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6화 (6/201)

#   6 - 광세일소_한추영 - 1176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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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화. 무림맹의 외톨이 소년 (1)

무림맹 의사청(議事廳).

맹주 남궁진악은 태사의에 앉아 있고 부맹주 천계심과 총군사 사마경은 맹주 좌우에 서 있었다. 세 사람의 앞에는 중양일지 회수에 실패한 암영단주 석문이 무릎을 꿇고 부복하고 있었다.

“중원 무림의 살수 중 최고라는 암영단원들을 백 명이나 데리고 석 달간 추격한 결과가 고작 이거란 말이냐!”

부맹주의 노한 음성이 텅 빈 의사청을 쩌렁쩌렁 울렸다. 석문은 머리를 땅바닥에 대고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죽을죄인 것은 아느냐? 이제 중양일지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강호에 퍼져나간다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이 비급을 쫓을 것이고, 그로 인해 전 강호가 다시 한번 대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야. 어찌 일 처리를 이따위로 해!”

석문은 맹으로 복귀하고 나서 어찌 된 영문인지 육굉의 몸에서 찾은 중양일지 전반부를 내놓지 않고 중양일지를 회수하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천계심은 중양일지를 잃어버렸다는 말에 맹주의 앞이었지만 이성을 잃고 길길이 날뛰는 중이었다.

비록 석문이 임무에 실패하기는 했으나 석문은 엄연히 맹주의 제자. 그 점을 생각한다면 부맹주가 이토록 석문을 몰아붙이는 것은 지나친 처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맹주 남궁진악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런 천계심을 내버려 두었다.

“그래, 석 달간 추격하면서 혹시 육굉이 다른 사람과 연락을 하거나 만나는 것을 전혀 보지 못했느냐?”

이번에는 총군사 사마경이 물었다. 석문은 고개를 들고 사마경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희가 워낙 바짝 뒤쫓아서 육굉은 다른 지원을 받을 처지가 전혀 되지 못했습니다. 육굉을 죽이고 나서 육굉의 몸을 수색했는데 비급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응룡검 황보가 뒤늦게 와서 시신을 처리했지만 역시 비급은 얻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석문의 말에 사마경은 탄식 소리를 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어허, 그것참 이상하구나. 그렇다면 그자가 그 비급을 어떻게 했단 말이냐? 어디에 숨긴 것도 아니고?”

“예. 육굉이 머물렀던 장소마다 우리 단원들이 샅샅이 뒤졌으나 중양일지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흠....”

“이 일은 더 두고 볼 것 없소이다. 임무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석 단주를 즉시 파면하고 중벌에 처해야 하오!”

천계심이 강경하게 나왔다. 석문은 어차피 맹주의 제자, 이 기회를 빌어 맹주의 측근을 한 사람이라도 더 줄일 수만 있다면 나중에 이룩할 대업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빠른 계산이 섰다.

그러나 그뿐만은 아니었다. 중양일지에 수록된 중양신공은 무림 3대 신공 중 으뜸. 그 비급만 자신이 차지할 수만 있다면 맹주나 구대 문파의 장문인들도 내려다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사실 천계심은 석문이 그 비급을 탈환해 오면 중간에서 은밀히 빼돌릴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건 안됩니다. 석 단주를 파면하면 구대 문파와 오대 세가 장문인들이 의아하게 여길 것이외다. 그들이 파고들면 이 모든 사단이 중양일지의 존재를 알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중양일지의 존재를 무림에 알리지 않고 은밀히 처리하려던 우리 계획에 차질이 생깁니다.”

사마경의 말에 맹주 남궁진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렇겠군.”

