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33화 (33/201)

#   33 - 광세일소_한추영 - 1246494

#

제 32화. 살말건의 사왕자

살말건(薩末建, 사마르칸트)의 사신단이 남경에 도착했다. 살말건은 성조께서 문호를 연 이후로 매년 사신단을 보내어왔다. 특히 올해에는 사신단 50여 명에 수행원과 호위무사 100여 명 등 총 150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 사신단을 파견했다.

이슬람 문화권인 살말건은 사자, 공작새, 백옥, 향료, 양모와 낙타 등, 중원 땅에서는 보기 힘든 진귀한 물건들을 진상품으로 가져왔다. 황상은 기뻐하며 이에 대한 회사품(回賜品)으로 도자기와 비단, 종이, 붓, 책과 특히 살말건이 간절히 원하는 차를 내렸다.

그리고 살말건이 중원과의 교역을 간절히 원하므로 이번에 특별히 천린상단의 주인인 임풍에게 사신단과 함께 살말건으로 가서 어떤 교역을 할 수 있을지 살펴보라고 명했다.

살말건 사신단의 단장, 두란철목아(豆蘭鐵木兒)는 황상의 은혜에 감읍하여 거듭 감사를 표했다. 사신단은 석 달간 머물며 중원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교류하다가 살말건으로 되돌아갈 준비를 했다. 황상께서 살말건 사절단에게 내린 회사품만 해도 그 품목이 36가지나 되었고, 또 살말건 사신단이 교류를 통해 직접 사들인 물품도 있어서 되돌아갈 준비를 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임풍은 이번 여정이 쉽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되돌아가는 길에 천산산맥을 지나야 하는데 천산산맥에는 무공이 고강하고 잔인하기로 악명높은 비적 떼들이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이마에 붉은 칠을 한 적비랑(赤飛狼)이라고 하는 비적들은 한번 표적으로 삼은 사람들은 결코 중간에 포기하는 법이 없었기에 상단이나 표국은 물론이고 강호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임풍은 살말건 사신단들이 데리고 온 군사는 물품들을 안전하게 수송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상단의 호천대(護千隊)를 이끌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호천대주 풍천숙(風薦肅)은 임풍의 지시로 이번에 살말건에 데리고 갈 날랜 대원들을 선발하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백여 명은 되어야 할 텐데 그 먼 길을 백 명이나 따르게 되면 식량 등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므로 가급적 인원을 줄여야 했다. 그래서 무공이 높은 대원들 위주로 뽑았지만 어느새 뽑힌 명단은 70명을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풍천숙은 어쩔 수 없이 일단 백 명을 채우기로 하고 앞에 늘어선 대원들을 꼼꼼히 살펴보며 명단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일봉이 눈에 들어오자 의아해하며 일봉의 앞으로 다가갔다.

“네 녀석은 아가씨를 지켜야지, 여기서 뭐 하고 있느냐?”

풍천숙의 입에서 꾸지람이 터져 나왔다. 풍천숙은 천성이 진지하고 강직해서 평생 살가운 말 한마디 해본 적이 없었지만, 사실 속마음만큼만은 늘 따뜻했다. 특히나 자신이 직접 가르친 제자나 다름없는 일봉에게만은 더욱 각별한 애정이 있었다.

“호천대원들은 모두 집합하라고 하셔서 저도 아가씨께 말씀드리고 왔습니다.”

일봉이 씩씩하게 대답하자 풍천숙이 일봉의 어깨를 짝 소리 나게 때렸다.

“답답한 녀석! 아가씨가 이번 여정에 함께 하기로 하셨으니 너도 당연히 가는 거지, 그걸 새삼스럽게 확인하려고 왔느냐? 얼른 가서 아가씨를 지키거라. 혹시라도 아가씨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대방 어른께서 너를 혼내시기 전에 내 손에 먼저 죽을 줄 알아라.”

풍천숙이 역정을 내었지만 일봉은 그럴 줄 예상했다는 듯 아랑곳하지 않고 빙긋 미소를 짓더니 등 뒤에 매고 있는 것을 꺼내어 풍천숙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냐?”

“보약을 좀 샀습니다. 이번 여정이 특히 멀고 험한데 그 전에 좀 드시고 기운 내시라고요.”

그 말에 풍천숙은 일봉의 등짝을 후려쳤다.

“이놈아, 내 나이 60이라도 네놈보다 팔팔하다. 이런 걸 뭣 하러 사와!”

풍천숙이 길길이 뛰자 일봉이 후닥닥 도망가며 말했다.

“그건 잘 알지만 그래도 워낙 연세가 있으시니 미리미리 보약을 좀 드시면 얼마나 좋습니까?”

“이놈이 보자 보자 하니까 뭐라고?”

