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10화 (10/201)

#   10 - 광세일소_한추영 - 1183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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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화. 무림신동 (3)

기하진은 천옥랑 같은 뛰어난 경공신법은 할 줄 몰랐다. 다만 기하진이 믿는 것은 중양신공으로 축적한 내공이었다. 남보다 무공입문이 늦었던 기하진이 쟁쟁한 소년 고수들을 모두 제치고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중양신공 때문이었다.

기하진은 소주천을 완성하고 나서 처음 걸음을 내딛던 때가 기억났다. 소주천을 이룬 뒤 다른 때와는 달리 몸이 유난히 가볍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깃털 같다고 해야 할까. 걸음을 내디디면 무한정 앞으로 뻗어 나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방 안에서 시험 삼아 성큼 걸음을 내딛는 순간, 그만 천장에 머리를 찧고 말았다.

어이쿠!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어루만지던 기하진은 다음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잠깐만! 내가 지금 천장에 머리를 찧은 건가? 어른 키의 두 배가 넘는 높이의 천장에?

그 높이까지 경공을 펼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기하진은 그 순간 무척 어리둥절했다.

그럴 리가! 다시 한번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은 기하진이 바닥을 박차고 천장을 향해 몸을 날리는 순간, 어느새 천장이 눈부신 속도로 머리를 향해 부딪쳐 오는 것이 아닌가!

우물쭈물하다가는 다시 머리를 찧을 것만 같아 기하진은 자신도 모르게 공중에서 몸을 틀며 공중제비를 돌았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공중으로 뛰어올라 공중제비를 도는 것도 그동안 한 번 하기도 벅찼건만 지금은 몇 바퀴라도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마치 자신의 몸이 공기가 된 듯 한없이 가볍게 느껴졌다.

기하진은 그 가벼움을 느끼고자 두 눈을 감고 팔을 벌려 가만히 섰다. 그랬더니 고양이의 꼬리가 닿는 듯 온몸 구석구석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기하진이 가만히 마음의 눈으로 자신의 몸을 응시하니, 실낱같은 기운들이 모공 하나하나에서 아지랑이처럼 뻗어 나오며 들락날락거리고 있었다.

방 밖으로 나온 기하진이 앞에 보이는 소나무를 향해 힘껏 땅을 박찼다. 그랬더니 발바닥에 커다란 용수철이라도 달린 듯 몸이 순식간에 십여 척 높이로 날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그때야 기하진은 깨달았다. 자신도 경공을 구사할 수 있음을. 그리고 자신의 온몸을 간지럽히는 그 느낌만 놓치지 않으면 천지간에 가득한 대자연의 기(氣)를 얼마든지 가져다 쓸 수 있음을.

대나무 다리 위에 올라간 기하진은 그때의 느낌을 떠올리며 잠깐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공력을 운행했더니 온몸의 세포에서 기(氣)가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발밑은 가느다란 대나무 줄기 하나밖에 없었지만 발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세한 기운은 어디를 밟아야 하는지, 어떻게 걸음을 움직여야 하는지 저절로 알려주었다. 떨어질까 봐 걱정할 필요 없이 그 기운에 자신을 그냥 맡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기하진이 눈을 감는 모습을 본 천옥랑이 조롱하며 말했다.

“갑자기 아래를 내려다보기 무서워지기라도 한 거냐? 이제 와서 눈을 감고 어쩌겠다는 것이냐?”

천옥랑이 비웃는 소리에 기하진이 눈을 뜨고 대나무 다리 가운데로 걸어 나오더니 갑자기 오른발을 들고 대나무 다리를 쾅 하고 내리밟았다. 그 바람에 대나무 다리가 튕기듯이 진동하기 시작했고 두 사람 모두 몸이 위아래로 심하게 흔들렸다.

천옥랑은 기하진이 갑자기 예상 밖의 행동을 하자 놀라 분통을 터뜨렸다.

“네 녀석이 정말 죽으려고 작정을 했구나.”

흔들리는 대나무 다리 위에서 교묘하게 균형을 잡은 천옥랑이 먼저 기하진을 향해 주먹을 날리며 선제공격을 했다.

천옥랑의 주먹에서 눈을 떼지 않던 기하진은 주먹이 몸통을 치기 직전, 돌연 발밑의 대나무에 발을 걸고 반 자 정도 몸을 뒤로 기울였다. 기하진의 몸이 마치 대나무 몸통에서 사선으로 뻗어 나간 가지처럼 옆으로 비스듬히 누이는 형세가 되었다. 그 기이한 동작에 아래에서 쳐다보던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천옥랑은 기하진이 대나무 다리 위에서 몸을 비스듬히 누이며 자신의 공격을 피하자 믿을 수가 없었다. 기하진이 쓴 수법은 땅에서도 하기 어려운데 그걸 공중에 외로 놓인 대나무 줄기 위에서 시연하다니!

