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27화 (27/201)

#   27 - 광세일소_한추영 - 1229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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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6화. 떠오르는 신교의 청년 검객

수라대 평대원 담예린은 땀에 전 무복을 벗으며 뜨거운 물 속에 몸을 담갔다. 목욕실 안에 가득 찬 뿌연 수증기 사이로 담예린의 나신이 드러났다.

그러나 아름다워야 할 여체는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무수한 검상. 모두가 수라대원으로서 임무를 수행하다가 얻은 영광의 상처들이었다.

담예린은 물속에 느긋하게 몸을 담근 채 최근에 입은 어깨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얼마 전 황허현 장강수채(長江水寨)를 공격하다가 입은 상처였다.

백련신교는 백성들의 고혈을 빠는 지방 관아들과 주구들을 주로 공격했지만, 백성을 수탈하는 녹림 도적 떼들도 내버려 두지 않았다. 백련신교가 내세우는 기치는 ‘제세구민(濟世求民)’. 열다섯 어린 나이에 담예린이 신교에 평생을 바칠 각오를 하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 입게 된 상처는 좀 더 각별한 의미를 지녔다. 바로 수라대 부대주 석추명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라대가 황허현 장강수채를 급습하자 뜻밖에도 수적들은 강하게 반발해왔다. 녹림 도적들이나 수적들은 힘없는 백성들에게는 흉포했으나 무공이 높지 않기 때문에 그동안 소탕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황허현 장강수채에 수룡방의 고수 한 명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담예린은 느닷없이 튀어나온 수룡방 고수와 사생 결단을 벌였으나 적의 무공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게다가 엄청난 신력의 소유자였다. 매번 작전을 나갈 때마다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지만 이번만큼은 정말 끝이구나 싶었다.

적의 칼날이 사정없이 목을 내리쳐 오던 순간. 자신을 온몸으로 감싸며 적의 검을 막아내던 사람이 있었다. 바로 부대주 석추명이었다. 석추명은 한 손으로는 담예린을 감싸 보호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그 유명한 수라신검(修羅神劍)을 떨쳐냈다.

챙챙챙챙. 순식간에 열두 번의 검초가 이어지면서 수룡방 고수는 결국 검을 떨구고 말았다.

“괜찮아?”

석추명의 서글서글한 눈을 바라보던 그 순간, 담예린은 숨이 턱 막혀 왔다. 수라대의 대주가 공석인 지금, 부대주인 석추명이 수라대를 이끌었다. 그리고 담예린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싸울 맛이 났다.

석추명은 적진에서는 늘 앞장섰고, 부하들이 위험에 처하면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같이 나타나서 곤경에서 구해주었다. 그리고 평소에는 대원들과 농담도 하며 허물없이 지내서 대원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았다. 그래서인지 다른 부대의 대원들도 자신들을 부러워했다.

게다가 석추명은 이상하게도 자신에게 특히 신경을 많이 써 주었다. 임무 중에는 자신이 위험하지 않나 수시로 확인했고, 임무가 끝나고 논공행상을 할 때는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고 했다. 어느 날, 담예린이 석추명에게 대놓고 물어봤다.

“부대주님, 저 좋아하십니까?”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에 석추명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저한테 왜 이렇게 잘 대해주시는 겁니까? 모르는 사람들 오해하게. 저도 그렇게 꽉 막힌 여자 아닙니다. 그러니 저를 좋아한다면 남자답게 시원하게 말해보세요. 그래야 저도 입장을 정리하죠.”

직설적인 담예린의 말에 무슨 소린가 하던 석추명이 싱긋 웃으며 어깨를 턱 쳤다.

“좋아하지. 동료로서. 하하하. 그냥, 예린이는 좀 더 챙겨주고 싶네. 굳이 이유를 대자면 이름이 누구랑 비슷해서...?”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아팠던 기억이 났다. 아, 이 사람, 좋아하는 사람이 있구나. 누군지는 몰라도 그 사람의 이름이 나랑 같구나. 질투가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람을 좋아하는 건, 그 사람의 자유가 아닌가. 내가 지금 부대주를 마음에 담고 있는 것처럼....

담예린이 상념에 빠져 있을 때 갑자기 목욕실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뭐, 뭡니까? 부대주님?”

뜻밖에 들어온 사람은 석추명이었다. 석추명도 목욕통 안에 담예린이 있는 것은 미처 몰랐던지 한 손으로 두 눈을 가렸다.

“야, 나 안 봤다. 오해하지 마라. 또 좋아하냐는 둥 이딴 소리 하지 말고.”

