(雙雷擊湖)를 시전했다. 이 초식은 풍천숙이 전수한 강남도법 중의 절초이기는 하지만 일전에 요혜신니의 지도를 받았던 초식이었다.
과연 아미파 장문인의 지도를 받아서인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력이 검에서 뿜어져 나왔다.
방갓 사내는 호천대원 한 명 튀어나오자 무시하며 신경도 쓰지 않다가 일봉이 휘두르는 검이 예상 밖으로 날카롭자 흥미가 이는 듯했다.
“오호, 네놈은 누구냐? 호천대주라는 저놈보다 훨씬 낫구나.”
방갓 사내의 말에 일봉은 이를 깨물며 검을 휘둘렀다. 요혜신니의 지도를 받아 이전보다 검법이 많이 발전하기는 했으나 강남도법으로는 사내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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