사실 맹주를 포함해서 무림맹 수뇌들은 육굉이 무림맹의 서고인 천림비고에서 중양일지를 탈취하기 전까지 중양일지가 무림맹 내에 있는지도 몰랐다. 무림의 3대 신공은 왕중양 진인의 중양신공, 혼세마검(混世魔劍)으로 이름이 바뀐 천마신검(天摩神劍), 그리고 철산신장(鐵山神掌)이었다. 3대 신공을 기록한 비급 중 혼세마검보와 철산신기(鐵山神記)는 무림맹의 장경각인 천림비고에 은밀히 보관되어 있었지만 중양일지는 실전된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중양일지가 사라진 것을 눈치챈 사람은 천림비고 관리인 양 노인이었다. 양 노인은 수십 년 동안 서고에서 일했기에 어느 책이 어디에 있는지 훤히 꿰뚫고 있었는데 어느 날 청소를 하려고 보니 중양일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양 노인은 중양일지가 무공비급인 줄은 모르고 다만 전진교 조사 왕중양의 일기라고만 생각했다고 한다.

양 노인이 책이 분실되었다고 보고를 한 뒤에야 무림맹의 수뇌부들은 천림비고에 중양일지가 보관되어 있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중양일지는 이미 도난당한 뒤였다. 특히 그 사실을 안타까워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부맹주 천계심이었다. 중양신공이야말로 부족한 자신의 무공을 끌어올려 무림의 절대적 지배자로 군림할 수 있게 해줄 무공으로 생각했었다.

그래서 천계심은 지금 부복해 있는 석문에게 자신의 그런 감정까지 모두 쏟아내어 질책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그냥 넘어가면 맹의 기강이 서지 않습니다. 반드시 일벌백계해서 맹의 법도가 시퍼렇게 살아있음을 맹도들에게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이번에는 천계심이 강력하게 주장했다. 맹주는 천계심의 말을 듣더니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부맹주의 말도 일리가 있군. 그도 그렇겠어.”

오락가락하는 맹주를 보며 천계심은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저러니 시시대협(是是大俠)이라는 소리를 듣지. 이것도 흥, 저것도 흥, 도대체 자신의 의견이라고는 없는 사람 같으니. 쯧쯧.’

천계심이 속으로 자신을 비웃는지도 모른 채 잠시 생각에 빠졌던 맹주는 부맹주 천계심의 손을 들어주었다.

“석문은 임무 실패의 책임을 물어 당장 오늘부로 암영단주직을 내려놓는다. 당분간 맹의 임무는 맡지 말고 무공수련에만 집중하도록 하여라.”

“예. 맹주님.”

천계심은 대답하는 석문을 내려다보며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어리석은 맹주. 곧 그 자리를 내게 물려줄 날도 멀지 않았다. 조금만 더 기다려라.’

천계심은 그리고는 중양일지를 잃어버린 바에야 나머지 무공비급들이라도 손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천계심의 건너편에 서 있던 사마경은 그런 천계심의 인상변화를 흥미로운 듯이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날 밤, 맹주전에 총군사 사마경이 조용히 들었다.

맹주전에는 남궁진악이 혼자 앉아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총군사께서 이 야심한 밤에 어인 일인가?”

“조금 전 석문에게 중양일지 전반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부맹주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은밀히 나머지 하반부를 계속 찾으라고 말을 해두었습니다.”

“잘했군.”

남궁진악은 사마경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일가족이 몰살당한 것으로 알았던 벽력검 기일광의 아들을 석 단주가 데리고 왔습니다.”

“벽력검 기일광?”

남궁진악은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섬서 무림의 한 축이었지만 그렇게 존재감이 강하지 않아서 맹주님께서는 잘 모르실 겁니다. 그런데 그 아들 녀석이 아주 재밌습니다. 부모 둘 다 한날한시에 잃어서인지 그 녀석, 마교라면 아주 치를 뜹니다.”

사마경의 설명에도 남궁진악은 딱히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가?”

“그런데 이 녀석이 또 제법 영특하고 고집도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부맹주의 아들, 천옥랑과 같은 학당에 집어넣을 생각입니다. 제 아비를 닮아 안하무인인 옥랑이 이 아이를 그냥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가 천옥랑을 좀 눌러주면 지고는 못 견디는 부맹주의 성격상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자충수를 두도록 노려봄 직한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맹주님?”

“흠, 그렇겠구만. 그건 총군사가 알아서 하시오.”

