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 광세일소_한추영 - 1259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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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4화. 설랑 (2)
“아닙니다, 왕자님. 저놈은 아마 서열 세 번째나 네 번째쯤 되는 녀석일 겁니다. 적비랑의 두목은 설랑(雪狼)이라는 놈인데 저놈들과는 무공이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어찌나 신출귀몰한 지 저희 군사들 절반 이상이 그놈 하나에게 모두 목숨을 잃었을 정도입니다.”
“그래? 어떤 놈이냐?”
살말건 병사는 둘러보다가 찾지 못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행히 지금 여기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놈은 기이하게도 피부와 머리색이 모두 흰색이라 어디에서나 금방 눈에 띕니다.”
말을 하는 순간, 철추가 풍천숙을 노리고 다시 날아왔다. 무기의 특성상 되받아치기가 어려워 철추를 피하자 철추는 대번에 옆으로 꺾이며 말의 머리를 정통으로 내리쳤다. 무거운 철추의 방향을 마음먹은 대로 조작하는 걸로 봐서 상대방의 무공이 보통이 아니었다.
말이 고통을 이기지 못해 울부짖으며 앞발을 높이 치켜들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장수를 치려면 장수가 탄 말을 먼저 치라는 소리쯤은 들어본 놈 같았다.
풍천숙은 말에서 뛰어내리기 무섭게 경공을 발휘하여 도약하며 쇠철추를 휘두르는 놈에게 다가갔다. 풍천숙의 도신(刀身)이 번뜩이며 빛을 내뿜는 순간, 철추가 웅웅 소리를 내며 날아와 그대로 풍천숙의 칼을 감아버렸다. 그리고는 곧장 힘을 주어 풍천숙의 칼을 뺏으려고 했다.
“어림없다, 이놈!”
힘에 있어서는 풍천숙도 지금까지 누구에게 양보해본 적이 없었다. 풍천숙이 손에 든 칼에 공력을 불어넣으며 두 사람 간에 팽팽한 기 싸움이 전개되는 순간, 돌연 옆에 있는 비적 하나가 커다란 도끼를 풍천숙에게 휘둘렀다. 도끼가 어찌나 크고 무거워 보이는지 웬만한 사람은 두 손으로 들기도 쉬워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풍천숙의 병기는 이미 철추와 엉켜 있어서 도끼를 다시 막아내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앗!”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임풍과 두란철목아가 놀라서 탄성을 내질렀다. 풍천숙의 허리가 도끼에 금방이라도 두 동강이 날 것만 같았다.
챙! 금속성이 울리더니 무서운 기세로 떨어져 내리던 도끼가 허공에 멈춰섰다. 어느새 일봉이 날아와 쌍검을 교차하여 도끼를 막아낸 것이다.
검은 가늘고 가벼우며, 도끼는 두껍고 무거운데 사정없이 내리치는 도끼를 일봉이 검 두 자루로 막아내는 것을 보고 두란철목아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공력이 상대방을 압도하지 않고서는 가벼운 병기로 무거운 병기를 막아낼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속으로 저 녀석과 직접 얽히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끼 주인도 자신이 휘두른 도끼 공격이 장검 두 자루에 가로막히자 놀라서 눈을 부릅뜨며 검 주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검을 휘두른 사람이 약관이 갓 지난 청년에 불과하자 코웃음을 치며 도끼를 잡은 손에 다시 힘을 주어 휘둘렀다.
도끼의 날이 옆으로 뉘여 바람을 가르며 날아왔다. 도끼를 잡은 팔의 울퉁불퉁한 근육이 터져나갈 듯 꿈틀댔다. 도끼 자체가 백 근이 넘는 데다가 도끼 주인은 원래 타고난 신력의 소유자라 도끼가 쪼개어오는 힘이 수백 근이 넘었다. 그 정도의 힘이라면 웬만한 병기는 단박에 박살을 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도끼가 일봉의 가슴팍을 가르려는 순간, 놀랍게도 일봉은 몸을 훌쩍 날리더니 도끼의 날을 밟고는 공중제비를 돌아 도끼 주인의 뒤로 넘어가는 게 아닌가!
도끼가 날아오는 속도와 몸을 날리는 속도가 조금이라도 어긋났다가는 도끼날에 발목이 날아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실로 대범하면서도 정확하기 이를 데 없는 수법이었다. 일봉은 도끼 주인의 뒤로 돌아서자마자 양손의 검을 서로 교차했다.
