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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세일소-26화 (26/201)

#   26 - 광세일소_한추영 - 1226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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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5화. 한 놈도 용납할 수 없다.

부맹주 천계심은 맹의 총단을 수비할 최소한의 인력만 남겨놓고 무림맹의 실전부대인 남천단, 용봉단, 암영단을 모조리 이끌고 양양으로 내려갔다. 또한 천림원의 강사와 생도들도 대부분 이번 전투에 참여하도록 하여 맹의 총단은 그야말로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맹주를 호위하고 또 맹주에게 무공을 배우느라 양양대전에 참여하지 못한 기하진은 내심 섭섭했다. 자신도 천림원의 다른 생도들처럼 실전에서 뛰어보고 싶었다. 마교라면 누구보다 싫어했고 무공도 상당히 깊어져서 이번 싸움에서는 큰 전과를 올릴 자신이 있었다.

기하진은 양양으로 떠나는 지학에게 몸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다.

“걱정 마라. 내가 마교 놈들을 죄다 극락으로 보내어 버릴 테니까 너는 맹주님이나 잘 지켜드려.”

조금씩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는 지학의 말에 기하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때 마침 옆에서 남이도 아미파 여제자들과 함께 출전준비를 하고 있었다. 남이가 안 보는 척하면서 기하진을 힐끗 쳐다보았다. 지난번 음양사자의 처소를 다녀온 이후로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유대감이 생겨났다.

기하진은 남이에게 몸조심해서 잘 다녀오라는 뜻으로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남이는 기하진의 미소에 알았다는 듯이 역시 입가에 미소를 띠고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남이의 뺨에 발그레한 홍조가 피어났다.

****

부맹주 천계심이 무림맹 총단의 7할에 달하는 대규모 인력을 동원하여 양양으로 떠난 지 이틀이 지난 밤. 그날따라 달이 유난히 밝더니 곧 구름이 달을 뒤덮었다. 사위는 너무 고요하여 적막하기까지 한 밤이었다.

기하진은 맹주전의 번을 서고 있었다. 맹주를 지키는 암영단조차 양양으로 떠나고 맹주전에는 지금 용봉단원 중에서 차출된 오십여 명이 각처에 몸을 숨기고 맹주전의 경호를 담당하고 있었다.

기하진은 번을 서면서 무료한 나머지 요즘 한창 수련 중인 창궁무애검법(蒼穹無碍劍法)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몸을 움직였다. 마침 주위에 보는 사람도 없고 함께 번을 서는 용봉단원들과는 거리가 있던 터라 자신도 모르게 검법의 초식대로 손발을 스르르 움직인 것이다.

창궁무애검법은 기하진이 수련 중인 천마검과는 또 다른 패도적인 기상의 무공이었다. 천마검은 현재 내공수위가 낮아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지만, 창궁무애검은 현재 내공수위로도 충분히 고급 단계까지 갈 수 있어서 기하진은 요즘 수련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번을 서면서도 무공초식을 연습한 것이다.

“정신을 어디다 팔고 있는 게냐!”

갑자기 불호령이 떨어졌다. 어느새 수련에 빠져있던 기하진은 정신이 번쩍 들어 살펴보니 용봉단 부단주인 구휘가 앞에 서서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앗! 부단주님, 죄송합니다.”

구휘가 기하진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기하진을 혼낼 듯이 다가오더니 막상 앞에 서서는 씩 웃었다.

“밤낮으로 수련에 빠져있구나. 배우는 사람은 마땅히 그래야 하지.”

구휘는 자신이 기하진을 데리고 온 뒤로 가끔 틈이 날 때마다 기하진이 어떻게 지내는지 돌봐주었다. 기하진이 권학당, 지무각을 거쳐 최연소 나이로 천림원에 입교하게 되었을 때 누구보다도 기뻐했고, 마침내 쟁쟁한 후기지수들 사이에서 맹주의 제자가 되자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요즘 배우는 무공이냐?"

구휘의 말에 기하진이 씩 웃었다.

“맹주님의 창궁무애검법입니다. 정말 세상에 이렇게 위력적인 무공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구휘는 기하진을 바라보며 잔잔하게 웃었다.