“명 받들겠습니다.”

사마경은 그길로 그대로 맹주전을 물러났다.

****

무림맹 총군사 사마경(司馬慶)은 초로에 접어든 학자풍으로 키가 크고 야위어서 옷이 살짝 헐거워 보였다. 사마경은 연보라색 수정으로 만든 동그란 안경을 코끝에 걸치고 눈앞에 있는 아이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아이는 고집이 센 듯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초롱초롱한 눈빛에서는 총기가 엿보였다.

“그래, 네가 기 대협의 아들이로구나. 네 부모님의 일은 우리 무림맹도 가슴 아프게 생각한단다.”

사마경이 자상한 눈빛으로 기하진을 쳐다보자 기하진은 부모님 생각에 불현듯 가슴이 울컥했다.

“감사합니다.”

“그래, 부모의 복수를 하고 싶다고?”

“예. 무공을 배워 마교 놈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몰살시키는 것이 제 인생 목표입니다.”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에 사마경은 잠시 껄껄 웃었다.

“그래, 잘 생각했다. 부모의 원수는 불구대천의 원수라, 같은 하늘 밑에서 살아갈 수 없지. 내 있는 힘껏 너를 돕도록 하마.”

사마경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우리 무림맹에는 네 또래의 아이들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학당이 있다. 그 학당을 권학당(勸學堂)이라고 한단다. 내일부터 권학당에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글과 무공을 배우도록 해라. 그리고 절대 누구에게도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지내거라.”

기하진은 사마경의 말에 꾸벅 인사를 했다. 이때만 하더라도 이 키다리 안경잡이 아저씨가 무림맹에서 얼마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인지 전혀 몰랐다. 그저 사람 좋게 생긴 늙수그레한 아저씨쯤으로 생각했다.

총군사 사마경의 배려로 기하진은 그다음 날부터 권학당에 나가게 되었다. 권학당은 무림맹 수뇌부의 자제들이 글과 무공을 배우는 학당이었다.

그러다 보니 권학당에서 공부하는 백여 명의 아이들은 아버지의 지위에 따라 자신들의 지위도 정하고 서로 무리를 지어 다니기 일쑤였다. 누가 새로 들어오면 아이들은 당연히 그 아이의 배경에 관심을 가졌고, 새로 입교한 아이는 호된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현재 권학당에서 가장 위세가 높은 아이는 부맹주의 외아들인 천옥랑(千玉郞)이었다. 당금 무림맹주 남궁진악(南宮眞岳)은 복잡한 것을 싫어해서 맹의 업무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맹의 모든 대소사는 부맹주인 천계심(千計深)이 처리했는데 무림맹 안팎에서는 모두 맹주보다 부맹주가 실권자라고 은연중에 인식하고 있었다.

부맹주 천계심은 청성파 장문인의 사형으로 무공이 고강하고 야욕이 큰 사람이었다. 사실, 구대문파 가운데 입지가 약한 청성파 출신으로 부맹주의 자리에 오른 것도 천계심의 남다른 권력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둔 천옥랑은 무림맹 안에서는 황태자로 통했다. 키도 크고 외모도 번듯하게 생긴 데다가 어릴 때부터 부친 천계심에게 직접 무공지도를 받아 무공실력도 출중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후광 때문에 무림맹 내에서는 감히 누구도 천옥랑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천옥랑은 자신이 마치 부맹주인 듯 행동했다.

기하진이 권학당에 들어오자 아이들 사이에는 벌써부터 기하진에 대한 소문이 쫙 퍼졌다. 기하진은 고아인데 암영단주가 어딘가에서 주워왔다는 것이다.

기하진은 아이들이 자신을 힐끗거리는 것을 알았지만 괘념치 않았다. 어차피 무림맹 내에서 자기는 혼자이다. 이 까짓건 힘든 축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마음속으로 되뇌며 이를 악물었다.

권학당은 오전에는 글을 배우고, 오후에는 무공수련을 했다. 기하진이 처음 권학당에 나간 날 마침 오전에 배우는 글은 기하진이 이전에 배운 적이 있는 명심보감이었다.