서걱. 예리한 검날이 무언가를 자르는 둔탁한 소리가 들리더니 도끼 주인이 쿵, 소리를 내며 땅에 쓰러졌다. 도끼 주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치켜뜬 채였다.
호천대의 무공이 상상외로 고강하자 위기감을 느낀 비적들이 말머리를 돌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 발자국 가지도 못해 숨어서 기다리고 있던 다른 호천대원의 공격에 또다시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적비랑들은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고 나머지는 호천대의 공격에 뿔뿔이 흩어졌다.
그날, 호천대의 활약으로 빼앗긴 물건들은 거의 모두 다시 탈환할 수 있었다. 두란철목아는 물건을 찾자, 이건 모두 신의 은총이라며 그 자리에 비단깔개를 깔고 그 위에서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아 알라신께 기도를 드렸다.
그 모습을 보고 호천대원들이 툴툴거렸다.
“물건은 우리가 찾아주었는데 감사는 왜 엉뚱한 놈한테 하는 거야?”
“저런 자가 왕자라니 앞으로 나라 꼴이 어찌 될지 안 봐도 눈에 선하군.”
물건을 찾자 두란철목아는 혹시 다른 비적들이 또 쫓아올까 봐 즉시 살말건으로 출발하자고 성화를 부렸다.
임풍은 딸을 기다리고 싶었으나 어쩔 수 없이 일봉에게 임예린을 데리고 오라고 지시했다. 일봉은 싸움이 끝나고 쉬지도 못했지만 혹시라도 자신이 없는 동안 임예린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었을까 봐 걱정되어 밤을 도와 즉시 천지 호숫가 옆의 도관으로 말을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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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숫가 옆에 있는 천지도관(天池道館)에 도착한 일봉은 문득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도관이 너무 조용했던 것이다. 임예린과 홍월, 두 사람 모두 한시도 입을 가만히 두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임예린은 재잘재잘 얘기하는 걸 좋아했고, 홍월은 그런 임예린을 따라 다니며 귀가 따가울 만큼 잔소리를 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한낮인데도 도관에서는 인기척이 전혀 나지 않았다. 도관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일봉은 임예린을 찾을 수 없었다. 도관에 있는 사람들도 그날은 하루종일 두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만 얘기했다.
일봉은 마음이 초조해졌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도관 주위를 꼼꼼히 살피던 일봉의 눈빛이 갑자기 날카롭게 빛났다. 도관에서 한참 떨어진 호숫가에서 두 동강이 난 홍월의 시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시신의 일부는 독수리가 뜯어 먹었는지 이미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신의 허리 부분이 예리한 칼날에 단번에 잘렸음을 알아보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여기서 무슨 일이 생겼다! 갑자기 심장 박동이 증가하며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오는 내내 불길했던 느낌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홍월의 시신을 대충 묻은 뒤, 일봉은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침착하게 주변을 샅샅이 헤치며 임예린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한참 만에 누군가 풀을 밟고 지나간 듯 풀이 살짝 짓밟힌 것을 발견했다. 풀이 짓밟힌 자국이 일직선으로 쭉 나 있었다. 누군가 임예린을 납치한 것이 틀림없다.
일봉은 흔적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풀밭에 난 발자국은 삼십여 장쯤 지나니 말발굽으로 바뀌어 있었다. 여기서부터 말을 탄 것이다. 말발굽은 흙바닥에 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추적하기 쉬웠다. 일봉은 자신이 타고 온 말을 끌고 와 임예린을 납치한 자의 흔적을 쫓기 시작했다.
말발굽 자국은 어느새 황무지로 이어지더니 반나절쯤 가자 온통 돌투성이인 바위산이 나왔다. 바위에는 흔적이 남지 않기 때문에 추격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 장소에서 한참 흔적을 찾아 헤매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어떤 바위 위에 낯익은 느낌의 옷가지가 떨어져 있었다. 일봉이 얼른 가서 살펴보니 과연 그 옷가지는 임예린이 입고 있던 저고리였다. 저고리는 완력으로 벗긴 듯 어깨 부분이 뜯겨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일봉은 두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누군가 감히 아가씨의 옷을 강제로 벗긴 것이다! 일봉은 임예린의 옷을 들고 그 앞쪽으로 난 길을 노려보았다. 이놈을 당장 찢어 죽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조금 더 가니 길은 사면이 바위로 막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어 보였다. 일봉은 특유의 침착함을 발휘하여 유심히 살펴본 끝에 바위틈에 숨겨져 있는 작은 샛길을 발견했다.
