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30화 (30/201)

#   30 - 광세일소_한추영 - 1239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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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9화. 무고한 피를 손에 묻히고 (1)

석추명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황보가 왜 여기 이렇게 처참한 몰골로 있단 말인가!

“십 년 전, 나는 황보에게 무림맹에 잠입하여 무공비급 하나를 찾아오라고 시켰지. 당시 참룡대의 대주였던 육굉이 무림맹에 잠입하여 비급을 탈취하는 데 성공했지만 무림맹의 끈질긴 추격을 받아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어.”

고개를 떨구고 있던 황보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얼마나 오랫동안 고통 속에서 지냈는지 총기로 가득 찼던 깨끗한 눈동자는 썩은 생선 눈알처럼 초점을 잃고 흐릿했다.

“육굉이 목숨을 걸고 구한 그 비급을 황보가 손에 넣었지만 황보는 나에게 바치지 않고 도리어 무림맹에게 뺏겼다고 얘기했지. 황보는 죽은 육굉 마저 죄인으로 만들었던 거야.”

교주가 몸을 돌려 석추명을 바라보았다.

“그 비급이 무엇인지 알겠느냐?”

그때 황보가 시선을 돌려 석추명을 바라보았다. 눈빛이 마주치자 석추명은 온몸이 감전이라도 된 듯 찌르르 떨려왔다.

“호, 혹시 중양일지... 가 아닙니까?”

“잘 아는군. 황보는 발칙하게도 중양일지를 찾지 못했다고 얘기한 뒤 그것을 뢰정에게 주었고 뢰정은 그것을 너에게 가르쳤다. 알겠느냐?”

교주의 목소리가 지하 뇌옥에 울려 퍼졌다.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뢰정 사부님은 저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시며 이 모든 무공은 신교의 무공이며, 본인이 직접 연구한 무공이라... 하셨습니다!”

“우하하하. 이제 보니 석 대주가 순진한 면이 있구만. 중양일지를 보고 혼자 연구했을 테니 그 말이 아주 틀린 말도 아니겠구만. 클클클.”

석추명은 여전히 황보의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자신이 신교에 들어온 지 벌써 십 년. 그 십 년 동안 황보는 이 지하 뇌옥에 갇혀 있었단 말인가. 그 반쪽짜리 무공비급 때문에? 석추명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그랬을까? 그냥 사실대로 고했으면 됐을 것을. 왜 이 엄청난 고통을 감내하며 지내왔단 말인가!

“이제 말해보게, 황 장로. 내 말이 맞지 않나?”

갈라지고 바싹 마른 황보의 입술이 힘에 부친 듯 천천히 움직였다.

“교주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들릴 듯 말 듯, 모기소리보다 작은 소리가 황보의 입에서 났다.

“황 장로와 뢰 장로가 나를 아주 깜쪽같이 속여 왔더군.”

교주는 옥문을 열게 하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뢰 장로가 달아났다. 제놈 혼자 살겠다는 거지. 황 장로는 어릴 때부터 뢰 장로의 친구가 아니었나?”

황보는 힘없이 교주를 한번 보더니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게 친구를 잘 사귀어야지.”

교주는 황보를 향해 냉소를 날리더니 옥문대장에게서 철채찍을 받아 석추명에게 건네주었다.

“황 장로가 나를 속였으니 이는 신교의 십만 교도 전체를 모욕한 것과 다름없다. 신교의 모든 교도를 대신해서 석 대주가 저자를 단죄하라.”

교주의 말에 석추명은 깜짝 놀랐다.

“교, 교주님...!”

석추명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내 말을 거역할 셈이냐, 석 대주?”

교주의 지엄한 명령에 석추명이 다시 황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초췌한 얼굴의 황보와 눈이 마주쳤다. 황보는 힘없이 석추명을 바라보며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교주의 뜻대로 하라는 표시였다.

석추명은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황보는 무림맹이 화살을 쏘며 공격해왔을 때 자신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었다. 게다가 고아였던 자신을 신교로 불러주어 글과 무공을 배우게 해주었고, 이렇게 잘 장성하게 해준 장본인이 아닌가! 석추명은 아직도 그때 황보가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따스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석추명이 부들부들 떨며 철채찍을 들어 올렸다. 철채찍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촘촘하게 박혀 있어서 한번 내리칠 때마다 살점이 뜯어지도록 특수한 고안이 되어 있었다. 석추명이 채찍을 들어 올린 채 또다시 망설이자 황보는 망설이지 말라는 듯 다시 눈짓을 했다.

교주님의 명령은 따르지 않을 수 없다는 뢰정과 황연화의 말이 떠올랐다.

석추명의 눈가가 붉게 충혈되며 눈물이 맺혔다.

이를 악물고 채찍을 내리쳤다.

