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28화 (28/201)

#   28 - 광세일소_한추영 - 123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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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7화. 첫 번째 임무 (1)

맹환은 교주 앞이라는 사실을 의식한 듯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 공격해 들어왔다. 무시무시한 칼바람이 일고 검에서 오싹한 검기가 퍼져 나와 방 안을 메웠다.

“지난번 비무대회 때는 내 잠시 방심했지만, 이번에는 전력을 다할 테니 각오하시오, 부대주.”

맹환의 검이 바람을 가르며 석추명의 안면부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석추명은 고개를 젖혀 가볍게 검을 피했다.

“좋지. 이번에 지면 확실하게 승복하겠지?”

“물론이오. 교주님께서 지켜보시니 만약 부대주가 지면 부대주 역시 깨끗이 승복해야 할 거요.”

맹환의 검이 돌연 육중해지더니 강맹한 칼바람이 석추명의 가슴을 압박해왔다. 그와 동시에 패도(覇道)적인 기운을 뿜어냈다. 검이 닿는 곳마다 광풍이 일었고 칼질 한 번 할 때마다 무시무시한 힘이 석추명을 짓눌러왔다.

‘이건, 광풍마검(狂風魔劍) 아닌가? 이 녀석이 어째서 이 무공을 구사하는 거지? 4대 신공은 대주급 이상이 아니면 전수하지 않는 무공인데 설마 이 녀석이 훔쳐 배웠단 말인가?’

그러나 놀라고만 있기에는 맹환의 공세가 너무 날카로웠다.

석추명은 신룡보(神龍步)라는 경공을 펼쳐 말 그대로 구름 속을 노니는 신룡처럼 몸을 위로 솟구치더니 잽싸게 맹환의 뒤로 날아갔다.

“하하하, 내 검을 받아낼 수 없으니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만 치는군.”

맹환의 입꼬리가 올라가며 석추명을 조롱하듯 바라보았다. 어깨높이로 들어 올린 맹환의 검에서 시퍼런 검기가 발출되면서 24식의 광풍마검이 강맹한 기운을 내뿜었다.

맹환이 일반대원들에게는 금지된 무공을 펼쳐 보이자 사람들은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특히 총관은 수심 가득한 표정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맹환 저 녀석이 우승에 눈이 멀어 제 무덤을 제가 파는구나. 필시 교주가 이를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텐데.’

총관은 걱정되어 교주의 얼굴을 살폈다. 그런데 교주는 사색이 된 총관과는 달리 재밌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총관, 맹환이라는 저놈, 상당히 재미있는 놈이군. 나한테 허락도 받지 않고 감히 신교의 사대무공 중 하나를 배운 주제에 그 무공을 겁도 없이 내 앞에서 펼치다니. 우하하하.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녀석인 건가 아니면 호랑이 담이라도 삶아 먹은 건가?”

의외로 교주의 기분이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그, 그렇습니다. 무식한 건지 대범한 건지 아무튼 평범한 녀석은 아닌 듯합니다.”

“그런데 말이야, 이번 비무대회에서 이겼다는 놈이 신교의 사대무공 중 하나인 광풍마검을 과연 막아낼 수 있을까?”

교주의 물음에 총관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얼른 답을 했다.

“석추명은 아직 사대무공을 모르는데 어떻게 막아내겠습니까? 신교의 사대무공은 구파일방도 막기 어려운 본교의 호교 무공입니다. 교주님께서 아무래도 석추명을 너무 과대평가하시나 봅니다. 하하하.”

그러자 교주는 석추명을 턱으로 가리키며 총관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저 녀석, 그렇게 밀리는 것 같지는 않군.”

교주의 말에 총관은 의아하여 석추명을 바라보았다.

과연 석추명은 여유 있게 맹환의 광풍마검을 막아내고 있었다. 바람처럼 가볍게 몸을 놀려 맹환의 패도적인 검을 피하면서 동시에 신묘한 공격을 퍼부었다. 맹환의 검이 지독히 무겁다면 석추명의 검은 바람에 날리는 깃털처럼 가볍기 그지없었다.

무공의 경지가 깊어지면 무거운 병기를 가볍게 다룰 수 있고, 더욱 깊어지면 그 반대로 가벼운 것을 무겁게 펼칠 수 있다지만, 지금 석추명은 깃털같이 가벼운 무공으로 태산처럼 무거운 검을 상대하고 있으니 이는 절대 석추명 또래의 후기지수들이 펼칠 수 있는 무공이 아니었다. 돌연 석추명의 검법이 급변했다.

