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 광세일소_한추영 - 1215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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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1화.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
부맹주 천계심의 전각.
한밤중이었지만 천계심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깨어 있었다. 천계심은 천옥랑이 혼세마검보 탈취에 실패하자 길길이 날뛰며 불같이 화를 냈다. 아들이 음양사자와 싸우다가 옆구리에 심각한 상처를 입어 죽을 뻔했지만 그런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쓸모없는 놈!’
천옥랑을 생각하니 다시 가슴속에서 열불이 치솟았다. 천계심은 요즘 들어 부쩍 조바심이 들었다. 그동안 맹주가 실속 없는 핫바지라고 여겨왔건만 얼마 전에 맹주가 보란 듯이 자신의 무위를 슬쩍 드러낸 것이다. 그때 잠깐 보였던 경지는 최소한 자신보다 한 단계 이상이었다. 정 안되면 무력으로라도 맹주를 쓰러뜨리려고 했던 자신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천계심이 원탁에 앉아 등잔불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을 때 돌연 휘장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천계심이 생각에서 벗어나 휘장 뒤를 향해 나직이 말했다.
“왔느냐?”
“예. 부맹주님.”
“그래, 시킨 일은 어떻게 되었느냐?”
“부맹주님의 밀지를 신교 측에 실수 없이 전달했습니다.”
“저쪽에서는 누가 나왔더냐?”
“탈명검이 직접 나왔습니다.”
탈명검은 백련신교의 마황신뢰 사대장로 중 우두머리인 마립을 가리켰다. 탈명검이 직접 나왔다는 얘기에 천계심은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가 올라갔다.
“답지를 가져왔느냐?”
“예.”
대답 소리와 함께 휘장이 조금 열리더니 노란 봉투에 밀봉한 서한 한 통이 바람에 날리듯 천계심이 앉은 탁자로 날아왔다. 봉투는 사람이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바치듯이 천계심의 바로 앞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천계심은 즉시 봉투를 뜯어 서한을 읽어 보았다.
천계심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황금 일만 냥에 백은 오십만 냥이라... 순 날강도 같은 놈들.!”
맹에 있는 모든 돈을 다 합쳐도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천계심은 서한에 적힌 금액의 크기에 분노를 터뜨리더니 곧 다시 냉소를 지었다.
“아니지, 아니지. 이놈들은 돈만 주면 얼마든지 내 뜻대로 움직여주니 오히려 다행인 것인가? 돈이야 있는 놈들에게서 뜯어내면 될 테고. 후후후.”
천계심이 휘장 뒤에서 엎드려 있는 사내에게 말했다.
“요구한 대로 준다고 전해라.”
“존명”
대답을 마친 사내의 인기척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천계심은 등잔불을 쳐다보며 탁자 위의 술잔을 들었다.
“중원제일의 상단인 천린상단이라면 이따위 액수는 돈도 아닐 텐지. 크크크.”
천계심은 술을 입안에 털어 넣더니 밖을 향해 소리쳤다.
“밖에 누구 있느냐?”
“예. 부맹주님.”
천계심이 부르자 문밖에서 누군가 대답했다.
“지금 당장 원 단주를 좀 모셔오너라.”
원 단주는 무림맹의 주력부대인 남천단의 단주 원무개(元無改)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원무개는 맹주와 부맹주로 나뉜 무림맹 내의 권력다툼에서 대표적인 부맹주파였다.
맹주 남궁진악은 맹 내의 주요 결정을 모두 총군사 사마경에게 일임했는데 원무개는 맹주가 추진력이나 결단력이 없어서 아무것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맹주면 맹주답게 좌중을 압도하는 기상이 있어야 하는데 외모조차 시골노인처럼 평범하여 도무지 그런 기상을 찾을 수가 없으니 그것도 불만이었다.
반면, 부맹주 천계심은 위풍당당한 외모에 칼날 같은 결단력, 뚝심 있는 추진력, 야심 찬 배포 등 모든 점에서 탁월한 맹주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권력 지향적인 천계심과 이권 지향적인 원무개는 서로 통하는 바가 많았다.
원무개가 부맹주각에 들자 한밤중이었지만 곧 조촐한 술상이 차려졌다.