촤악! 채찍이 빈약한 육신에 내려꽂히는 소리와 함께 살점이 뜯기는 소리가 났다. 한 번의 채찍질에 황보는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채찍을 쥔 석추명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온몸을 감싸는 절망감에 지금의 상황이 꿈속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촤악. 또다시 철채찍이 내리꽂혔다. 황보의 육신이 꿈틀거리며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내놓았다. 석추명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스승님, 이 죄를 어이합니까. 스승님, 이 죄를 어이합니까!

극심한 고통 속에 일그러지는 석추명의 얼굴이 재밌기라도 한 듯, 교주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지켜보고 있었다.

****

“뢰 장로가 장가방(張家幇)으로 숨어 들어간 정황이 있습니다. 즉시 장가방을 치라는 교주님의 명이 떨어졌습니다.”

부대주 맹환이 가져온 정보를 보고 석추명은 마음이 무거웠다.

장가방 방주 장일웅은 사람됨이 충직하고 의로워 무림에서 협사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장일웅은 체격이 곰처럼 크기 때문에 무림별호가 대웅대협(大雄大俠)이었다. 대웅이라는 별호에는 또한 큰 영웅이라는 뜻도 있었다.

뢰정은 평소 정사 양쪽을 개의치 않고 사람을 사귀었기 때문에 대웅대협 장일웅과도 친분을 쌓았다. 그런데 그걸 빌미로 장가방을 치라는 교주의 명이 떨어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장가방은 무림맹의 사천분타를 적극 후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림맹과 대적 관계에 있는 신교의 입장에서는 늘 눈엣가시였다. 마침, 이참에 장가방을 휩쓸어버려 무림맹에 타격을 주려는 숨은 의도 또한 깔려있었다.

- 감히 신교에 반기를 드는 놈들은 살려둘 수 없다. 장가방에서 살아 숨 쉬는 것은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처단하도록 하라!

석추명은 장일웅을 치는 것이 내키지 않았으나 교주의 명은 지엄한 것!

장가방이 차라리 악인의 무리라면 강호의 악을 제거하는 셈 치고 손에 피를 묻히겠으나 의로운 자의 피를 묻히려니 양심이 너무 괴로웠다.

그러나 설사 옳지 않다고 생각하더라도 이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거부는 곧 항명, 이는 곧 출교(黜敎)를 의미함과 동시에 그 죄는 죽음에 해당되었다.

가슴이 답답하여 한참 망설이는 석추명에게 맹환이 야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번 일이 내키지 않는다면 대주는 한 발 빠지시오. 내가 알아서 다 해치우리다.”

석추명이 맹환을 쳐다보았다. 맹환은 공을 세우고 싶은 마음에 좀이 쑤셔 참지 못하고 있었다. 석추명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교주님이 내리신 임무에 대주가 빠질 수는 없지. 즉시 대원들을 모아라. 내일 밤 자정에 장가방을 친다.”

석추명의 말이 떨어지자 맹환은 의외라는 듯 눈을 치켜떴다.

석추명은 내키지 않는 일을 결심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지만 일단 마음을 정하면,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안타깝지만 장가방과 대웅대협의 목숨은 여기까지인 것이다.

석추명의 눈에 결연한 의지가 비쳤다.

‘스승님, 부디 장가방에서 도망치십시오. 제 손으로 스승님을 붙잡아야 하는 시련을 저에게 주지 마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석추명은 스승 뢰정에게 마음속으로 말을 건넸다.

****

장가방 가주 장일웅은 자신의 눈에 비치는 모습을 믿을 수가 없었다.

불과 한 시진 전만 하더라도 장가방 백여 명의 식솔들은 달콤한 꿈을 꾸며 단잠에 빠져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마교놈들이 몰아닥친 것이다. 이름 그대로 지옥에서 올라온 것 같은 수라대가!

장가방의 호위를 담당하는 백여 명에 달하는 무사들은 제대로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모두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양측의 무위는 처음부터 워낙 압도적인 차이를 보였다. 장가방에서 무공이 가장 뛰어난 장로 일곱 명의 목숨이 젊은 대주의 손에 순식간에 이슬로 사라졌다.

일곱 장로가 쓰러지자 젊은 대주는 나머지를 부대주에게 일임했고, 부대주는 지옥에서 올라온 야차처럼 장가방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은 하나도 살려두지 않았다.

장일웅은 내원(內園)의 마당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집안의 종복들과 호위무사들을 바라보았다. 하나같이 몸에 치명적인 검상을 입었으며, 벌어진 상처에서 꾸역꾸역 흘러나온 선혈이 내원의 마당을 온통 검붉은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마당 한 모퉁이에 핀 하얀 수선화가 붉은 핏자국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어 더욱 처연한 느낌이 들었다.

집안 곳곳에서 역겨운 피비린내가 풍겨왔다.