“아니, 저것은?!”

석추명을 바라보던 총관이 깜짝 놀랐다.

석추명의 손에 들린 검이 빙그르르 회전하더니 맹환의 얼굴과 가슴을 휘몰아쳐 갔다. 회전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검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맹환은 석추명의 회전공격을 쳐내려 했지만, 석추명의 검세가 워낙 가벼워서 힘줄기가 하나도 실리지 않은 듯하니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우리 신교에 저런 무공도 있던가?”

석추명의 무공을 바라보던 교주가 낮은 목소리로 총관에게 물었다.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지만 뭔가 오싹한 기운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 그게... 석추명을 가르친 뢰 장로가 워낙 박학다식하다 보니 우리 신교의 무공이 아닌 것도 많이 알고 있을 것으로 생, 생각됩니다.”

총관이 불길한 느낌에 더듬거리며 답을 하자 교주가 가소롭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총관을 빤히 쳐다보았다. 총관은 교주의 시선을 의식하자 등골이 오싹해지며 식은땀이 났다.

교주가 다시 석추명에게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

“뢰 장로가 박학다식하다고는 하나 내가 보기에 총관도 그에 못지않아.”

“과, 과찬이십니다. 교주님.”

“그러니 말해봐. 석추명 저 녀석의 무공이 어떠한가? 무슨 무공인 것 같나?”

“그, 글쎄 말입니다. 움직임이 표홀하면서도 법도가 엄정한 것이 현문정종의 무공인 듯합니다.”

“자네가 보기에도 그렇지? 내가 보기에도 저 무공은 도가 계열의 무공인 듯하구만.”

“도, 도가라고 하시면...?”

총관의 말에 교주가 고개를 돌리고 총관을 바라보며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마치 먹이를 앞에 둔 맹수의 웃음과도 같은 미소였다.

“도가 무공의 꼭대기에 누가 있을 것 같은가?”

교주의 물음에 총관은 문득 십여 년 전의 일이 떠올라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교, 교주님, 설마...!”

“흐흐흐, 총관의 생각이 옳아. 나에게는 잃어버렸다고 보고하고서는 자기네끼리 독차지하려고 했던 거지. 쥐새끼 같은 놈들! 크흐흐흐.”

교주는 잠시 석추명과 맹환의 비무를 지켜보았다.

맹환이 비록 광풍마검을 익히기는 했으나 아직 공력이 오성밖에 달하지 못해 석추명을 압도하지 못 하는 반면, 석추명은 공세와 방어를 적절히 조절하며 여유 있게 맹환을 몰아가고 있었다. 게다가 암만 봐도 아직 본인이 가진 무공을 다 풀어놓은 것 같지 않았다.

“이제 그만!”

교주의 말이 떨어지자 석추명과 맹환은 동시에 손을 거두었다.

맹환은 숨을 헐떡이며 전신이 땀투성인 데 비해 석추명은 이마에 땀방울 하나 나지 않았다. 누가 보더라도 승자와 패자는 분명했다.

“맹환, 네놈이 비무대회의 결과에 승복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네놈이 몰래 익힌 무공 때문이더냐? 무공을 몰래 익힌 것만으로도 사지를 자르는 중벌을 받아야 하거늘, 감히 내 앞에서 대놓고 그 무공을 드러내다니, 건방진 놈!”

맹환은 교주의 차가운 눈길이 자신에게 와 닿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교, 교주님, 용서해 주십시오.”

맹환은 그제야 두려운 마음이 들어 황급히 교주 앞에 무릎을 꿇었다. 비무에서 이겼다면 비록 금기의 무공을 배웠다고 해도 교주가 책망하지 않을 텐데 졌기 때문에 이제 단죄는 피할 수 없었다.

맹환은 무릎을 꿇은 채 옆에 서 있는 석추명을 슬쩍 노려보았다.

분명히 이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건만, 그것은 자신의 착각이었다. 신교의 사대무공 중 하나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석추명 이 녀석의 무공이 자신보다 한 수 위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무공을 익혔는지는 모르겠지만....

“석추명, 네놈의 무공은 뢰 장로가 전수한 것이렷다?”

얼음같이 차가운 교주의 눈이 이번에는 석추명을 향했다. 석추명은 그제야 머릿속에 뢰정이 교주 앞에서는 절대 이 무공을 쓰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교주 앞에서 이 무공을 쓰지 말라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 혹시 이 무공도 광풍마검처럼 숨겨진 신교의 무공이 아닐까? 혹시 내가 허락받지 못한 무공을 익힌 것이 아닐까?

