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 광세일소_한추영 - 1186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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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화. 잇따른 살겁
점창파 대제자 복태는 누군가가 뒤따라오는 듯한 느낌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인적이 없는 산길에는 새소리만 들려왔지만 복태는 여차하면 검을 뺄 수 있도록 손에 힘을 주었다.
“형님, 왜 그러십니까?”
셋째인 주창민이 의아한 눈초리로 복태를 쳐다보았다.
“혹시 아까부터 무슨 인기척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더냐?”
“예엣?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복태의 말에 주창민도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번에 여산노괴를 베느라 형님께서 너무 무리하셨나 보오. 하긴 왜 안 그렇겠소? 그놈의 노괴 명줄이 어찌나 질긴지 삼백 합을 싸워도 승부가 갈리지 않았으니.”
둘째 욱우가 호탕하게 껄껄 웃었다.
“그래도 형님의 그 신묘한 검법으로 결국 그 노괴를 염라대왕 앞으로 보낼 수 있었으니 정말 다행이오. 같은 사부님 제자인데 형님과 우리는 어찌 이리도 차이가 나는지 모르겠소.”
점창파 대제자인 복태와 둘째 욱우, 셋째 주창민은 사부의 명을 받들어 여산지역에서 악명을 떨치던 여산노괴 일당을 물리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복태는 점창파 장문인 복호일의 외동아들이자 대제자로 점창파의 제자들 중에서 문파의 절기인 사일검법(射日劍法)을 가장 완숙하게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번에 여산노괴를 벨 때도 사일검법을 썼었다.
“이번에 돌아가면 사부님께서 아마 큰 상을 내리실 거요. 상금은 우리가 알아서 쓸 테니 형님은 그저 푹 쉬면서 몸조리나 좀 하시오. 이제 곧 장가도 가야 할 사람이 부실한 몸으로 가면 되겠소? 그러다가 형수님 독수공방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둘째의 농담을 셋째가 웃으면서 받았다.
“형수님 독수공방하시면 안 되죠! 아들, 딸을 한 열 명은 낳아야 사부님께서 좋아하실 텐데, 독수공방이 가당키나 해요?”
동생들의 농담에 복태가 웃으며 말했다.
“요놈들이 큰 형님을 놀리는 걸 보니 살 날이 얼마 안 남았구나. 네놈들이 형수님 독수공방을 왜 걱정하냐? 부러우면 네놈들도 빨리 장가나 가거라.”
“아이고, 무슨 소리요? 형님이 장가가서 형수와 깨가 쏟아질 때 우린 열심히 수련해서 형님을 한번 앞질러 볼 생각이요. 우리도 점창 제일이라는 말 한번 들어봐야지.”
“요놈들 심보 좀 보게?”
복태가 날렵한 몸짓으로 동생들에게 꿀밤을 주자 동생들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꿀밤을 그대로 맞았다.
“어이쿠!”
점창파 제자 세 사람의 웃음소리가 호젓한 산길에 울려 퍼졌다. 복태는 동생들의 말처럼 이번 싸움 때문에 너무 예민해졌나 생각하고는 불길한 생각을 애써 지웠다.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었다. 복태가 다시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드니 좁은 산길 한가운데 누군가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뒷짐을 지고 있었지만 옆구리에 번쩍번쩍 빛나는 장검 한 자루를 차고 있는 것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복태는 긴장한 나머지 발검 준비를 하며 길을 막은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댁은 누군데 이렇게 길을 막고 계신 게요? 한쪽으로 비켜주시면 고맙겠소.”
그러나 사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성미가 급한 둘째가 앞으로 나서며 호통을 쳤다.
“이봐, 이 길 당신이 다 전세 냈어? 당장 비키지 못해?”
둘째가 막무가내로 나오자 복태가 얼른 둘째를 말렸다.
“둘째야, 경거망동하지 말아라.”
복태는 둘째를 제지하고 난 뒤 다시 두 손을 모아 포권을 취하며 정중하게 말했다.
“나는 점창파의 대제자 복태라고 합니다. 귀하께 길을 내어주시기를 부탁드리오.”
