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 광세일소_한추영 - 1207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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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화. 음양사자(陰陽使者) (1)
기하진은 천림원의 7층 전각을 한 층 한 층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매 층마다 반드시 순찰조가 없는지 확인을 한 다음에야 살그머니 그다음 층으로 몸을 날렸다.
기하진이 천림비고가 있는 7층 전각의 지붕 위에 조용히 발을 내딛는 순간, 기하진은 지붕 위에 자신 말고도 한 사람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깜짝 놀랐다.
그 사람도 천림비고에 잠입하려는 것인지 몸놀림이 은밀하기 짝이 없었다. 경공만으로는 자신보다 더욱 뛰어나 보였고 신속한 움직임에는 거침이 없었다.
기하진은 급히 복면인의 눈에 띌까 봐 즉시 지붕에 바짝 몸을 낮추었다.
이 야심한 밤에 누가 감히 천림비고에 잠입한단 말인가? 무공비급을 노리는 마교의 사람들일까? 삼엄한 무림맹의 경계는 어떻게 뚫었을까?
문득 어쩌면 무림맹의 경계가 보기와는 달리 그렇게 대단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둠 속의 복면인은 천림비고의 위치를 이미 파악하고 있는 듯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구멍을 찾아 마치 뱀이 미끄러지듯 스르르 안으로 들어갔다.
기하진은 복면인이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을 더 기다렸다. 긴장해서인지 심장 뛰는 소리가 바로 귓전에서 울려 퍼지는 듯했다. 손에서 땀이 살짝 났다.
기하진은 복면인이 사라진 창으로 재빨리 몸을 날렸다. 그 창은 서고의 온도와 습도조절을 위해서 막아놓지 않고 늘 열어두는 창이었는데 외부인들이 찾기 어려운 위치에 교묘히 숨겨져 있었다. 먼저 들어간 복면인이 아니었다면 천림비고 안으로 소리 나지 않게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을 것만 같았다.
창을 통해 들어가니 일반 서적을 모아두는 외고(外庫)와 이어지는 복도가 나왔다. 복도는 건물 벽을 따라 빙 둘러 있었기 때문에 복도를 따라 걷다 보면 건물 전체를 한 바퀴 도는 셈이 되었다. 그리고 그 끝에 기하진도 잘 아는 외고의 문이 나왔다.
외고의 문이 꽉 닫히지 않고 살짝 열려 있었다. 자신보다 앞서 천림비고로 잠입해온 복면인이 외고로 들어갔음이 분명했다.
‘역시 내고(內庫)는 외고 안에 있었어.’
기하진은 제 생각이 옳았음을 느끼며 외고 안으로 들어갔다. 외고는 일종의 장경각 겸 도서관으로 삼만 권이 넘는 방대한 책자를 보관하기 위해서 어른 키보다 훨씬 높은 서가 수십 개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외고는 깃털 떨어지는 소리라도 들을 수 있을 만큼 적막했다.
기하진은 어디에서 음양사자가 갑자기 튀어나올지 몰라 미세한 공기의 흐름이라도 포착하기 위해서 온몸의 기감을 활짝 열었다. 그러나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야 할지 얼른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때 기하진의 귓가에 미약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재빨리 놀려 공기가 갈라질 때 나는 소리였다. 기하진은 그 소리를 따라 발소리와 기척을 최대한 죽이고 살금살금 걸어갔다.
기이하게도 안쪽에서 바람 소리가 나는데 아무리 보아도 안쪽으로 들어가는 문이 보이지 않았다. 벽 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보아 내고가 벽 안쪽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건물의 중심부에 내고가 있고 외고가 그것을 둥그렇게 감싸고 있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벽 안쪽으로 어떻게 들어갔을까? 기하진이 세심하게 관찰해보니 제일 안쪽에 있는 서가 하나가 좀 이상했다. 바닥에 서가에서 떨어진 듯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서가가 움직인 걸까?’
기하진은 안력을 돋우어 바닥을 살펴보았다. 과연 바닥에는 미세하게 긁힌 자국이 나 있었다.
