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 광세일소_한추영 - 1193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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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화. 천림원의 괴짜들 (3)
“화산파와 남궁세가는 모두 검법으로 유명하지만 두 문파의 검법은 아주 다르지. 무결이는 말을 못하니 남궁척(南宮尺)이 한번 말해볼까?”
허각 도장의 시선이 강의실 제일 구석에 있는 키가 크고 얼굴빛이 창백한 청년에게 향했다. 워낙 말이 없는 청년이라 기하진은 그런 사람이 강의실에 있는지도 몰랐다.
“저 친구가 바로 남궁세가의 장남 남궁척이야. 맹주님의 조카라고 하네.”
지학이 기하진의 귀에 대고 소곤거리며 알려주었다.
뜻밖의 인물에 기하진이 눈을 씻고 다시 남궁척을 바라보았다. 고집스러운 입술은 꽉 닫혀 있었고, 두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고독해 보였다. 두 눈썹이 짙고 골격이 커서 외모만으로는 맹주 남궁진악과 완전 딴판이었다.
“화산파는 쾌검이고 저희 남궁가는 중검(重劍)입니다.”
긴말을 싫어하는 듯 아주 간략한 설명이었다. 하지만 기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문파의 검술의 차이가 잘 드러났던 것이다.
“그렇다. 무림에 쾌검으로 이름을 날리는 검법들이 있다. 여러분들도 알겠지만 화산파의 매화검법, 점창파의 사일검법, 그리고 종남파의 분광검법 같은 것들이지. 쾌검은 적이 방어할 틈을 주지 않고 휘몰아쳐서 공격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지. 반면, 남궁세가의 창궁무애검, 하북팽가의 오호단문도법, 아미파의 아미복마검 등은 빠르기보다는 검의 무거움, 즉 위력에 중점을 두고 있다.”
기하진은 여자들로만 구성된 아미파의 검법이 중검이라는 이야기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여자들이라면 당연히 남자들보다 힘으로 밀릴 텐데 어찌 중검을 추구한단 말인가?
허각 도장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그렇다면 쾌검과 중검이 서로 맞붙게 될 경우는 어떻게 될까?”
허각 도장의 질문은 사실 기하진도 궁금한 부분이었다. 그때 허각 도장이 백무결과 남궁척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십사수 매화검법과 창궁무애검법을 잠깐 보여줄 수 있겠느냐?”
허각 도장의 물음에 백무결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남궁척은 정중히 거절했다.
“죄송합니다만 사문의 어른들께서 본문의 무공을 함부로 외부에 드러내지 말라고 명하신 터라 그것은 좀 어려울 듯합니다.”
남궁척에게 본문의 어른이라 함은 당연히 맹주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무림의 문파들은 모두 자기 문파의 무공이 노출되는 것을 꺼리기 때문에 허각 장로는 남궁척의 말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문의 법도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렇다면 우리 모두 먼저 화산파의 쾌검이 어떠한지 한번 견식 해보도록 하자. 무결, 그럼 부탁하마.”
백무결이 오른손으로 검을 수직으로 들고 왼손의 식지와 중지를 한데 모아 검끝에 댔다. 잠시 기운을 갈무리하던 백무결이 돌연 휘리릭 수평으로 검을 뻗어내는데 검광이 번쩍거렸다.
백무결이 이십사수의 매화검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검법이 물 흐르듯이 막힘이 없었고 검의 빠르기는 눈으로 쫓아가기도 어려웠다. 동을 베는가 하면 어느새 서를 찌르고 아래쪽을 막는가 하면 어느새 위쪽에서 공격을 해대니, 백무결의 시연 동작을 바라보는 학생들의 시선은 백무결의 검보다 항상 반 박자 늦게 검의 뒤를 쫓는 셈이 되었다.
또한 검이 어찌나 빠른지 검이 머문 곳마다 잔상이 남더니 허공에 매화꽃이 찬란하게 피어올랐다. 한 송이, 두 송이, 세 송이... 어느새 강의실 앞 허공은 검으로 빚어낸 매화 꽃송이로 가득 차서 빛을 번쩍거렸다.
