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 광세일소_한추영 - 125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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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3화. 설랑(雪狼) (1)
두란철목아가 칼을 뽑자 임풍이 놀라서 얼른 그 병사를 막아섰다.
“왕자님, 이 병사는 이 소식을 알려주기 위해 사력을 다해 먼 길을 달려왔습니다. 전령은 적이라도 죽이지 않는 법입니다. 고정하십시오.”
그 말에 두란철목아는 칼을 내던지며 울분을 토해냈다.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이오? 부왕께서 아시면 나는 그날로 왕자의 자리에서 쫓겨나는 것은 물론, 우리 집안 모두가 중벌을 면치 못할 것이오.”
두란철목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비탄에 빠졌다. 조금 전까지 흥청망청 술을 마시며 기분을 내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방안을 왔다 갔다 했다.
그 모습에 임풍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물품수송대를 지킬 인원을 더 배치하자는 자신의 말을 들었다면 이 지경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니, 물품수송대만 먼저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일,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왕자님, 다행히 우리 호천대의 전력이 아직 그대로 남아있으니 당장 저들을 추격해서 물건을 되찾겠습니다. 저들은 아마 지금쯤 승리의 기쁨에 취해 있을 것입니다. 이때 저들을 치면 쉽게 황상께서 내리신 사례품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임풍의 말에 두란철목아는 임풍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십시다. 내 진작에 임 대방의 말을 들을 것을. 지금 후회막심이오. 지금 당장 전 병력을 파견해서 물건을 꼭 되찾아와야 하오. 당장 출발합시다. 당장!”
그러더니 두란철목아는 임풍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주위를 보며 명령을 내렸다.
“당장 출발 준비를 해라!”
풍천숙은 두란철목아의 명을 받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신속하게 호천대원들을 정렬시켰다.
임풍도 함께 가려고 무장을 하고서는 임예린에게 말했다.
“너는 여기 남거라. 전투라는 것이 워낙 돌발상황이 많으니 여기서 얌전히 몸을 숨기고 있거라.”
“예. 아버지.”
그때 풍천숙이 역시 전투준비를 하는 일봉을 보며 말했다.
“너는 남아서 아가씨를 지키거라.”
일봉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두란철목아가 말도 안 된다는 듯 노기 띤 목소리로 풍천숙에게 삿대질을 하며 꾸짖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지금 한 사람의 고수라도 더 데려가야 할 판국에 남으라니? 여기 있으면 임 소저는 안전하니 싸울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빼지 말고 모두 준비시켜라!”
임풍이나 임예린이 나서기도 전에 두란철목아가 마치 자신의 수하에게 하듯이 풍천숙에서 하대하며 지시를 했다. 임풍도 자신에게 함부로 말하지 않는데 새파랗게 젊은 놈이 자신에게 하대하며 일방적으로 지시하자 풍천숙은 화가 불같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임풍의 낯을 봐서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풍 대주님, 그렇게 하시지요. 저는 여기서 꼼짝 않고 있을 테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황상께서 내리신 물건을 도적 떼에게 잃는다면 우리 상단으로도 치명타입니다. 일봉은 고수니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임예린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풍천숙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임예린의 말에 임풍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더니 임예린에게 말했다.
“조심하거라.”
“아버님도 꼭 몸조심하셔야 해요.”
그리고 임예린은 이번에는 일봉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를 지키듯이 아버지를 꼭 지켜줘.”
임예린의 간절한 눈빛에 일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임풍과 풍천숙은 호천대를 이끌고 소식을 전하러 온 병사에게 길 안내를 맡겨 급히 적비랑(赤飛狼)의 뒤를 쫓았다. 풍천숙이 거의 백여 명에 달하는 호천대원들을 데려왔기 때문에 해볼 만한 싸움이었다.
비록 무림맹의 남천단만큼은 아니지만 호천대도 그 위용이 남달랐다. 상단을 수호하며 무수한 실전을 겪은 덕분에 호천대 하면 강호의 녹림대도들은 일단 한 수 접어주는 판국이었다.
임예린은 자신의 시비인 홍월(紅月)과 함께 도관의 문 앞에 서서 불빛에 비쳐 멀어지는 호천대원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모두들 무사히 돌아올 수 있기를, 그리고 잃어버린 물건들을 부디 되찾을 수 있기를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도관에는 적막감이 감돌았다. 천산산맥의 꼭대기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임예린은 으스스 몸을 떨었다. 그렇게 밤이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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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적들과 싸우러 간 아버지와 호천대원들을 걱정하느라 임예린은 밤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바깥이 어슴푸레 밝아오자 옷을 챙겨입고 홍월이 깨지 않게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가 호수 주위를 걸으며 맑은 공기라도 마시면 불안한 느낌이 좀 가실 것만 같았다.