무엇인가 기계장치가 된 게 틀림없었다. 기하진은 확신이 들자 서가 주위를 꼼꼼히 살폈다. 그때 문득 서가 제일 아래 칸 한쪽 구석에 놓인 두꺼운 서책이 눈에 들어왔다.
당송도인록(唐宋道人錄).
무림맹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보지 않을 법한 책이었다. 제목만 보면 당송시대의 도사들에 관한 책이 분명했지만 왜 이 책이 하필 이 자리에 꽂혀 있는 걸까? 책의 분류를 보면 뭔가 맞지 않았다.
기하진은 숨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당송도인록을 붙잡고 꺼내려고 했다.
뜻밖에도 책은 반쯤 나오다가 더는 나오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윙 하고 미세한 기계음이 들리더니 서가 전체가 앞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매일 같이 이용하던 천림비고의 외고에 이런 장치가 숨어 있을 줄이야!
기하진은 깜짝 놀라서 두어 걸음 물러난 뒤 서가의 움직임을 살펴보았다. 서가가 앞으로 나오자 그 뒤로 다시 길게 이어진 어두운 복도가 나왔다.
이것이 내고로 가는 길이구나!
기하진은 가슴이 두근거려 진정할 수가 없었다.
내고의 복도도 외고의 복도와 마찬가지로 둥글게 소용돌이 모양을 그리며 안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외고에서 들리던 바람 소리가 조금씩 높아졌다. 휙휙 옷자락이 날리고 탁탁탁 손과 손이 서로 둔탁하게 마주치는 소리도 들려왔다.
내고로 이어지는 복도의 끝에 문이 반쯤 열려 있고 그 안으로 아까 지붕 위에서 봤던 복면인이 누군가와 싸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복면인은 다급하게 손발을 놀리고 있었으나 이미 열세에 놓여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복면인의 무공이나 체격이 왠지 낯익었다. 기하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사실 그 복면인의 정체보다도 더욱 궁금한 것은 바로 음양사자였다.
살짝 자세를 낮추자 열린 문틈으로 사이로 복면인과 싸우는 상대방이 눈에 들어왔다.
상대방을 확인하던 기하진의 눈이 순간적으로 커졌다.
여자?!
복면인과 싸우는 사람은 놀랍게도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여인이었다. 머리가 온통 하얀 은빛인데 한줄기 검은 머리 몇 가닥이 어우러져 오묘한 느낌이 났다. 여인의 얼굴과 손은 밀랍처럼 새하얀데 갈고리처럼 구부린 손가락 공력이 매섭기 그지없었다.
‘저 여인이 설마 음양사자?’
음양사자가 여인일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던 기하진은 놀랍기 그지없었다. 음양사자의 얼굴을 보면 살아날 생각을 포기해야 해서 저승사자라고도 불린다는 얘기를 지학이 해준 적이 있었다.
기하진이 유심히 살펴보니 갈고리처럼 구부러진 여인의 손 모양이 일반적인 응조공이나 호조수와는 사뭇 다른 것이 말로만 듣던 귀조공(鬼爪功)이 분명했다.
음양사자의 팔이 순식간에 한 자나 늘어나며 복면인의 복부를 질풍처럼 쥐어뜯었다. 보고 있던 기하진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사람의 팔이 고무줄도 아닌데 어찌 순식간에 늘었다 줄었다 한단 말인가?
분명히 착시현상이겠지만 실제로 한 자의 거리를 격하고 갑자기 나타난 손가락에 복면인도 당황한 것이 분명했다. 복면인은 황급히 허리를 좌로 굽히며 음양사자의 귀조공을 막아내려고 했으나 음양사자는 이를 이미 예상한 듯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는 복부를 공격하던 손을 돌연 수평으로 이동하더니 그대로 복면인의 옆구리를 쥐어뜯었다.
기이할 정도로 빠른 데다 공격의 전환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루어져 복면인은 그만 옆구리를 음양사자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
“으악!”
