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 광세일소_한추영 - 1202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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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화. 천림비고(千林秘庫) (1)
무당파 제자 금휼에 이어 화산파 제자 백무결도 싸늘한 시신으로 무림맹에 돌아왔다.
백무결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지학과 기하진은 허겁지겁 달려갔다.
“무결아!”
지학은 백무결이 온몸에 무수한 검상을 입고 선혈이 낭자한 모습으로 돌아오자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백무결의 이름을 불러댔다.
“무결아, 이 자식아! 왜 네가 죽어, 왜 네가 죽냔 말이다!”
지학은 백무결의 시신 앞에 엎드려 울부짖었다.
“아악!”
미친 듯이 소리치는 지학을 달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하진은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멀쩡한 모습으로 농담을 주고받던 백무결이 죽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지학아, 무결이가... 무결이가 어떻게 된 거야?”
기하진이 멍한 표정으로 지학의 옆에 오자 지학이 기하진을 붙들고 눈물을 쏟아냈다. 지학은 백무결의 죽음을 자책하며 끝도 없이 오열하다가 사숙인 공각 대사의 손에 이끌리어 억지로 그 자리를 떠났다.
금휼에 이어 백무결마저 살해되자 천림원의 분위기는 한없이 가라앉았다. 공기가 마치 납덩이로 이루어진 것처럼 숨쉬기가 너무 답답했다. 연이은 이틀 동안 무당파와 화산파의 쟁쟁한 후기지수들이 죽어 나가자 무림맹에는 다시 비상이 걸리고, 남천단과 용봉단, 그리고 암영단 등 무림맹 차원의 대규모 체포조가 꾸려져 귀면쌍살 체포에 나서는 동시에 삼엄한 경계가 이루어졌다.
기하진은 탈골된 양팔에 붕대를 감은 채 자신의 방에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천림원에 처음 왔을 때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걸어주고 따뜻하게 대해주었던 백무결의 모습이 떠올랐다.
‘무결아.’
내일 무공수업에 들어가면 백무결이 금방이라도 미소를 지으며 다가올 것만 같았다.
기하진의 눈에서 주르르 눈물이 흘렀다. 지학과 자신을 살리기 위해 귀면쌍살과 싸우면서 먼저 가라고 외치던 모습이 떠올랐다. 백무결은 무림맹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만난 벗인데 그 만남이 이렇게 짧을지는 몰랐다.
비록 말은 못해도 백무결은 성품이 온화하고 부드러웠고 무공에 대한 이해가 깊어 명문정파 제자의 표본이라고 할 만했다. 그런데 그런 친구가 왜 이렇게 빨리 세상을 떠나야 했을까?
기하진의 눈앞에 귀면쌍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귀면탈 뒤에 숨은 그 오만하고도 차가운 눈빛이 떠올라 기하진은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이놈! 내가 반드시 복수하리라. 네놈을 죽여 반드시 무결이의 복수를 하리라!
기하진은 머릿속의 귀면쌍살을 노리고 또 노려보았다.
****
지학은 몰래 맹을 빠져나가 술을 마신 것이 발각되어 석 달간 독방에서 근신을 명령을 받았다. 지학은 지금 그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근신 명령이 오히려 고마웠다. 근신 명령을 받고 독방에 갇힌 생도들은 외부인 면회조차 허용되지 않아서 기하진도 벌써 한 달이 넘도록 지학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기하진은 탈골된 팔꿈치 관절이 다시 붙을 때까지 무공수업을 받을 수 없었다. 기하진 역시 당분간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낮에는 천림원 꼭대기에 있는 도서관인 천림비고에서 하루종일 시간을 보냈다.
백무결의 복수를 갚으려면 귀면쌍살을 압도할 만한 무공이 있어야 했다. 평범한 무공이 아니라 단숨에 귀면쌍살을 능가할 수 있는 무공. 그런 무공이 과연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끝에 얼마 전 지학이 얘기해준 무림 3대 기서가 생각났다.
*
백무결이 죽기 며칠 전이었다. 기하진은 지학, 백무결과 함께 천림원 후원에 있는 정자에 앉아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너희들 무림 3대 기서라고 들어는 봤냐?”
“무림 3대 기서라니?”
기하진이 묻자 지학은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3대 기서란 바로 중양일지, 혼세마검보(混世魔劍譜), 그리고 철산신기(鐵山神記)를 가리키는 말이지. 그렇다면 그 세 비급이 어디에 있느냐? 바로 우리가 있는 이 건물 꼭대기에 있다 이 말씀이야.”