백무결의 검법을 처음 본 기하진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게 말로만 듣던 화산 이십사수 매화검법이구나. 얼마나 검을 빨리 놀려야 허공에 저렇게 검의 잔상만으로 꽃을 수놓을 수 있을까?”
“놀랍지? 허공중에 매화 꽃송이를 스물네 송이 이상 피어 올리는 검사를 매화수(梅花手)라고 하지. 화산파에는 저런 매화수가 일백 명 이상이 있대. 그래서 강호의 어떤 문파도 쉽게 넘보지 못하지.”
지학의 설명에 기하진은 탄성을 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천옥랑이 말했듯이 어쩌면 무공이란 처음부터 좋은 사문을 타고나야 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효, 무결이 저 녀석, 아직 매화수는 못 되겠는걸? 매화꽃이 아직 두 송이 부족하네. 그러게 내가 평소에 놀지 말고 수련 좀 하라고 해도 그렇게 말을 안 듣더니만....”
지학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걱정스럽다는 듯이 혀를 찼지만 정작 백무결이 들으면 어이가 없었을 얘기였다. 왜냐하면 연공하는 백무결을 꼬드겨 늘 밖으로 빼돌리는 사람은 다름 아닌 지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무결은 사실 본 실력을 다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매화수의 반열에 오른 지는 이미 오래전이었지만 한 번에 스물네 송이의 매화꽃을 피어 올리는 것에는 화산파의 비전절학이 숨겨져 있어 정말 필요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절대 시연하지 않았다.
백무결의 매화검법의 시연이 끝이 나자 학생들이 요란하게 박수를 쳤다.
“잘 해주었다. 자, 이번에는 중검을 한 번 견식 해봐야 할 텐데 누가 나서주겠느냐?”
그때 덩치가 크고 인상이 사나운 청년이 벌떡 일어섰다.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청년이 강의실 바닥을 쿵, 하고 한번 박차더니 어느새 강의실 앞쪽으로 튀어왔다.
생김새만 사나울 뿐만 아니라 성격도 불같이 급한 듯했다.
“오호, 하북팽가의 팽호구나. 팽세가의 오호단문도도 위력적인 무공이지.”
허각이 한 손으로 수염을 훑으며 얘기하자 팽호는 허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말로만 위력적이라고 떠들어대는 가문과는 차원이 다르지요. 제가 한번 보여드리겠습니다.”
팽호는 기가 얼마나 센지 말을 할 때마다 정말 호랑이가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났다.
“말로만 위력적이라고 떠들어대는 가문이라니?”
기하진이 이해를 못 하고 눈을 껌벅이며 지학에게 물었다.
“어디긴 어디겠냐? 남궁세가지.”
“남궁세가라면 맹주님의 가문인데 어찌 말로만 위력적이라는 거야?”
아직 구대문파와 오대세가 간의 세력다툼을 잘 모르는 기하진이 물었다. 그러자 지학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다들 자기가 최고라고 싸우는 거지 뭐. 무공이란 말이 필요 없는데 말이야.”
지학이 남궁척을 슬쩍 쳐다보았다.
“일단 손을 섞어보면 승자와 패자가 분명히 나오니까.”
지학과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지만 지학이 말을 꺼내는 순간 남궁척의 눈길이 지학을 슬쩍 스치고 지나갔다.
“도법이 검법과 다르기는 하지만 여러분들이 하북팽가의 그 유명한 오호단문도법(五虎斷門刀法)을 한 번 견식 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되겠지. 그럼 팽호에게 부탁을 해 볼까?”
“옙!”
허각 도장의 말이 떨어지자 팽호는 큰소리로 대답하더니 팽가의 독문병기 오호도를 꺼내 들었다. 오호도(五虎刀)는 큰 칼에 기다란 손잡이 달려있고 손잡이 끝부분에는 범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형상의 주조물이 달려있었다. 외관상으로는 청룡언월도와 비슷한 형상이었다.