처절한 신음소리와 함께 음양사자에게 잡혔던 옆구리의 옷과 살점이 뜯겨나갔다. 음양사자의 새하얀 손끝에 붉은 피가 묻어 기괴한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기하진은 복면인이 순식간에 음양사자에게 당하자 놀라서 두 눈을 부릅떴다. 그 순간, 음양사자가 고개를 돌리고 문밖 어두운 복도를 바라보았다. 그 바람에 음양사자의 눈이 어둠 속에 몸을 숨긴 기하진의 눈과 딱 마주쳤다.
허억!
기하진은 깜짝 놀랐다. 어둠 속에 숨은 자신을 볼 수 없으리라 확신했지만 어찌나 놀랐는지 머리끝이 쭈뼛 서는 것만 같았다. 소리가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황급히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음양사자의 눈동자는 기이하게도 고양이 눈처럼 노란색이었다.
그때 복면인이 상처를 움켜쥐고 도망가려고 하자 음양사자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거두더니 다시 복면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저 복면인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 틈에 어서 비급을 찾아야 해!’
그때 음양사자의 공격에 정신없이 당하던 복면인의 절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음양사자님, 저 기하진입니다. 설마 제 목숨을 앗아가려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기하진은 몸을 낮추어 내고 안으로 진입하려다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누군가가 자신을 사칭하고 있다. 그런데 목소리를 들어보니 뜻밖에도 천옥랑이 분명했다.
목소리의 주인이 천옥랑인 것도 놀라웠지만 말하는 내용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천옥랑의 말은 자신이 오늘 밤 천림비고에 잠입하려는 것을 미리 알았다는 뜻이 아닌가?
내가 천림비고에 잠입하려는 것을 천옥랑이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비급을 훔쳐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바로 오늘 저녁이지 않은가? 천옥랑이 설마 내 마음을 읽을 줄 아는 능력이라도 있다는 것일까?
더욱 놀라운 것은 천옥랑이 자신의 이름을 음양사자에게 말했다는 점이다. 그 말은 곧 음양사자가 자신을 알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음양사자를 한 번도 본 적도 없는데 그가 나를 도대체 어떻게 안단 말인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지만 기하진은 천옥랑이 음양사자의 관심을 흩뜨리고 있는 지금이 아니면 무림 3대 비급을 손에 넣을 기회는 절대 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한번 결심하면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이 기하진의 성격이었다. 기하진은 결심하자마자 신속하게 내고 안으로 들어섰다. 다행히 음양사자는 천옥랑을 공격하느라 자신이 내고로 들어온 것을 모르는 듯했다. 기하진은 서둘러 무림 3대 기서를 찾기 시작했다.
다행인 것은 내고는 절세 무공의 비급만 보관하고 있는 장소라 살펴볼 책들이 외고만큼 많지 않다는 점이었다. 재빨리 책을 살펴보았지만 3대 무림기서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하진은 음양사자와 천옥랑의 동정에 귀를 기울이며 재빨리 내고 안의 구조를 살펴보았다. 3대 무림기서는 절세 무공비급들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비급이니만큼 특별한 곳에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문득 내고의 가장 중앙에 있는 고풍스러운 작은 서가가 눈에 들어왔다. 서가에는 책이 몇 권 꽂혀 있지 않은데 그중 한 권이 지학이 얘기해주었던 혼세마검보였다. 혼세마검보는 마치 어서 자기를 빼가라는 듯 눈에 잘 띄는 곳에 놓여 있었다.
기하진은 침을 꿀꺽 삼키며 혼세마검보를 빼 들었다. 무공 중에 가장 패도적인 무공. 그 무서운 위력 때문에 수련마저 금지된 무공이 바로 이 혼세마검이었다. 어쩌면 중양신공을 능가하는 무공일지도 몰랐다.
언제 음양사자에게 발각될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이었지만 기하진은 치밀어 오르는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혼세마검보의 책장을 넘겼다.
그때 돌연 뒤쪽에서 홱 하고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며 살기가 뻗어왔다.