그제야 사내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점창파의 대제자가 앞으로 문파를 이끌만한 인재라고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사내가 몸을 돌리자 복태를 비롯한 세 사람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사내가 얼굴에 귀면탈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경극 배우도 아니고 외진 산길에서 탈을 쓰고 있을 이유가 무엇일까?
그때 문득 복태의 머릿속에 최근 무림에서 후기지수들만 노린다는 살인마가 떠올랐다. 벌써 여러 명 죽었지만 아직 그자의 얼굴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다. 혹시 그 이유가 탈을 쓰고 살인을 하기 때문이 아닐까?
수상한 느낌이 든 복태는 즉시 검을 잡으며 소리쳤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하하하, 곧 죽을 녀석이 정체를 알아서 뭐하겠느냐?”
귀면탈의 어깨가 움찔하는가 싶더니 옆구리에 차고 있던 검이 어느새 복태의 면전을 향해 소리도 없이 날아왔다. 대담하고도 빠른 손놀림과 적의 의표를 정확히 짚어내는 공격이었다.
복태는 서둘러 검을 뽑아 가로막았으나 검이 부딪치자 엄청난 진동이 검을 통해 전달되었다. 검을 쥔 복태의 손이 수전증을 앓는 사람처럼 부르르 떨렸다. 여산노괴조차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 모습에 놀란 두 아우가 챙, 소리와 함께 검을 뽑더니 좌우에서 협공해 들어왔다.
그러나 귀면탈을 쓴 괴인은 어린애 장난이라는 듯 순식간에 검을 따당, 하고 떨치니 둘째와 셋째의 검이 손아귀를 벗어나 풀숲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위험하다. 피해라!”
위기감을 느낀 복태는 곧바로 사일검법의 상승절기 십일락천(十日落天)을 펼쳐냈다. 하늘에 뜬 열 개의 해를 쏘았다는 예(羿)의 고사에서 나온 이 초식은 강맹하고도 쾌속한 양강초식으로 절정에 달하면 상대할 자가 없는 검법이었다.
열 번의 쾌속한 변화가 쉬지 않고 이어졌다.
“과연 제법이로구나. 앞으로 십 년만 더 지나면 강호에 적수가 없겠구나. 그러나 네 녀석이 이 검법을 익히지 않았다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구나.”
귀면탈은 검을 좌우로 번개같이 휘두르며 복태가 쏘아낸 열 번의 공격을 일일이 막아낸 뒤 복태의 가슴을 향해 좌장을 떨쳐냈다.
펑!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복태가 귀면탈의 좌장을 가슴에 맞고 뒤로 튕겨 날아갔다. 좌장을 맞은 가슴 한복판이 움푹 함몰되어 있었다.
“형님!”
둘째와 셋째의 절박한 외침이 조용한 산자락에 메아리쳤다. 아우들이 달려오기도 전에 중상을 입은 복태는 선혈과 끊어진 내장을 입으로 와락 뿜어냈다. 그 모습에 둘째와 셋째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 자가 누군데 점창파 대제자를 단번에 이 지경으로 만든단 말인가?
복태의 무공이 근래에 눈부시게 발전하여 자신들의 스승이라도 복태를 일격에 이렇게 피떡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복태는 살아날 가망이 없어 보였다. 둘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검을 주워들고 귀면탈에게 달려들었다.
“네 이놈!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귀면탈을 쓴 괴인의 손짓 한 번에 칼날이 둘째의 가슴을 갈랐다. 대번에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둘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자신의 가슴을 한번 쳐다보고는 그대로 쿵, 쓰러졌다.
“둘째 형님!”
셋째는 첫째를 붙들고 있다가 둘째마저 쓰러지자 다급하게 둘째에게 달려갔다. 손속이 얼마나 악랄한지 둘째는 이미 절명해 있었다.
“형님! 흑흑.”
셋째는 피투성이가 된 둘째의 시신을 안고 오열을 터뜨렸다. 잠시 흐느끼던 셋째가 핏발이 선 눈으로 귀면탈을 노려보았다.