“자, 오늘은 어제에 이어 명심보감 안분편(安分篇)이다. 지족자(知足者)는 빈천역락(貧賤亦樂)이오, 부지족자(不知足者)는 부귀역우(富貴亦憂)니라. 이게 무슨 뜻이냐?”

선생의 질문이 떨어지자 아이들은 다들 조용했다. 사실 선생의 질문이 어렵다기보다는 아이들 간에는 일종의 암묵 같은 것이 있었다.

천옥랑은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해서 문무 모두 수석을 놓치기 싫어했다. 그래서 문장 수업시간에도 누가 자기보다 먼저 답을 하거나, 자기가 답을 할 수 없는데 답을 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천옥랑의 눈치를 보느라 답을 안 하게 되고, 천옥랑은 아무도 답하지 못하는 질문에 답함으로써 한껏 자기 존재감을 과시했다. 학당의 선생들은 이런 내막은 모른 채 그저 천옥랑이 남들보다 낫다고 생각하여 천옥랑을 무림수재(武林秀才)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천옥랑은 오늘도 자신이 답을 하여 선생들의 칭찬을 독차지해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자신이 미처 손을 들기도 전에 처음 보는 녀석이 번쩍 손을 드는 게 아닌가!

권학당 내의 불문율이 깨지자 천옥랑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들은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속으로는 고소해 하면서도 불똥이 자기에게 튈까 봐 조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오호! 오늘 처음 온 하진이가 손을 들었구나. 그래, 무슨 뜻이냐?”

선생이 묻자 기하진은 예의 그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답했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가난하고 천해도 역시 즐겁고,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부하고 귀해도 역시 근심한다는 뜻입니다.”

기하진이 한 점 막힘없이 답을 하자 선생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웃음이 서렸다.

“잘 말해주었다. 자기 분수를 아는 사람은 가난해도 족하고, 분수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지위가 높고 돈이 많아도 근심 속에서 살아가는 법이지.”

선생은 하진이를 기특하다는 듯 쳐다보더니 눈길을 돌려 학생들을 향했다.

“자, 오늘 새로 온 하진이가 이렇게 답을 해주었는데 오랫동안 공부해온 우리도 이에 질 수 없겠지? 다음 질문이다. 안분신무욕(安分身無辱)이요 지기심자한(知機心自閑)이라, 수거인세상(雖居人世上)이나 각시출인간(却是出人間)이니라. 이것이 무슨 뜻인지 말해볼 사람?”

이번에도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선생의 눈이 자연스레 천옥랑을 향했다.

“무림수재가 한 번 답을 해 보겠느냐?”

그러나 이번 질문은 어려워서 천옥랑도 뜻을 알 수가 없었다. 천옥랑은 당혹감으로 얼굴이 시뻘게졌다.

기하진은 당황하는 천옥랑을 잠시 물끄러미 보더니 다시 손을 들었다.

“오호, 또 하진이냐? 하하, 그래, 무슨 뜻이냐?”

선생의 질문에 기하진이 또박또박 답을 했다.

“편안한 마음으로 자신의 분수를 지키면 욕됨이 없고, 일의 실마리를 알면 마음이 절로 한가로울 것이니, 비록 속세에 살지만 도리어 속세를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답을 하는 기하진의 눈빛이 천옥랑의 눈빛과 잠시 마주쳤다. 잠깐이었지만 그 사이 두 사람의 눈빛은 불꽃을 튀기며 허공에서 잠시 엉겨 붙었다.

천옥랑은 오늘 처음 본 신입생에게 보기 좋게 참패를 당한 셈이었다.

건방진 놈!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나에게 이런 수모를 줘?

천옥랑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는데 선생의 다음 말이 불에 기름을 부었다.

“잘 설명해주었다. 그동안 권학당의 분위기가 좀 침체 되긴 했었지. 이제 당찬 신입생이 들어왔으니 기존 학생들은 훨씬 더 분발해야겠구나. 무림 수재 옥랑이도 우물쭈물하다가는 수재라는 별호를 뺏길 수도 있으니 더욱 분발하거라.”