“운 하나는 정말 끝내주는 놈!”

“예?”

구휘의 뜬금없는 말에 기하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녀석아, 한번 생각해보아라. 최연소로 천림원에 들어간 것도 모자라서 남들은 한번 뵙기도 어려운 맹주님의 제자가 되었으니 네 녀석 운이 그래도 끝내주는 게 아니겠느냐? 흠흠, 그러고 보니 이제 어쩌면 내 상관으로 올지도 모르니 앞으로 말조심해야겠군.”

구휘의 말에 기하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부단주님 상관이 되면 맨날 군기 잡을 겁니다. 잔뜩 긴장하십시오!”

“에라, 이 은혜도 모르는 녀석아!”

구휘가 기하진의 등을 퍽 쳤다.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적막한 맹주전 앞에 낮게 울렸다.

“그나저나 양양으로 떠난 사람들에게서 아직 별 소식 없습니까?”

“흠, 아직 적들과 조우하지는 않은 것 같구나. 그럴 리는 없겠지만 적들이 이때를 틈타 오히려 여기를 공격해올까 봐 걱정이구나. 정신 바짝 차리고 있거라.”

구휘는 왠지 모를 불안감이 들었다. 대규모 인력이, 특히 고수들만 차출되어 맹에서 빠져나갔다. 만약 적들이 이 사실을 알면 이 좋은 기회를 결코 그냥 넘어가진 않을 것이다.

구휘는 괜한 생각이라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림맹의 주력 인원들이 빠져나간 것은 일급 기밀. 그 사실을 적들이 어찌 알겠는가? 구휘는 괜히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으며 자신도 이제는 늙은 모양이라고 속을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 어디선가 미미한 진동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구휘와 기하진은 놀라 동시에 서로 바라보았다. 미미한 소리기는 했지만 수십, 아니 수백 명의 사람이 신속하게 움직이는 듯 땅이 울리고 있었다.

타다닥. 땅을 박차는 소리, 나무를 박차는 소리, 심지어 풀잎 위를 스치고 오는지 너무도 미미하여 세심하게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마저 있었다.

구휘는 긴장하여 즉시 경계를 서고 있는 용봉단원들에게 전투준비를 하라는 신호를 했다. 얼마 되지 않아 검은 무복으로 전신을 감싸고 얼굴에는 두건마저 쓴 이삼백여 명의 사람들이 맹주전을 둘러싸고 전면에 나타났다. 하나같이 체격이 크고 심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누구냐!”

구휘가 즉시 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나섰다.

조금 전까지 기하진과 농담을 하던 모습을 사라지고 어느새 구휘의 목소리에 거역하기 힘든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런 구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복면인 중 제일 선두에 섰던 자가 손을 공중으로 치켜들며 명령을 내렸다.

“공격!”

순식간에 수백 명의 적이 맹주전으로 쇄도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맹주전을 수비하는 인원은 불과 오십여 명. 일대 몇인지도 모를 너무나도 어려운 싸움이었다.

적은 잘 훈련받은 자들인 듯 검을 휘두를 때 군더더기가 없고 검세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용봉단원은 결사항전 하라. 곧 구원병력이 도착할 테니 죽기를 각오하고 맹주님을 지켜라!”

구휘는 용봉단원들에게 고함을 지른 뒤 검을 들고 적들의 두목으로 보이는 자에게 달려들었다.

“흐흐흐, 네놈이 용봉단 부단주라는 구휘로구나. 오냐, 네놈과 진즉부터 겨뤄보고 싶었느니라.”

구휘는 본래 종남파의 제자로 종남파의 진산절기(鎭山絶技)인 천하삼십육검(天河三十六劍)으로 유명했다. 이제 구휘가 천하삼십육검을 펼치자 장강 대하의 세찬 물결이 휘몰아치는 듯 강맹한 기류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구휘를 상대하는 적의 무공도 만만치 않았다. 검세가 유난히 날카롭고도 신속하여 구휘의 무공과 막상막하를 이루었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십여 초식을 겨루었다.

적의 수법을 알아본 구휘의 눈동자가 흔들리나 싶더니 갑자기 동공이 확대되었다.