“너는 대체 누구냐? 우리 점창파와 무슨 원한이 있기에 이렇게 끔찍한 짓을 저지른단 말이냐?”
귀면탈은 셋째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형만 한 아우 없다더니 과연 그렇구나.”
귀면탈은 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시원찮은 네 무공이 너를 살렸다. 이대로 사문으로 돌아가거라. 그리고 어쭙잖게 무공을 닦을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귀면탈이 고개를 돌려 셋째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놈 무공이 네 사형들을 능가하는 날, 네 목숨도 사라질 테니....”
셋째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귀면탈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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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맹 의사청에서 구파오세가(九派五世家)의 수장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기다란 자단목 탁자에는 각파를 대표하는 수장들이 앉아 있고 그 중앙에는 맹주 남궁진악이 좌우에 부맹주 천계심과 총군사 사마경을 데리고 앉아 있었다.
구파오세가의 수장회의는 좀처럼 열리지 않았으나 근래에 심상치 않은 일들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부득이 소집되었다.
최근 들어 구대 문파와 오대 세가 및 무림 명숙의 제자들이 잇달아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다. 문파의 미래를 짊어질 인재를 잃은 문파들은 그 상실감과 분노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몇 달 전에 아들과 제자를 한꺼번에 잃은 점창파 장문인 복호일은 탁자를 쾅, 내리치며 울분을 토해냈다.
“벌써 아홉 명의 후기지수가 목숨을 잃었소이다! 도대체 무림맹에서는 그동안 뭣들 하신 게요? 흉수를 잡을 생각이 있소이까, 없소이까! 아니, 흉수가 누군지 파악은 했소이까!”
복호일은 격한 감정을 주체치 못하고 맹주 남궁진악에게 언성을 높였다.
“복 장문께서 아들과 제자를 잃은 슬픔은 이해하오만 맹주님이 계신 자리입니다. 조금만 자중하시지요.”
총군사 사마경이 복호일의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했으나 오히려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고 말았다.
“이해? 자중? 지금 총군사께서는 자기 일이 아니라고 그런 속 편한 말을 하시는 게요? 이게 말이나 되오이까? 백주대낮에 정도 무림의 미래를 대표할 후기지수들이 참혹하게 목숨을 잃었어요, 목숨을!”
복호일이 탁자를 탕탕 쳐대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그 모습에 사마경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들과 제자를 잃은 그 마음이야 오죽하랴 싶었다.
“빈도도 석 달 전에 셋째 제자를 잃었소이다. 성품이 인자하고 무공이 뛰어나서 앞으로 우리 종남파의 기둥이 될 인재였지요.”
종남파 장문인 청학도장이 참담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지난 여섯 달 사이, 아홉 명에 달하는 정도 무림의 동량들이 살해당했소이다. 아직까지 소림, 무당, 화산, 곤륜, 아미의 제자들은 해를 당하지 않았소이다만 언제까지나 그러하리라는 보장은 없지 않소? 반드시 무림맹 차원에서 대응책을 마련해야 하오.”
화산파 장문인 거양진인이 목소리를 높였다.
“아미타불, 맹주께서 어떤 계획이 있으신지 고견을 듣고 싶소이다.”
소림사 장문인 공애대사의 말을 끝으로 구파오세가 장문인들은 입을 다물었다.
“아....”
맹주는 곤혹스러운 듯 탄식 소리만 냈다.
그러자 장문인들의 눈치를 보던 부맹주 천계심이 목청을 가다듬으며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정도 무림의 후기지수들만 대상으로 하는 이번 사건은 아주 악랄하고도 무서운 사건입니다. 반드시 강호의 모든 문파와 우리 무림맹이 합심하여 해결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저는 무림맹의 부맹주로서 이번 사태에 심각한 책임과 분노를 느낍니다.”
천계심은 아무 소리도 못 하는 맹주에 비해 입에 기름칠이라도 한 듯 달변을 토해냈다.
“제 생각에는 당분간 후기지수들의 단독 행동을 금하고 각 지역 문파들이 서로 연합하여 합동 조사반을 꾸리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물론, 무림맹에서 필요한 인력과 정보를 지원하겠습니다.”
