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23화 (23/201)

#   23 - 광세일소_한추영 - 1218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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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2화. 음양사자의 정체 (1)

기하진은 앓아누운 지 보름이 지나서야 겨우 회복했다. 회복되자마자 다시 전과 다름없이 수련에 열중했지만 무공은 답보상태에 빠져 전혀 진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천마검 4단계에 필요한 내력을 얻기 위해서는 내공의 단계가 소주천을 넘어 대주천에 들어가야만 하는데 기하진은 중양일지의 소주천 부분만 수련했기 때문에 한계에 부딪히고 만 것이다.

천마검보에는 내력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내력을 더 높일 수 없다면 천마검 4단계는 결코 수련할 수 없을 것이다.

기하진은 밤낮 침식을 잊고 수련에 매진했지만, 소주천을 통한 축기(畜氣)는 한계에 다다른 듯 전혀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한숨만 나왔다. 커다란 돌덩이가 목구멍에 걸린 듯 가슴은 답답하고 끝없이 높은 벽을 마주하고 선 듯 막막한 느낌만 들었다. 누군가에게 조언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자신이 천마검을 익히고 있다고 드러낼 수가 없기에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 없었다.

기하진은 안개 속을 걷는 듯 마음이 답답하여 천림원 뒤에 있는 정원을 혼자서 걸었다. 고즈넉한 초여름 오후, 들리는 소리라고는 때 이른 매미 소리뿐이었다.

기하진은 정원에 있는 정자의 난간에 걸터앉아 자신도 모르게 장탄식을 내뱉었다.

“아아!”

“이 화창한 날 어이 이리 고뇌에 빠져있을꼬?”

뒤에서 갑자기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벌떡 일어나서 보니 언제 왔는지 총군사 사마경이 백우선을 살랑살랑 흔들며 서 있었다. 기하진이 급히 포권을 취했다.

“총군사께 계신지도 모르고 소인이 무례를 범했습니다.”

“하하하, 아닐세. 날씨가 하도 좋아 나도 산책 삼아 나온 것뿐일세. 그래, 지난번에 주화입마로 입었던 부상은 다 회복했는가?”

“예. 맹주님과 총군사님께서 염려해주신 덕분에 완전히 쾌차했습니다.”

“그것참 다행이로군. 그나저나 정말 대단한 무공을 수련하고 있었나 보군. 내가 맹주님을 모신지 이십 년이 넘었지만 맹주님이 친히 나서서 누군가를 치료해 주시는 모습은 처음 보았네. 하하하.”

그 말에 기하진은 송구스러운 마음이 들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괜히 죄스러운 마음이 들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사마경은 수정 안경을 슬쩍 들어 올리며 그런 기하진을 살펴보았다.

“그래, 수련하던 무공의 진전은 좀 있는가?”

마치 사람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사마경의 눈빛에 기하진은 자신도 모르게 씁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끄럽지만 전혀 진전이 없습니다.”

“그래?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제 내력이 부족해서인 것 같습니다.”

기하진은 솔직하게 말했다. 지금은 어떻게 해야 공력을 더 쌓을 수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내력이 부족하다? 천하무학의 정종이라는 중양신공으로 쌓은 내력도 부족하면 어떤 수련을 해야 할꼬?”

사마경의 말에 기하진은 머리끝이 쭈뼛 섰다. 자신이 몰래 중양신공을 수련했음을 총군사가 어떻게 아는 걸까? 설마 음양사자가...?

그럴 수도 있었다. 어차피 음양사자는 천림비고를 지키는 임무를 맡은 무림맹의 고수. 무림맹의 수뇌부인 사마경에게 자신이 중양신공을 익혔음을 보고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렇다면 설마 내가 천마검을 익히고 있는 것도 알까?

기하진은 돌연 가슴이 쿵쾅거리고 귀가 먹먹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사마경과 눈을 마주친다면 지혜로운 총군사의 눈이 자신의 마음을 읽어낼 것만 같았다.

목 뒤에서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사마경이 그런 기하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네가 수련 중인 무공은 극강의 무공이겠지?”

“그, 그걸 어떻게...?”

기하진의 목소리가 살짝 떨려 나왔다. 도대체 어디까지 아는 걸까? 도대체 어디까지 실토해야 하는 걸까?

사마경은 잔뜩 움츠린 기하진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백우선을 천천히 부쳤다.

“자네가 수련 중인 무공을 이끌어 주실 분이 계시네.”

“그... 그분이 누구입니까?”

기하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졌다.

사마경은 그런 기하진을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당금 무림에서 가장 패도적인 무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그야 당연히....”