그 샛길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녹림들의 산채같이 보이는 집 십여 채가 나타났다. 집들은 통나무와 진흙으로 만든 조잡한 것으로 겨우 비바람 정도만 막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느새 해가 져서 바위산에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어둠을 틈타 일봉은 몸을 숨기고 산채 안을 조심스럽게 염탐했다. 뜻밖에도 산채 안에는 어제 혈전을 벌였던 적비랑 놈들이 있는 것이 아닌가! 여기가 바로 적비랑들의 본거지였던 것이다.
산채 안에는 호랑이 가죽이 깔린 커다란 의자가 하나 있었는데 그 의자에 얼굴과 머리카락이 온통 새하얀 사내가 두 눈을 감고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 사내 옆에서는 어제 자신에게 혼쭐이 난 놈이 뭐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얘기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호천대가 다시 물건을 탈환해간 상황을 설명하는 것만 같았다.
그때 어디선가 여인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났다. 일봉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세한 소리였지만 임예린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어릴 때부터 임예린의 말소리나 웃음소리를 한 번이라도 더 들으려고 일부러 임예린의 주위를 서성거렸던 일봉은 임예린의 목소리는 아무리 작아도 즉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일봉은 발걸음을 죽여 울음소리가 나는 곳으로 조용히 움직였다. 그때 산채 안에서 부하의 보고를 듣던 설랑이 문득 눈을 뜨고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지만 일봉은 전혀 알지 못했다.
일봉은 울음소리가 흘러나오는 집 밖으로 와서 몸을 숨기고 몰래 안을 들여다보았다.
역시 울음소리의 주인공은 임예린이었다. 일봉은 순간 찾았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다행히 창이 열려 있어서 안을 들여다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임예린은 뜻밖에도 맨몸에 가슴 가리개만 겨우 하고 하체는 옆이 길게 터져 다리 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서역 여인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머리와 팔에도 서역 여인들이 하는 여러 겹의 진주장식과 금장식을 하고 있었다.
임예린의 옆에는 색목인으로 보이는 노파가 알아듣지 못할 말을 떠들어대며 임예린의 팔을 잡고 비단 천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향냄새가 나는 것으로 봐서 향유를 몸에 바르고 있는 듯했다.
임예린이 자꾸 울어 화장이 지워지자 노파가 큰소리로 뭐라고 다그치며 수건으로 임예린의 눈물을 닦아냈다.
일봉은 위급한 상황이었지만 속살을 다 드러낸 임예린의 복장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일봉은 정신을 차리려는 듯 얼른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지금 예린 아가씨와 나는 적의 수중에 있다. 한시바삐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 조금도 머뭇거릴 틈이 없다!
일봉은 주위에 보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한 다음 조용히 창문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방안으로 들어선 일봉은 색목인 노파가 소리를 지르기 전에 급히 아혈을 짚고는 연달아 몇 군데 혈도를 더 짚었다. 노파는 갑자기 일봉이 나타나자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소리를 지르려고 했으나 이미 일봉의 손에 점혈이 된 나머지 움직일 수도,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일봉!”
그때까지 눈물만 흘리던 임예린은 갑자기 일봉이 나타나자 너무 기쁜 나머지 일봉을 꼭 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일봉은 임예린이 자신에게 안겨 오자 당황스러웠지만, 무섭고 불안했을 그 심정이 이해가 되어 묵묵히 임예린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일봉, 정말 와주었구나. 정말 와주었어.”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이렇게 와준 게 어디야? 제발 일봉이 나를 구하러 오게 해달라고 천지신명께 간절히 빌었거든. 그런데 정말로 왔어.”
그동안의 두려움이 한꺼번에 몰아닥쳐서인지 임예린은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앞으로는 절대 혼자 내버려 두고 가지 않겠습니다.”
일봉의 말에 임예린의 어깨가 더욱 들썩였다.
“평생 지켜준다고 약속해.”
임예린의 말에 일봉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럴 수만 있다면.... 평생 당신 곁에서 당신을 내가 지켜드릴 수만 있다면....
일봉은 가슴 한구석이 시큰거리며 아려왔지만, 정작 임예린은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듯했다.
일봉은 쓴웃음을 지으며 감정이 격해진 임예린의 등을 토닥였다.
“평생 지켜드릴게요. 아가씨께서 원하신다면....”