그러면서 석추명은 벽에 걸린 옷을 던져주었다. 담예린은 옷을 입으면서 그런 석추명을 노려봤다.

“누가 뭐라고 했어요?”

담예린이 옷을 다 입자 석추명이 씩 웃으며 담예린의 어깨를 또 탁, 하고 쳤다.

“그놈의 성질하고는. 임무 투입이다. 빨리 가자.”

“다음부터는 꼭 인기척 좀 내시죠? 목욕실 안에 사람 있는지 확인도 좀 하시고.”

담예린이 쏘아붙이자 석추명이 껄껄껄 하고 웃었다.

“왜 그렇게 내외하냐? 누가 들으면 담예린 여자인 줄 알겠다?”

“부대주님!”

담예린이 눈을 부릅뜨며 때리려 하자 석추명이 달아나며 소리쳤다.

“서둘러라. 늦으면 군령에 따라 엄벌이다.”

담예린이 투덜거리며 석추명을 쫓아갔다. 석추명이 오기 전에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수라대의 풍경이었다.

*****

섬서 화련산(火蓮山)의 백련신교 총단.

삼월의 따스한 봄 햇살이 쏟아지는 후원에는 나뭇가지마다 새순이 돋고 봄이 왔음을 알리는 때 이른 봄꽃들이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문사 차림을 한 중년의 사내가 창을 열고 창밖에서 지저귀는 산새 소리를 들으며 상념에 잠겨있었다. 사내는 피부가 깨끗하고 세 갈래 수염을 고아하게 길렀으며 머리에는 문사건을 쓰고 손에는 부채 한 자루를 쥐고 있었다.

백련신교의 사대장로 중 한 명인 수라검 뢰정(賴庭)은 십 년 전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당시, 왕중양이 남긴 무공비급을 쫓던 황보는 참룡대 대주 육굉이 목숨과 맞바꾼 중양일지를 손에 넣었으나 그것은 반쪽짜리에 불과했다. 전반부는 무림맹에 뺏겼던 것이다. 하반부라도 건진 것은 당시 육굉이 나름 석추명을 믿는 모험을 감행했기 때문이었다.

황보는 중양일지의 하반부만 가지고 돌아왔지만 하반부만 찾았다고 교주에게 보고할 수는 없었다. 성격이 급하고 참을성이 없는 교주는 필시 진노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하반부 반권을 찾은 것은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것이 뻔했다.

생각다 못한 황보는 자신의 오랜 지기(知己)인 뢰정을 찾아왔다.

“뢰정, 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중양일지 하반부를 바치나 안 바치나 교주께서는 나를 용서치 않을 것 같네. 그래서 말인데....”

황보는 뢰정의 눈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이 하반부를 좀 맡아주었으면 좋겠네. 나는 교주님께 육굉이 중양일지를 탈취했으나 무림맹에 뺏겨 버렸다고 보고를 드리겠네.”

“아니, 자네, 그게 무슨 소리인가? 그러다가 교주께서 아시는 날엔 자네뿐만 아니라 참룡대 전체가 살아나지 못할 걸세!”

뢰정은 황보의 말에 대경실색하여 황보를 만류했다.

“아니야, 자네나 나나 지난 이십여 년간 교주가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겪지 않았나? 만약 이 책이 교주의 수중에 떨어진다면 강호는 다시 피바람이 불걸세. 그때는 아무도 교주를 제지할 수 없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네. 더 이상 무고한 피를 흘려서는 안 돼.”

황보의 목소리는 결연했다.

“이 책을 바치지 않으면 교주께서는 임무 실패의 책임을 물어 자네에게 중벌을 내리실 걸세. 어쩌면 지하 뇌옥에 갇혀 못 나올 수도 있어. 그걸 어떻게 감당하려고 이러나?”

뢰정은 걱정이 되어 황보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했으나 황보는 듣지 않았다.

“나 한 사람 뇌옥에 갇히는 것이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겠나? 그러나 이 책으로 인해 앞으로 수천, 수만의 무고한 생명이 피를 흘리게 된다면 그거야말로 우리가 천추의 대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그걸 막고 싶을 뿐이야.”

황보는 결심이 선 듯 뢰정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자네가 이 책을 맡아주게나. 그리고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이 책을 전해서 교주가 몰고 올 피바람을 막아주게. 이 부탁을 할 만한 사람은 자네밖에 없어.”

“흠...!”