기하진은 지학의 입에서 ‘중양일지’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속으로 뜨끔했다. 혹시 자신이 중양신공을 익힌 것을 아는 게 아닌가 싶어서 곁눈질로 슬쩍 지학을 바라보았지만, 지학은 기하진에게만 눈길도 주지 않고 누운 채 발만 건들거렸다.
“중양신공이라니?”
기하진이 모르는 척 시치미를 뚝 떼고 지학에게 물었다.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심장 고동은 빨라지고 있었다.
“중양신공은 이백 년 전 절세 기인이었던 왕중양 진인이 익힌 무공이야. 왕중양 진인은 검선 여동빈 때부터 전해오던 신공을 정리하여 비급 한 권을 남겼어. 그게 바로 ‘중양일지’야.”
그 말을 듣는 순간 기하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전대 기인이 남긴 무공비급이라고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그 정도로 중요한 비급이었던 것은 몰랐었다.
“그 비급이 그동안 천림비고에 숨겨져 있었는데 그걸 아무도 몰랐지. 비급을 잃어버리기 전까지는.”
기하진은 중양일지가 원래 천림비고에 감추어져 있었단 얘기에 호기심이 일었다.
“천림비고에? 아니 그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지학이 난들 알겠냐는 투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워낙에 책이 많기 때문이겠지. 어쨌든 그 책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딱 한 명, 바로 천림비고의 책을 정리하는 양 할아범뿐이었어. 그런데 양 할아범도 책이 없어지고 나서 한참 뒤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된 거야. 책을 훔쳐 간 사람은 마교 대주 중의 한 명이라고 하는데, 분명한 건 그 비급을 회수하지 못했다는 거야.”
책을 회수하지 못했다는 말에 기하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때 분명히 암영단주 석문이 회수해 가지 않았던가? 그런데 회수를 하지 못했다니? 지학이 잘못 알고 있는 걸까? 아니면 워낙 극비사항이라 회수한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닐까?
기하진은 잠시 책의 행방을 유추하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그런 기하진을 빤히 바라보던 지학이 불쑥 말했다.
“오호라, 맞다! 마교 놈들이 중양일지를 가져간 것을 봤다는 소년이 기하진 너 아니야? 맞지?”
그 말에 기하진은 당황해서 목소리가 살짝 흔들렸다.
“으, 응.”
그러면서도 혹시 자신이 중양일지의 앞부분을 찢은 사실을 지학이 알아낼까 봐 지학의 시선을 피했다.
“크! 지지리 운도 없는 녀석. 중양일지는 당금 무림의 제일기보(第一奇譜)야. 다들 그 비급을 찾으려고 눈이 시뻘게져 있는데 그 귀한 것을 코앞에 두고 못 알아보다니. 그 신공만 익혔다면 천하제일고수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쯧쯧.”
지학은 마치 자신이 무공비급을 놓친 것처럼 혀를 차며 아쉬워했다.
기하진은 지학과 백무결에게 당시의 상황을 얘기해주려다가 자신의 말을 꿀꺽, 다시 속으로 삼키고 말았다. 당시의 얘기를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마교로 간 석추명까지 얘기해야 할 것 같았다.
마교라면 이를 갈도록 싫어하는 기하진이었지만 석추명에 대해서만큼은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석추명이 마교로 간 이유는 당시 빗발치는 화살 속에서 자신을 구하려다가 화살을 맞고 정신을 잃어서였다.
그리고 부모님을 잃고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던 그 시절에 유일하게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고 자신을 보살펴주던 사람이 석추명이었다. 당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기하진은 석추명을 친형처럼 생각했었다.
석추명을 생각하자 돌연 가슴이 시큰하게 아파왔다. 기하진은 그런 자신의 감정이 들킬까 봐 일부러 밝은 표정으로 말을 돌렸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책이 천림비고에 보관되어 있었다는 거야? 지키는 사람도 없이?”
“나도 보지는 못했지만, 사숙께서 그러시는데 천림비고를 지키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해. 음양사자(陰陽使者)라던가? 무공이 워낙 고강해서 무림 전체를 통틀어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안 된다는 소문이 있어.”
지학의 말에 기하진은 놀랐다. 천림비고는 자신도 자주 이용하는데 음양사자와 같은 사람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양 할아범밖에 못 봤는데 무슨 음양사자가 있다는 거야? 그리고 그토록 무공이 높은 사람이 지키는데 어떻게 마교 놈들에게 중양일지를 잃었지?”