“그, 그렇습니다.”

석추명은 꿀꺽, 하고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내가 분명히 실전처럼 싸우라고 했거늘, 네놈은 여기서도 전력을 다하지 않았어.”

교주가 눈빛을 번쩍이자 석추명은 차가운 냉기가 온몸을 꿰뚫고 지나가는 듯했다.

석추명은 뢰정 장로가 전수한 무공을 발휘하면서도 본 실력의 3할 정도를 숨겨두었는데 교주가 이를 간파한 것이다. 석추명은 긴장해서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네놈이 교주의 말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냐?”

교주가 다그치자 석추명은 고개를 들고 교주를 바라보았다.

“제가 감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흥! 두 놈 중 한 놈이 죽지 않고서는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거늘, 네놈은 저놈을 죽일 생각이 아예 없지 않았느냐?”

차가운 교주의 눈빛이 가시처럼 석추명을 찔러왔다.

“저, 저는....”

석추명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비록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는 하나 어찌 동료에게 칼을 댄단 말인가. 이제는 등뿐만 아니라 이마에서도 식은땀이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석추명, 네 이놈! 답을 해라!”

교주의 눈에서 안광이 폭사되어 나왔다.

“예, 교주님.”

석추명은 눈을 질끈 감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결심이 섰다.

비록 죽더라도 동료에게 검을 댈 수는 없다.

“죄송하오나 통촉해 주십시오. 동료의 몸에....”

그때 교주가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우하하하”

난데없는 웃음소리에 석추명과 맹환을 포함하여,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교주를 바라보았다. 교주는 한참 웃더니 웃음을 뚝 멈추고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훌륭하다. 과연 신교의 미래를 밝힐 동량이로다. 석추명을 수라대의 대주로 명한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에 석추명은 깜짝 놀랐다.

“교, 교주님, 감당할 수 없습니다.”

“네 무공은 사대주들과 겨루어도 결코 부족함이 없다. 그리고 동료와 부하를 위하는 그 마음은 바로 싸움터를 누비는 대주가 가져야 할 첫 번째 덕목이다.”

교주는 고개를 돌려 총관을 바라보며 말했다.

“총관은 지금 당장 대주 취임을 준비하도록 하라.”

“예, 교주님.”

총관이 교주의 명에 엄숙히 대답했다.

맹환은 석추명이 수라대 대주로 임명되자 질투심이 끓어올랐다. 자신이 교주 앞에서 이렇게 자리를 깔아주지만 않았어도 석추명이 수라대주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신이 괜히 나서는 바람에 석추명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이다.

교활한 놈...! 언젠가 네놈을 반드시 잘근잘근 씹어 주리라.

맹환은 석추명이 일부러 무공을 숨겼다가 교주 앞에서 보란 듯이 드러냈다고 여기고 석추명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교주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그런 맹환을 지켜보았다.

‘네 욕심이 네놈을 충성스러운 개로 만들리라. 네놈에게는 또 다른 임무가 있으니 너무 아쉬워 말아라.’

“그리고 맹환은 수라대 부대주로 임명한다.”

교주의 말이 떨어지자 이번에는 맹환이 놀라서 교주를 바라보았다.

“맹환, 너는 무공은 다소 부족하나 놀라운 집념을 보여주었다. 신교의 사내라면 응당 그런 집념을 가져야지. 앞으로는 광풍마검 등 신교의 사대무공을 떳떳이 배우도록 하라. 그리고 석 대주를 도와 신교에 충성을 바치도록 하라.”

무공을 몰래 배우고 비무대회 결과에 승복하지 않은 죄로 중벌에 처해 질 줄 알았던 맹환으로서는 정말 뜻밖의 처사였다.

자포자기하고 있던 맹환은 기뻐서 털썩 무릎을 꿇었다.

“교주님, 속하 맹환, 교주님과 신교를 위해 분골쇄신하겠습니다.”

석추명도 얼른 맹환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

“수라대와 신교의 앞날은 앞으로 너희 두 사람에게 달려있다. 석추명과 맹환은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신교에 충성하겠는가?”

“예. 교주님!”

“어떤 임무를 받는다 하더라도 충성을 다하겠느냐?”

남무궁이 다짐을 받기라도 할 듯이 재차 물었다.

“예, 교주님. 어떤 임무든지 신명(身命)을 다 바쳐 수행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남무궁의 오른쪽 입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남무궁이 기분이 좋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과연 믿음직한 신교의 인재들이다.”

남무궁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두 사람 앞으로 다가왔다.