새벽녘이라 그런지 바깥은 아직 어두워서 사물의 형체만 겨우 분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인적 없는 호수는 바람이 그쳐 조용하고 안온한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임예린은 천천히 호숫가를 걷기 시작했다. 주위는 더할 나위 없이 조용했지만 머릿속은 무겁기만 했다.
무심코 걷다 보니 어느새 도관이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와 버렸다. 마침 물이 얕은 곳이 있어서 임예린은 호숫가에 앉아 맨발을 호숫물에 담갔다. 발로 물을 튀기다 보니 문득 어릴 때 장난치며 놀던 석추명과 기하진이 떠올랐다. 늘 얼굴이 퉁퉁 붓고 멍이 들어 오면서도 활짝 웃던 석추명과 고집 세고 새초롬하지만, 또 나름 속정이 깊었던 기하진을 생각하니 문득 가슴속이 싸해졌다.
그때는 왜 두 사람 모두 아무 말도 없이 떠났을까? 내가 너무 부담되어서였을까? 어릴 때는 자신을 두고 떠난 두 사람이 원망도 많이 되었지만 다 자란 이제는 그저 보고 싶기만 했다.
헤어진 지 어느덧 십 년. 다시 만나면 알아볼 수는 있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꾸 떠오르자 임예린은 벌떡 일어서더니 겉옷을 훌훌 풀어헤쳤다.
이 호숫가는 어차피 사람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곳이다. 게다가 지금은 신새벽. 사람은 고사하고 다람쥐나 새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임예린은 속옷마저 과감하게 벗어 던지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그대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첨벙! 피부에 와 닿는 호숫물의 느낌이 차갑고도 시원했다. 물이 맑아서 물속이 훤히 보였고, 물에서는 은근히 청초한 풀냄새 마저 나는 듯했다. 임예린은 머리끝까지 물속으로 푹 담갔다. 차가운 물 속에 머리를 집어넣자 머릿속이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임예린은 한참 동안 숨을 참다가 숨을 참지 못할 지경이 되어서야 몸을 물 밖으로 내밀었다.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칼이 하얀 피부에 달라붙었다. 임예린은 머리를 한번 털고는 두 손을 들어 물 묻은 머리칼을 짜냈다. 비단결같이 매끄러운 피부를 타고 물방울이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열여덟 막 물이 오르기 시작한 소녀의 몸은 새벽이슬을 흠뻑 머금은 잘 익은 복숭아를 연상시켰다. 임예린의 피부는 눈이 부실만큼 새하얘서 미명의 어둠 속에서 스스로 빛을 내는 듯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고혹적이고 아름다운지 누군가 보았다면 강의 신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가 나타났다고 착각했으리라.
임예린은 다시 물속으로 머리를 담그고 숨을 멈췄다. 물속에서 숨 오래 참기는 물놀이를 좋아하는 임예린이 어릴 때 즐겨 하던 놀이였다. 자라서는 이렇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수영할 기회가 없었는데 간만에 호수의 맑은 물속에 몸을 담그니 어릴 때 생각이 났다.
숨을 참을 만큼 참던 임예린이 다시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며 일어섰다.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숨을 후, 하고 내뱉었다. 그리고는 눈을 뜨다가 임예린은 깜짝 놀라 다시 물속으로 황급히 몸을 숨기고 말았다.
호숫가에 웬 남자 하나가 서서 넋이 나간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는 몰라도 서 있는 자세로 봐서 자신을 지켜본 지가 꽤 된듯했다.
임예린은 무섭기도 하고 당황스러워 물속에서 두 손으로 자신의 몸을 가렸다. 물보라가 일며 물방울이 튀었다. 자신의 몸 주위로 물살이 동심원처럼 퍼져나갔다. 그러나 물이 워낙 맑아서 물속으로 숨었지만 임예린의 황홀한 몸매의 굴곡이 그대로 비쳐 보였다.
임예린은 물속에 잔뜩 몸을 웅크린 채 가만히 남자를 지켜보았다.
남자는 다행히 자신을 해코지하려는 생각은 없는 듯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 모습에 용기를 얻은 임예린이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옷 좀 던져주시겠어요?”
그 말에 호숫가에 서 있던 남자가 임예린이 벗어놓은 옷가지를 던져주었다. 임예린은 물속에서 허겁지겁 남자가 던져 준 옷을 대충 몸에 걸쳤다. 그러나 옷가지는 물에 흠뻑 젖어 임예린의 몸매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었다. 오히려 옷을 입지 않은 것보다 더욱 관능적인 느낌이었다.