“이 야심한 시각에 주무시지 않고 어인 일이십니까?”
원무개가 정중히 묻자 천계심이 술병을 들어 원무개의 잔에 따랐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서 잠이 오질 않는군. 자, 한 잔 들게나.”
원무개는 천계심이 주는 술을 들이켜고는 물었다.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으십니까?”
“하하하, 정도 무림의 앞날이지, 내가 딴 걱정 할 게 뭐가 있겠나?”
천계심의 말에 원무개는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에 맹주가 기하진이라는 아이를 치료한 뒤 통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말에 천계심이 껄껄 웃었다.
“그 알량한 내력을 그 녀석의 주화입마를 막는데 다 써버렸으니 기운이 달려서 못 나오나 보지.”
“하하하. 그런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맹주가 간만에 신공을 펼쳤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고 있습니다만 운기를 좀 도와준 걸 가지고 무공을 논하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지요.”
그 말에 천계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나도 맹주의 무공을 실제로 본 게 언제인지 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다네.”
“그러니 정파 무림의 앞날이 암울한 것이지요. 부맹주님처럼 당연히 맹주직에 앉으셔야 하는 분이 앉지 않으시고 엉뚱한 작자가 앉아 있으니....”
“그래서 말인데....”
이야기를 꺼낼 만한 분위기 되었다고 생각한 천계심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
“마교에 은밀히 심어놓은 세작들이 놀라운 첩보를 가져왔다네.”
“무슨 첩보를 전해왔습니까?”
사안이 중요하다고 생각되어 원무개의 목소리도 덩달아 내려갔다.
“듣자 하니 조만간 마교 측에서 맹주 암살단을 파견할 모양이야.”
천계심은 말을 꺼내며 슬쩍 원무개의 낯빛을 살폈다. 원무개가 아무리 자기 사람이라지만 자신이 맹주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런 것은 가급적 아는 사람이 적어야 뒤탈이 없는 법이다.
원무개는 마교에서 맹주 암살단을 파견한다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렇다면 큰일 아닙니까? 당장 맹의 수뇌부 회의를 소집해서 이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야....”
그때 문득 원무개는 그렇게 수뇌부 회의를 할 것 같으면 이 야심한 밤에 자기만 은밀히 부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말꼬리를 슬며시 흐렸다. 그 모양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원무개가 말을 이었다.
“그야 마교 놈들이 쳐들어온다면 당연히 대비책을 세워야겠지. 그런데 마교 놈들이 맹주 한 사람만 암살할 모양이야. 맹주가 부재할 때는 당연히 내가 맹주를 대신해서 비상 전권을 가지게 되네. 그러니 어떤가? 저들의 힘을 빌어 맹주를 제거하는 것도 그렇게 나쁜 방법은 아닐 듯하네만?”
그제야 천계심의 말이 이해가 된다는 듯 원무개가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그렇겠군요. 마교가 맹주를 죽인 사실이 알려지면 정도 무림을 한데 모으는 명분이 될 테고, 수장이 없이 우왕좌왕하는 무림맹의 모습을 보일 수는 없으니 구대문파와 오대세가도 무림맹에 협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겠지요. 결과적으로는 부맹주님이 맹주님이 되실 테니 그야말로 일석이조인 셈입니다.”
“그렇지. 그걸 빌미 삼아 마교를 치자고 한다면 어느 문파가 이에 반대하겠는가 말일세. 맹주 한 사람의 죽음이야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것은 제 주제를 모르고 앉지 말아야 할 자리에 앉은 사람의 잘못이지. 그리고 어쨌든 맹주 자리에 있었으니 정도 무림 전체의 단결을 위해서 그 정도의 희생쯤은 감당해야 하지 않겠는가?”
부맹주의 발언 수위가 극히 높았지만 원무개는 부맹주가 지나치다고 생각지 않았다. 일개 천림원 생도에게 내력을 좀 불어넣은 것을 가지고 기운이 빠져서 보름 가까이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 한심한 맹주 따위는 얼른 갈아치우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맹주 뒤에는 강호의 그 어떤 문파도 결코 적대시할 수 없는 천하제일가인 남궁세가가 버티고 있다. 맹주 한 사람 쳐내는 일은 오히려 작은 일인 반면, 남궁세가와 원수가 되는 일은 그 누구라도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이 일은 일종의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가 되겠군요?”