“이것은 탈명추혼검(奪命追魂劍)! 탈명검 마립이 직접 왔을 리는 없고, 그렇다면 네놈은 탈명대주라는 추혼검 왕기(王起)로구나!”

구휘의 불안감이 적중했다. 과연 맹의 주력부대가 빠진 줄을 알고 백련신교가 맹주전을 급습해온 것이다.

“흐흐흐, 과연 눈썰미 하나는 제대로군. 이제 인사는 그만하고 그만 지옥으로 가거라.”

왕기의 검이 순식간에 구휘의 가슴을 찔러 들어왔다. 구휘는 즉시 검을 휘둘러 막았으나 검과 검이 부딪치는 순간, 손목이 얼얼했다. 적의 공력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구휘가 적의 검을 막아내기 무섭게 왕기가 다시 하체를 노리고 무서운 속도로 삼 검을 찔러 들어왔다. 검의 변환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검끝이 마치 세 갈래로 갈라진 것만 같았다.

쨍쨍쨍쨍.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구휘는 사력을 다해 막아내고 있었지만 적은 아직도 온 힘을 쏟지 않은 듯 여유가 있어 보였다. 다시 십여 초식을 싸우는 동안 적의 칼에 베이고 찔리며 구휘는 온몸에 검상을 입었다.

이마에도 검이 스쳐 지나간 가느다란 자국이 생기면서 상처를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핏방울이 구휘의 눈썹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핏방울이 눈 안으로 들어오자, 구휘의 시야가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적과 대치하고 있는 이때, 섣불리 눈을 깜박일 수는 없었다. 핏방울이 땀방울과 섞여 뺨을 타고 흘러내리더니 턱밑으로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구휘와 왕기가 서로 대치하고 있는 순간, 맹주전을 둘러싸고 있던 용봉단원들은 목숨을 걸고 적을 막아내느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용봉단(龍鳳團)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최정예 고수들로만 구성되어 하나같이 무공이 고강했지만, 적의 수가 워낙 많아 베어도 베어도 줄어들지 않자 힘에 부친 나머지, 드디어 적의 칼에 당해 쓰러지는 단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퍽. 피가 튀기고, 목이 달아났다. 온몸에 검상을 가득 입은 용봉단원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용봉단원들은 한 명이라도 더 베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베는 것보다 더 많은 적들이 쓰러지는 사람의 뒤를 이어 밀고 들어왔다.

왕기를 노려보던 구휘의 귓가에 용봉단원들의 몸에 적의 칼날이 꽂히는 둔탁한 소리, 쓰러져가는 단원들이 내지르는 신음소리, 무기 부딪치는 소리 등이 어우러져 들려왔다.

두 눈을 부릅뜬 구휘의 눈동자가 분노로 가득 차 파르르 떨렸다. 늘 한솥밥을 먹던 용봉단원들은 구휘에게 제자 같고 동생 같은 존재들이었다. 비록 대의 앞에서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라고 늘 가르쳤지만 하나뿐인 목숨을 어느 누가 아까워하지 않을까.

“네 이놈들!”

구휘의 입에서 울분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쯤이면 구원병력이 도착하고 남을 때인데 이상하게도 구원병력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무림맹 총단의 심장부까지 적이 침입해 들어온 것도 이상했지만 맹에서 이를 아직까지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도 너무나 이상했다.

지금 무림맹 총단의 모든 병력을 지휘하는 사람은 총군사 사마경이었다. 맹주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부맹주 천계심이라면 몰라도 총군사 사마경은 맹주의 충실한 심복이었다. 맹주가 위험에 처한 것을 알면 반드시 발바닥에 불이 나게 달려오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맹주전을 수호하는 용봉단의 절반 이상이 죽어 나가는 동안, 그 어떤 지원병력도 나타나지 않았다.

구휘는 힐끗 맹주전을 쳐다보았다. 바깥의 이런 소란을 아는지 모르는지 맹주전은 불이 꺼진 채 어둠 속에 묻혀 조용하기만 했다.

구휘는 다시 눈앞의 적을 노려보면서 기하진을 불렀다. 기하진도 그때 온몸에 핏물을 뒤집어쓴 채 사방에서 침입해오는 적들을 막아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하진아, 즉시 맹주전 앞을 지켜라. 맹주님께 접근하려는 자는 단칼에 베야 한다.”

