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 광세일소_한추영 - 1259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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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6화. 재회 - 1
18년 전 겨울.
하늘이 눈이라도 올 것처럼 하루종일 잿빛이더니 저녁이 되자 기어이 눈을 뿌리기 시작했다. 눈이 오자 임풍은 조바심이 났다. 물자를 수송해서 가느라 가뜩이나 더딘데 눈이 오면 더 느려질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어허, 이래서야 언제 도착할꼬.”
답답한 나머지 임풍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임풍은 태어난 지 석 달도 채 되지 않은 딸 아린(雅隣)의 얼굴이 눈에 밟혀 마음이 급했다. 혼례를 치르고 십 년이 다 되어서야 얻은 귀한 자식이었다. 비록 아들이 아니라 서운하기도 했으나 임씨 성을 물려받은 자신의 첫 자식이었고, 아내가 몸이 약해 둘째를 가질 기약이 없던 터라 더욱 귀한 자식이었다.
게다가 백일도 지나지 않은 갓난아기가 제 아비를 어찌 알아보는지 임풍을 보면 빙긋빙긋 잘 웃었다. 임풍은 그런 딸아이의 앙증맞은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입가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날이 금세 어두워지더니 싸라기눈이 함박눈으로 바뀌었다. 떡가루처럼 날리는 부드러운 눈송이를 보고 있자니 딸아이의 올망졸망한 눈망울이 생각나 임풍은 더욱 좀이 쑤셨다.
“풍 대주, 안 되겠네. 나는 장 총관과 먼저 갈 테니 풍 대주께서 이 물자들을 잘 수송해서 오시게나.”
임풍은 호천대주인 풍천숙에게 말했다. 풍천숙은 임풍이 저렇게 조바심을 내는 이유를 잘 아는 터라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방 어른.”
이제 남경에 있는 천린상단까지는 하루 남짓 남은 거리였지만 말을 타고 전력 질주한다면 불과 반나절이면 도달할 수 있었다.
“부탁하네, 풍 대주. 장 총관, 그럼 우린 먼저 가세나.”
임풍은 마음이 급한 나머지 장 총관과 서둘러 말을 달렸다.
임풍이 집에 도착했을 때 임가장은 눈 속에 파묻혀 마치 흰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듯 평온해 보였다.
안채 뜰에 있는 나무에 새 한 마리가 앉아 있다가 임풍이 들어오는 기색에 놀라 푸드덕 날아올랐다. 그 바람에 나뭇가지가 휘청이며 잔뜩 쌓였던 눈이 우수수 떨어졌다.
“아린아, 아린아!”
임풍은 딸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부인의 방으로 달려갔다.
“아버지 오셨나 보다. 아버지께서 네가 보고 싶어서 숨넘어가시는구나.”
임풍의 아내 권 부인은 임풍의 소리에 품에 안긴 딸을 바라보며 활짝 미소를 지었다.
내당의 문이 열리더니 임풍이 들어왔다.
“부인, 내가 돌아왔소. 잘 지냈소? 우리 아린이는 어떻소? 아픈 데는 없소?”
임풍은 들어오자마자 딸아이를 받아 안았다.
“우리 아린이, 아비가 한번 안아보자. 까꿍.”
아비의 마음을 아는 듯 아린이가 임풍을 보고 빙긋 웃었다.
“숨넘어가시겠어요. 내일쯤 오신다더니 빨리 오셨네요.”
권 부인의 말에 임풍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아린이가 눈에 밟혀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이 웃는 것 좀 보시오. 아비를 어찌 이리 잘 알아볼까? 까꿍.”
임풍이 포대기에 싸인 아이를 안고 마냥 행복한 느낌에 빠져있을 때, 멀리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한 푼 줍쇼! 한 푼 줍쇼!”
“이게 무슨 소리요?”
임풍이 장 총관을 돌아보았다. 걸인이 구걸하는 듯한 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시끄러운 소리에 품에 안긴 아린이 울음을 터뜨렸다.
“오, 괜찮다. 아린아, 울지 마라.
”
임풍이 우는 아이를 부인에게 넘겨주며 장 총관을 돌아보았다.
“그게....”
장 총관이 말을 얼버무렸다. 임풍은 두 눈썹을 찌푸렸다.
“무슨 일인데 그러오?”
“지... 지금 수백 명의 걸인이 집을 둘러싸고 있다고 합니다.”
“수백 명의 걸인이? 그게 무슨 소리요?”