일봉을 안은 임예린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얇은 가리개만 한 임예린의 젖가슴이 일봉의 몸에 닿으면서 뭉클한 느낌이 들었다. 일봉은 낯선 느낌에 당황해서 얼른 몸을 떼려고 했지만 임예린은 겁이 나서인지 일봉을 꼭 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다친 데는 없어요?”
“응. 다행히.... 아무도 오지 않으면 어떡하나 너무 무서웠어. 아버지도, 너도,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하면 어떡하나 너무 두려웠어.”
그때 밖에서 미세한 바람 소리가 났다. 일봉은 즉시 한 손으로 임예린의 입을 가리고 몸을 빙그르르 돌려 한쪽 벽에 바짝 붙어섰다. 일봉이 경계하자 임예린의 눈빛도 불안감에 흔들렸다. 임예린이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려 하자 일봉은 임예린의 입을 가린 채 고개를 좌우로 조용히 가로저었다. 말을 하지 말란 표시였다.
잠시 기다려 보았지만 더 이상 아무 기척이 없자 일봉은 그제야 임예린의 입을 가린 손을 내렸다.
“지금 즉시 가야 합니다. 말이 있는 곳까지는 거리가 꽤 있으니 저한테 업히시고 꽉 붙잡으세요.”
일봉의 말에 임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임예린이 등에 업히자 다시 등으로 임예린의 뭉클한 가슴 느낌이 전해졌다. 일봉은 등에 업힌 임예린의 두 다리를 손으로 받쳤다. 매끄러운 속살의 느낌이 일봉의 손끝을 타고 전해져왔다. 그때야 임예린도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지만 지금은 남녀지간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임예린을 업고 밖으로 나온 일봉이 땅바닥을 발로 박차며 경공을 발휘하려는 순간, 쐐액 소리가 나며 비도 한 자루가 무서운 속도로 일봉의 다리를 노리고 날아왔다. 바람을 가르는 기세로 보아 도저히 되돌려 차거나 받아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일봉은 등에 업은 임예린을 순식간에 앞으로 돌려 안으며 몸을 땅바닥에 굴러 비도를 피했다. 비도는 간발의 차이로 비켜 갔다. 일봉은 자신도 모르게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눈을 들어 앞을 보니 자신의 앞에는 얼굴과 머리칼이 하얀 사내 녀석이 무심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며 서 있었다.
“저 사람이 나를 납치했어. 사람들이 설랑이라고 불렀어.”
임예린이 두려운 눈빛으로 일봉에게 속삭였다. 그러자 일봉은 임예린에게 말했다.
“이 길로 곧장 가시면 제가 매어둔 말이 나옵니다. 그 말을 타고 지금 바로 달아나세요. 다른 놈들이 나오기 전에요.”
“그럼 일봉은? 일봉은 어떻게 오려고?”
“제 걱정은 마세요. 저놈만 처치하고 금방 따라가겠습니다.”
말을 하면서도 일봉은 설랑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쉽지 않을 싸움이 될 것만 같았다.
설랑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자약하게 서 있었다. 자신의 실력에 대단한 자부심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지금요. 빨리 가세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일봉이 검을 빼서 설랑을 찔러 들어갔다. 휘리릭, 검이 부드럽게 휘는가 싶더니 그 탄성으로 검끝이 순식간에 설랑의 면전에 도달했다. 설랑은 고개를 가볍게 젖혀 공격을 피하고는 임예린을 쫓아가려고 했지만, 일봉은 설랑이 임예린을 쫓아가도록 놓아주지 않았다.
“네놈을 만나면 꼭 찢어 죽이리라 생각했다. 이놈!”
일봉이 적의를 드러내며 질풍처럼 설랑에게 검을 뻗었다. 일봉은 설랑이 임예린을 납치했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결코 설랑을 살려두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게다가 이놈은 감히 하늘 같은 아가씨를 겁간하려 했던 놈이라고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아 참을 수가 없었다.
설랑은 원래 일봉의 검을 되는대로 막고 즉시 임예린을 쫓아가려고 했으나 일봉이 죽기살기로 달려들며 집요하게 자신의 진로를 방해하자 늑대처럼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비켜.”
설랑의 말에 일봉이 양손에 쌍검을 들고 땅을 박차며 설랑의 목을 노렸다.
“오냐, 네놈의 목부터 딴 뒤에 비켜주마.”