기하진은 책을 그대로 가슴 속에 집어넣고 바닥으로 몸을 굴렸다. 간발의 차이로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뒷덜미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기하진을 공격한 사람은 음양사자였다. 음양사자의 뒤쪽으로 옆구리에 심한 상처를 입은 채 정신을 잃고 쓰러진 천옥랑이 보였다.
기하진은 음양사자의 손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면 자신도 저 꼴이 되어 쓰러지리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땅바닥으로 몸을 굴린 기하진이 몸을 일으키지도 않고 그대로 두 무릎과 발등으로 땅바닥을 찍어 몸을 석 자 이상이나 공중으로 띄우더니 빙글빙글 몸을 돌려 문 쪽으로 빠져나가려고 했다.
“흥!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 들어왔겠지만 나갈 때도 설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남자의 목소리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늘고 여자의 목소리라고 하기에는 너무 굵은 중성적인 목소리가 공명을 일으키며 음양사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음양사자는 말을 함과 동시에 다리를 움직이지도 않고 스르르 몸을 이동하더니 어느새 내고의 문을 막고 서서 기하진의 정수리를 향해 손가락을 쫘악 벌리고 질풍같이 공격해왔다.
저 손가락 공격에 맞았다가는 두개골에 구멍이 뚫려 그대로 즉사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기하진의 몸은 이미 회전운동으로 가속도가 붙고 있었기 때문에 중간에 방향을 바꾸거나 멈출 수가 없었다.
기하진은 이를 악물고 두 손에 공력을 끌어올렸다. 피할 수 없으니 맞서려고 한 것이었다.
음양사자가 손바닥을 활짝 편 채 손가락을 구부려 공격해오자 기하진은 장을 펼칠 듯하다가 돌연 장을 권으로 변환하더니 그대로 음양사자의 장심(掌心)을 때렸다.
음양사자는 기하진이 피하지 못하고 두 손을 뻗어내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몸놀림이 제법 빠르기는 했지만 자신의 손아귀에서 결코 빠져나가지 못하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음양사자의 갈고리 손가락이 기하진의 손목을 파고들기 직전, 기하진의 권이 음양사자의 장심을 때리면서 강렬한 충격파가 음양사자의 몸에 전해졌다. 음양사자는 어린 녀석의 공력이 상상을 초월하자 놀란 듯 황급히 손을 뒤로 회수하면서 한 차례 빙그르르 돌아 기하진의 공력을 해소했다.
손을 회수하고 한 차례 도는 동작이 그야말로 눈 깜박할 새 이루어졌다. 기이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음양사자의 붉은 치마가 꽃잎처럼 옆으로 넓게 퍼졌다.
음양사자는 기하진의 공력이 뜻밖이라는 듯 공격을 멈추고 기하진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네가 어째서 중양신공을 아는 거지?”
음양사자의 입에서 나온 말에 기하진은 기절할 듯이 놀랐다. 무림맹에서 자신의 공력을 알아본 사람이 드디어 나타난 것이다.
사실 그동안 기하진은 무림맹의 난다 긴다 하는 고수들이 자신의 내력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알아볼까 봐 조마조마했었다. 권학당, 지무각을 거쳐 지금 천림원에 이르기까지 기하진의 내력을 본 무공강사들은 그 내력의 고강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하나같이 기하진이 기연을 얻었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듯했다.
심지어 천림원 원주 공각 대사나 무당파의 허각 도장은 어떤 문파의 무공이든 한 번만 보고도 척척 알아맞히는 등 놀라운 식견을 자랑했지만 기하진이 가진 내력의 출처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다만 도가계열의 내공일 것이라고 추측만 하는 상태였다.
어쩌면 중양신공을 익힌 사람이 없거나 이 무공이 무림에 알려지지 않아서일 지도 몰랐다. 그만큼 중양신공은 비밀에 싸인 무공이었다.
그런데 지금 음양사자가 이 무공을 알아보는 것이 아닌가! 어떤 식으로든 중양신공과 연관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하진이 너무 놀라 할 말을 잃고 음양사자를 멍하니 바라보자 음양사자가 코웃음을 쳤다.
