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 광세일소_한추영 - 1259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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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5화. 설랑(雪狼) (3)
설랑이 다시 비도를 날리며 일봉이 있는 곳으로 도약해왔다. 일봉은 마지막 남은 강철비침을 양손에 들고 있는 힘껏 내던졌다.
휘리리릭. 강철비침 십여 개가 다시 설랑에게 날아갔지만 설랑은 코웃음을 치며 도를 휘둘렀다. 그러자 강철비침이 대번에 반쪽이 되어 땅바닥에 우수수 떨어졌다.
일봉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적을 만만히 보지 말았어야 했다. 자신의 판단착오로 임예린이 다시 위험에 처한다고 생각하니 후회막심이었다. 이대로 설랑이 임예린을 쫓아가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다. 임예린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일봉이 쌍검을 휘두르며 설랑에게 다시 맞섰다.
도와 검이 서로 부딪칠 때마다 일봉의 몸이 휘청거렸다. 설랑은 체구가 우람하지는 않았지만, 돌덩이 같은 팔근육에서 폭사 되어 나오는 힘이 무지막지했다. 일봉은 사력을 다했으나 설랑의 엄청난 힘에 밀려 자꾸만 뒷걸음질을 칠 수밖에 없었다.
또 한 걸음 뒤로 물러난 일봉의 눈에 설랑이 집어 던졌던 비도 한 자루가 눈에 띄었다. 일봉은 다시 물러나는 척하면서 발끝으로 그 비도를 차올려 설랑을 향해 내쏘는 한편, 양손의 검을 평행으로 들고 비천응왕(飛天鷹王) 초식으로 설랑을 공격해 들어갔다.
이 초식은 매가 먹이를 노리듯 단번에 내려꽂히는 초식으로 공수를 나누어 분배하던 공력을 오롯이 공격에만 집중하여 그 위력이 배가되는 장점이 있었다. 반면, 방어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에 자칫 동귀어진(同歸於盡)하여 적과 함께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초식이었다.
쨍강! 다시 한번 검과 도가 부딪쳤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봉의 쌍검이 대번에 부러져 나갔다. 설랑의 무지막지한 공력을 쌍검이 버텨내지 못한 것이다. 쌍검이 부러지자 그 기세를 몰아 설랑이 다시 쌍도를 내리쳤다. 쐐액. 쌍도가 공기의 결을 가르는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이 울렸다.
설랑의 입가에는 먹잇감을 앞에 둔 늑대의 눈빛이 떠올라 있었다. 일봉은 부러진 검을 들고 혼신의 힘을 다해 쌍도를 막아내려 했으나 쌍도는 부러진 검을 넘어 일봉의 몸에 붉은 선을 그어 내렸다.
설랑의 칼날이 순식간에 일봉의 등을 가르며 지나갔다. 대번에 살갗이 갈라지며 시뻘건 핏방울이 떨어졌다. 그나마 일봉이 민첩하게 몸을 놀려 뼈가 상하지는 않았다. 설랑은 만면에 오만한 미소를 띠었다. 감히 나를 방해하고 내 신부가 될 여자를 풀어준 네놈을 철저히 응징해주마, 하는 눈빛이었다.
궁지에 몰린 일봉은 다시 땅바닥으로 급히 몸을 굴렸다. 등에 난 상처에 흙먼지가 닿으면서 등이 쓰라려 왔다. 일봉의 등에서 흘러나온 선혈이 땅바닥을 금세 붉게 물들였다.
설랑의 칼끝이 다시 간발의 차이로 일봉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금세 얼굴에 혈선이 생기며 핏물이 배어 나왔다.
일봉은 숨을 헐떡이며 설랑을 노려보았다. 등에 입은 상처가 내장을 할퀴는 듯 온몸이 욱신거렸다. 칼에 벤 옷은 걸레가 되어 너덜거렸고 핏물과 흙먼지가 엉망으로 묻어있었다.