황보의 말에 뢰정은 깊은 탄식을 터뜨렸다. 만약 이 일이 발각된다면 자신도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음은 물론, 수라대 전체가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황보의 말대로 이 신공이 교주의 손에 들어간다면 강호 전체에 피바람이 불 것은 자명했다. 그렇게 되면 수십, 수백 명이 아니라 수천, 수만 명의 무고한 목숨이 피를 흘릴 것이다. 뢰정은 황보의 말 대로 대의를 위해서 불충한 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어느새 십 년이 흘렀구나. 지난 십 년은 매 순간이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지.’

뢰정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황보는 중양일지를 무림맹에 뺏겼다고 교주에게 보고했고, 진노한 교주는 임무 실패에 대한 잘못을 물어 황보를 죽이려고 했으나 뢰정이 중간에 나서서 겨우 교주를 설득하여 지하 뇌옥에 가두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리고는 지난 십 년 동안 뢰정은 한 번도 황보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사실 아직 살아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근래에 나를 대하는 교주의 눈길이 심상치가 않아. 드디어 나도 떠날 때가 온 것인가.’

뢰정이 이제 막 터지기 시작한 매화 꽃망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스승님, 안에 계십니까?”

돌연 문밖에서 소리가 나자 상념에 잠겨있던 뢰정은 정신을 차렸다.

“추명이냐? 들어오너라.”

곧 문이 열리고 스무 살이 훌쩍 넘어 장성한 모습의 석추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키가 컸던 추명은 청년이 되자 훤칠한 미남자로 바뀌어 있었다.

추명이 들어오자 뢰정은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지금 교내에서 온통 네 이야기밖에 들리지 않는구나. 잘했다. 정말 잘해주었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스승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스승님이 아니었으면 제가 어찌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하하하, 아니다. 네가 주야로 쉬지 않고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이지. 장하다. 자부심을 가질 만해.”

뢰정은 만족스러운 듯, 석추명을 바라보며 한 손으로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뢰정은 백련신교의 사대장로 마황신뢰(馬黃伸賴) 중 한 명으로 수라검이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얼마 전에 있었던 신교의 비무대회 결과를 놓고 얘기 중이었다.

백련신교는 교도들의 사기를 높이고 무술을 장려하기 위해서 매년 부대주급 이하 전 교도가 참여하는 비무대회를 개최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비무대회의 최종 우승자가 네 개 대대에서만 나오면서 비무대회는 네 개 대대가 서로 기량을 겨루는 대회로 성격이 바뀌었다.

즉 마립(馬立)이 이끄는 탈명대, 황보(黃報)가 이끄는 참룡대, 신갈(伸葛)이 이끄는 광풍대, 그리고 뢰정이 이끄는 수라대(修羅隊)가 각 부대의 명예와 자존심을 걸고 무공을 겨루었던 것이다. 황보는 십여 년 전 지하 뇌옥에 갇혔으나 4개 대대의 비무전은 계속되었다.

그런데 올해의 우승자가 바로 수라대의 신임 부대주 석추명이었다. 석추명은 압도적인 무위로 다른 부대의 부대주급를 모두 이기고 승리를 거머쥐었다. 어떤 사람들은 대주들과 맞붙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석추명의 우승으로 수라대는 잔치 분위기였다. 대주 자리가 공석이었던 수라대는 오랫동안 한 번도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 그런데 신임 부대주 석추명이 오자마자 우승을 거머쥔 것이다.

신교의 수뇌부들도 장강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낸다고 후대로 갈수록 점점 더 걸출한 기량을 가진 인재가 나오니 모두 제 일처럼 기뻐했다.

그런데 지난 십여 년간 석추명의 무공을 가르친 사람이 바로 수라검 뢰정이었다.

십여 년 전, 황보가 데려온 석추명은 검에 대한 놀라운 소질을 보이며 솜이 물을 흡수하듯이 뢰정이 전수하는 모든 무공을 비상한 속도로 습득해 나갔다.

맹자도 천하의 뛰어난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을 군자삼락(君子三樂) 가운데 하나로 말했지만 석추명에게 무공을 가르치는 재미는 그 어떤 즐거움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뢰정 자신도 신교의 사대검왕(四大劍王) 중의 하나로 검에 대해서는 누구 못지않게 열정과 재능이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석추명은 그런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 지경이었다. 석추명은 하나를 들으면 둘을 깨닫고, 셋을 창조해내는 아이였다.

뢰정은 가르치는 재미에 푹 빠져 결국 자신의 절기는 물론, 자신이 아는 천하의 검법을 모조리 전수하고는 그것도 부족하여 드디어 황보가 전해준 중양일지에 실린 무공도 가르치기 시작했다.

중양일지에 적힌 무공들은 하나같이 절세 신공이었지만 대부분이 막대한 내력을 바탕으로 했다. 내력을 쌓는 방법은 일지의 전반부, 그중에서도 제일 첫 부분에 실려있었는데 전반부가 없으니 부득이 내력은 다른 방법을 통해 쌓아야 했다.