풍천숙이 소매를 걷어 올리자 일봉은 기겁하고는 얼른 꽁무니를 내뺐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풍천숙의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리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잘 지켜드리거라. 나처럼 실수하지 말고....”

****

사신단의 단장, 두란철목아는 사실 살말건 국왕의 사왕자(四王子)였다. 젊은 나이에 큰 권력을 가져서인지 두란철목아는 고집이 세고 자존심이 강했다.

비록 천자의 명으로 임풍이 사신단과 합류하게 되었으나, 임풍은 일개 상인이요, 자신은 왕자라는 생각에 은연중에 임풍을 무시하며 콧대를 높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임풍은 이번에 황상의 명을 받고 가는 만큼, 가급적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일부러 몸가짐을 더 낮추었다.

“이번에 방문길에 임 대방께서 따님을 데려가신다고요? 중원제일상단의 두령이라기에 임 대방께서는 공사를 분명히 구분할 줄 알았는데 역시 장사나 하는 분이라 어쩔 수 없군요. 그리고 그런 일이 있으면 당연히 단장인 저에게 먼저 말을 했어야지요. 원, 그렇게나 생각이 없어서야..... 쯧쯧.”

임풍은 자신의 아들뻘인 두란철목아에게 대놓고 무시를 당했지만, 장사하며 워낙 이 사람 저 사람을 다 겪어보았기 때문에 그 정도는 웃으면서 넘어갈 여유는 있었다.

“허허허, 미리 인사를 드리게 한다는 것이 제가 바빠서 좀 잊었군요.”

임풍은 그리고는 시종을 시켜 임예린을 불러오게 했다.

두란철목아은 평소 살말건 여자의 미모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서 중원 여자들 중에는 미인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임예린을 직접 보게 되자 그만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반, 반갑소이다. 나는 살말건의 사왕자인 두란철목아라고 하오.”

두란철목아가 말을 더듬자 임예린은 살짝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임예린이라고 합니다. 왕자님께서 이번 여행길에 저를 동행하도록 흔쾌히 허락해주셨다고 아버님께 들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임예린은 시종을 통해 살말건의 이 콧대 높은 왕자가 면전에서 아버지에게 수모를 주었다는 얘기를 들어, 일부러 더 들으란 듯이 얘기를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임예린의 말을 듣자 두란철목아는 당황한 듯 안색이 붉어졌다.

“그, 그렇고 말고요. 하하하. 이렇게 꽃다운 미녀께서 동행해주시는데 제가 싫다고 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하하.”

두란철목아가 손바닥 뒤집듯 가볍게 자신의 말을 뒤집으며 임예린에게 알랑방귀를 뀌었다. 그때 임예린의 뒤에 서 있던 일봉이 그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사신단의 단장이자 일국의 왕자가 하기에는 말투가 너무 경박했던 것이다.

“호호호, 그렇게 말씀하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군요. 앞으로도 잘 좀 부탁드립니다, 왕자님. 저희 아버지도 잘 좀 부탁드리고요.”

“하하하, 잘 봐 드려야지요. 누가 부탁을 하는데요. 하하하.”

두란철목아가 계속 눈치 없이 경박한 말을 내뱉자 그 옆에 있던 살말건의 사신들이 임풍과 임예린의 눈치를 살피며 쩔쩔매었다.

“호호호, 잘 봐주신다니 다행이군요. 듣자 하니 이번에 왕자님께서 황상께 차의 무역을 허락해달라고 하셨다던데 차는 중원 땅에서도 저희 상단을 통하지 않고는 거래를 할 수가 없답니다. 왕자님께서는 무슨 차를 좋아하시는지요?”

임예린의 웃음에 두란철목아는 멍하니 넋이 나가 임예린을 한참 쳐다보았다.

“그, 그야....”

두란철목아가 말을 채 하기도 전에 임예린을 다시 말을 이었다.

“저희 상단은 항주의 명물 서호 용정차(龍井茶), 복건 안계현의 철관음(鐵觀音)과 복정현의 백호은침(白毫銀針), 사천 몽산의 몽정차(蒙頂茶), 소주의 벽라춘(碧螺春), 대만의 동정오룡(凍頂烏龍), 동정호의 명차 군산은침(君山銀針), 안휘성의 기문차(祁門茶), 그리고 황상께서 드시는 대리 운남의 보이차(普洱茶) 등, 모든 차를 취급하고 있죠.”

전문적인 차 상인처럼 차의 종류를 줄줄 외는 임예린의 말에 두란철목아는 놀래서 입이 벌어졌다. 혹시 천린상단에서 차와 관련된 실무를 하는 건 아닌지 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아! 차는 조정의 허락 없이는 거래할 수 없다는 건 이미 알고 계시죠? 저희 상단은 황상께 전매특권을 받았기 때문에 오직 저희 상단을 통한 차 거래만 가능하답니다. 중원뿐만 아니라 대리, 안남, 토번, 조선, 왜 등, 차를 수입하는 나라들은 모두 저희 상단과 거래해야 하지요.”