설랑은 아쉽다는 듯이 천천히 일봉을 향해 성큼 한 걸음 다가왔다.
“일봉, 여기야!”
그때 임예린이 말을 몰고 나타났다. 도망갔으리라 여겼던 임예린이 갑자기 나타나자 설랑이 반사적으로 임예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바늘 하나 꽂을 틈 없이 빽빽이 피어오르던 살기에 틈이 생겼다. 일봉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양손에 들고 있던 부러진 검을 설랑에게 집어던졌다.
쐐액! 부러진 검이 무서운 기세로 날아갔다. 설랑은 검이 날아오는 소리에 멈칫하여 고개를 돌려 피하려 했으나 일봉이 간발의 시간차를 두고 던진 또 하나는 미처 피할 수 없었다. 뒤에 던진 검이 그만 설랑의 왼쪽 눈에 꽂히고 말았다.
푹! 살이 찢어지며 눈알이 그대로 터져나갔다.
“크아악!”
설랑은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포효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워했다. 검이 박힌 눈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려 흰 피부를 적시기 시작했다. 설랑이 이를 빠드득 갈며 눈에 박힌 검을 손으로 뽑아냈을 때는 일봉과 임예린은 이미 말을 타고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너, 꼭 죽인다! 너, 꼭 죽는다!”
설랑이 고통과 분노로 길길이 날뛰며 무시무시한 소리를 질러댔다. 일봉은 임예린의 뒤에 앉아 말의 배에 계속 박차를 가했다. 통증으로 정신이 가물가물했지만,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야 했다. 다행히 일봉의 말은 임풍이 임예린의 안위를 부탁하며 특별히 선사한 대완국 말로 빠르기로는 여포의 적토마 못지않은 말이었다.
적들이 소리치며 뒤에서 쫓아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말 고삐를 쥔 일봉의 손에서 힘이 스르르 빠졌다. 말에서 굴러떨어지려는 일봉의 손을 임예린이 다급하게 붙잡았다.
임예린은 한 손으로 자신의 치마를 찢어 일봉의 몸을 자신의 허리에 묶고는 말고삐를 넘겨받았다. 자신의 매끈한 다리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임예린은 더욱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일봉은 그대로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일봉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자신은 땅바닥에 누워있었다. 가슴과 등에는 임예린의 치마가 붕대처럼 칭칭 감겨 있었고 등에서 흘러나온 피가 벌겋게 배어있었다.
“일봉, 괜찮아?”
일봉은 자신의 눈 바로 앞에 걱정에 가득 찬 임예린의 얼굴이 보였다. 한참을 운 듯 퉁퉁 부은 눈에는 물기가 가득했다. 임예린이 손을 뻗어 일봉의 얼굴에 난 상처를 어루만졌다. 피는 어느새 말라붙어 딱정이가 져 있었다.
“미안해. 나 때문에. 내가 그때 도관 밖으로 나가지만 않았어도.....”
임예린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글썽글썽 맺히더니 또르르 흘렀다. 일봉은 손을 들어 임예린의 눈물을 가만히 닦아주었다.
“괜찮아요. 아가씨가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윽!”
갑자기 통증이 몰아쳐 왔다. 통증은 발톱을 세우며 온몸을 쥐어뜯었다. 그러다가 잠시 멈추고는 또다시 간헐적으로 찾아왔다. 임예린은 눈물을 흘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때 어디선가 말발굽 소리가 났다. 임예린과 일봉은 적비랑 무리들이 뒤쫓아 온 줄 알고 얼른 바위틈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는 임예린이 살짝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뜻밖에도 말을 몰고 있는 사람은 호천대 소속의 무사가 아닌가! 임예린은 그제야 일어나 다급하게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여기예요!”
임풍은 임예린을 데려오라고 보낸 일봉이 돌아오지 않자 걱정이 된 나머지 호천대원 십여 명을 천지도관으로 파견했다. 호천대원들은 도관 근처에서 홍월의 무덤과 일봉이 탄 말의 발굽으로 추정되는 희미해진 말발굽 자국을 발견했다.