“개방의 당두걸(唐斗乞)이라는 자가 제자 수백 명을 이끌고 와서 동냥하라고 난리입니다.”
“어허, 동냥을 받는데 어찌 수백 명이나 이끌고 왔을꼬? 돈 몇 푼 주어 보내시오.”
“그것이... 저, 몇 푼이 아니옵고, 저들이 은자 백만 냥을 요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장 총관의 말에 임풍은 노해 옆에 아이가 있는 것도 잊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게 무슨 소리요? 그 말은 저들이 걸인이 아니라 강도라는 소리이지 않소!”
임풍이 소리를 지르자 아린이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당두걸이란 자가 도대체 누구요?”
“제가 알기로는 개방 장로 중의 한 명입니다.”
그 말에 임풍은 기가 막혔다. 개방 장로라는 작자가 감히 나를 핍박하러 왔다?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임풍이 장 총관과 함께 사태파악을 위해 나가자 과연 수백 명이 거지들이 집 앞에 모여 진을 치고 있었다.
거지들은 하나같이 손에 죽봉을 들고 ‘한 푼 줍쇼’라는 구령을 하면서 죽봉으로 땅을 탁, 탁, 쳐댔다. 죽봉은 개방 제자의 상징이었다. 구걸할 때 무기를 지니고 구걸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몸에 무기를 지니지 않기도 어려워 개방 제자들은 하나같이 대나무 지팡이를 들고 다녔다.
거지 떼들 앞에 코끝이 빨간 늙은 거지가 손에 호로병을 들고 술을 마시다가 임풍을 보자 인상을 썼다.
“젠장 할. 임풍이 집에 있다는 소리는 없었는데?”
그러자 옆에 있던 거지 하나가 늙은 거지의 귀에 소곤거렸다.
“어떻게 할까요?”
“어쩌긴 뭘 어째? 이참에 저놈마저 없애버리고 돈을 좀 더 올려 받아야지. 어차피 그놈은 이 상단을 삼키는 게 목적이니 저놈마저 없애주면 더 좋아하겠지.”
코끝이 빨간 거지는 바로 주불사(酒不死)라는 별호가 있는 개방 장로 당두걸이었다.
임풍은 당두걸이 수하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알지 못한 채 눈앞의 광경에 진노하여 앞으로 나섰다.
“개방은 명문정파이거늘 이게 무슨 짓이요? 개방의 유 방주께서는 어디 계시오?”
당두걸은 임풍의 말에 아랑곳하지도 않고 호로병을 들고 꿀꺽꿀꺽 술을 마시다가 술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듯 호로병 안을 쳐다보았다.
“이런! 술이 떨어졌구나. 쯧쯧.”
“이보시오! 내 말이 들리지 않소? 유 방주는 어디에 계시오? 내가 직접 따져 묻겠소이다.”
임풍의 말에 당두걸이 갑자기 컥 하며 가래침을 땅에 뱉었다.
“이런, 젠장 할. 유 방주는 왜 찾소? 방주님이야 방무(幇務)로 바쁘시오. 그나저나 동냥은 할 거요, 말 거요? ”
당두걸의 말에 임풍의 수염이 부르르 떨렸다.
“뭐, 뭣이라! 안 되겠구나. 호천대는 뭣들 하느냐? 당장 저놈들을 쓸어버리지 않고!”
임풍이 호통을 치자 장 총관이 옆에서 갑자기 임풍의 귀에 소곤거렸다.
“호천대는 대부분 이번 표행길에 빠지고 지금 장원에 남아있는 병력은 백 명이 채 되지 않습니다. 무림맹에서 지원 나온 병력이 있었는데 어제 맹에서 급하게 전갈을 받고 모두 맹으로 복귀했다고 합니다.”
그 말에 임풍이 눈을 부릅떴다.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마치 자신이 자리를 비우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당황해하는 임풍을 바라보던 당두걸이 껄껄 웃으며 호령을 내렸다.
“이제 상황파악이 좀 되셨나? 얘들아, 좀 놀아 드려라. 집주인께서 동냥을 못 주신단다.”
“예. 장로님!”