팽호가 두 손으로 오호도를 붙잡고 크게 휘두르자 세찬 바람 소리가 휙휙 나면서 보는 것만으로도 그 기세에 압도되었다. 백무결의 화산검법처럼 쾌속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한번 부딪친다면 어떤 검이라도 부러져 나갈 것 같은 위력이 느껴졌다.
팽호가 기합과 함께 십삼세(十三勢)의 오호단문도법을 펼치자 강의실의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오호단문도법은 위력을 중시하는 무공이라 초식이 단순한 편이었지만 매 초식이 일격필살의 위력을 뿜어냈다.
팽호가 손에 들고 있는 오호도를 빙글빙글 돌리더니 돌연 딱 소리가 나게 바닥에 부딪치며 시연을 끝마쳤다. 이마에는 가볍게 땀이 맺혀있었다.
팽호의 시연이 끝나자 학생들로부터 박수가 쏟아졌다. 기하진도 놀랍고 부러워서 손이 아프도록 손뼉을 쳐댔다.
“정말 위력이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팽호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누구든지 우리 팽가의 오호단문도 위력이 궁금한 사람은 언제든지 환영한다. 다만 팔 하나, 다리 하나쯤은 잃을 각오를 해야겠지.”
그러더니 턱을 치켜들고 남궁척을 쳐다보며 빈정댔다.
“비무를 신청할 때는 잘 살펴야 할 거야. 어떤 사람은 말만 무성하고 유명인사 뒤꽁무니에 숨어서 나오지 않으니까. 그런 사람과는 비무를 해봤자 얻는 것도 없지.”
명백히 남궁척을 도발하는 말에 강의실 안은 한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나 정작 남궁척은 못 들은 척 창밖만 바라보며 팽호의 시선을 외면했다.
- 아쉽다. 잘하면 팽가와 남궁가 간의 비무를 볼 수도 있었는데 말이야.
지학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기하진에게 전음을 했다. 그 말에 기하진은 팽호를 다시 쳐다보았다. 딱 벌어진 어깨에 오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팽호는 정말 자신만만해 보였다.
- 남궁척 저 녀석은 절대 속내를 드러내지 않아. 능구렁이가 따로 없다니까. 하지만 팽호 말처럼 말만 무성한 것은 절대 아니야. 저 녀석도 분명히 비장의 한 수를 숨기고 있어.
지학의 전음을 들으며 기하진은 남궁척과 팽호를 번갈아 보며 자신이 저 두 사람과 맞붙게 되면 어떨지 생각해보았다. 분명히 힘든 싸움이 될 것만 같았다.
“훌륭한 도법이었다.”
허각 도장은 팽호의 도법을 칭찬한 뒤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검은 일반적으로 가볍고, 도는 무거워서 그 차이를 감안해야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팽세가의 오호단문도법은 무거운 병기가 지닐 수 있는 위력을 모두 끌어낸 셈이다. 자, 그렇다면 검으로 펼치는 중검은 어떻게 다를까?”
말을 하던 허각 도장이 학생들을 한번 훑어보더니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아미복마검도 무림 일절(一絶)이지. 남 소저, 아미 중검을 한 번 보여줄 수 있겠나?”
그러자 남이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이가 사뿐사뿐 앞으로 걸어나가자 무공 강의실에 있던 모든 학생의 눈길이 남이에게 꽂혔다. 남이의 검은 무복은 몸에 딱 맞게 재단이 되어 있어 날씬한 몸매가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머리도 연공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붉은색 끈으로 묶었을 뿐 그 흔한 장신구 하나 착용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 모습이 남이의 수수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남이가 수중에서 장검 한 자루를 꺼내더니 기수식을 취했다.
아미복마검법(蛾眉伏魔劍法)이었다.
학생들은 갸날픈 몸매의 여자가 중검을 구사한다니 신기한 눈초리로 남이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남이가 검을 펼치는 순간, 호리호리한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엄정하고 단호한 기세가 검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팽호의 무시무시한 위력과는 또 다른,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검에 깃들어 있었다.