임풍은 걱정이 되어 즉시 호천대의 인원 절반가량을 차출하여 임예린을 찾게 했다. 호천대원 절반을 차출하려고 하자 비적 떼가 또다시 습격해 올 것을 우려한 두란철목아가 강하게 반대했지만 풍천숙의 노성 한 마디에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항상 두란철목아의 말을 들어주던 임풍조차도 돌아가면 황상께 이번 일을 고하겠다고 엄포를 놓자 두란철목아는 더 이상 반대할 수 없었다.
그렇게 차출된 호천대원 중 하나를 임예린이 발견했던 것이다. 임예린과 임풍은 그제야 살았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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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살말건에 도착한 임풍 일행은 살말건 국왕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천산산맥을 넘다가 적비랑에게 물건을 뺏길 뻔했지만 호천대의 맹활약으로 다시 찾은 이야기는 임풍 일행이 귀국하기 전에 이미 강호에 널리 퍼져나갔다.
특히 일봉이 단신으로 적비랑의 소굴에 들어가서 적비랑의 두목인 설랑과 싸우고 임예린을 구해온 이야기는 일봉을 단박에 영웅으로 만들었다.
임예린은 아버지 임풍이 호천대 절반을 보내 자신을 찾으려고 했을 때 두란철목아가 반대했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지만 두란철목아 앞에서 서운한 기색을 내지 않았다. 그 바람에 자칫 위태로울 뻔했던 양국 간의 우호 관계도 큰 지장을 받지 않았고, 임풍은 살말건과 교역의 조건을 논의하고 임예린과 함께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다.
임풍은 임예린이 개인적인 감정보다 대국을 중요시하자 장하고 흐뭇했다. 비록 어린 딸이지만 명석한 두뇌와 냉철한 판단력으로 볼 때, 앞으로 자신이 이룬 상단을 이끌어 가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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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조금만 쉬었다가 하면 안 될까?”
임예린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일봉에게 투정부리듯 얘기했다.
“안됩니다. 내려치기 삼백 번을 다 채우기 전에는 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설렁설렁했다가는 처음부터 다시 한다고 말씀드렸죠?”
엄격한 일봉의 말에 임예린은 입술을 한번 삐죽 내밀더니 끽소리 않고 다시 목검을 쥐었다.
임예린은 살말건에서 돌아온 이후로 무공의 필요성을 느끼고 일봉에게서 무공을 배우고 있었다. 원래 임풍은 구대문파 중에서 명사(名師)를 모셔다가 가르치려고 했으나 임예린은 일봉보다 더 나은 스승은 찾기 어려울 것이라며 일봉에게 배우겠다고 말했다.
과연 일봉은 엄한 스승이었다. 임예린이 비록 자신의 주인이었지만 무공을 가르칠 때는 조금도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천산산맥에서 임예린이 납치당해 자칫 큰일 날 뻔했던 일은 뼈아픈 기억이었다. 그래서 일봉은 더더욱 임예린을 바짝 다그쳤다.
임예린도 일봉의 그런 마음을 알고 꾀를 부리지 않고 열심히 따라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연약한 여인의 몸으로 거친 수련을 모두 소화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겨우 내려치기 삼백 번을 다 채운 임예린이 숨을 헉헉대고 있는데 시비가 다가왔다.
“아가씨, 주인어른께서 찾으십니다.”
그 말에 임예린이 일봉을 쳐다보며 말했다.
“사부님, 이따 다시 와서 해도 될까요?”
일봉은 임예린의 애교 섞인 말에 저도 모르게 입가에 피식 웃음이 묻어났다.
“오! 웃었다! 드디어 웃었어. 맨날 인상만 쓰고 있더니 사부님이라는 말에 웃었어!”
임예린의 말에 일봉은 다시 표정을 싹 바꿨다.
“제가 언제 웃었습니까?”