그러나 놀람도 잠시, 천옥랑은 다시 질풍처럼 좌우 쌍권을 번갈아 뻗어냈다. 쌍권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이번 대나무 위에서의 비무는 자신이 제안했기 때문에 결코 질 수 없었다. 아니 결코 져서는 안 되었다.

만약 이번 비무를 진다면, 아버지는 결코 자신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또 여섯 달 폐관수련을 명할 수도 있다.

외부출입이나 외부인과의 접촉은 일체 금지되고 반년 동안 딱딱하기 그지없는 벽곡단과 물만 가지고 어두컴컴한 동굴 안에서 또 사투를 벌여야 할지도 모른다. 온기는 찾아볼 수도 없고 있는 것이라고는 동굴 벽에 낀 이끼뿐인 그곳에서 반년을 버텨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천옥랑은 목구멍이 꽉 막힌 듯 갑자기 숨쉬기가 어려워졌다.

천옥랑이 또래 아이들보다 체격이 크긴 했으나 아직 열세 살 남짓한 소년에 불과했다. 그 어린 소년에게 어른도 참기 힘든 폐관수련은 너무나 가혹한 처사였다.

그러나 천계심은 자신의 아들이 누군가에게 지는 꼴을 참지 못했다. 천옥랑이 누군가에게 지거나 맞고 돌아오면 천계심은 아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그리고 옥랑이 그 상대와 다시 싸워서 이기고 돌아올 때까지 결코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다. 천옥랑은 아버지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누구와 싸우든지 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이겨야 했던 것이다.

천옥랑이 어릴 때부터 쉬지 않고 부친과 사숙에게서 무공을 전수받은 것도 사실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만큼 어릴 때부터 단련이 되어 있던 터라 천옥랑은 사실 기하진을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기하진이 자꾸만 자신의 예상을 벗어나는 능력을 보인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이번 비무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

천옥랑의 몸이 좁은 대나무 위에서 공중으로 튀어 오르며 기하진의 안면을 무릎으로 찍어왔다. 상대방이 무릎 공격을 피한다 하더라도 연이어서 여섯 번의 발길질이 뒤따라 나오기 때문에 결코 피할 수 없는 수법이었다.

“앗! 건곤무영각(乾坤無影脚)이다!”

밑에서 쳐다보던 누군가가 천옥랑의 공격을 알아보고 소리쳤다. 건곤무영각은 청성파가 자랑하는 절기 중의 하나로, 한 번 겨냥한 목표를 절대 놓치는 법이 없는 무공이었다.

아들의 비무를 쳐다보던 천계심은 천옥랑이 좁고 위험한 대나무 위에서도 사문의 절초를 사용하자 흡족하여 빙긋 미소를 지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옥랑이의 무공이 아주 절묘하군요. 훌륭한 아드님을 두셨습니다.”

사마경이 천옥랑의 무공에 감탄하자 천계심은 내심 자랑스러우면서도 아닌 척 겸양을 떨었다.

“아니올시다. 저 녀석 무공이라 해봤자 고양이 세수하는 격으로 흉내만 내는 것이지 무슨 위력이 있겠소이까?”

“허허허. 고양이 세수라고 하기에는 위력이 실로 무서운 것 같습니다만?”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저 아이가 더 대단하오. 경공신법을 제대로 배운 것 같지도 않은데 저 좁은 대나무 위에서 어찌 저렇게 균형을 잘 잡을 수 있단 말이오?”

아닌 게 아니라 기하진은 천옥랑처럼 멋들어진 신법을 구사하지는 못했지만 좁은 대나무 위에서도 진퇴에 전혀 어려움을 안 느끼는 듯했다.

사마경도 사실 천옥랑 보다는 그런 기하진이 더욱 신기했기 때문에 말을 멈추고 다시 두 사람의 비무로 눈을 돌렸다.

천옥랑의 무릎 공격이 들어오기 직전, 기하진은 천옥랑이 내뿜는 기가 돌변하며 거칠게 증폭되고 있음을 알아챘다. 천옥랑 쪽에서 자신에게로 흘러오는 기에 맹렬한 살기가 담기면서 기하진의 온몸을 따끔따끔하게 찌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천옥랑의 기가 무릎 부분에 모이더니 곧 폭사되기 시작했다. 기하진은 기의 흐름을 볼 수 없지만 마치 눈에 보이는 것처럼 읽을 수는 있었다. 그래서 천옥랑이 무릎과 다리로 공격해 들어오리라는 것을 미리 알아챘다.