기하진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사마경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무공을 절정으로 연마하신 분이라면 자네가 수련하는 극강의 무공도 이끌어 줄 만하지 않으시겠나?”

“그, 그 말씀은...?”

“맹주님께서 자네를 기다리신 지 오래이네.”

“...!”

기하진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사마경을 바라보았다. 쿵쾅거리던 심장 박동 소리가 어느새 바로 귀 옆에서 고막을 찢을 듯이 들려왔다. 시간이 정지한 듯 기하진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사마경을 바라보았다.

맹주님께서 나를 기다리신다니, 그게 무슨 뜻일까? 설마 나를 제자로 받아주신다는 말은 아니겠지? 맹주님의 제자라,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게 가당키나 할까? 가문도 사문도 이토록 보잘것없는 나를 정도 무림의 최고봉이라는 맹주님께서 뭐하러 제자로 받으려고 하실까?

믿을 수가 없는 말이었다. 게다가 기하진이 알기로 무림맹주 남궁진악은 자신의 유일한 제자였던 암영단 단주 석무가 돌연 사라진 이후, 더 이상 제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사마경은 지금 자기에게 맹주의 제자가 되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도 맹주님께서 자신을 기다리고 계신다니!

기하진은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가 없어서 멍청한 눈빛으로 다시 사마경을 바라보았다.

“맹주님을 지켜드리게. 무림맹주라는 자리는 허울만 좋은 자리일세. 사방이 적이야. 누구 하나 믿을 수가 없어. 맹주님은 외로운 분일세. 그분 가까이서 그분을 지켜드리게나.”

맹주의 제자가 된다니 기하진은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제, 제가 정말 맹주님을 모실 수 있겠습니까? 저같이 부족하고 한미한 자가 무림의 하늘이신 맹주님 곁에서 그분을 모셔도 되겠습니까?”

기하진의 말에 사마경은 빙그레 웃었다.

“내 맹주님께 말씀을 드려놓겠네. 맹주님께서는 자네에 대해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시네. 그러니 차후에 맹주님을 뵈면 모든 것을 한 점 숨김없이 말씀드리게. 맹주님의 가르침만 받는다면 자네가 십 년, 이십 년 걸려도 체득하기 어려운 무공도 활연관통(豁然貫通)할 수 있을 것이네.”

사마경은 할 말을 다 했다는 듯이 몸을 돌려 정자에서 내려갔다. 사마경은 정자의 돌계단을 내려가더니 문득 걸음을 멈추고 기하진을 돌아보았다.

“자네와 맹주님은 인연이 있네. 그 인연을 놓치지 말게나.”

말을 마친 사마경은 그대로 걸음을 놀려 순식간에 천림원 뒤뜰에서 사라졌다. 사마경의 모습이 사라진 뒤에도 기하진은 정자 안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벅차오르는 기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따뜻한 저녁 햇살이 뜰 안의 화초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

사람이 없는 천림비고 안.

천옥랑이 원성한과 함께 앉아 양 노인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천옥랑은 지난번 천림내고에 잠입하여 혼세마검보를 탈취하지 못해 아버지인 천계심에게 심한 꾸중을 들었다. 게다가 옆구리의 상처가 의외로 깊어서 그 이후로 보름 이상을 요양해야 했다.

다행히 기하진의 주화입마 소동으로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은근슬쩍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옆구리에는 음양사자의 공격으로 지울 수 없는 흉터가 남고 말았다.

그 흉터를 보면 천옥랑은 백발을 휘날리던 음양사자에게 지독한 적개심이 들었다. 제아무리 맹주의 명만 받는다고 하지만 저도 엄연히 맹에 소속된 사람. 이치로 따지자면 아군인 자신에게 이렇게 모질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적개심에 사로잡힌 천옥랑은 자신이 복면을 쓰고 있었으며 천림내고에 잠입해서 비급을 탈취하는 그 순간에는 아군이 아니라 적으로 간주 된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다만 자신의 아버지가 부맹주인 만큼, 제아무리 음양사자라 하더라도 무언가 기별이 있었을 것으로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음양사자는 자신의 옆구리를 쥐어뜯어 살과 뼈를 상하게 하고 정신을 잃게 했다.

사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정말 아찔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구해주지 않았다면 자신은 그 자리에서 바로 죽고 말았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 자신의 신분이나 임무는 밝혀져서는 안 되는 만큼, 자신의 죽음은 비밀로 덮이고 자신의 존재는 조용히 세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천옥랑은 다시 맥박이 빨라지고 호흡이 가빠졌다. 음양사자의 고양이 같은 노란 눈동자가 떠오르자 자신도 모르게 이가 갈렸다. 비록 정신을 잃기는 했지만 누가 자신을 구해주었을지 짐작이 가는 사람이 있었다. 자신은 바로 그 사람이 천림비고에 잠입한다는 정보를 듣고 움직였으니까.