일봉이 짐짓 엄한 표정을 짓자 임예린이 활짝 미소를 지으며 일봉의 팔에 매달렸다.
“사부님, 웃으시니 멋있던데 한 번 더 웃으세요. 호호호.”
느닷없는 임예린의 애교 공격에 일봉은 다시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가씨는 당해낼 수가 없군요. 다녀오세요. 오늘 수련은 이걸로 끝내겠습니다.”
임예린은 두 손을 모아 일봉에게 정중히 포권을 취하며 ‘감사합니다. 사부님’ 하더니 다시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내당 안으로 들어갔다.
일봉은 임예린의 미소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난번 살말건 여정에서 죽을 뻔한 이후로 두 사람은 눈에 띄게 가까워졌다. 특히 자신을 바라보며 눈물 흘리던 임예린의 모습과 ‘평생 지켜달라’는 말은 일봉의 머릿속에 강렬히 각인되어 있었다.
일봉은 임예린이 내당 안으로 사라지기 무섭게 벌써 다시 보고 싶어지자 정신을 차리려는 듯 두 손으로 뺨을 가볍게 몇 번 때렸다. 그렇지만 임예린이 보고 싶은 마음은 약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강해지기만 했다. 일봉은 그런 자신의 감정이 익숙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그럴 때는 역시 수련이었다. 검을 뽑아 들고 정신을 집중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설랑이 서 있다고 생각하니 들뜬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며 다시 이글이글 투지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그놈과 맞붙었을 때는 자신이 밀렸다. 반드시 그놈을 꺾을 만큼 수련하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만나면 이번에는 반드시 숨통을 끊어놓고 싶었다.
“타앗!”
일봉의 기합소리가 수련장에 울려 퍼져나갔다. 일봉이 공중으로 도약하더니 종횡무진으로 검을 휘둘렀다. 검의 빠르기가 벼락같았다. 아니, 실제로 벼락이 내리치는 듯 검에서 용울음이 나고 검광이 번쩍거렸다.
공중으로 비상했던 일봉은 어느새 땅바닥에 착지해서 동작을 멈추었다.
휴! 입으로 깊은숨을 뱉어냈다.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알송알 맺혀있었다.
뭔가 미진한 느낌이었다. 예전에는 알 수 없었던 느낌이었다.
‘이렇게 해서는 그놈을 꺾을 수 없어.’
일봉은 어느새 머릿속에 설랑이 움직이던 모습을 다시 떠올렸다. 현란한 발검과 눈부신 몸놀림, 그리고 엄청난 괴력.... 좌절감이 몰려왔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이 단계를 뛰어넘어 한 단계 더 올라갈 수 있을까?
일봉의 짙은 눈썹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깊은 고뇌에 빠져있던 일봉은 누군가 다가오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검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가?”
어디선가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일봉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의 앞에 처음 보는 중년의 비구니 스님이 손에 선장을 들고 서 있었다. 인상은 자애롭고 몸집이 자그마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비구니의 꼬장꼬장한 목소리가 묘하게 일봉의 마음을 건드렸다.
“마음에 한줄기 수심이 가득하여 검이 제 길을 찾지 못하니 참으로 안타깝구먼.”
비구니의 말에 일봉은 뒤통수를 맞은 듯 눈이 번쩍 뜨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비구니는 선장을 잠시 벽에 세워두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와 일봉의 검을 넘겨받았다.
“검을 휘두를 때 잡념이 있으면 안 되네. 검을 일단 손에 잡으면 나와 상대방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잊어버리게. 천지만물이 모두 사라지고 존재하는 것은 나와 상대방뿐이네. 자네가 방금 이렇게 한 것 같은데 맞나?”
비구니가 방금 일봉이 전개한 초식을 흉내 냈다.
“맞습니다.”
일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봉이 풍천숙에게 배운 강남도법의 절초, 쌍뢰격호(雙雷擊湖)라는 초식이었다. 벼락이 호수면을 때리듯이 맹렬하고도 위력적인 수법이었다. 다만 일봉은 도법을 검법으로 바꾸어 수련했는데 그 때문인지 늘 어딘가 아쉬운 구석이 남았다.