일봉의 공격도 빨랐지만 설랑의 발도(拔刀)도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챙! 소리가 나며 어느새 설랑의 손에도 쌍도가 쥐어져 있었다.
“그래, 쌍검 대 쌍도니 공평하군.”
일봉이 검 하나를 빙그르르 돌리며 설랑의 시선을 현혹하는 동시에 왼손에 든 검으로 설랑의 복부를 노렸다. 이 검법은 풍천숙의 강남도법(江南刀法)에서 발전시킨 것으로 원래 한 자루의 칼로만 구사하던 초식을 쌍검으로 구사하도록 변환시킨 것이었다. 지금까지 무수한 적과 마주쳤지만 이 초식을 피한 적은 아직 없었기에 일봉은 내심 자신 있었다.
그러나 일봉은 설랑도 쌍도를 쓴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설랑은 왼손에 든 칼로 일봉의 회전공격을 강하게 내리치면서 오른손 도를 늘어뜨려 일봉의 복부 공격을 정확하게 가로막았다.
챙, 도와 검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강하게 울렸다. 일봉은 검이 설랑의 칼에 부딪치는 순간 검을 놓칠뻔했다. 도를 휘두르는 힘이 어제 도끼를 쓰던 거한보다 훨씬 더 센듯했다.
병기 부딪치는 소리가 나자 산채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일봉의 모습을 알아본 비적들이 소리를 지르며 흥분하면서도 자신들의 대장이 일봉을 금방 끝장낼 것으로 생각하는 눈치였다.
원래 일봉은 단칼에 설랑의 목숨을 앗으려고 했으나, 설랑이 비적 주제에 무공이 대단한지라 호승심이 들기 시작했다. 정정당당히 겨루어 설랑을 꺾고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싸우면서 다른 비적들이 몰려들자 마음이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이러다간 예린 아가씨와 나, 둘 다 붙잡힌다. 일단은 어쨌든 몸부터 빼내야 한다.
생각을 정리한 일봉은 웬만해서는 잘 쓰지 않는 수법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암기를 날리기로 한 것이다. 일봉은 암기를 정당한 수법이 아닌 암수라고 생각했기에 절체절명의 상황이 아닌 다음에는 잘 쓰지 않았다.
일봉이 설랑을 정면으로 바라본 상태에서 몸을 뒤로 날리며 정강이를 감싼 보호대에서 강철비침 십여 개를 꺼내어 던졌다. 끝이 새파랗게 벼려진 강철비침이 번쩍번쩍 빛을 내며 설랑에게 날아갔다.
설랑은 별것 아니라는 듯 쌍도를 휘둘러 십여 개의 강철비침을 모두 가볍게 막아냈다. 그러나 설랑에게 던진 강철비침은 사실 허초였다. 일봉은 설랑이 막아낼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공력을 싣지 않았던 것이다.
설랑이 자신에게 날아오는 강철비침을 막자마자 일봉은 주위에서 구경하던 비적들에게 다시 강철비침을 날렸다. 이번에는 무시무시한 위력이 실려있었다. 한 명이라도 더 숨통을 끊어놓아야만 뒤를 쫓아오는 자가 그만큼 적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비적들은 갑자기 자신을 향해 강철비침이 날아오자 우왕좌왕했다. 강철비침의 기세가 워낙 빨라 피할 수도 없었다. 그때 설랑이 쌍도를 휘둘러 다른 사람들에게 향하던 강철비침을 막아냈다.
챙챙챙챙. 강철비침이 도에 막혀 땅으로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거리가 먼 탓에 몇 개는 미처 막지 못해 몇 사람은 강철비침에 찔리고 말았다.
으악! 비명이 터져 나왔다.
“너, 죽인다!”
설랑의 입에서 성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설랑이 다른 사람들을 구하려고 잠깐 지체하는 사이, 일봉은 이미 상당한 거리를 확보해 달아나고 있었다.
설랑은 분한 듯 소리를 지르며 품에서 비도 세 자루를 꺼내더니 일봉을 향해 던졌다.
쐐액. 비도가 바람을 가르며 무서운 기세로 날아갔다. 비도는 강철비침보다 무거워서 더 멀리 던질 수 있었다.
비도 세 자루가 순식간에 일봉의 등에 다다랐다. 이번에는 피할 여력도 없어서 반드시 막아야만 했다. 일봉이 몸을 돌려 쌍검을 휘둘러 비도를 떨어뜨렸지만 비도에 검이 부딪치는 순간, 또다시 손목이 시큰거리며 아파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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