천옥랑의 건곤무영각이 폭사되는 순간, 기하진의 몸이 대나무 위에서 스르르 반보 가량 뒤로 움직였다. 무릎을 굽히지도 않고 발바닥은 대나무에 붙은 채 움직였기 때문에 아래에서 쳐다보는 사람들은 마치 귀신이 움직이는 모습을 본 양 경악했다.

뒤로 물러난 기하진이 몸을 살짝 틀면서 복부를 보호하듯 오른손을 뻗는 순간, 천옥랑의 무릎이 밀고 들어왔다. 그러나 기하진은 이 공격을 예견해 무릎이 밀고 들어오는 부위에 이미 오른손을 대고 있었다. 천옥랑의 무릎이 손에 닿자마자 기하진은 그대로 천옥랑의 무릎을 밖으로 쓸어냈다.

공중에 뜬 천옥랑의 몸이 중심을 잃고 대나무 다리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천옥랑은 무릎 공격 뒤에 곧바로 무영각을 뻗으려고 하다가 상대방이 자신의 공격을 귀신처럼 알아차리고 미리 손을 쓰자 크게 당황했다.

이미 대나무 다리를 크게 벗어난 천옥랑의 몸은 금방이라도 땅바닥에 곤두박질칠 것처럼 보였다.

아래에서 쳐다보던 사람들은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분분히 일어섰다. 그 모습을 본 천계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만약 옥랑이 저 녀석이 이대로 땅에 떨어져 자신의 체면까지 깎는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으리라!

그 순간, 천옥랑이 공중에서 두 발을 가위처럼 잽싸게 놀리더니 공중에 뜬 상태에서 그대로 몸의 방향을 바꾸어 다시 대나무 다리 끝쪽으로 떨어져 내렸다.

아무리 무림 명숙의 지도를 받았다고는 하나 아직 어린 소년이 펼치기에는 너무나 놀라운 경공 신법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관중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기하진마저도 천옥랑이 그 정도로 경공이 뛰어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은 결코 할 수 없는 상승 신법이었다.

“훌륭하다.”

싸우는 중이었지만 기하진이 진심으로 천옥랑의 신법을 칭찬했다.

“흥!”

천옥랑은 별거 아니란 듯 콧방귀로 응수했지만 얼굴은 이미 하얗게 질려 있었다. 방금 전의 상황은 자신이 생각해도 아찔했던 것이다. 천옥랑은 무심코 부친 천계심을 힐끗 쳐다보았다. 천계심의 표정은 얼음같이 차갑기만 해서 속내를 알 수 없었다.

“기하진, 네가 어떻게 건곤무영각을 막아냈는지 모르지만 이번에도 그런 운이 따를 것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좋아. 그럼 이번에는 내 공격을 한번 막아봐.”

그동안 계속 천옥랑의 공격을 방어만 하던 기하진의 손이 부드럽게 움직이며 둥글게 태극을 그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손을 앞으로 뻗어내자 기하진의 몸 주위에서 유영하던 기(氣)가 기하진의 손바닥을 통해 맹렬하게 뿜어져 나왔다. 빠른 속도로 원을 그리며 점점 커지던 기의 움직임은 그대로 회오리바람이 되어 천옥랑의 몸에 세차게 부딪쳐 갔다.

아래에서 이를 지켜보던 사마경은 두 사람의 움직임만으로 기하진이 천옥랑에게 장풍을 내쏘았음을 알아챘다. 열세 살 소년이 벌써 기를 다룰 줄 알다니! 이것은 돌멩이 몇 개를 깨부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기하진을 바라보는 사마경의 눈빛이 이채를 띠었다.

‘정말 물건 하나가 들어왔구나. 소림사의 지학(知學)이 후기지수 가운데 으뜸이라던데 저 정도면 지학과 겨루어도 손색이 없을 듯하구나.’

한편, 사마경의 바로 옆에서 기하진을 바라보던 천계심도 심사가 복잡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뺀다더니 어디서 굴러먹었는지 알 수도 없는 놈이 무림 맹주로 키우기 위해 세 살 때부터 혹독한 수련을 시켜온 자신의 아들을 능가하다니!

누구든지 자신의 앞에 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부맹주에게 이는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건방진 녀석.’

잔뜩 찌푸려진 부맹주의 시선이 태극을 그리는 기하진의 손을 쫓았다. 그 손끝 너머 아들 천옥랑이 삼사 장 밖으로 나가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털썩!

천옥랑이 대나무 다리에서 떨어지자 이를 전혀 예상치 못한 좌중은 얼어붙은 듯 조용했다. 수백 개의 눈동자가 대나무 다리 위의 어린 소년과 땅바닥에 떨어진 천옥랑을 주시했다. 숨소리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우렁찬 포 부단주의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지며 정적을 깼다.

“기하진 승!”

포 부단주도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믿을 수 없는 듯한 눈초리였다.