“그렇지.”
“만약 그대로만 된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하하. 만약 내가 맹주에 오른다면 원 단주를 반드시 부맹주로 중용하겠다는 약조를 함세.”
부맹주의 달콤한 사탕발림에 원무개는 기분이 좋아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다면 소인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딱히 해야 할 일은 없네. 다만 마교에서 맹주 암살단을 파견할 때에 맹주전을 지키는 수비인력을 슬그머니 다른 곳으로 돌리기만 하면 되네. 나중에 누가 뭐라고 하면 급한 일이 있어서 그쪽으로 군사를 돌렸다고 하면 될걸세.”
천계심의 말에 원무개는 더욱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야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다만 구미호 같은 총군사 그 늙은이의 눈을 피해 일을 진행하는 것이 그리 녹록지는 않을 듯합니다.”
대외적으로는 부맹주가 맹의 실권을 쥐고 있는 듯하나 실제로는 맹주를 등에 업은 총군사 사마경의 입김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게다가 사마경은 총군사답게 두뇌가 명석하고 눈치가 빨라 천계심도 이번 대사의 관건은 사마경의 의심을 사지 않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 늙은 여우가 머리는 비상하다만 무공이 그렇게 높지는 않지. 여차하면 내가 고수를 파견하여 그 늙은이를 쥐도 새도 모르게 극락세계로 보내어 버리겠네.”
평소에 총군사에 대한 불만이 많았던 원무개는 그 말에 꿀꺽하고 침을 삼켰다. 그렇게만 된다면야 무림맹은 그야말로 자신들의 세상이 될 것만 같았다.
“다만 이 일은 각별한 보안이 필요한 일이네. 혹시 아랫것들에게 일을 시키더라도 입단속을 확실하게 하게나. 또 한 가지. 자네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네.”
천계심의 말에 원무개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했다.
“어쨌든 대사를 치르자면 요놈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천계심이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 엽전 모양을 만들었다.
“천린상단의 임 대방을 만나 기존의 기부금 외에 별도의 금액을 기부하도록 말을 좀 해야겠네.”
“별도의 금액이라고 하시면?”
원무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두 눈을 껌벅거렸다.
“상인 놈들이 아무리 좋은 물건을 가지고 있어도 그깟 물건 녹림 도적들에게 뺏기면 그뿐 아닌가? 우리가 보호해주니 저들도 장사를 해서 이문을 남기는 걸세. 그러니 우리는 그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는 셈이야.”
“그야 당연한 말씀입니다.”
원무개는 천계심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얼마 정도나...?”
원무개의 말에 천계심은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를 띠었다.
“황금 이만 냥과 은자 백만 냥일세.”
그 말에 원무개는 너무 놀라서 헉! 하고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멍하니 천계심을 바라보았다.
그 금액은 지부를 포함한 무림맹 전체 자산의 세 배가 넘는 금액이었다.
“놀랄 것 없네. 화살을 많이 비축해두어야 전투에서 유리한 법일세. 천린상단이라면 그 정도 금액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거야.”
원무개는 액수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아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하고 다시 삼켰다.
“하하하, 원 단주가 보기보다 통이 작구먼. 그 정도 액수에 뭘 그리 놀라나?”
천계심의 말에 원무개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우리가 내놓으라고 한다고 임 대방이 선뜻 그 금액을 내놓겠습니까?”
원무개의 말에 천계심의 눈빛이 일순간 사나워졌다.
“내놓지 않으면 팔을 비틀어서라도 내놓게 해야지. 돈이 아무리 좋기로서니 목숨보다 중하겠는가?”
천계심의 말끝에 살기가 배어 나왔다. 그 말은 내놓지 않으면 없애 버린다고 협박이라도 하겠다는 뜻이었다.
“자네는 그저 내 옆에서 바람이나 잘 좀 잡아주게.”
천계심이 다시 원무개의 술잔을 채워주었다. 원무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발을 넣고 있었지만 짜릿한 흥분으로 전혀 의식도 못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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