기하진의 말에 지학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음양사자가 무공이 높기는 하지만 치명적인 약점이 있어.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낮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해가 지고 나서야 나타난대. 그래서 낮에는 남천단에서 파견된 최정예 고수 서른 명이 천림비고를 지키지. 지금까지 비급을 훔치러 왔다가 음양사자의 손에서 살아나간 사람은 중양일지를 훔쳐간 마교놈이 유일하다고 해.”
지학의 말에 기하진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나는 천림비고에서 한 번도 남천단원들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천림비고에는 내고(內庫)와 외고(外庫)가 있어. 외고에는 일반 서적들이 있고, 내고에는 특히 귀중한 서적들이 보관되어 있지. 천림비고의 외고는 천림원의 학생들을 비롯한 무림맹 사람들에게 개방하지만 내고는 맹주님의 재가가 있어야만 이용할 수 있지. 음양사자는 바로 그 내고를 지키는 사람이야. 남천단원들도 마찬가지이고.”
천림비고에 내고가 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라 기하진은 눈을 빛내며 관심을 보이자 지학은 더욱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사숙께 들은 얘기인데 천림비고의 내고에는 중양일지 말고도 절세 무공비급이 여럿 있다는 거야. 그중 하나가 바로 혼세마검보(混世魔劍譜)이지.”
혼세마검보라니, 무림맹이 아니라 마교의 서고에 있어야 할 것만 같은 이름이었다. 하지만 중양신공 외의 또 다른 절세무공이라는 말에 기하진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다음 얘기에 빠져들었다.
“원래 그 무공의 이름은 천마신검(天磨神劍)이야. 백여 년 전 명성을 떨치던 홍진노괴의 무공이었지. 약 오십 년 전에 당시 맹주께서 천마신검의 비급을 보시고는 크게 탄식하시며 이 무공이 워낙 패도적이고 악랄하여 장차 무림에 큰 환란을 일으키리라 우려하셨어. 그러나 무림사에 다시 없을 기공(奇功)이라 차마 없애지는 못하고 후대의 사람들을 경계하는 차원에서 혼세마검(混世魔劍)이라고 무공의 이름을 바꾼 뒤 비급의 표지를 바꾸어 붙이셨대.”
지학의 말을 들을수록 기하진은 혼세마검에 대한 호기심이 부쩍 일었다.
“어리석은 짓이지.”
지학이 갑자기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리석은 짓이라니?”
“그런 무공은 탐욕을 부르게 마련이야. 제아무리 희대의 신공이라도 올바른 무공이 아니라면 당장 없애버리지 왜 그냥 내버려 둬서 여러 사람을 시험하냔 말이지. 내 생각에는 혼세마검보 때문에 천하 무림에 반드시 피바람이 불게 될 거야. 그때 가서야 진작 그 비급을 없애버리지 못한 걸 후회하겠지만 그래 봐야 어쩌겠어? 이미 엎질러진 물인 것을.”
어떤 때는 한량없이 엉뚱하다가도 또 어떤 때는 마치 득도한 고승 같은 소리를 하는 통에 기하진이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백무결이 그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기하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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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일을 떠올리니 어깨에서 느껴졌던 백무결의 따뜻한 손 느낌마저 생생하게 기억났다. 또다시 코끝이 잠시 시큰해졌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중양일지 후반부는 당시 응룡검 황보에게 넘어갔으니 마교에서 보관 중일 테고 나머지 두 비급 중 하나라도 찾는다면 귀면쌍살에게 복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기하진은 천림비고를 매일 같이 올라와 어떻게 하면 내고에 들어갈 수 있을까 책을 보는 척하면서 살펴보았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덧 팔도 다 나았지만 기하진은 그래도 매일 같이 천림비고로 올라왔다. 가끔씩 숨어 있는 남천단 단원들의 기척을 느끼려고 공력을 끌어올렸다. 아주 미약하기는 하지만 외고의 벽 안쪽에서 사람의 기운이 느껴졌다. 천림내고는 외고의 벽 안쪽에 위치하는 것이 분명했다.
눈을 지그시 감고 기척을 찾던 기하진은 문득 싸늘한 느낌에 번쩍 눈을 떴다. 책 수레를 끌며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양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얼핏 양 노인의 눈빛에 미소가 떠오른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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