“예. 부단주님.”

기하진이 적 사이로 몸을 날려 맹주전의 문 앞에 버티고 섰다. 그것을 신호로 구휘의 검이 웅웅 하고 용트림을 내뱉더니 질풍처럼 왕기를 휩쓸어 갔다. 왕기는 구휘의 검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검을 곧추세워 구휘의 공격을 막아내더니 숨 막힐 듯한 기세로 반격에 나섰다.

왕기는 과연 탈명추혼검이라는 별호답게 일 검에 대여섯 초식의 변초를 뿌리면서 구휘를 사정없이 압박했다. 전신에 상처를 입은 구휘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결국 왕기의 검에 가슴을 허락하고 말았다.

푹. 왕기의 검이 정확하게 구휘의 심장을 찔렀다. 가슴에서 찔러 들어간 칼날이 한 자나 등 뒤로 삐져나왔다.

“부단주님!”

그 모습에 놀란 기하진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기하진의 목소리가 구휘에게 닿기도 전에 왕기는 구휘의 가슴에 박힌 검을 빼내더니 검을 휘둘러 구휘의 목을 날렸다.

떼구르르. 눈을 부릅뜬 구휘의 머리통이 기하진의 앞까지 굴러갔다. 구휘의 머리통은 몸통에서 떨어진 채로도 분을 참지 못한 듯 잠시 수염이 꿈틀거렸다.

불과 일각 전만 하더라도 자신과 웃으며 이야기하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의 머리통이 베어져 차가운 땅 위에 굴러다니자 기하진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타오르는 울분과 함께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네 이놈들! 다 죽여버리겠다!”

이성을 잃은 기하진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기하진이 검을 치켜들고 왕기에게 달려가는 순간, 기하진의 시선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 구휘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네 이놈! 정신 바짝 차리지 못할까? 맹주님을 지켜야지!’

마치 구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구 부단주님...!’

맹목적으로 달려나가려던 기하진이 발걸음 멈추고 심호흡을 내쉬었다. 어느새 기하진의 눈빛이 다시 차가워지며 적들을 노려보았다.

‘그래, 지금은 맹주님을 지키는 것이 최우선이다. 일단 그것만 생각하자.’

뺨 위를 흐르는 뜨거운 눈물이 식기도 전에 기하진은 검을 든 손에 공력을 불어넣어 창궁무애검법을 펼치며 엄밀히 수비하기 시작했다. 한 사람도 맹주전의 문을 뚫도록 허락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새삼 다졌다.

시간이 지나자 맹주전 주위에 쓰러진 사람들의 수가 점점 늘어갔다. 용봉단원들도 이제 거의 다 죽고 남아있는 사람은 불과 십여 명도 되지 않았다.

기하진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을 새도 없이 계속해서 덤벼오는 적들을 막아 나섰다. 적을 노려보는 두 눈에서 불꽃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적들이 기하진에게 덤벼들었다. 적의 무공도 놀라웠으나 기하진은 맹주에게 전수받은 창궁무애검법과 천룡파천장(千龍破天掌)을 펼쳐 덤비는 적마다 일말의 여지도 남기지 않고 단 몇 수만에 베어버렸다.

다시 일각이 지나자 오십여 명의 용봉단원들은 어느새 모두 싸늘한 주검이 되어 맹주전 주위에 쓰러지고 기하진 혼자만 남아 칼을 지팡이 삼아 짚고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런 기하진을 바라보던 왕기가 눈에 이채를 띄었다.

“창궁무애검이라.... 네 녀석이 이번에 남궁진악이 새로 받아들였다는 제자인가 보군. 과연 무공과 끈기가 남다르구나. 하지만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왕기의 수신호에 적 두 명이 동시에 기하진에게 덤벼들었다. 기하진은 이미 온몸에 힘이 빠져 녹초가 되어 있었지만 자신이 밀리면 곧 맹주전은 끝장이라는 생각에 이를 악물었다.