휘리릭 휘리릭 검이 펼쳐질 때마다 기하진은 새삼 자신의 처지가 한탄스러웠다. 그리고 저토록 좋은 사문에서 어릴 때부터 무공을 연마해온 사람들이 너무 부러웠다. 지학, 백무결, 팽호, 남이, 그리고 천옥랑까지 모두 어릴 때부터 뛰어난 사문절학을 연마해왔다. 기하진이 무림맹의 무공학당인 권학당과 지무각을 거치기는 했지만, 그 두 곳은 무공의 입문과 실전기술을 가르쳤을 뿐 상승절기를 가르치는 곳이 아니었다. 상승무공은 각 문파의 비전절학이기 때문에 각자의 사문에서 배워야 했다.
그런데 기하진은 사문이 따로 없어서 상승무공을 배울 기회가 아예 없는 셈이었다. 상승무공을 익히지 못한 기하진이 권학당과 지무각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천림원까지 들어와서 구대문파의 쟁쟁한 후기지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은 정말 무림맹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또래들보다 뛰어난 내공으로 한발 앞서 올 수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상승절기를 배우지 않으면 앞서 나가기는커녕 도태될 것만 같았다.
“자, 그럼 남 소저의 아미 중검을 누가 한 번 받아보겠느냐?”
허각 도장이 학생들을 훑어보았다.
그때까지 기하진은 남이의 무공을 멍하니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있었다.
“여기 기하진이 하겠답니다!”
지학이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기하진을 앞으로 밀어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오 그래? 요즘 명성이 자자한 무림신동의 실력을 한번 볼까?”
허각 도장의 말에 기하진이 당황해서 지학을 돌아보자 지학은 키득거리면서 기하진을 외면했다.
“빨리 나가. 뭘 해?”
기하진이 머뭇거리자 지학이 기하진을 앞으로 떠밀었다. 그런 지학이 원망스러웠지만 기하진은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기하진과 남이가 서로 마주 선 뒤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했다. 남이는 부끄러운 듯 기하진의 눈을 똑바로 보지 않고 아래만 바라보았다.
“그럼 아미 중검이 실전에서는 어떻게 사용되는지 한 번 더 감상해볼까?”
허각 도장의 말이 떨어지자 남이와 기하진은 기수식을 취했다.
기하진은 사실 검법이 평범했다. 중양일지에 기록되어 있던 것은 내공구결 뿐이었기 때문에 내공만 연마했을 뿐, 검법은 그동안 학당에서 배운 것이 전부였다. 그러다 보니 남이의 아미복마검을 대하면서도 기하진은 평범한 팔괘검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다.
허각 도장과 학생들은 무림신동이 어떤 신공으로 아미복마검을 상대할까 궁금해하다가 기하진이 팔괘검을 시연하자 다들 속으로 놀라워했다.
설마 저 평범한 팔괘검으로 무림 일절인 아미복마검을 상대한단 말인가?
남이조차도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불쾌해서 인정사정없이 공격해 들어갔다. 검끝이 파르르 떨리며 검에서 웅, 하고 검명이 일었다.
남이의 검을 막아내는 기하진의 눈에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남이의 귀엽고 하얀 얼굴이 들어왔다. 남이가 움직일 때마다 귀 옆머리가 찰랑거렸다.
그 모습에서 다시 임예린이 떠올라 기하진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남이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기하진이 자신을 비웃는다고 느낀 것이다.
촤르르르. 남이의 검이 순식간에 변하며 기하진을 위에서 아래로 베어 들어왔다. 베어 들어오는 각도가 절묘하여 빈틈이 없었다. 기하진은 놀라서 맞받아칠 생각은 못 하고 급히 몸을 뒤로 눕혀 검을 피했다.
남이가 다시 입술을 깨물며 검을 공중에서 변화시켜 기하진의 복부를 찔러 들어갔다.
챙챙챙챙. 순식간에 십여 초를 교환했다. 기하진은 팔괘검으로 상승무공인 아미복마검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깨달았다. 남이의 검세는 갈수록 사나워지고 엄정해졌지만 그럴수록 기하진은 손발이 다급해질 뿐이었다.
지켜보던 학생들은 기하진의 무공에 실망한 빛이 역력했다.
