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 - 광세일소_한추영 - 1244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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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1화. 천린상단의 천재 소녀
화사한 봄날, 벚꽃보다 더욱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하는 소녀가 천린상단 본가의 뒤뜰에 있는 팔각정에 앉아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읽고 있었다.
바람이 불자 벚꽃이 우수수 떨어지며 정원이 온통 꽃 천지가 되었지만 소녀는 그것도 모르고 책에서 눈을 뗄 줄 몰랐다.
바람에 소녀의 머리칼이 흩날렸다. 무산신녀(巫山神女)가 저보다 아름다울까? 팔각정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팔짱을 낀 채 소녀를 바라보던 일봉(一峯)의 마음에 잠시 파문이 일었다.
문득 소녀를 처음 봤을 때가 떠올랐다. 일봉의 나이 그때 열네 살. 대방 어른과 안방마님의 손을 잡고 호기심에 가득 찬 눈빛으로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여덟 살 소녀의 올망졸망하고 초롱초롱한 눈빛이 생각났다.
그때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소녀를 본 일봉은 자신도 모르게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 어린 소녀의 모습이 자신의 가슴에 새겨진 것이.
팔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피나는 노력 끝에 자신은 어느덧 천린상단(千鱗商團)을 수호하는 호천대(護千隊)의 정식 대원이 되었고, 어린 소녀는 꽃다운 처녀로 자라났다.
언제부터인가 임예린을 볼 때마다 일봉은 숨이 가빠지고 가슴속에 간질간질한 묘한 느낌이 들었다. 심장 박동이 유난히 빨라지고 얼굴이 붉어지기도 했다. 임예린을 한 번이라도 더 볼까 싶어 임무 중에 안가를 힐끗 쳐다보았다가 호천대주이자 사부인 풍천숙에게 따끔하게 꾸중을 들은 적도 있었다.
그런 일이 잦아지자 일봉은 그런 자신의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임예린을 멀리했다. 멀리서 임예린이 다가오면 일부러 자신이 피해가고, 부득이 마주쳐야 할 일이 있으면 늘 무표정하고 딱딱한 표정을 유지했다.
가슴 속은 콩닥콩닥 요동을 쳤지만, 그런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임예린이 비록 수양딸이기는 했으나 엄연히 천린상단 주인어른의 천금 같은 따님이었고, 자신은 상단에 소속된 일개 무사에 불과했다.
그렇게 임예린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애써 지워가던 일봉은 뜻밖에도 일 년 전부터는 대방 어른의 명으로 임예린만을 지키는 호위무사가 되었다. 임예린을 늘 가까이서 볼 수 있어서 행복했지만, 그럴수록 자신의 속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더욱 딱딱한 표정을 유지해야 했다.
“일봉은 웃을 줄 몰라? 웃으면 좋을 텐데. 그렇게 인상만 쓰고 있으니 잘생긴 얼굴이 너무 아깝잖아.”
언젠가 임예린이 일봉에게 한 말이었다.
“제 임무 중에 웃어야 한다는 임무는 없습니다.”
말도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예린은 일봉을 재미없어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옆에 있으면 예린은 늘 안심하는 듯했다. 자신이 그렇게 예린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뿌듯하기만 했다.
지금도 일봉은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보는 듯 안보는 듯하면서 예린을 지켜보고 있었다.
갑자기 바깥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후원 안으로 천린상단의 주인어른인 임풍(林豊)이 들어왔다. 일봉이 임풍에게 인사를 하려고 하자, 임풍이 손가락을 입에 대고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했다. 딸 아이의 독서를 방해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그때 임예린이 여전히 머리는 책에서 돌리지도 않은 채 일봉에게 말을 걸었다.
“일봉, 아무리 봐도 이 장부는 좀 이상하네? 장부에 기입된 항목과 액수의 총합이 맞지 않아. 혹시 장부를 기입하다가 실수가 있었던 게 아닐까? 그런데 단순 실수가 아닌 듯한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임예린에게 임풍이 웃으며 다가갔다.
“어떤 항목이 그렇게 이상하더냐?”
갑자기 임풍의 소리가 들리자 임예린은 깜짝 놀라 얼른 장부에서 눈을 돌렸다.