마치 자신이 맹주라도 된 듯, 장문인들을 대상으로 서슴지 않고 무림맹 차원의 약속을 토해내자 지켜보던 총군사 사마경은 눈살을 찌푸렸다.
“시신의 상태로 보건대 흉수의 무공은 지극히 고강합니다. 그리고 인적이 드문 곳이나 예측불허의 장소에서 출현합니다. 그러나 무림맹에서 중원 천하의 모든 문파를 다 보호할 수는 없습니다. 각 문파의 후기지수들은 각 문파에서 일단 알아서 지켜야 할 것입니다.”
사마경이 원론적인 이야기를 꺼냈지만 이미 제자를 잃은 각 문파 수장들의 귀에 그 말이 제대로 들릴 리가 없었다.
“무슨 말씀이오? 무림맹에서 책임을 전가하겠다는 게요? 무림맹을 만든 것은 각 문파별로 하기 힘든 일을 공동으로 하기 위함이 아니오이까? 이런 식이라면 우리 점창파는 당장 무림맹에서 탈퇴하겠소이다!”
점창파 장문인이 전에 없는 강경한 어조로 나오자 사마경은 별수 없이 한발 물러섰다.
“그 무슨 말씀입니까? 당장 힘을 합쳐도 부족한 판국에 탈퇴라니요?”
사마경은 자기 말의 진의가 왜곡되자 언성을 높이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천계심은 그런 모습을 고소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네놈이 아무리 제갈량 뺨치는 재주가 있다고 해도 이번엔 안될 것이다.’
“총군사의 실언을 제가 사죄드립니다. 복 장문인께서는 노여움을 푸시지요. 우리 무림맹은 조속히 추적대를 꾸려서 흉수를 찾아내겠습니다.”
천계심이 사마경을 쳐다보며 슬쩍 비웃었다.
“이번에 살아 돌아온 제자의 말에 따르면 흉수는 얼굴에 귀면탈을 쓰고 있으며 한 자루의 장검을 기가 막히게 잘 쓴다고 합니다. 그자의 무공이 어찌나 고강한지 혼자서 상대하는 데도 마치 두 명의 적을 동시에 상대하는 느낌이 들었답니다. 그래서 일단 그 흉수를 귀면쌍살(鬼面雙殺)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떻겠소?”
“좋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귀면쌍살의 얼굴을 본 사람이 없으니 진범을 찾기가 쉽지는 않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천계심이 복 장문인의 말에 호응하고 나섰다.
“살해된 아홉 명이 모두 명문정파의 후기지수들이오. 이런 짓을 할 집단이 마교밖에 더 있겠소이까? 당장 마교에 선전포고를 해야 한다고 보오!”
공동파의 왕 장문인이 벌떡 일어나 비분강개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직 백련교가 관련되었다는 정보는 없습니다. 괜히 풀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하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겠지요.”
사마경의 말에 왕 장문인이 탁자를 탕, 하고 치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백련교가 아니라 마교요! 총군사께서는 무림맹의 군사시오, 아니면 마교의 군사시오? 소속감을 분명히 하시오!”
“아니 장문인께서는 그게 지금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제가 무림맹의 총군사임을 모르는 분도 있답니까?”
사마경은 왕 장문인의 말에 이성을 잃고 흥분하여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무림맹의 총군사라면 마교를 공격할 방책이나 내놓을 일이지, 어째서 아까부터 계속 초 치는 소리나 하는 게요? 그러고도 무림맹의 지도부라 할 수 있소이까? 안 그렇소이까, 맹주?”
그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이 없던 남궁진악이 허리를 폈다.
“마교에서 관련되었다면 증거만 잡힌다면 곧바로 공격해 들어갈 생각이오. 그리고 무림맹에서는 암영단을 통해 계속해서 정보를 모으고 있소이다. 여러 장문인의 안타까운 마음이야 잘 알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오.”
맹주 남궁진악의 말에 여기저기서 답답한 한숨 소리만 조용히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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