장일웅의 몸도 온통 상처투성이였고 상처에서 난 피로 옷은 원래 색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장일웅이 핏발선 눈으로 검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젊은이를 노려보았다. 젊은이는 악명 높은 수라대주라고 하기에는 눈빛이 맑았다.

“더러운 마교놈들, 하늘이 두렵지도 않느냐?”

장일웅의 목소리가 쉰 듯 갈라져서 나왔다.

“나도 장가방을 이렇게 공격하게 되어 유감이오. 그러니 이제 그만 실토하시오. 백련신교의 뢰정 장로를 어디에 숨겼소이까?”

수라대주 석추명이 장일웅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석추명의 눈빛에는 승리자의 기쁨도, 포식자의 즐거움도 없었다. 담담한 눈빛은 슬픈 빛마저 띠고 있었다.

“흥! 뢰정은 우리 집에 오지 않았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느냐? 그리고 설령 왔다 하더라도 내가 살자고 어찌 오랜 벗을 밀고하겠느냐? 네놈이 나를 잘못 봐도 너무 잘못 보았구나.”

장일웅은 검을 움켜쥔 손에서 땀이 나자 다시 고쳐 잡으며 말했다.

장일웅의 눈에는 비장하고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

“과연 듣던 대로군요. 그럼 어쩔 수 없지요.”

말을 마친 석추명이 장일웅에게 검을 휘둘렀다. 검이 어찌나 가벼운지 빠르기를 종잡을 수가 없었는데 동쪽을 찌르는 듯하다가 서쪽을 베고, 하체를 휩쓸어 오다가 돌연 가슴을 내찌르니 장일웅은 손발이 어지러워 다시 한번 허벅지를 찔리고 말았다.

윽!

장일웅은 이빨을 깨물었지만 새어 나오는 신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칼에 베인 상처에서 붉은 피가 번져 나오더니 금세 옷을 적셨다.

“나는 아직 항복할 수 없다! 다시 공격해라!”

장일웅이 소리를 지르며 석추명을 도발했다.

챙챙챙챙. 두 사람은 다시 몇 초식을 겨루었지만 이미 기진한 장일웅은 신묘한 무공을 펼쳐보이는 젊은 수라대주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장일웅은 싸우면 싸울수록 의혹이 들었다. 이 젊은 대주가 뉘기에 무공이 이처럼 뛰어나단 말인가? 게다가 무공에서 사특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으니 현문정종임이 틀림없다.

젊은 대주는 금방이라도 자신을 벨 수 있지만 왠지 그러기를 꺼리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너의 무공은 마교의 무공이 아니다. 그리 신묘한 무공으로 어찌 이리 악한 일을 한단 말이냐? 무고한 피를 손에 묻히면 하늘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

“신교의 공격을 받게 된 것은 장 대협의 운이 여기까지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도리에 맞지 않는 일도 많으니 너무 억울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대협의 시신은 제가 잘 거두어 수습하겠습니다.”

그 말에 장일웅은 눈을 부릅떠서 석추명을 바라보았다.

“네놈들의 목적은 뢰 장로를 찾는 것이 아님을 안다. 네놈들은 그것을 빌미로 지금 장가방의 식솔들을 모조리 처단하고 있다. 이는 필시 무림맹과의 싸움을 염두에 둔 처사일 것이다. 어떠냐, 내 말이 맞지 않느냐?”

석추명은 잠시 말을 하지 않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짐작하신 대로입니다. 강호에 몸담은 이상, 이 모든 일이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장일웅이 갑자기 껄껄껄 웃었다.

“하하하.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더니 무림맹과 신교 간의 싸움에 우리 힘없는 장가방이 휘말린 것이로군. 약한 자의 비애로다. 약육강식의 무림에서 힘이 없으니 결국 이렇게 스러져 가는 것이로구나. 누구를 탓하랴. 세상에 정의가 사라진 지 오래고, 나는 힘이 없는 것을...!”

쓰러진 집안의 종복들과 무사들을 바라보는 장일웅의 눈에서 뜨거운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모습에 석추명은 한숨을 내쉬었다. 석추명은 장일웅의 기개를 존중하여 최대한 수모를 주지 않고 정중하게 끝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장 대협, 다시 들어갑니다.”

석추명의 검이 빛을 뿌리며 장일웅을 베어왔다. 장일웅은 끝까지 검을 들어 막으려 했지만 다른 쪽 다리에 다시 검상을 입고 털썩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안간힘을 쓰며 무릎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근육이 파열된 두 다리에는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아! 정녕 이렇게 끝이란 말인가!’

좌절한 장일웅은 결국 살기를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그때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이 공중에 울려 퍼지더니 한 여인이 품에 어린 아들을 안고 내원으로 도망쳐 들어왔다.

그 여인은 바로 장일웅의 아내 한 씨였다. 품에 안은 아이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장일웅의 외아들이었다.

“여보!”

여인이 소리를 지르며 장일웅에게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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