“아버지! 언제 오셨어요? 기척이라도 내지 그러셨어요?”
임예린이 얼른 일어나서 임풍을 맞이했다.
“허허허, 그러고 싶었으나 네가 워낙 열중하고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임풍은 자애로운 미소를 띠고 임예린을 바라보았다. 임예린은 날이 갈수록 아름다워져서 임예린을 한번 본 청년들 중에는 상사병을 앓는 사람들이 많았다. 게다가 머리도 총명하여 무엇이든지 한번 보면 절대 잊지 않았고, 상황판단력도 뛰어났다. 임풍 부부는 그야말로 잃었던 딸이 돌아왔다고 여기고 임예린을 애지중지했다.
“그래, 무엇을 보고 있었느냐?”
“이번에 항주, 소주에서 올라온 진상품의 품목과 값을 기록한 장부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렇게 이상하더냐?”
임풍이 느긋하게 수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두 지역에서 올라온 비단의 수가 작년보다 현저하게 줄어 그 수를 대조해 보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두 지역의 뽕나무밭에 딱히 병충해가 들었다는 소식도 없었고, 기후나 날씨도 적당하여 양잠에 딱히 영향을 끼칠만한 요인도 없었습니다. 양잠이 활발했으니 작년보다 올해의 비단 생산이 늘어야 정상인데 오히려 장부상으로는 줄었으니 이게 첫 번째 이상한 일입니다. 생산이 줄어 비단 한 필의 값이 작년보다 월등히 올랐다고 기재되어 있는데 이것이 두 번째 이상한 일입니다. 게다가 비단을 사들인 값의 총합이 조금씩 다 틀리니 이것이 세 번째 이상한 일입니다. 아무래도 해당 지역의 비단 객주들을 불러서 확인을 해봐야 할 듯합니다.”
임예린의 설명을 듣고 있던 임풍은 누군가가 장부를 조작해서 비단값을 빼돌리려고 했음을 즉시 눈치챘다. 하지만 임풍은 딸아이가 이것을 어찌 해결할지 자못 호기심이 생겼다.
“훌륭하구나. 작년에 뽕나무 농사가 잘되었으니 비단값이 오히려 내려가야 정상이지. 그건 네 말이 맞구나. 그런데 주판도 없이 비단값의 총계가 잘못된 것은 어찌 알았느냐?”
임풍의 질문에 임예린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소녀가 머리가 좀 좋다는 사실을 잊으셨습니까, 아버지?”
그 말은 곧 암산을 했다는 뜻이었다. 두 지역에서 올라온 비단의 수만 해도 몇천 필은 될 텐데 그 계산을 어찌 암산으로 했단 말인가. 그러나 예린의 명석한 두뇌를 잘 아는 임풍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딸이 총명하기로는 제갈공명에 버금간다는 사실을 이 아비가 잠시 깜박했구나. 하하하.”
임풍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마침 이번에 살말건(薩末建, 사마르칸트, 우즈베키스탄의 옛 수도)에 황상께서 회사품(回賜品, 조공에 대한 하사품)으로 내리시는 비단을 논의하기 위해 항주와 소주의 비단 객주들이 올라와 있느니라. 지금 그들을 보러 가는 길인데 같이 가겠느냐?”
“네! 어쩜 그렇게 제 속마음을 잘 아세요, 아버지?”
임예린이 손뼉을 치며 좋아하자 임풍이 껄껄 웃으며 한 손으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어릴 때 양친을 잃은 임예린을 수양딸로 삼았지만 다행히 임예린은 성격이 쾌활하고 낙천적이었다. 그리고 애교와 재롱도 많아 임풍에게 늘 커다란 즐거움을 안겨다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임예린은 호기심이 많아 상단의 일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경험하는 것을 좋아했다. 물건의 품질을 직접 살펴보고 물건값도 직접 계산해보고 싶어 했고, 무엇보다도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는 다양한 물건들을 직접 보고 싶어 했다.
“장 총관, 곧 상단 본점으로 딸아이와 함께 가겠네. 채비를 해주게나.”
“예, 주인어른.”
임풍과 임예린이 동장안가(東長安街)에 자리 잡은 상단의 본점으로 떠나자 일봉도 말을 타고 묵묵히 이들의 뒤를 따랐다.