언제나 그렇듯이 임예린은 웃으며 얘기하지만 그 미소와 함께 나오는 말은 침처럼 따끔하게 사람의 마음을 찔러서 별명이 소일침(笑一針)이었다. 즉, 너희 나라도 차를 교역하고 싶다면 우리 상단을 통하지 않고는 안되니, 알아서 처신하라는 뜻이었다.

두란철목아가 비록 안하무인에 쓸데없이 자존심이 높았지만 바보는 아니기에 임예린의 말뜻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리고는 임예린을 다시 바라보았다.

미모만 아름다운 줄 알았더니 머리도 명석한 데다가 말하는 것도 똑 부러졌다. 게다가 그 뒤에 천하제일상단이라는 천린상단이 떡 하니 버티고 있으니 자기의 배필감으로 이만한 사람은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 애간장을 살살 녹이는 저 미소와 철철 넘치는 애교 때문에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입 맞추고 싶은 충동이 몇 번이나 들었다.

“하하하, 좋습니다. 좋아요. 내 당장 부왕께 귀 상단과 교역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리겠소이다.”

두란철목아가 웃음을 터뜨리며 갑자기 임예린의 손을 덥썩 잡았다.

“당장 그 손 거두시지요.”

말과 동시에 임예린의 뒤에서 그림자처럼 서 있던 청년이 성큼 앞으로 나서며 두란철목아의 팔꿈치를 움켜잡았다. 꽉 움켜잡은 것도 아닌데 청년의 손가락이 닿은 부위가 화상을 입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두란철목아는 그만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아악!”

“일봉, 나는 괜찮으니 뒤로 물러나.”

갑자기 일봉이 나서자 임예린이 놀라서 일봉에게 명했다. 일봉은 내키지 않은 듯 두란철목아를 한번 노려보고는 뒤로 물러섰다.

두란철목아는 얼얼해진 팔을 주무르며 불쾌한 표정으로 일봉을 쳐다보았다.

“저 사람은 누군데 이토록 무례하오?”

“제 호위무사입니다.”

“감히 호위무사 따위가 일국의 왕자인 나를 우롱하다니!”

두란철목아는 일개 호위무사에게 자신이 수모를 당했다고 생각하자 목소리를 높이며 분개했다. 당장 일봉의 목이라도 치라고 요구할 것만 같았다.

“일개 무사가 아니라 제가 목숨을 의탁하는 사람이랍니다. 방금 왕자님의 몸에 허락도 없이 손을 댄 것은 무례한 처사였지만 왕자님도 제 허락 없이 제 손을 잡으셨으니 피장파장 아니겠어요? 그러니 화를 거두시지요. 대신 제가 왕자님께 귀한 차 한 잔 올리겠으니 안으로 드시지요.”

임예린의 딱 부러진 말에 두란철목아도 더 이상 일봉의 일을 문제 삼을 수 없었다.

임예린이 두란철목아를 앞장세워 앞으로 가면서 슬쩍 고개를 뒤로 돌려 일봉에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리고는 소리 없이 입 모양만으로 ‘잘했어!’라고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두란철목아의 안하무인격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일봉에게 팔이 잡혀 혼쭐이 나는 모습을 보니 속이 시원했던 것이다.

그 이후로도 두란철목아는 대놓고 티를 내며 임예린을 쫓아다녔다. 그리고는 항상 구실을 만들어 임예린과 단둘이 있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정작 임예린에게 가까이 다가가기라도 하면 언제 나타났는지 일봉이 매의 눈으로 두란철목아를 노려보았다. 일봉은 무공이 고강해서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두란철목아는 분통을 터뜨렸다.

‘시건방진 놈. 일개 호위 나부랭이 주제에! 나중에 반드시 혼쭐을 내주마. 두고 보아라, 이놈!’

두란철목아는 일봉을 노려보며 속으로 분을 삭였다.

일행이 길을 떠난 지 달포 가량이 지나자 드디어 저 멀리 만년설로 뒤덮인 산봉우리들이 보이며, 푸른 초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하늘의 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천산(天山) 산맥이었다.

눈 앞에 펼쳐진 절경에 임예린은 넋을 잃었다.

“너무나 아름다워요. 정말 천상의 산이 저런 모습일까요?”

그 모습에 두란철목아는 천산 산맥이 자신의 소유인 듯 임예린에게 말했다.