임예린이 물속에서 옷을 입을 동안 호숫가의 남자는 눈길을 돌리지도 않고 임예린을 빤히 바라보았다. 임예린도 마음이 조마조마하여 옷을 입는 동안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남자는 콧대가 높고 눈이 쑥 기어들어갔으며, 머리카락은 곱슬곱슬한 것이 한족이 아닌 듯했다. 밤이면 만년설산의 꼭대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아직 얼음처럼 차갑기 그지없었지만 남자는 검은색 바지와 가죽 장화만 신은 채 상체는 맨몸 위에 털조끼 하나만 걸치고 있었다. 등에 쌍도를 매고 있었고 칼집을 고정하는 천을 꼬아 만든 끈이 조끼 위에 가위 모양으로 묶여 있었다.
조끼 사이로 단단해 보이는 가슴근육이 드러났다. 그러나 정작 특이한 것은 그 남자의 피부색이었다. 마치 피부색소가 빠진 듯 양모처럼 피부가 새하얬는데 피부뿐만 아니라 어깨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과 눈썹마저도 새하얀 색이었다.
임예린은 자꾸만 몸에 달라붙는 옷가지를 몸에서 떼어내며 남자를 경계하듯 바라보았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자신의 알몸을 들킨 것이 부끄러웠지만 지금은 그런 수치감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고마워요.”
임예린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대로 남자를 지나쳐 도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두려움 때문인지 한기 때문인지 몸이 자꾸 떨려왔다. 그러나 임예린은 무서워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양손에 힘을 꽉 주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서너 발자국쯤 움직였을까, 남자가 갑자기 임예린의 앞을 가로막았다.
“너, 한족인가?”
남자가 어눌한 한어(漢語)로 물었다.
“네?”
임예린은 남자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되물었다.
“너, 예쁘다. 오늘부터, 너, 내 신부다.”
남자는 말을 막 배우기 시작한 아이처럼 말을 짧게 끊어서 했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했다. 임예린은 그 말에 너무 놀랐지만 나약하게 보이면 안 될 것만 같았다.
“그게 무슨 소리죠? 왜 내가 당신의 신부라는 것이죠? 아니, 그보다 먼저 당신은 누구인가요?”
임예린이 목소리를 높이며 엄하게 캐물었다. 그러나 남자는 눈동자 한번 깜박이지 않더니 임예린을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너, 예쁘다. 나, 네가 좋다. 나와 같이, 가자.”
갑자기 남자가 다가오더니 임예린을 그대로 어깨 위로 달랑 들쳐 맸다. 임예린은 남자의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에 놀라 주먹으로 등을 치며 발버둥을 쳤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당장 내려줘요. 당장 내려달란 말이에요!”
그러나 남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대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남자는 무공의 고수인 듯 발걸음이 무척이나 빨랐다.
“내려달란 말이야, 이 자식아!”
임예린이 심하게 발버둥을 치며 고함을 질렀다. 그때 멀리서 홍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홍월은 일어나보니 임예린이 보이지 않자 걱정이 되어 찾으러 나온 참이었다. 호숫가를 둘러 보다가 보이지 않아 다시 도관으로 돌아가려고 발걸음을 돌렸다가 마침 임예린이 지르는 소리를 듣고 득달같이 달려온 것이었다.
“이놈, 아가씨를 내려놔!”
홍월은 자신의 눈앞에서 얼굴과 머리가 허연 괴상한 남자가 임예린을 어깨에 둘러메고 가자 고함을 질렀다.
사내는 귀찮은 듯 홍월을 무시하고 가려고 했으나 홍월이 계속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결국 걸음을 멈추고 홍월을 쳐다보았다. 사내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으며 늑대처럼 목 안으로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홍월은 사내가 걸음을 멈추자 ‘옳다구나’ 싶어서 더욱 고함을 질러댔다.
“이런 파렴치한 같은 놈. 당장 아가씨를 내려놔. 내려놓으란 말이야!”
기괴한 사내의 모습에 겁을 먹을 만도 하건만 홍월이 전혀 기죽지 않고 더욱 목청을 높였다. 그 순간 사내의 눈이 가늘어지며 두 눈에서 살기가 솟구쳤다.
스겅!
“아, 아가씨...!”
홍월이 멍한 시선으로 임예린을 한번 바라보더니 자신의 허리를 내려다보았다. 홍월의 허리가 스르르 양분되며 상반신이 땅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언제 빼 들었는지 사내의 손에는 칼자루가 들려있었고 칼자루는 이미 홍월의 허리를 정확히 반으로 갈라놓은 뒤였다.
“홍월아! 홍월아!”
임예린은 자신의 눈앞에서 홍월의 몸이 두 동강 나자 믿을 수가 없어서 미친 듯이 홍월의 이름을 불러댔다. 울음소리가 목에 걸린 듯, 터져 나오지 않고 흑, 흑, 하는 새된 소리만 났다. 숨이 막혀서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가 다시 울음소리가 목구멍 안쪽에서부터 터져 나왔다.