“흥! 보아하니 아직 중양신공의 진체(眞體)는 얻지 못한 모양인데 그까짓 병아리 오줌만 한 공력으로 감히 겁도 없이 천림비고에 숨어들다니.... 본때를 보여주마.”
음양사자가 발을 한 번 구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기하진의 코앞으로 다가오며 좌우로 팔을 크게 휘둘렀다. 맹금류의 발톱처럼 무시무시하게 구부러진 손가락 끝부분에 새하얀 기운이 맺히더니 알 수 없는 한기가 흘러나왔다.
음양사자의 오른쪽 팔이 순식간에 한 자 정도 쑥 늘어났다. 아까 천옥랑이 당한 바로 그 공격이었다.
기하진은 이 공격을 피하려고 하는 순간 적의 팔은 수평으로 이동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에 팔이 다가오자 그대로 뒤로 물러섰다.
음양사자가 밀고 들어오는 공격이나 기하진이 뒤로 물러나는 동작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매끄럽게 이어져 누군가 보았다면 감탄할 정도였다.
뒤로 서너 걸음을 물러나던 기하진의 등에 무언가 부딪쳤다. 서가였다. 그 순간 기하진의 몸이 잠시 움찔했다.
그러나 그 찰나의 순간, 음양사자의 갈고리 손이 기하진의 목을 쥐어뜯으려고 달려들었다. 기하진은 너무나 다급하여 오히려 음양사자 쪽으로 다가가면서 급히 허리를 활처럼 뒤로 둥글게 휘었다. 그러자 음양사자의 손이 기하진의 가슴에 닿을 듯 말 듯 스쳐 지나가더니 손가락에 닿은 서가의 두꺼운 나무판을 순식간에 으스러뜨렸다.
쾅! 서가의 한쪽 부분이 뜯겨나가면서 나무 조각과 가루가 날렸다. 저 손가락이 자신의 옆구리에 떨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했다.
하지만 마냥 놀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기하진은 발끝으로 바닥을 찍고 몸을 뒤로 날리면서 양옆에 있는 서가를 음양사자 쪽으로 힘주어 밀었다. 수백 권의 책이 꽂힌 커다란 서가들이 기하진의 손에 흔들리더니 음양사자를 덮치기 시작했다.
“요 쥐새끼 같은 녀석이 정정당당하게 무공을 쓰지 않고 꼼수를 쓰는구나.”
음양사자가 노란 고양이 눈으로 기하진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서가가 음양사자를 덮치자 음양사자는 신속히 몸을 뒤로 빼며 무너지는 서가를 피했다.
그러자 기하진은 다시 한 발 뒤로 물러나면서 뒤에 쭉 늘어서 있던 서가들을 하나씩 모두 연쇄적으로 쓰러뜨렸다.
쿠르릉 쾅!
서가가 넘어지면서 요란한 소음이 났다. 그와 동시에 먼지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이렇게 시끄러운 소동이 벌어졌으니 이제 곧 각층을 순찰하던 무사들이 몰려올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그때, 무너져 내리는 서가 아래에 정신을 잃고 쓰러진 천옥랑이 눈에 들어왔다.
기하진은 사람들이 몰려오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천림비고를 빠져나가고픈 생각에 천옥랑을 못 본 척 내버려 두려 했으나 두어 걸음도 가지 못해 다시 몸을 돌리고 말았다.
젠장!
만약 저대로 내버려 둔다면 천옥랑은 음양사자의 손에 죽기 전에 육중한 서가에 깔려 목숨을 잃은 판국이었다.
기하진은 쏟아지는 책들과 서가 속으로 몸을 날려 황급히 천옥랑을 붙잡았다. 그때 천옥랑의 바로 뒤에 서 있던 서가가 와르르 소리를 내며 쓰러져 내렸다.
기하진이 정신을 잃은 천옥랑을 안고 떨어지는 서가를 피해 비켜서는 순간, 음양사자의 밀랍같이 하얀 손가락이 천옥랑의 목 뒤 사혈로 내려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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