당두걸의 명령이 떨어지자 수백 명의 거지들이 집안으로 쳐들어오더니 대나무 지팡이로 집안을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호천대 백여 명이 거지들을 가로막았지만, 거지들의 수가 워낙 많은 데다가 무공이 뛰어난 고수들도 상당수여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특히 당두걸은 무공이 워낙 고강하여 호천대원들은 당두걸에게 붙잡히기만 하면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임풍은 호천대원들이 밀리자 집 안에 있는 아내와 아이가 걱정되어 장 총관을 내당으로 보내어 아내에게 급히 아이를 데리고 어디로 좀 피신해 있으라고 전하게 했다. 그러나 장 총관이 안쪽으로 달려가는 것을 본 거지 대여섯 명이 장 총관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임풍이 검을 뽑아 들고 달려가자 당두걸이 죽봉을 앞으로 쭉 뻗어 임풍을 막았다.
“어디를 가시오? 임 대방은 나와 볼 일이 있지 않소? 임 대방 같은 거상(巨商)이 은자 백만 냥에 목숨을 걸다니 참으로 어리석구려.”
그 말에 임풍이 몸을 돌려 당두걸을 노려보았다.
“네 이놈! 유 방주께서 이 책임을 물으실 텐데 어찌 감당하려느냐?”
“하하하, 임 대방께서 이 몸을 그리 걱정해주시니 고맙소. 하지만 나는 오늘부로 개방을 떠날 생각이요. 개방을 떠난 사람을 방주가 어떻게 한단 말이오? 하하하.”
“네 이놈!”
임풍이 검을 빼 들고 당두걸을 공격했다. 사실 임풍도 자기 한 몸 지킬 정도의 무공은 익히고 있었지만 당두걸은 개방의 장로. 임풍의 무공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빠악! 당두걸의 죽봉이 그대로 임풍의 어깨에 내리꽂히자 임풍은 뒤로 나가떨어졌다. 죽봉에 맞은 어깨뼈에 금이 간 듯 지독한 통증이 몰려왔다. 임풍의 악다문 입에서 신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껄껄껄. 천하제일상단의 주인께서 빌어먹는 거렁뱅이의 손에 이렇게 쩔쩔매시다니, 이렇게 황송할 때가. 크크크. 이렇게 된 이상, 백만 냥이 아니라 임 대방의 목숨값으로 오백만 냥은 받아야겠소. 오백만 냥만 내쇼. 그러면 내 조용히 물러가리라.”
“이런 날 강도 놈!”
임풍은 당두걸의 말에 눈에 핏대가 선 채 검을 들고 당두걸에게 돌진했다. 당두걸은 그런 임풍의 모습에 코웃음을 치며 이제 슬슬 끝내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당두걸의 죽봉이 임풍의 오른손을 때리자 임풍은 그만 검을 놓치고 말았다.
“그렇게 안 봤는데 임 대방께서 셈이 서투시구먼. 그런 머리로 그동안 장사를 어떻게 하셨소? 목숨값으로 오백만 냥이 그리 비싼 값은 아닐 텐데?”
당두걸의 죽봉이 홱 소리를 내며 그대로 임풍의 목 바로 아래 천돌혈로 꽂혀 들었다. 천돌혈은 사혈로 죽봉이 꽂히기만 하면 그대로 즉사할 수도 있는 혈자리였다.
당두걸이 내심 즐거워하며 임풍이 쓰러지기만을 생각하는 순간, 당두걸이 던진 죽봉이 두부처럼 끝이 잘려나가며 두 동강이 나서 땅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당두걸이 깜짝 놀라서 앞을 바라보자 언제 나타났는지 자신의 눈앞에 체구가 작은 비구니 스님이 손에 검 한 자루를 들고 삼엄한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개방의 장로라는 작자가 감히 강도질과 노략질이라니, 도저히 두고 볼 수 없구나. 내, 유 방주를 대신하여 오늘 네놈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마.”
자그마한 체구에서 엄청난 기세가 휘몰아쳤다. 당두걸은 내심 당황했지만 곧 허리를 곧추세우며 소리쳤다.
“누가 감히 내 일을 방해한단 말이냐!”
“흥! 오냐. 똑똑히 알아두거라. 네놈 일을 방해하는 사람은 바로 아미의 요혜라는 중이다.”
요혜신니는 우연히 수백 명의 거지가 은밀히 움직이는 모양을 보고 수상한 생각이 들어서 이들을 뒤따라 왔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들은 임가장으로 가서 행패를 부리는 것이 아닌가! 신중한 성격의 요혜신니는 개방의 장로가 하는 일이라 무슨 연유가 있겠지 싶어 선뜻 나서지 않다가 당두걸과 임풍의 이야기를 듣고 그제야 나선 것이었다.
