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5화 (5/201)

#   5 - 광세일소_한추영 - 1174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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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화. 운명의 수레바퀴는 구르기 시작하고 (3)

그제야 기하진은 고개를 들고 구휘를 쳐다보았다.

“그 악당과 나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

기하진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빽 소리를 질렀다.

“아무런 관계도 없는 데 그 사람과 왜 같이 있었느냐? 너는 그 사람이 누군지 아느냐?”

“알아요. 그 악당은 응룡검 황보라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제 부모님의 원수인 마교 사람이에요!”

분해서인지 숨이 차기 때문인지 말을 하면서 기하진이 씩씩거렸다.

“부모님의 원수라니? 네 부모님이 누구냐?”

“제 아버지는 기자, 일자, 광자를 쓰세요. 어머니는 방자, 혜자, 미자를 쓰시고요.”

기하진의 말에 구휘는 잠시 두 사람의 이름을 되뇌었다.

“기일광, 방혜미라....”

그러다가 구휘는 갑자기 두 손으로 기하진을 붙잡고 물었다.

“혹시 네 아버지가 벽력검 기 대협이 아니냐?”

구휘의 말에 기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아버지를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이야.

“기 대협 댁 사람들이 모두 죽은 줄로만 알았더니 네가 살아있었구나.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구휘가 다정한 눈빛으로 기하진을 바라보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기하진은 울음을 멈추고 구휘를 바라보았다.

“우리 아버지를 아세요?”

“알다마다. 얼마 전 정마대전 때 네 아버지를 뵌 적이 있다. 네 아버지는 섬서 무림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무인이셨지. 그런데 그 간악한 마교 놈들에게 몰살을 당하셨다니....”

구휘의 말에 기하진은 아버지가 생각나서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얘야, 아저씨랑 같이 무림맹으로 가지 않겠느냐? 아저씨와 같이 가면 무공도 배우고 친구도 사귈 수 있을 거야.”

무공을 배울 수 있다는 말에 기하진은 마음이 움직였다. 게다가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니, 기하진은 저도 모르게 구휘에게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좋아요! 데려가 주세요. 그런데 제 동생도 데려가도 돼요?”

기하진의 말에 구휘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동생이 있느냐? 기 대협은 외동아들만 있는 줄로 알았는데?”

“아, 친동생은 아니에요. 걔도 얼마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추명이 형과 제가 같이 돌봐줬거든요. 꼭 데려가야 해요.”

기하진은 어느새 울음 그친 똘망똘망한 눈으로 구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차마 거절하기가 어려웠지만, 지금은 작전 중인 데다가 무림맹과 상관없는 애를 데려가기도 난처했다.

그때 석문이 명령을 내렸다.

“암영단은 즉시 맹으로 철수한다. 그리고 구 부단주와 용봉단은 응룡검 황보를 쫓도록.”

석문은 기하진이 이 년 전 마교에게 일가족이 몰살당한 기 대협의 아들이라는 얘기를 듣자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 아이는 우리가 맹으로 데려가겠다. 자, 즉시 움직인다!”

“존명!”

암영단원 중 하나가 기하진을 안아 들었다. 구휘는 용봉단을 이끌고 즉시 사라진 황보를 쫓아갔다.

암영단원들이 떠나려는 모습에 기하진은 당황하여 석문에게 소리쳤다.

“아저씨! 제 동생은요? 동생은 어떡해요?”

“무림맹이 무슨 고아원이라도 되는 줄 알아?”

석문의 호통 소리에 기하진은 더 이상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석문을 노려보며 주먹을 꼭 쥘 뿐이었다.

문득 폐가에 혼자 있을 예린이 생각이 났다. 아침에 나와서 벌써 저녁이니 지금쯤이면 아마 혼자서 놀다가 지쳐 잠들었을 것이다. 마음이 시큰거렸다. 예린이를 잘 돌보라고 늘 신신당부하던 석추명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러나 기하진은 입을 꽉 깨물었다.

어쩔 수 없어.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평생 부모님 원수를 못 갚을 수도 있어. 예린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어. 나는 무림맹으로 가야 해!

기하진은 움츠러드는 자신을 다독이며 자신을 태운 암영단원 무사의 허리를 꽉 붙잡았다.

“자, 출발하자. 이랴!”

석문의 구령에 대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하진이 탄 말도 달리기 시작했다.

기하진은 말 등위에서 고개를 돌려 점점 멀어지는 화양현을 바라보았다. 임예린의 커다란 눈망울이 떠올랐다. 가슴속에 커다란 돌멩이가 가득 찬 듯 답답하고 괴롭기만 했다.

****

예린은 폐가에서 하루종일 기다렸지만 추명과 하진이 돌아오지 않자 겁이 나기 시작했다. 어느새 날은 어두워져 깜깜해졌다. 예린은 기다리다 지쳐 자다가, 또 깨어 기다리다 지쳐 자기를 반복했지만 아무리 자고 일어나도 추명과 하진은 오지 않았다.

밤이 되자 컹컹, 하고 떠돌이 개들이 짖는 소리가 마치 늑대 소리처럼 밤공기를 찢으며 들려왔다. 예린은 그 소리에 놀라 누더기 이불을 뒤집어쓰고 덜덜 떨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벽 틈으로 바람이 들어와 밤새 이빨을 딱딱거렸다.