그일 이후로 천옥랑은 가급적 기하진과 부딪치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기하진이 고마워서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증오심이 들었다. 기하진이 천림내고에 잠입하려고 하지만 않았다면 자신도 다칠 일이 없었을 테니까.

그러나 지금 당장 천옥랑의 분노는 기하진보다 음양사자에게 향했다. 감히 자신의 몸에 더러운 손가락을 대서 자신을 다치게 해? 이놈이 누군지 당장 밝혀내어 본때를 보여줄 때까지는 제대로 잠도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무림맹 내에서 음양사자의 소재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양 노인이란 것은 천옥랑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양 노인을 다그쳐서 음양사자가 있는 곳을 알아낼 참이었다.

양 노인이 빽빽한 서가 사이로 책이 잔뜩 쌓인 끌차를 끌고 나타나더니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서가의 제일 윗단부터 차곡차곡 책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천옥랑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한번 스윽 돌아보았다. 마침 인근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천옥랑은 원성한과 함께 어슬렁거리며 양 노인에게 다가갔다.

“할아범, 내가 찾고 있는 책이 있는데 책 좀 찾아줘.”

양 노인은 천옥랑에게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지금 바쁜 것 안 보이는가? 자네가 직접 찾게.”

양 노인의 말에 원성한이 눈을 부라리며 발을 들어 사다리를 툭툭 찼다.

“이 늙은이 말본새 좀 보게. 이 분이 누군지나 알고 그따위로 말하는 게야? 당장 여기서 잘리고 싶어?”

원성한이 사다리를 차자 사다리가 흔들리면서 양 노인이 정리하던 책 몇 권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다리가 흔들리자 양 노인은 떨어지지 않으려고 황급히 두 손으로 사다리를 붙잡았다. 그리고는 차라리 빨리 책을 찾아주자 싶었던지 천옥랑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슨 책을 찾는데?”

“음양사자의 처소라는 책이야.”

천옥랑이 하는 말에 양 노인은 쯧쯧 혀를 차더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리고는 다시 서가로 눈길을 돌리더니 책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혼나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나 보군.”

천옥랑은 양 노인의 말을 듣고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자신이 천림내고에 잠입하여 음양사자와 싸운 것은 극비사실인데 이 노인네가 그 사실을 어찌 안단 말인가?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양 노인이 아는 것이 지극히 당연했다. 음양사자 그 흉악한 마녀가 얘기했음이 틀림없다. 그러고 보니 양 노인이 음양사자의 수종이라는 말은 사실인 셈이었다.

“오호라. 본인 입으로 음양사자의 처소를 안다고 시인하네? 그 마녀의 처소가 어디야? 그것만 말해주면 더 이상 괴롭히지 않지.”

천옥랑의 말에 양 노인은 아무런 말도 없이 서가만 정리했다.

“그렇게 입만 다물고 있으면 영감만 피곤할 텐데?”

천옥랑이 양 노인을 비웃더니 발을 들어 사다리를 세게 찼다. 그 바람에 사다리가 접히면서 사다리 위에 있던 양 노인이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양 노인이 정리하던 책 십여 권도 함께 떨어졌다. 이번에는 원성한이 끌차 위에 실려있던 수북한 서책들을 넘어뜨렸다. 수십 권의 서책이 바닥에 쓰러진 양 노인장의 몸 위로 쏟아졌다.

“이놈들! 이게 뭐하는 짓들이야!”

양 노인이 수염을 파르르 떨며 천옥랑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천옥랑은 양 노인이 손에 잡고 있던 책을 발로 밟으며 쪼그리고 앉았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것 같아? 영감을 괴롭히는 거잖아. 그러니 빨리 음양사자 그 백발마녀가 사는 곳을 대란 말이야. 그러면 피차 좋잖아.”

천림비고 안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지만 그나마 있던 사람들도 소동을 일으키는 주역이 망나니 천옥랑인 것을 알고 머리를 책에 파묻고는 일부러 더욱 못 들은 척했다. 무림맹 실세인 부맹주의 아들을 뉘라서 감히 말리랴!

그때 마침 남이가 천림비고 안으로 들어서다가 그 모습을 보았다. 남이는 평소에 수줍음이 많은 데다가 번잡한 것을 싫어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잘 어울리지 못했다. 게다가 남자 수련생들과는 일부러 더욱 어울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이는 명문정파인 아미파의 제자. 불의를 보고도 그냥 넘어가는 유약한 성격은 아니었다.