말을 타고 한참을 가자 눈앞이 탁 트이며 황궁이 있는 장안가(長安街)가 눈에 들어왔다. 장안가에는 고관대작들과 대부호들의 집이 모여 있었는데 그 동쪽 끝자락에 천하제일상단이라고 일컬어지는 천린상단의 본점이 있었다. 천린상단의 본점은 그 자체가 하나의 성을 이룰 만큼 전각의 규모와 개수가 어마어마했다.
임풍은 본점에서 기다리고 있던 항주와 소주지역의 비단 객주들에게 임예린을 소개했다.
“이 아이가 내 딸아이라오. 얘야, 인사드리거라.”
비단 객주들은 임예린을 보자 양귀비가 울고 갈 외모라느니, 눈빛이 맑고 총명해 보인다느니, 아버지를 쏙 빼닮았다느니 하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호호호, 과찬의 말씀 감사합니다. 제가 객주님들이 보내주신 장부를 보다가 좀 궁금한 점이 있어서 이렇게 외람되이 왔습니다.”
“아이고, 외람되다니요. 무엇이든지 하문해 주시지요. 저희가 아는 한 성심성의껏 답해드리겠습니다.”
객주 중에 대표인 듯한 나이가 지긋하고 풍채가 좋은 노인이 만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호호호, 유 객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정말 감사드려요. 그럼 세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세 가지가 아니라 백 가지라도 궁금한 게 있으시면 얼마든지 물어보셔야지요. 그래, 무엇이 궁금하신지요?”
비단 객주들은 임풍의 환심을 사려고 임예린을 향해 온갖 말을 다 동원하여 아첨을 떨었다. 비록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다들 속으로는 어린 계집이 뭘 안다고 어른들이 계신 자리에 나왔을꼬 하는 생각이었다.
임예린이 좌중을 둘러보며 미소를 짓더니 입을 열었다.
“작년에는 항주와 소주의 양잠 농가 8,760여 개에서 금라(錦羅) 1,780필, 능라(綾羅) 3,570필, 단삼(緞衫) 4,150필, 견사(絹紗) 6,730필, 겸사(縑絲) 11,270필 등 도합 27,500필의 비단이 생산되었습니다. 그러나 올해에는 뽕나무 농사도 풍년이고 양잠에 피해를 줄 만한 천재지면이나 이변이 없었음에도 금라 1,120필, 능라 2,230필, 단삼 3,600필, 견사 4,870필, 겸사 8,750필로 그 수가 대폭 줄었어요. 이상하지요? 또한, 이를 다 합치면 20,570필로 작년보다 무려 6,930필이 줄었는데도 올해 청구하신 비단 가격은 오히려 작년보다 은자 37,900냥이 늘었습니다. 이게 어찌 된 영문일까요?”
임예린의 입에서 비단의 품목은 물론, 가격까지 줄줄 나오자 비단 객주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뿐만 아니라 농가별로 생산한 비단의 총계가 장부에 적힌 것과는 다르니 이에 대한 합당한 설명도 듣고 싶습니다.”
임예린이 생글거리며 웃고 있었지만 그 말뜻은 자명했다. 즉, 너희들이 빼돌린 비단 필수와 금액을 이실직고하라는 뜻이었다. 임예린의 말을 듣던 비단 객주들은 모두 사색이 되었다.
원래 이들은 천린상단에서 비단을 담당하는 정 행수에게 뇌물을 주고 비단의 수량과 가격을 거짓으로 기입했다. 8,700여 개나 되는 양잠 농가의 비단 필수와 가격을 모두 조금씩 다르게 해놓았기 때문에 장부를 대충 봐서는 잘못된 점을 절대 찾을 수 없었다. 비단 객주들은 설마하니 상단의 총책임자인 임풍이 장부에 적힌 비단의 수량을 하나하나 세어보지는 않으리라 생각하고 대담하게도 장부를 조작했던 것이다.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 아가씨께서 혹시 계산을 잘못하신 것은 아니신지요?”
비단 객주의 대표인 유 노인이 말을 더듬으며 임예린의 말에 반박의견을 내놓았다. 그 말에 다른 객주들도 수군거리며 유 노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어린 소녀가 그 복잡한 계산을 제대로 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임예린이 유 노인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과연 그럴까요, 유 객주님? 같이 한번 따져볼까요?”