아침이 되었지만 추명과 하진은 오지 않았다. 예린은 주린 배를 물로 채우며 또 하루를 기다렸지만 추명과 하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두려움과 배고픔에 지쳐 엉엉 울던 예린은 기다리다 결국 참지 못하고 큰길로 나가 보기로 했다.

예린은 한참을 걷다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가게 앞에서 그만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이틀을 굶은 예린의 배는 어서 만두를 넣어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만두를 보니 이틀 전에 오빠들과 함께 웃으며 만두를 먹던 기억이 떠올라 갑자기 눈물이 났다.

예린은 결국 만두가게 앞에 쭈그리고 앉아 눈물을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배가 고프기도 했지만 배고픔보다는 왠지 이제는 오빠들을 볼 수 없을 것 같은 불길한 생각에 더욱 눈물이 났다.

어린 여자아이가 만두가게 앞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니 측은하게 여길 만도 하건만 그 당시는 굶는 이도 많고 고아도 많았던 터라 다들 그러려니 했다.

만두가게 주인은 한 시진 째 가게 앞에 쭈그리고 앉아 만두만 바라보는 예린이 성가신 모양인지 결국 빗자루를 휘두르며 가게에서 뛰쳐나왔다.

“어서 안 꺼져? 젠장. 손님들이 오려다가도 네년 때문에 못 들어오잖아!”

만두가게 주인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빗자루를 휘두르자 겁이 난 예린이 피하려다가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으앙!”

그렇지 않아도 울보인 예린의 울음이 터졌다. 두려움과 배고픔과 돌아오지 않는 오빠들에 대한 원망이 가득 담긴 울음소리는 쉬이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아니, 이년이?”

만두가게 주인은 예린이 울음을 터뜨리자 더욱 성가시게 되었다고 생각했던지 눈을 부라렸다. 그리고는 예린의 뒷덜미를 잡고 뒤로 질질 끌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예린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그때 누군가 만두가게 주인의 팔을 붙잡았다.

“어허, 어린애에게 이 무슨 짓이오?”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데없는 목소리에 예린이 울음을 멈추고 올려다보니 비단옷을 입은 중년 부부 한 쌍이 앞에 서서 자기를 측은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값비싼 비단에 귀한 담비 가죽옷을 입고 있었다. 남자는 얼굴에 세 가닥 수염을 길러 표정이 엄숙했고, 여자는 피부가 하얗고 눈매가 선하게 생긴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여인이 예린이를 보더니 남편을 보고 얘기했다.

“우리 아린이도 지금쯤이면 딱 이 애만 하지 않을까요?”

부인의 말에 남편도 예린을 쳐다보았다. 근엄한 얼굴에 인자한 빛이 스쳤다.

“그렇구려. 팔 년이나 지났으니 지금쯤 이 애만큼 자랐겠지.”

남편의 말에 여인이 예린의 눈물을 닦아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얘야, 배가 고파서 울고 있니? 만두가 먹고 싶어?”

예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인은 예린을 품에 안더니 만두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부부는 예린을 위해서 만두 한 접시를 시켰지만 예린은 의외로 만두를 먹기는커녕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예린을 바라보던 여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우리 아린이는 어디 있는 건지.... 살아나 있으면 좋으련만.”

여인의 말에 남자도 눈에 물기가 살짝 묻어났다. 남자가 여인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

“걱정 말아요. 분명히 어딘가에 살아있을 거요.”

여인은 손끝으로 눈물을 훔치더니 만두 하나를 들고 웃으며 예린이에게 내밀었다.

“어서 먹어보렴. 따끈따끈할 때 먹어야 해.”

그제야 예린이 만두를 두 손으로 잡고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귀여운지 여인은 예린의 모습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 계속 머리를 쓰다듬었다.

“얘야, 네 이름이 뭐니? 부모님은 어디 계시고?”

“어머니는 일 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제 이름은 예린이예요. 임예린.”

부부는 예린의 이름을 듣자 깜짝 놀라 서로를 돌아보았다.

“이 아이의 이름이 어쩜 우리 아린이와 이렇게 비슷할까요?”

“그러게 말이오. 성도 ‘임’씨라니 정말 신기한 노릇이구려.”

이 부부는 중원 최대규모의 상단인 천린상단의 주인, 임풍 부부였다. 임풍 부부는 약 팔 년 전에 당시 갓난아기였던 어린 딸을 잃었다. 딸의 이름이 임아린(林雅隣)이었는데 예린의 이름과 너무 비슷하자 깜짝 놀란 것이다.

여인은 남편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보, 여기서 이 애를 만난 것도 인연인 것 같으니 우리가 데리고 가서 키우면 어떨까요? 아이의 이름이 우리 애와 비슷한 것이 마치 잃어버린 우리 딸이 돌아온 것만 같아요.”

그렇지 않아도 딸을 잃고 나서 매년 시름에 잠긴 아내의 모습이 안쓰러웠던 임풍은 선뜻 동의했다.

“그럽시다. 마침 이 아이도 부모를 잃어 사정이 딱하게 됐으니 우리가 데리고 갑시다.”

남편이 동의하자 여인이 예린을 보고 인자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얘야, 우리와 같이 가면 더는 길에서 헤매지 않아도 된단다. 우리와 함께 갈 테냐?”

늘 따뜻한 엄마 품이 그리웠던 예린에게 여인의 모습은 바로 엄마의 모습이었다.

예린이 만두를 놓고 일어나더니 여인의 품에 안겨들었다. 그 모습에 여인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예린의 등을 토닥였다. 여인의 따뜻한 체온이 예린의 몸으로 전해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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