선생은 아이들 간에 선의의 경쟁심을 불어넣으려고 한 소리였지만 그 말은 천옥랑에게는 치욕으로 다가왔다.

기하진의 뒤에 앉은 천옥랑은 그 말을 들으며 기하진의 뒤통수를 한참 노려보았다.

그러는 사이, 점심시간이 되었다.

기하진이 식판을 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데 누군가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갔다. 천옥랑의 똘마니인 뚱보 이덕방이었다.

“아이구, 이게 누구야? 대단하신 무림신동 아니신가?”

덕방이 대놓고 기하진을 놀렸다. 기하진은 대꾸도 하지 않고 차갑게 이덕방을 노려보았다.

그때 또 누군가가 어깨로 기하진을 퍽, 밀치는 바람에 들고 있던 식판이 떨어졌다. 어이가 없어 돌아보니 이번에는 천옥랑의 또 다른 똘마니 원성한이었다.

“식당에 웬 비렁뱅이가 있냐? 어디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 걸?”

원성한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 시늉을 하더니 기하진 앞에서 한 손으로 코를 감싸 쥐었다.

“어디서 이런 냄새가 나나 했더니 첫날부터 관심을 못 받아 안달 난 관심종자시구먼?”

원성한이 코를 감싸 쥔 채 빤히 기하진을 바라보았다. 기하진은 화가 나 주먹을 꽉 쥐었다. 어찌나 주먹을 세게 쥐었는지 주먹 색깔이 하얘지며 바들바들 떨렸다.

“이래서 근본은 못 속이는 거지. 빌어먹던 놈은 어디서나 더러운 냄새가 나는 거지.

이번에는 이를 악 깨물었다. 기하진은 권학당에 들어온 첫날부터 말썽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기하진은 바닥에 떨어진 식판을 주워 다시 줄을 섰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하나같이 기하진을 밀치고 앞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결국 기하진은 제일 마지막에 음식을 받아야 했다.

기하진이 겨우 밥을 받아서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데 원성한이 다가와 식판을 냉큼 내려놓으며 말했다.

“어이, 신입생. 여기 내 자리인데?”

기하진은 그 말에 산적두목같이 생긴 원성한을 한번 노려보고는 잠자코 옆자리로 자리를 옮기려고 했다. 그러자 원성한이 또 냉큼 식판을 그 자리에 밀어 넣으면서 말했다.

“마음이 바뀌었어. 이 자리에 앉고 싶어.”

기하진은 식판을 놓고 앉으려다가 엉거주춤 선 상태에서 원성한을 다시 노려보았다. 기하진이 다시 그 옆자리로 자리를 옮기려고 하자 원성한은 기하진이 앉기도 전에 또 냉큼 그쪽으로 옮겨 앉았다.

“신입,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네 자리는 없는 것 같은데?”

그러자 이덕방이 기하진의 식판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치며 말했다.

“비렁뱅이 놈이니 바닥에 앉아서 먹으면 되겠네. 크크크.”

기하진의 식판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자 식판에 담겨 있던 음식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덕방의 말에 원성한과 주위에 있던 아이들 몇 명이 배를 잡고 낄낄거리며 웃었다.

기하진이 이를 악물며 손으로 흩어진 음식을 식판에 주워 담았다.

“역시 거렁뱅이 출신이라 그런지 손쓰는 것이 더 편한가 보네? 이래서 근본도 없는 놈을 받아선 안 돼.”

원성한의 말을 이덕방이 이어받았다.

“근본이 없긴? 어미, 애비도 거렁뱅이겠지. 크크크.”

그 말 한마디에 기하진은 정신이 나가버렸다. 꾹꾹 눌러 참았던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폭발했다.

기하진은 주워 담던 식판을 들고 그대로 이덕방의 머리를 내리쳤다. 순식간에 이덕방의 얼굴이 음식과 국물로 뒤범벅이 되었다.

“이 돼지 새끼야, 터진 입이라고 함부로 놀리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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