‘에이, 저런 게 무슨 무림신동이야.’
고개를 가로저으며 불신의 빛을 보내는 학생들도 많았다.
그러나 허각 도장은 보면 볼수록 기이한 생각이 들었다.
‘평범한 검법으로 상승무공인 아미복마검을 상대하다니, 저 아이의 내력이 심상치 않구나. 게다가 저 몸놀림.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저 보법. 저건 의식하지 않은 채 저절로 이루어지는 게 분명해. 신기하구나, 자연지기(自然之氣)를 익힌 듯한데 아직 한참 어린 나이에 수십 년 수련해도 터득하기 어려운 자연지기를 어찌 얻었을꼬?’
허각 도장의 눈꼬리가 가늘어지는 것도 모르고 기하진은 쏟아지는 남이의 공격을 막기에 급급했다.
돌연 남이의 검에서 지지직 하며 시퍼런 검기가 일어났다. 남이가 혼신의 공력을 검에 불어넣은 것이다.
학생들은 감탄을 터뜨리며 남이의 검에 시선을 고정했다.
남이의 검이 기하진의 어깨를 곧장 베어 들어왔다. 검 자체에 산악 같은 무거움이 내포되어 있었다. 이리저리 밀리며 피하기에 급급하던 기하진이 더는 피할 도리가 없자 돌연 왼팔을 앞으로 뻗어내며 땅 소리가 나게 검을 튕겼다.
그 순간, 강의실 안의 학생들은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남이의 검이 손에서 벗어나더니 그대로 십여 척 높이의 천장에 꽂히고 만 것이다. 검은 천장에 꽂혀서도 진동을 이기지 못하고 한참이나 부르르 떨렸다.
남이는 기하진이 절대 자신을 이길 수 없으리라 생각하다가 돌연 검이 자신의 손에서 벗어나자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손에서 검을 튕겨낼 정도의 내력은 사부인 요혜신니 정도가 되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기하진이 튕겨낼 줄이야!
게다가 검을 쥐고 있던 팔의 어깨가 시큰거리고 아파서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였다.
한편 기하진은 남이가 검을 놓치고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자 너무 미안했다.
기하진은 얼른 검을 되찾아 주고 싶은 마음에 바닥을 박차고 몸을 위로 솟구쳤다. 순식간에 기하진의 손이 십오 척 높이의 천장에 꽂힌 검에 닿았다. 십오 척을 한 번에 뛰어오르다니!
게다가 신법이 어찌나 가벼운지 아무런 공기의 저항도 받지 않는 듯했다. 그야말로 바람이 살짝 일렁이는 것만 같았다.
기하진의 신법에 감탄한 학생들 사이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기하진이 남이에게 검을 건네주었다.
“미안합니다, 남 소저.”
남이는 아랫입술을 깨문 채 상심한 표정으로 기하진의 손에서 검을 받아 제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강의실 안에 정적이 흘렀다.
짝짝짝. 갑자기 허각 도장이 박수를 쳤다.
“둘 다 잘 해주었다. 아미복마검도 훌륭했고 이에 맞선 대응도 훌륭했다. 잘들 봤겠지만 내력이 뛰어나면 검술의 부족함을 메꿀 수 있다. 다들 쉬지 말고 내공을 연마하도록 해라.”
천림원에서의 첫 무공수업이 그렇게 얼떨결에 끝이 났다. 수업이 끝나자 지학이 기하진의 어깨를 툭 치며 장난스럽게 얘기했다.
“무림신동, 내공 하나는 정말 대단한데?”
옆에 있던 백무결도 기하진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미소를 지었다.
“기하진, 아무리 힘이 남아돌아도 그렇지, 남 소저의 검을 그렇게 싹퉁머리 없이 튕겨내면 어떡하냐? 앞으로 남 소저 얼굴을 어떻게 보려고 그래? 이거 참 대책 없고 눈치 없는 녀석일세.”
지학이 기하진을 바라보며 아쉽다는 듯 쯧쯧, 혀를 찼다.
기하진이 저 멀리서 앞서가는 남이를 몰래 쳐다보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서둘러 강의실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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