임예린의 입에서 각 비단 종류별 가격과 가격의 총합이 마치 책을 보고 읽는 듯, 줄줄 나오기 시작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그 모습에 비단 객주들은 하나같이 놀라서 입을 떡 하니 벌리고 다물지 못했다. 세상에 두뇌가 이렇게 명석한 사람도 있단 말인가?
멀찌감치 떨어져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일봉은 넋이 나간 객주들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났다.
‘그러니 속이길 왜 속여. 저 영감들 이제 경칠 일만 남았군.’
슬쩍 임예린에게 눈길을 돌리니 임예린은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계속 줄줄 비단 가격과 수량을 읊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본 게 한두 번도 아니었지만 볼 때마다 늘 놀라웠다. 그리고는 속으로 그 옛날, 책사 중의 책사라는 강태공이나 제갈공명이 우리 아가씨보다 더 똑똑했을까 하고 생각해보기도 했다.
“자, 유 객주님. 이제 어찌 된 영문인지 한번 말해보실까요? 아, 혹시 저희 상단에서 비단을 담당하는 정 행수와 미리 얘기를 한번 해보셔야 하나요? 정 행수를 만나고 싶다면 지금 즉시 응천부(應天府, 남경) 옥사로 가 보시면 됩니다. 판관 유 대인께 이미 말씀을 드려놓았으니 금방이라도 옥사 안으로 안내해 드릴 겁니다.”
그 말은 정 행수가 장부를 위조한 죄로 지금 하옥되어 있으니 너희들도 곧 그렇게 되도록 해주겠다는 뜻이었다. 물론 정 행수가 하옥되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으로 그 말을 듣자 유 노인을 비롯하여 십여 명의 비단 객주들은 사시나무 떨듯 떨며 모두 임예린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아이고, 아가씨.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저희가 옥에 갇히면 시골에 있는 노모와 처자식은 굶어 죽습니다. 제발 불쌍히 여기시고 한 번만 봐주십시오.”
잘못이 들통이 나자 비단 객주들은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었다. 그러나 임예린의 목소리는 오히려 더욱 엄해졌다.
“처자식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장부를 위조하여 거금 37,900냥을 빼돌리려 했으니 이는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임예린의 목소리가 서릿발처럼 차가워지자 비단 객주들은 눈물로 읍소했다.
나이 든 사람들이 땅바닥에 꿇어앉아 애원하는 모습을 차마 계속 보기 어려워 임예린은 ‘어떻게 할까요?’라는 눈빛으로 아버지 임풍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임풍은 뜻대로 하라는 표시로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였다.
임예린이 다시 엄한 눈빛으로 비단 객주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번 한 번은 봐 드리겠습니다. 대신 물건값의 백 분의 일로 받던 거간비를 이번만큼은 삼백 분의 일로 받되, 양잠 농가에서 비단을 사들이는 비용은 한 푼도 깎지 말아야 합니다. 그럴 수 있겠습니까?”
당장 관아에 넘겨져 치도곤을 맞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던 비단 객주들은 임예린의 말에 살았구나 싶었다. 거간비가 비록 삼 분의 일로 줄기는 했으나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비단 객주들은 임예린의 처사에 감읍해 하며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또다시 이런 일이 발생할 때는 관아에 고하는 것은 물론, 해당 객주와의 거래를 끊고, 두 번 다시 이 바닥에 발도 붙이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알겠습니까?”
“아이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아가씨. 이번만이라도 이렇게 넘어가 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임풍은 아직 나이가 어린 딸이 환갑이 넘은 능구렁이 같은 객주들을 노련하게 다루는 모습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허허허, 제법이구나. 그들을 따끔하게 혼내면서도 살길을 열어주었으니 아마도 그 노인네들이 네게 크게 고마워할 게다.”
상단 본점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임풍이 임예린을 칭찬했다.
“호호호, 이게 다 아버지께 보고 배운 걸요?”
예린이 눈웃음을 지었다.
“아버지, 제가 청이 하나 있는데 들어주시겠어요?”
“청이라니?”