“수라대주 석추명, 부대주 맹환에게 첫 번째 임무를 내리노라. 임무를 완수하지 못할 시에는 엄벌로 다스릴 것이다!”

석추명은 대주로 맡을 첫 임무라는 말에 잔뜩 긴장되었다.

“수라대주는 지금 즉시 본교의 역적인 뢰정을 잡아들여라!”

서릿발 같은 교주의 명이 떨어지자 석추명은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었다.

석추명은 교주의 얼굴을 함부로 보지 말라는 경고도 잊은 채 고개를 들고 교주의 눈을 마주 보았다.

“교, 교주님!”

뢰정이 누구인가?

지난 십여 년간 자신을 보살펴준 은인이자 무공을 전수해준 스승이고,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지우였다. 그런 뢰정을 자신의 손으로 잡아 바치라고 하다니!

석추명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고 교주를 불렀다.

그러나 교주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뢰정은 지난 십 년간 나를 속이고 본교를 배반하였으니 지금 당장 잡아 오너라. 명왕대!”

교주가 허공을 향해 소리치자 검은색 장포로 온몸을 두른 십여 명의 무사들이 허공에서 연기처럼 스르르 나타나 교주전 바닥에 엎드렸다.

“예! 교주님.”

명왕대(冥王隊)는 교주 직속의 호위대대.

당연히 교주의 가까이에서 교주를 호위하는 것이 임무였지만 갑자기 지척에서 명왕대가 나타나자 석추명과 맹환은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교주전에는 지금까지 교주와 총관, 그리고 자신들을 포함하여 비무대회 우승자들 외에는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저 많은 인원이 어디에 숨어 있었단 말인가?

석추명은 자신의 무공이 비록 천하제일은 아니지만 방 안에 사람이 숨어있는 정도는 충분히 알아챌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의 기감을 완전히 속였던 것이다.

교주 남무궁이 말을 이었다.

“명왕대는 신임 수라대주를 도와 지금 당장 가서 뢰정을 잡아 오라.”

“존명!”

교주의 명을 받자 명왕대는 다시 스르르 아무런 인기척도 내지 않고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석 대주는 무얼 하는 게야? 당장 움직이지 않고!”

자신의 사부인 뢰정을 잡아 오라는 말에 얼이 빠졌던 석추명에게 교주의 추상같은 꾸짖음이 날아들었다.

맹환은 뢰정을 잡아들이라는 교주의 하명을 듣자 이게 웬 떡이냐 싶었다. 수라대 내에서 늘 자신과 부딪치는 두 사람이 바로 뢰정과 석추명이기 때문이었다.

석추명은 같은 동료라 싫은 티를 낼 수 있었지만 뢰정은 장로라는 까마득히 높은 신분이라 그동안 싫어도 싫은 티를 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런 맹환의 속마음을 어찌 알고 교주가 물꼬를 터 준 것이다.

석추명의 넋 나간 모습을 힐끗 본 맹환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내가 대주로 승진할 날이 머지않았구나.

맹환이 득달같이 소리쳤다.

“반도 뢰정을 즉시 잡아 오겠습니다.”

맹환과 석추명이 교주전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교주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듯 미소가 떠올랐다.

‘뢰정, 네놈이 그동안 잘도 나를 속여 넘겼겠다? 오냐, 네놈이 키운 놈에게 한번 당해 보아라. 흐흐흐.’

뢰정은 지난 십여 년간 교주의 눈을 속여 석추명에게 중양신공을 전수했는데 이제 자신의 제자에게 붙잡히게 될 운명이 되었다. 만약 석추명이 사제지간의 의리 때문에 뢰정을 붙잡지 않는다면 임무를 실패한 죄를 물어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석추명이 마음을 돌려 뢰정을 붙잡는다면 당연히 석추명에게는 상을 주고 뢰정은 엄벌로 다스리면 되리라. 어떻게 되든지 간에 두 사람의 사제관계는 깨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남무궁은 자신의 계략이 흡족한 듯 손에 든 술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는 허공을 노려보며 손에 든 술잔에 힘을 주었다.

‘뢰정, 이놈, 어디 두고 보자.’

남무궁이 손아귀에 힘을 주자 백옥으로 만든 진귀한 술잔이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바닥에 우수수 떨어졌다.

****

석추명을 교주전에 보낸 뒤 뢰정은 이상하게도 계속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방 안을 서성거렸다. 손으로 가슴을 쓸어보았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어허, 오늘따라 이상하구나. 도대체 기분이 왜 이런 것인가?’

뢰정은 자신의 불안감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사실 잘 알고 있었다.