“하하하, 천산 산맥을 처음 보는 사람들을 누구나 다 그렇게 넋이 나가지요. 이제 저 산맥만 넘으면 살말건입니다. 거의 다 왔으니 짐과 수행원들을 먼저 보내고 저희는 천천히 산구경이나 하면서 가십시다. 천산 산맥은 제 손바닥 안에 있으니 제가 직접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과연 천하절경이군요. 그런데 이곳은 비적들이 많다는데 그렇게 해도 될까요?”

임예린의 우려 섞인 말에 두란철목아는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할 필요 없소이다. 우리 살말건의 군사들은 모두 일당백의 무사들입니다. 비적들도 그 사실을 알기에 우리가 지나갈 때는 오히려 산골짜기에 숨어서 우리를 피해갔을 정도지요. 이번에도 그럴 겁니다. 만약에 저들이 엉뚱한 짓을 하면 내 당장 우리 살말건의 군사를 동원하여 저들이 천산 산맥에 발도 못 붙이도록 휩쓸어 버리겠소이다.”

두란철목아의 호언장담에 임예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금방 처리할 수 있다면 왜 지금까지 비적들을 보고만 있었단 말인가? 그러나 일국의 왕자가 그렇게 주장하는데 정면에서 반박하기도 어려웠다.

두란철목아는 이 기회에 임예린의 환심을 사고 싶어서 천산의 이름난 명승지를 둘러보고 가자고 자꾸 우겼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물품을 실은 마차를 먼저 보내고 임풍 일행은 두란철목아의 안내를 받아 천산을 둘러보기로 했다.

살말건의 군사들이 물품 마차를 호송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안심이 되지 않던 임풍은 호천대의 인원을 반으로 나누어 물품수송대를 호위하려고 했으나 자존심이 센 두란철목아는 고집을 부리며 임풍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임예린 앞에서 살말건 군대의 위신을 세우고 싶었던 것이다.

임풍 일행이 두란철목아의 안내를 받아 말을 타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한참 올라가니 얼마 안 있어 눈앞이 탁 트이며 바다같이 펼쳐진 커다란 호수가 하나 나타났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호수의 수면이 금가루를 뿌린 듯 눈부시게 반짝였다.

“정말 장관이군요!”

임예린이 감탄하자 두란철목아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이 호수는 천지(天池)라고 하오. 빙하가 녹은 물로 생긴 호수지요. 이 산을 넘어가면 서유기에도 나오는 화염산(火焰山)이 있지요.”

“그래요? 만년설산 바로 옆에 화염산이 있다니 믿을 수가 없군요.”

임예린이 거듭 감탄하며 놀라워하자 두란철목아는 자기가 칭찬을 받은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목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 분위기를 만끽하려는 듯 수행원들에게 호수 주변에 자리를 마련하고 술과 고기를 준비하라고 일렀다.

“오늘은 여기서 하루 쉬고 내일 가십시다. 마침 근처에 쉴만한 사원이 하나 있습니다. 그곳 주지와는 잘 아는 사이니 하룻밤 묶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임풍은 아무래도 먼저 보낸 물품이 걱정되었다. 그 모습에 임예린은 두란철목아에게 호수를 보았으니 이제 가자고 말했지만 두란철목아는 밤에 천산의 호수가에 느끼는 정취는 중원 땅에서는 맛보지 못할 것이라며 고집을 부려 어쩔 수 없이 그날 하룻밤을 묶게 되었다.

그날 밤 모처럼 흥이 난 두란철목아가 일행들에게 술을 몇 차례 권한 뒤 또 한 차례 권하는데 갑자기 바깥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왕자님, 왕자님!”

풍천숙이 문을 열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더니 화살을 맞아 피 흘리는 병사 한 명이 쓰러질 듯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그때까지도 술병을 들고 연신 입속으로 술을 벌컥벌컥 부어대던 두란철목아는 중상을 입은 부하의 모습에 벌떡 일어섰다.

“무슨 일이냐?”

“붉, 붉은 이리떼들이 나타났습니다.”

병사는 상처의 통증과 먼 길을 달려오느라 지쳐 헉헉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서, 그래서 물건들은 다 어찌 되었느냐?”

“모, 모두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뭣이라고!”

두란철목아는 회사품을 모두 빼앗겼다는 말에 들고 있던 술병을 내던졌다. 챙그랑, 소리가 나며 술병이 산산조각이 났다.

“그 물건들이 어떤 물건인데 그것을 뺏긴단 말이냐!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켰어야지. 목숨을 걸고서라도!”

두란철목아는 분을 이기지 못해 소리를 지르고는 옆에 풀어놓은 검을 빼 들었다.

“네놈부터 당장 참하여 이 일의 본보기로 삼을 것이다!”

두란철목아가 병사의 목을 치려고 검을 치켜들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