“자, 그럼 내가 다시 한번 펼쳐보겠네.”
비구니의 손에 들린 검이 새파란 선을 그으며 스르르 움직였다.
비구니의 검을 바라보던 일봉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같은 검이요, 같은 초식이었건만 그 위력이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작은 몸집에서 폭풍우 같은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휘리릭, 휘리릭, 장삼이 휘날리는 소리가 나더니 돌연 검을 뻗어내자 검끝에서 벼락이 내려치는 듯했다.
일봉은 이게 자신이 알던 그 검법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알던 무공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무공이었다.
일봉은 비구니의 동작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눈동자 한번 깜박이지 않고 지켜보았다. 비구니 스님의 시연이 끝났다.
“알겠는가?”
일봉은 말이 없었다. 가슴속에 벅찬 희열과 함께 이런 분을 스승으로 모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허허허, 내가 본의 아니게 자네의 무공을 엿본 꼴이 되었으니 나도 하나 가르쳐 줌세. 그래야 공평하지 않겠는가?”
비구니는 다시 검을 잡더니 초식 하나를 시연해 보였다. 검을 잡은 손이 무거워지며 검에서 엄청난 위력이 생겨났다. 일봉은 자그마한 몸집의 비구니가 지금 휘두르는 검은 호천대주인 풍천숙이라도 맞받아칠 수 없으리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복마검(伏魔劍) 중의 일초일세. 자네도 알다시피 원래 사문의 무공은 외인에게 공개하지 않으나 자네와는 인연이 있는 것 같구먼. 모든 게 그저 인연 따라 흐를 뿐이지.”
비구니는 몇 가지 주의할 점과 간략한 구결을 알려주면서 몇 번 더 몸소 보여주었다. 그리고는 이제 됐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바깥어른을 뵈러 가야겠구먼.”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비구니의 말에 일봉은 얼른 앞장서며 길을 안내했다.
“고맙네.”
“바깥어른께는 누구라고 전해드릴까요?”
일봉은 불현듯 나타나서 자신에게 무공을 지도해준 이 아담한 비구니가 누군지 무척 궁금했다.
“아미파의 요혜라고 하면 잘 아실 게야.”
그 말에 일봉은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어 걸음을 멈추고 비구니를 다시 쳐다보았다. 요혜라면 아미파의 장문인 요혜신니(嶢慧神尼)가 아닌가! 당금 무림에서 여자 고수들 중에서는 따라올 자가 없으며, 소림과 무당의 장문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평생 한 번 보기도 힘든 사람에게서 초식을 지도받았으니 일봉은 그야말로 기연을 얻은 셈이었다.
“장원의 구조는 다행히 예전과 별반 다르지 않구먼.”
마치 예전에 와본 적이 있는 듯한 말투였다.
일봉이 요혜신니가 왔다고 전해 올리자 임풍이 버선발로 달려 나왔다.
“선사께서 정말 오랜만에 오셨습니다.”
임풍은 만면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 요혜신니의 손을 덥석 잡았다.
“임 대방께서는 잘 지내셨소? 늙은이가 되다 보니 자연 발길이 뜸해졌구려.”
요혜신니도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 검을 휘두를 때의 서릿발 같은 기상을 생각하니 저 작은 몸 어디에서 그런 기세가 나왔는지 의아심이 들 정도였다.
“늙으셨다니요, 이렇게 정정하신 것을요. 사실 제가 먼저 찾아봬야 했는데 은인께 면목이 없습니다.”
“허허허, 임 대방이야 워낙 바쁜 분이시니 그러기 어려웠겠지. 벌써 한 18년 되었지?”
“예, 벌써 18년이 지났습니다.”
임풍은 옆에 서 있던 임예린에게 요혜신니를 소개하며 말했다.
“인사 올리거라. 18년 전, 이 아비의 목숨을 구해주신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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