응룡검 황보가 중양일지를 빼돌린 이후 지난 십여 년간 뢰정은 한시도 마음 편한 적이 없었다. 늘 혹시라도 교주가 그 사실을 알아챌까 봐 조마조마했었다.

그러나 다행히 십여 년간 아무 일도 없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황보는 지하뇌옥에 갇힌 뒤 나오지 못하고 있고, 추명에게는 중양일지의 무공을 가르치면서도 그 무공이 어떤 무공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절체절명의 순간이 아닌 다음에야 쓰지 말도록 신신당부했기 때문에 석추명은 지난번 비무대회 때도 그 무공을 쓰지 않았다.

오늘은 교주전에 비무대회 우승으로 인사를 드리러 갔을 뿐이니 교주가 중양신공을 알아볼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아까부터 진정이 되지 않았다.

뢰정이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방문을 열고 후원으로 나오는데 키가 크고 요염한 미인이 뢰정에게 다가왔다.

“아니, 너는 불모전(佛母展)의 사소혜가 아니냐? 네가 수라각에는 어쩐 일이냐?”

뢰정이 의아한 표정으로 사소혜를 바라보았다.

백련신교는 교주를 미륵불에 비유하기 때문에 교주의 부인을 불모(佛母)라고 불렀다. 불모전이란 다름 아닌 교주 부인의 거처였다.

사소혜는 교주의 부인인 황연화를 오랫동안 모셔온 측근으로 풍만한 가슴과 기다란 다리가 통째로 드러나는 아슬아슬한 옷을 즐겨 입었다. 게다가 표정은 늘 도도하고 요염했으며, 이야기를 할 때면 상대방의 두 눈을 그윽하게 응시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사소혜를 처음 보는 남자들은 대부분 얼굴을 붉힌 채 어디에 눈길을 둬야 할지 몰라 허둥거리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남자들은 또 은근히 곁눈질로 사소혜의 몸매를 감상했고, 사소혜는 그런 눈길을 즐겼다.

그러나 뢰정은 그런 일반적인 남자에 속하지 않았다. 자신이 아무리 요염하게 표정을 지어도 늘 목석을 쳐다보듯 눈길 하나 바뀌지 않았다. 그럴수록 사소혜는 더욱 뢰정을 도발하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언젠가는 뢰 장로님도 제 눈길에 녹아들 날이 있을 테지요.’

뢰정을 바라보는 사소혜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뢰정은 황연화의 사형이었기 때문에 겉으로 예를 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불모(佛母)께서 뢰 장로님께 급히 드리라는 전갈이 있어서 왔어요.”

사소혜가 눈웃음을 치며 하얀 손을 앞으로 내밀어 황연화가 보낸 전갈을 뢰정에게 전했다.

뢰정은 사소혜의 교태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문득 짚이는 구석이 있어 얼른 서한을 펴들었다.

서한의 글자는 몇 자 되지도 않았는데 황급히 휘갈겨 쓴 듯 아직 먹물도 마르지 않은 채였다.

- 화급출교(火急出敎).

급히 교를 벗어나라는 뜻이었다. 뢰정은 서한을 보자마자 아까부터 들던 불안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교주가 자신을 잡아들이려고 명왕대를 보낸 것이다. 명왕대라면 일각도 못되어 들이닥칠 것이다. 이것저것 짐을 챙길 여유 따위는 없었다.

뢰정은 즉시 방 안으로 들어가서 하반부만 남은 중양일지를 챙긴 뒤 밖으로 나와 사소혜에게 말했다.

“불모께 몸조심하시라고 전하거라.”

말을 마친 뢰정이 손바닥에 공력을 모으니 순식간에 삼매진화가 피어오르며 서한을 태웠다. 불에 탄 서한은 재가 되어 금방 바람에 흩어져 날아갔다.

뢰정은 그런 뒤 휘리릭 몸을 날려 눈 깜짝할 새 수라각의 지붕으로 올라갔다.

사소혜는 무엇인가 눈앞을 번뜩이며 지나간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뢰정이 수라각 지붕 위에 올라가 있자 호기심이 일어 자신도 얼른 지붕 위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사소혜가 수라각 지붕 위에 올라갔을 때 이미 뢰정은 사라진 후였다.

“하하, 뢰 장로님 정말 신법 하나는 끝내주시네.”

사소혜가 뢰정의 신법에 감탄하며 지붕에서 내려오자 돌연 파바박, 하고 공기의 흐름이 흩뜨려지면서 열두 명의 고수들이 검은색 장포를 휘날리며 수라각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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