뢰정의 내공도 상당히 정순한 편이었으나 웬일인지 중양신공과는 잘 맞지 않아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중양신공을 만든 왕중양이 전진교 도사니 아무래도 도가 쪽의 내가 기공법이 잘 맞겠지. 이 일은 아무래도 초의와 상의해야겠어. 곤륜파도 도가 계열이니 내 사문의 내가 기공법보다 더 잘 맞지 않을까.’

초의는 곤륜파의 유명한 검객 초의공이었다. 젊은 시절 막역지우였으나 서로 가는 길이 달라진 이후, 지난 십여 년간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사부된 자로서 비록 중양일지의 전반부는 없지만 중양일지에 있는 절세 신공을 쓸 수 있는 내가 기공법을 찾아서 석추명에게 전해주고 싶은 것이 뢰정의 마음이었다.

뢰정은 석추명을 바라보며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추명은 모르리라. 자신이 왕중양의 절세신공을 익혔음을.

“교주님께서 곧 찾으실 게야. 아마 너에게 큰 상을 내리실 듯하구나. 어쩌면 비어 있는 수라대주의 자리를 맡기실지도 모르지.”

뢰정의 말에 석추명은 깜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보다 경험도 많고 실력도 뛰어난 선배들과 동료들이 구름처럼 많은데 제가 감히 대주라니요. 감당할 수 없습니다.”

“허허허. 그게 어디 네 뜻대로 되는 일이더냐? 교주께서 시키시면 받들 뿐.”

마침 그때 방문 밖에서 총관이 교주가 이번 비무대회의 우승자들을 찾는다는 전갈을 전해왔다. 뢰정은 웃으며 어서 가 보라고 했다. 석추명은 부득이 뢰정에게 인사를 하고 황급히 다른 우승자들과 함께 교주전으로 갔다.

교주전에 다다르자 석추명은 살짝 긴장되었다. 그동안 교주를 직접 대면해서 명을 받는 일은 뢰정이 담당했기에 석추명은 수라대 부대주이기는 했으나 멀리서 교주를 보기만 했을 뿐 직접 만날 기회는 없었다.

석추명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떨기는 마찬가지였다. 그중에는 수라대 조장인 맹환도 있었다. 맹환은 이번 대회에서 석추명에게 아깝게 패해 차석을 차지했다.

그러나 맹환은 결과에 승복할 수 없었다. 자신이 석추명에게 진 이유는 다만 시간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패배를 자인해야 할 만큼 크게 다친 것도 아니고, 계속 수세에만 몰린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맹환은 이번 비무대회의 우승자는 자기가 될 것이라고 내심 자신만만했었다. 그만큼 실력이 출중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최종우승을 석추명에게 빼앗기자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맹환이 보기에 석추명은 무골호인이었다. 늘 실실거리며 웃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부하 대원들과 격의 없이 지내는 것도 마땅찮았다. 부하들이 임무 수행 중에 다치는 것은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인데 석추명은 늘 그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자신이 보기에 석추명은 한 마디로 ‘무인의 기본이 안 된 놈’이었다.

자신이 그런 녀석에게 패배해서 우승을 놓쳤다는 것이 분하고 억울했다. 그리고 자신이 받아야 할 교주의 관심도 석추명이 가져갈 게 분명했다.

“교주님의 하명이 있기 전에는 눈을 들지 마시오. 교주님의 허락 없이 교주님과 눈을 마주치는 자는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오.”

교주전에 들기 전에 총관이 말했다.

‘교주가 평상시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거나 다른 의견을 내놓는 수하들을 싫어한다더니 과연 눈도 마주치지 못하게 하는군.’

석추명은 속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교주님, 비무대회 우승자들을 데려왔습니다.”

“들어오너라.”

총괸이 아뢰자 방문 안에서 낮고 굵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비무대회 우승자 다섯 명은 교주전에 들어가자마자 교주가 앉은 자리 앞에 엎드렸다.

모두 총관에게 들은 대로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머리를 바닥에 숙이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라.”

교주의 말이 떨어지자 그제야 다섯 명의 우승자들은 주섬주섬 고개를 들었다.

석추명도 조심스럽게 고개를 드는 순간, 교주와 눈이 딱 마주쳤다. 교주가 자신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석추명은 당황하여 얼른 고개를 다시 숙였다.

교주는 불교의 사천왕처럼 체격이 늠름하고 얼굴은 각졌으며 기이하게도 두 눈썹과 머리카락이 짙은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눈썹과 머리카락 모두 구불구불해서 마치 푸른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인상을 주었는데 이는 교주가 익힌 특이한 무공 때문이었다.