사내의 어깨 위에서 두 동강이 난 홍월의 시신을 바라보던 임예린은 어느덧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홍월의 시신이 점처럼 작아질 때까지도 그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임예린이 울음을 그치지 않자 그 소리가 성가셨던지 사내는 커다란 손을 들어 임예린의 목 뒤를 퍽 하고 내리쳤다. 임예린은 순식간에 두 팔을 축 늘어뜨리며 의식을 잃었다. 임예린을 둘러맨 사내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더니 순식간에 호수 너머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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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풍과 풍천숙은 호천대를 이끌고 ‘붉은 이리떼’라는 적비랑의 뒤를 쫓았다. 다행히 적비랑들의 흔적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들이 탈취한 물건은 마차 스무대 가량의 분량으로 그 수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물건 운반이 쉽지 않았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적비랑들의 꼬리를 쉽게 잡을 수 있었다.
적비랑을 보자마자 두란철목아는 당장 공격해 들어가자고 주장했다. 그러자 풍천숙이 두란철목아를 무시무시한 눈으로 쏘아보았다.
“호천대주는 접니다. 싸움의 전술을 짜는 것도 제가 할 역할입니다. 아무리 왕자님이라 하더라도 이점을 인정하지 않으신다면 저는 이대로 대원들을 이끌고 철수하겠습니다.”
풍천숙의 으름장에 두란철목아는 수치스러워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일개 무장 따위가 감히 왕자인 자신에게 대든다고 생각하니 참기 어려웠다.
“왕자님은 살말건의 군사나 지휘하시지요. 호천대는 제가 지휘합니다.”
풍천숙이 두란철목아를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한번 못을 막았다.
“이... 이런...!”
두란철목아는 분하여 말을 잇지 못하고 도와달라는 듯이 임풍을 돌아보았다.
“왕자님, 풍 대주의 뜻대로 하시지요. 풍 대주는 백전노장입니다. 실제 싸움에서 호천대를 어떻게 운용할지는 저도 관여할 수 없습니다.”
임풍의 말에 두란철목아는 불쾌한 듯 끙하고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임풍은 호천대를 두 개 조로 나누어 일 개 조는 후방에서 지키고 있다가 적들이 우왕좌왕할 때 달려 나와 퇴로를 차단하게 하고, 다른 일 개조는 자신이 직접 이끌고 비적 떼를 공격해 들어가기로 했다.
호천대주 풍천숙이 커다란 칼을 빼서 손에 쥐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공격!”
그와 함께 호천대원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말에 박차를 가해 비적들에게 뛰어들었다. 호천대의 주요 임무는 물건수송 호위였기 때문에 대원들은 하나같이 기마술이 뛰어났다. 호천대원들이 말을 달리면서 동시에 활을 쏘며 공격해 들어갔다.
이마에 붉은 칠을 한 비적들, 적비랑은 돌연 함성소리가 나며 화살이 날아오자 잔뜩 긴장했지만 적의 수가 생각보다 많지 않자 금방 얕잡아보았다.
“별거 없다. 다 쓸어버려라!”
두령으로 보이는 자가 둥글게 휜 만도를 빼 들고 호령하자 적비랑들은 호천대를 향해 말머리를 돌리며 응전해왔다.
“네 이놈들! 목숨을 내놓거라!”
풍천숙이 말을 달려가며 대도를 휘두르자 비적 하나가 순식간에 목이 날아가며 말에서 떨어졌다. 풍천숙은 나이 육십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성난 호랑이처럼 그 위용이 대단하기 그지없었다. 뒤에서 그 모습을 보던 두란철목아가 그 기세에 놀라 눈을 치켜떴다.
그러나 적비랑들도 만만치는 않았다. 적비랑들은 주로 둥글게 휜 만도를 썼는데 그뿐만 아니라 철퇴나 커다란 도끼를 쓰는 자들도 있었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풍천숙이 명을 내리자 와, 하고 다시 함성이 일었다. 그때 풍천숙을 향해 철추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왔다. 철추의 겨냥이 정확하고 신속한 것이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원래는 한달음에 달려가 물건을 되찾으려고 했던 두란철목아는 적비랑들의 뛰어난 무공실력에 오금이 저려와서 정작 자신은 싸움에 참여하지 않고 뒤로 빠져있었다.
이제는 처음에 자신을 말려주었던 풍천숙이 고맙기까지 했다. 멋모르고 싸움에 뛰어들었다가는 비적들의 칼날에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간담이 서늘해졌다.
풍천숙에게 철추를 휘두르는 거한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자 뒤에서 싸움을 관전하던 두란철목아가 길을 안내해온 병사에게 물었다.
“저놈이 두목이냐? 과연 무공과 기세가 예사롭지 않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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