우와! 기하진의 승리를 알리는 구령 소리와 함께 우레 같은 함성과 박수 소리가 가하진에게 쏟아졌다. 순식간에 비무장은 흥분의 도가니로 바뀌었다.

이름도 잘 몰랐던 외톨이 소년 기하진이 바야흐로 무림맹 내 최강 소년 고수로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소년 비무대회를 관람하던 모든 사람이 일어서서 기하진에게 박수를 쳤다. 부맹주는 내키지 않았지만 일어서서 형식적으로 몇 번 손바닥을 부딪쳤다.

“부맹주님, 옥랑이를 이기다니 저 기하진이라는 아이, 과연 소문대로 대단하지 않습니까? 저 정도면 무림 신동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듯합니다. 저런 아이를 발굴하다니 아직 제 눈이 녹슬지 않았나 봅니다. 껄껄껄.”

천계심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마경이 대놓고 기하진을 칭찬했다. 천계심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으나 대회의 주관자로서 사적인 감정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과연 그렇소이다. 총군사께서 주목하신 아이이니 당연히 남다르겠거니 하고 생각했지만 정말 놀랍소.”

사마경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면서 천계심은 속으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멍청한 놈. 감히 애비에게 이런 수모를 안기다니...!’

담담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부맹주의 입술 한쪽은 이미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둥둥둥. 세 번의 용고 소리가 울리고 징 소리가 크게 나면서 올해의 기린회가 끝이 났다.

“최종 우승자 기하진 앞으로.”

포 부단주의 구령에 기하진이 앞으로 나와서 부맹주 앞에 섰다. 다시 한번 우레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훌륭하구나. 과연 앞으로 정도 무림의 기둥이 될 동량이로다.”

부맹주가 기하진을 칭찬하며 금으로 만든 패를 전달했다. 맹주 남궁진악의 이름으로 소년 비무대회 최종 우승자에게 주는 금기린패였다.

“기린회 최종 우승자에게는 맹주님께서 직접 하사하신 이 패와 함께 은화 백 냥의 상금이 수여된다.”

상금이 은화 백 냥이라는 소리에 여기저기서 부러움과 시샘이 가득 찬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상금으로 무엇을 할 테냐?”

부맹주의 물음에 기하진이 고개를 들고 부맹주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부맹주님, 저는 이 상금 필요 없습니다.”

당돌한 기하진의 말에 천계심은 순간 말문이 딱 막혔다. 박수갈채를 보내던 좌중들도 상금을 마다한다는 기하진의 말에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순식간에 다시 조용해졌다. 다만 사마경만은 흥미롭다는 듯 수정 안경을 코끝에 살짝 걸치며 기하진을 내려다보았다.

“상금이 필요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대신 청이 하나 있습니다.”

“청이라니, 그게 무엇이냐?”

“상금 대신 제가 지무각(知武閣)에 입교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기하진의 말에 좌중은 모두 깜짝 놀라 제 귀를 의심했다. 최종 비무에 패배하여 잔뜩 풀이 죽어있던 천옥랑마저도 놀란 토끼눈이 되어 기하진을 바라보았다.

권학당을 수료하려면 아직 일 년이 더 남아있으나 기하진은 지금 남은 일 년을 채우지 않고 곧바로 지무각으로 월반(越班)을 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흠....”

천계심은 전례가 없던 일이라 즉답을 못 하고 옆에 앉아 있는 사마경을 슬쩍 쳐다보았다.

“제가 보기에는 지무각으로 올라가기에 충분한 실력인 것 같습니다만 부맹주님께서 결정하셔야지요.”

사마경이 빙그레 웃었다. 천계심은 잠시 말이 없더니 갑자기 껄껄껄 하고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당돌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지만 또한 야심 찬 포부로다. 무릇 사내로 태어나면 그 정도 포부는 가져야지. 하하하. 좋다. 허락하겠다.”

“감사합니다. 부맹주님!”

권학당을 수료하지 않고 다음 단계인 지무각으로 올라간 첫 사례가 나온 것이다. 은화 백 냥을 거부하고 월반을 하다니, 수련생들과 관중들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단상에 서서 좌중을 훑어보던 부맹주 천계심의 눈에 아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놈! 그동안 네놈의 발전이 더딘 것은 맞서 싸울 상대가 없어서였다. 그런데 드디어 네놈의 경쟁자를 한 명 발견했구나. 이 정도 파격이면 네 녀석도 정신 바짝 차리겠지.’

천계심은 아들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기하진은 천계심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자신의 청을 대범하게 들어준 천계심이 너무 고마워서 그대로 땅에 엎드리며 큰절을 올렸다.

“감사합니다. 부맹주님. 정말 감사합니다!”

기하진은 어서 빨리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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