수상하게 여긴 남이가 다가가자 천옥랑은 남이를 힐끗 보더니 양 노인장을 붙잡아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다.

“양 할아버지, 그러니까 조심하셔야죠. 잘못하다가 다리라도 부러지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살아온 햇수만큼 현명한 판단을 하셔야죠.”

천옥랑은 양 노인을 일으켜 세운 뒤에 어깨를 툭툭 털고는 빤히 쳐다보는 남이를 향해 씨익 웃었다. 남이는 그 모습이 미심쩍었지만 천옥랑이 양 노인의 사다리를 넘어뜨리는 모습은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잠자코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양 노인은 그날 하루종일 천옥랑 때문에 서너 배는 더 고생하다가 해 질 무렵이 되어서야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천림원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그때까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한쪽에 가만히 숨어서 양 노인을 지켜보던 천옥랑과 원성한이 발소리를 죽여 양 노인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한편, 천옥랑의 행동을 수상쩍게 여긴 남이는 천옥랑과 원성한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따라가 보기로 했다.

양 노인은 세 명의 천림원 생도들이 뒤쫓아 오는지도 모르고 허겁지겁 어디론가 걸음을 옮겼다.

잠시 뒤, 무림맹 내에 이렇게 은밀하고 고요한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적막한 오솔길이 나왔다. 세 사람 모두 한 번도 와보지 않은 길이었다. 오솔길 주위로 빽빽한 대나무숲이 울창하게 펼쳐져 있어서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발생해도 결코 알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주위의 대나무 숲을 둘러보던 천옥랑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 나가더니 양 노인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양 노인은 천옥랑이 갑자기 나타나자 깜짝 놀랐다.

“네, 네가 여, 여기에는 무슨 일이냐?”

얼마나 놀랐던지 말까지 더듬거렸다. 그 모습에 천옥랑은 씨익 웃었다.

“영감, 어딜 그렇게 급히 가시나? 음양사자라도 만나러 가는 건가?”

천옥랑이 거들먹거리며 다가오자 양 노인은 놀라서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이, 이놈! 음양사자님께 네놈 혼찌검을 내시라고 말씀을 드려야겠구나.”

“하하하, 좋은 생각이야. 그 전에 그 백발마녀가 어디 사는지부터 말해주면 좋잖아?”

천옥랑은 음양사자가 밤에만 활동하는 것으로 봐서 낮에는 움직일 수 없은 모종의 제약이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어쩌면 햇빛에 노출되면 안 되는 병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그런 게 있다면 당연히 낮에 음양사자를 만나야 한다. 낮에 겨룬다면 지난번처럼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당하지는 않으리라. 게다가 오늘은 옆에 원성한도 있다. 남천단주의 아들인 원성한은 덩치가 크고 힘이 세며, 무공도 천림원 생도들 가운데서도 최상위급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복면을 쓰지 않고 부맹주 아들의 신분으로 나간다면 음양사자가 제아무리 손속이 매서워도 자신에게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별안간 천옥랑이 우장을 치켜들더니 양 노인의 뺨을 내리쳤다.

쫘악! 소리와 함께 양 노인의 머리가 돌아가고 볼이 벌겋게 붓기 시작했다. 양 노인은 별안간 뺨을 맞자 놀라서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한 손으로 맞은 뺨을 감싼 채 천옥랑을 쳐다보았다.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천옥랑은 냉소를 지으며 다시 한발 양 노인에게 다가가 이번에는 손등으로 반대쪽 뺨을 내리쳤다. 천옥랑의 힘을 이기지 못한 양 노인이 땅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두 눈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고, 얼굴빛은 사색이 된 채 양어깨를 덜덜덜 떨었다.

“음양사자님의 처소를 밝히면 나는 그분께 죽어!”

“당연히 그렇겠지. 하지만 밝히지 않는다면 나한테 먼저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은 안 들어?”

천옥랑이 손가락으로 양 노인의 이마를 툭 밀었다. 양 노인은 두려움에 질려 있으면서도 밝힐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천옥랑은 열불이 난다는 듯 숨을 길게 내쉬며 양 노인을 노려보더니 원성한에게 턱짓을 했다. 원성한이 천옥랑과 양 노인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등을 돌리고 서자 천옥랑은 제 화를 이기지 못하고 발을 들어 양 노인의 몸을 자근자근 밟기 시작했다.

한편 멀리 숨어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남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양 노인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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