“이번에 살말건(薩末建) 사신들이 황상께서 내리시는 회사품을 받고 돌아갈 때 아버지도 같이 가신다고 들었어요. 그때 저도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살말건까지는 일 년도 넘게 걸리는 힘든 여정이야. 게다가 비적들이 우글거리는 천산산맥을 지나가야 해. 여리디여린 네가 갈 길이 아니야.”
임풍은 예린의 청이 당치도 않다는 듯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도 보셨지만 저는 그렇게 여린 소녀는 아니랍니다. 게다가 무공이 출중한 일봉이 늘 저를 지켜줄 텐데 뭘 그렇게 걱정하세요? 안 그래, 일봉?”
임예린이 갑자기 일봉을 쳐다보며 생긋 웃었다. 일봉은 묵묵히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가다가 그 웃음에 쿵 하고 심장이 멎는 듯했다. 하지만 일봉은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보세요. 일봉도 그렇다잖아요.”
“어허, 안된대도!”
“그냥 얌전히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께서 하시는 모습을 지켜만 볼게요. 살말건은 중원과는 문물이 사뭇 다르다는데 그게 너무나 궁금해서 그래요. 그리고 제가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를 보좌하면 아버지도 편하시잖아요?”
아닌 게 아니라 똑소리 나는 임예린은 모든 일을 알아서 척척 진행했기 때문에 같이 있으면 임풍이 딱히 신경 쓸 게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는 하나 그 위험한 길을 꽃 같은 딸을 데리고 갈 수는 없는 일이다.
“허허, 이 녀석. 내가 허락을 한다 해도 네 어머니가 허락지 않을 게야.”
“그건 걱정 마세요. 어머니께는 제가 잘 말씀드릴게요. 그럼 아버지는 허락하신 거예요?”
“원, 녀석도. 허허허. 이 아비가 졌구나.”
임예린의 말에 임풍은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임풍과 임예린이 집에 도착하여 함께 걸어가는데 내원을 둘러싼 담장 너머로 누군가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흥!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뺀다고 어디서 근본도 모르는 년이 들어와서 설치고 다니는 꼴이라니. 정말 꼴불견이야, 꼴불견!”
“그러게 말이다. 이러다가 천린상단이 피 한 방울 안 섞인 외부인에게 통째로 넘어가는 게 아닌가 몰라.”
“쉿! 조용히들 하거라.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우연히 담장 너머에서 들려온 얘기를 들은 임풍의 안색이 노기로 달아올랐다. 이름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임예린을 두고 하는 말이 분명했다.
“이런 고얀 놈들이 있나. 감히 내 집에서 어떤 놈들이 이렇게 입에 담지도 못할 소리를 한단 말이냐? 내 당장 이놈들을...!”
“아버지, 잠시만요!”
임풍이 화를 내며 담장 안에서 수군거린 사람들을 잡아들이려 하자 임예린이 얼른 임풍의 소매를 잡았다. 누가 이야기를 했는지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임예린은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바로 자기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숙부 임호(林胡)와 그 딸 임화령(林花令)이었다.
후사가 없는 임풍 부부가 어느 날 갑자기 수양딸이랍시고 자기를 데리고 들어왔으니 임호 부녀가 자기를 좋게 볼 리가 없었다. 임호 부녀는 혹시라도 임풍이 천린상단을 임예린에게 넘겨줄까 봐 늘 노심초사했다. 임풍도 그 사실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친동생을 어찌할 수도 없고 해서 그저 두고만 보고 있는 형편이었다.
“제가 굴러 들어온 돌은 맞잖아요. 그러니 아버지도 너무 개의치 마세요.”
임예린이 임풍을 보며 싱긋 웃었다. 임풍은 그 웃음이 도리어 더 마음 아팠다. 자기의 귀에 들리는 것이 저 정도이니, 아마 자신 모르게 괴롭힘도 많이 당하리라 생각되었다.
한숨을 내쉬는 임풍을 보며 임예린이 팔짱을 끼며 애교를 부렸다.
“아이, 아버지, 인상 그만 쓰세요. 잘생기신 얼굴에 주름 늘어요. 그리고 아까 약속하신 것 꼭 지키셔야 해요?”
자기가 당하는 상처보다 임풍이 마음고생 할 것을 더 염려하는 임예린의 마음이 예뻐서 임풍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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