“아, 아미파의 요혜신니...?”
당두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금 강호에서 혁혁한 명성을 쌓고 있는 아미파 신임 장문인의 명성을 누가 모를까. 요혜신니를 바라보는 당두걸의 인상이 똥 씹은 듯 구겨졌다.
“당장 제자들을 물리고 돌아가지 못할까!”
요혜신니의 음성이 귓전을 때렸다. 당두걸은 이 꼬장꼬장한 중년의 비구니가 꺼림칙했지만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흥! 냄새나는 비구니 주제에 무슨 소리냐?”
“뭣이라? 팔 하나는 잃어야 정신을 차릴 모양이로구나.”
당두걸은 요혜신니가 아무리 무공이 강해도 여자인 만큼 그간의 강호 풍문이 과장되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게다가 자신의 무공에 대한 은근한 자신감도 있었다.
화가 난 요혜신니가 검을 들고 휘리릭 몸을 날렸다. 당두걸은 몰래 숨기고 있던 검을 빼 들었다. 임가장을 공격하면서 만일을 대비하여 병기까지 몸에 숨기고 왔던 것이다.
챙챙챙챙. 요혜신니와 당두걸의 검이 서로 부딪치며 수 초를 이어갔다. 한 명은 아미파의 장문인이요, 다른 한 명은 개방의 장로이니만큼 수십 초를 겨루기 전까지는 승부가 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당두걸의 착각이었다. 요혜신니의 검이 내려치는 중압감과 무게감은 절대 자그마한 체구의 비구니가 낼 수 있는 위력이 아니었다. 당두걸은 요혜신니의 검을 몇 번 받아내자 팔에 힘이 빠지며 어깨가 마비되어왔다. 어느새 당두걸은 사색이 되어, 도망갈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다.
그러나 당두걸이 도망가도록 내버려 둘 만큼 요혜신니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당두걸의 힘이 빠진 것을 눈치챈 요혜신니가 번개같이 검을 사선으로 베어왔다.
화르르르. 검이 지나간 자리에서 불길이 이는 듯했다. 당두걸은 황급히 검을 들어 막으려 했으나 힘이 빠진 팔은 마음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서걱! 요혜신니의 검이 당두걸의 오른팔 팔꿈치를 가르며 지나갔다. 당두걸의 팔이 땅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아악!”
당두걸이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자 요혜신니는 검을 들어 당두걸의 목을 겨누었다.
“이번에는 네놈 목을 쳐 주마. 어서 제자들을 물리지 못할까!”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당두걸의 두 눈에 요혜신니의 차가운 눈빛이 들어왔다. 꾹 다문 신니의 입술은 목을 친다는 말이 허튼소리가 아님을 소리 없이 말해주고 있었다.
“물러나라! 어서 물러나!”
당두걸이 왼손으로 절단된 오른손 팔꿈치를 움켜쥐고 소리쳤다. 손가락 틈새로 선혈이 흘러내렸다. 요혜신니를 노려보는 당두걸의 두 눈에는 핏발이 가득 서 있었다. 오늘 일을 절대 잊지 않겠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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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 아비의 목숨을 살려주신 분이 바로 요혜신니이시다.”
지난 일을 잠시 회상하던 임풍이 감개가 무량한 듯 임예린에게 말했다. 그러자 요혜신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그날 내가 좀 더 빨리 왔었더라면 그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그날 상황이 위험해지자 권 부인은 임풍을 두고 혼자만 살고 싶지 않아서 유모에게 딸을 데리고 급히 피하게 했다. 그런데 그 난리 통에 그만 두 사람이 모두 실종되어 버린 것이었다. 난리가 끝나면 돌아올 것으로 생각했던 유모는 무슨 연유에서인지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임풍의 눈빛이 잠시 쓸쓸해 보였다.
“허허허. 그래서인지 하늘이 제게 다른 딸을 보내주었습니다.”
임풍의 말에 요혜신니가 자상한 표정으로 임예린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인지 딸아이가 부인을 많이 닮았소이다.”
그때 장 총관이 들어와서 무림맹에서 사람들이 왔다고 아뢰었다.
“대방 어른, 무림맹에서 신임 용봉단주와 부단주라는 사람이 왔습니다. 오늘 오기로 기별이 왔던 사람들입니다.”
“그래? 이리로 모시게.”
요혜신니는 임풍이 선약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자리를 피하려고 했으나 임풍은 별일 아니라는 듯 요혜신니에게 계속 있으라고 강권했다.