기하진이 좌우에서 동시에 공격해 들어오는 적을 향해 기합을 내지르며 검을 크게 휘둘렀다. 등룡반추(登龍返追)라는 창궁무애검의 절초였다.

기하진이 반원을 그리며 검을 크게 휘둘러 두 사람의 검을 동시에 막아내자 기하진에게 덤벼들던 두 사람은 검을 쥔 손이 불에 덴 듯 뜨거워서 동시에 검을 떨구고 말았다. 젊은 청년에게 이런 놀라운 무위가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적들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두 사람은 기하진의 검을 피하는 동시에 양손을 교차하여 양 옆구리에 갖다 대더니 비도를 꺼내어 기하진에게 날렸다.

네 자루의 비도가 바람을 가르며 각기 다른 각도로 기하진에게 쏜살같이 날아왔다. 이미 기력이 고갈된 기하진은 몸을 비틀어 한 자루는 피하고 두 자루는 간신히 검으로 쳐냈다. 하지만 마지막 한 자루가 그만 어깨에 박히고 말았다.

윽!

기하진이 어깨에 박힌 비도를 뽑아 땅바닥에 던지기 무섭게 다른 두 명이 다시 기하진에게 달려들었다. 기하진이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두르자 두 명 중 한 명의 팔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하지만 동시에 기하진은 다른 한 명의 검에 등을 길게 베이고 말았다. 기하진의 입에서 다시 낮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윽! 기하진이 검으로 땅을 짚어 쓰러지는 몸을 지탱했다. 눈앞의 적들을 바라보는 기하진의 눈빛은 결연하기 그지없었다.

“내 목숨이 붙어 있을 때까지는 한 놈도 용납할 수 없다!”

기하진이 나직이 내뱉었다. 그 소리는 적에게 들려주기보다는 자신에게 되뇌는 소리였다.

기하진이 다시 검을 고쳐 잡자, 이번에는 그런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왕기가 직접 나섰다.

“네 주인이 네놈의 충심을 알아야 할 텐데.... 지금쯤이면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다 알 텐데 왜 나오지 않을까? 나오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나오지 않아도 살아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야. 크크크.”

왕기가 맹주를 비웃자 기하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 이놈! 헛소리 말고 덤벼라!”

기하진의 백의가 핏물로 온통 시뻘겋게 물들었다. 이마는 땀과 피로 뒤범벅이 되어 번들거렸다.

“크하하하. 그것이 소원이라면 들어주지.”

왕기가 검을 들고 기하진에게 덤벼들었다. 기하진은 창궁무애검법으로 이에 맞섰다.

그러나 강맹한 무공인 창궁무애검법은 내공소모가 너무 컸다. 이미 체력이 바닥이 난 기하진은 창궁무애검법을 연이어 펼치기가 너무나도 벅찼다.

연속해서 들어오는 공격을 겨우 막아낸 기하진이 헉헉거리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손과 발은 이미 힘이 빠져 후들거릴 정도였다. 이제 끝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잘 가거라, 애송아.”

왕기의 검이 기하진의 목을 노리며 벼락처럼 위에서 아래로 내리쳐왔다. 기하진은 떨어지는 검을 바라보면서도 검을 들어 올려 이를 막을 힘이 없었다. 더는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끝이다. 기하진은 눈을 감았다.

그때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맹주전의 문이 박살나더니 안에서 검 한 자루가 쏜살같이 튀어나와 왕기의 검을 막았다.

안에서 튀어나온 검이 왕기의 검과 부딪치는 순간, 왕기의 검은 큰 충격을 받은 듯 손에서 벗어나더니 공중으로 삼 장이나 튕겨 나갔다.

뜻밖에 나타난 검에 왕기는 대경실색했다.

그때 맹주전 안에서 체격이 아담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바로 당금 무림맹주 남궁진악이었다. 기하진은 흐려지는 의식을 붙잡고 남궁진악을 바라보았다.

“맹, 맹주님....”

가물가물 의식을 잃어가는 기하진의 눈에 다시 맹주의 손으로 되돌아가는 검이 보였다. 그리고 맹주의 손에 그 검이 붙잡히는 순간, 주위에 남아있던 적들이 가랑잎처럼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끝으로 기하진은 그만 스르르 눈을 감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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