“네가 이번에 우승했다는 놈이구나.”

교주의 말에 석추명은 얼른 대답했다.

“모두 스승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네 스승이 누구냐?”

“수라검 뇌정 장로입니다.”

석추명의 대답에 교주가 흥미롭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수라검 뢰정에게 무공을 배웠다고? 이거 재미있구만. 뢰 장로가 한가하게 제자나 양성하고 있는 줄은 내 미처 몰랐어.”

어쩐지 호의적이지 않은 교주의 말에 석추명은 당황스러웠다.

“그래, 이 녀석에게 마지막에 진 놈은 누구냐?”

교주가 다섯 명을 둘러보며 물었다.

맹환은 ‘졌다’라는 말에 마음이 상해서 교주가 묻는데도 미처 대답을 못 하고 말았다.

맹환이 대답을 하지 않자, 옆에 있던 총관이 맹환에게 계속 눈치를 주었다.

총관의 눈치를 받던 맹환이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교주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비록 제가 비무에서는 일초 반식 뒤지기는 했으나 만약 실전이었다면 절대 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맹환의 폭탄 발언에 총관과 나머지 우승자들은 깜짝 놀라 맹환을 바라보았다. 총관의 안색은 아예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렸다. 그러나 교주는 재미있다는 듯 맹환을 바라보았다.

“네가 감히 몇십 년간 이어 내려온 신교 비무대회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냐?”

교주의 말에 맹환은 당황하여 얼른 말을 덧붙였다.

“당치도 않습니다. 저는 다만 시간이 부족하여 이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종우승을 놓쳐서 아쉽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맹환의 말에 교주가 광소를 터뜨렸다.

“우하하하하, 네놈 말이 참으로 재밌구나. 시간이 부족해서 졌다니....”

웃음을 멈춘 교주가 눈을 지그시 뜨며 맹환과 석추명을 쳐다보았다.

“좋다. 네놈이 실전에서는 지지 않는다 하였으니 지금 여기서 실전처럼 다시 한번 붙어보거라. 실전이니만큼 두 놈 중 한 놈이 죽지 않고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교주의 말이 떨어지자 석추명은 깜짝 놀랐다. 비무를 하는데 상대방을 죽이라니, 그것도 다름 아닌 동료를.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교주님, 그 말씀은 거두어 주십시오!”

석추명이 두려움을 무릅쓰고 교주에게 이야기해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시끄럽다! 당장 시행하라!”

교주는 몸을 휙 돌려 단상 위에 마련된 자리로 올라갔다. 석추명과 맹환을 제외한 나머지 우승자들은 뒤로 물러섰다.

석추명은 맹환을 바라보았다. 지난번 비무대회에서 일부러 봐준 것도 모르고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다니. 이렇게 뒤끝이 있는 인간은 석추명이 정말 싫어하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석추명이 쏘아 보았지만 맹환은 도리어 신이 났다. 교주가 바로 코앞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다시 싸울 기회를 잡은 것이다. 여기서 저놈을 납작하게 눌러준다면 교주의 관심은 물론, 십만 교도 전체가 자신을 다시 볼 게 아닌가!

맹환은 자신이 분명히 이길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맹환은 대주급 이상만 익힐 수 있는 신교의 사대무공 중 광풍마검(狂風魔劍)을 몰래 익히고 있었는데 엊그제 광풍마검이 오성에 이르렀다. 언젠가는 배울 무공이니 이기기만 하면 광풍마검을 익힌 것은 교주님이 봐주시리라. 게다가 석추명은 아직 사대무공에 입문조차 못 했을 테니 당연히 우승은 자기 차지가 될 터였다.

자신만만한 맹환은 분노에 찬 석추명의 눈길은 무시한 채 검을 뽑아 들었다.

맹환이 검에 공력을 주입하자 검이 저절로 떨리며 위잉 하고 검명(劍鳴)을 토해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저놈을 확실하게 눌러주어야겠군.’

석추명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석추명에게는 뢰정이 가르쳐 준 무공 중 지난번 비무대회에서 펼치지 못한 무공들이 있었다. 그 무공은 반드시 절체절명의 순간에만 사용하고 절대로 교주 앞에서 쓰지 말라고 뢰정이 신신당부했기 때문에 지난번 비무대회 때는 쓰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맹환이 교주 앞에서 자기를 도발하자 뢰정의 간곡한 충고는 어느새 머릿속에서 까맣게 사라져 버리고 따끔하게 혼을 내주어야겠다는 생각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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