“저희가 다루는 물품이 워낙 많다 보니 무림맹의 도움을 번번이 받습니다. 이번에도 아마 물품 호위건 때문일 테지요. 늘상 있는 사무적인 일이니 사태께서는 괘념치 마십시오.”
“그럼 저도 궁둥이를 좀 더 붙이고 있어 볼까요? 이번에 새로 임명된 용봉단주가 역대 최연소인데다가 맹주의 직계제자라고 하오. 빈니도 그동안 어떠한 사람인지 궁금했는데 마침 이번 참에 얼굴이나 한번 보고 싶구려.”
잠시 후, 장 총관의 안내를 받아 기하진과 천옥랑이 들어왔다. 기하진과 천옥랑은 방 안에 임풍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있자 잠시 당황한 듯했으나 곧 침착하게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올렸다.
“무림맹의 신임 용봉단주 기하진이라고 합니다.”
“귀하께서 무림신동으로 명성이 자자한 신임 용봉단주시구려. 맹주님의 직계제자인 데다가 지난번에 목숨을 걸고 맹주님을 지켰다는 얘기는 장사꾼인 나도 들었소이다. 정말 대단하시오.”
“과찬의 말씀입니다.”
“인사드리시오. 여기 아미파의 장문이신 요혜신니이시오.”
요혜신니는 꼬장꼬장한 눈빛으로 기하진을 바라보았다.
기하진은 아미파 장문인이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의외였지만 정중히 포권을 취하며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다시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부드러운 기운이 소리 없이 가슴을 압박해와서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요혜신니가 자신의 무공을 시험했던 것이다.
그러나 계속 허리를 굽히고 있는 모양새가 볼썽사납기도 하고 아미파 장문인에게 쉽게 굴복하고 싶지도 않아 든 기하진은 중양신공을 발동시켰다. 비록 가슴의 압박이 거세기는 했으나 기하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천천히 몸을 일으켜 꼿꼿이 세웠다. 그러나 기실 요혜신니의 내공에 대항하느라 숨을 참고 신공을 발휘하는 바람에 머릿속에서는 현기증이 나고 있었다.
옆에 있는 천옥랑은 요혜신니의 내공에 눌려 아직까지 허리를 펴지 못하고 있었다. 동시에 두 사람에게 내공을 뿜어내어 무공을 시험하다니 놀랍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처음 대면하는 자리에서 무림맹 용봉단주와 부단주의 체면을 이토록 구기다니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사태께서 저희의 무공을 시험하고 싶으시다면 밖에서 제대로 하시지요.”
기하진이 요혜신니를 노려보며 가시 돋친 말을 내뱉었다.
요혜신니는 기하진이 자신의 내공에 저항하며 말까지 하자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기하진과 천옥랑을 내리누르던 압박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천옥랑은 그제야 몸을 일으키며 후, 하고 답답했던 숨을 내리 쉬었다. 얼굴은 이미 시뻘게져 사색이 되어 있었다. 천옥랑도 나름 내공을 모아 저항하느라 숨을 참고 있었던 것이다.
“젊은 단주의 성격이 아주 칼끝 같구먼. 맹주께서 사람을 제대로 뽑았나 궁금해서 그런 것이니 두 분은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요즘 맹주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도통 얘기를 안하시니.... 쯧쯧쯧.”
요혜신니의 말에 잠시 정적이 흐르자 임풍은 어색한 분위기를 수습하려고 급히 다음 사람을 소개했다.
“허허허. 무림인들이라 그런지 역시 소개도 과격하십니다. 자, 이번에는 제 딸을 소개해 드리겠소. 예린아, 인사드리거라.”
임풍의 말에 기하진은 벼락이라도 맞은 표정으로 임예린을 바라보았다.
“임예린이라고 합니다.”
기하진의 눈빛이 임예린의 얼굴에 꽂혔다. 어쩐지, 아까부터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여인의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느낌이라더니! 그러나 자신은 무림맹 외부 사람들과 교분을 쌓은 적이 없어서 잘못 보았겠거니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임예린이라니...! 자신이 자나 깨나 생각하던 그 임예린이 맞는 걸까? 섬서성 화양현에 홀로 두고 온 그 임예린이 맞는 걸까? 자신과 평생 살고 싶다고 얘기하던 그 임예린이 맞는 걸까?
기하진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그런 기하진의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임예린이 담담하면서도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잘 지내셨어요? 하진 오라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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