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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광세일소_한추영 - 1171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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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밤.
섬서성의 무림명가인 기씨장원(奇氏莊園)에는 숨 막힐 듯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기씨장원의 주인인 벽력검 기대협은 검을 뽑아 든 채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칠흑 같은 어두움과 억수 같은 빗줄기 때문에 시야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어둠 속 저편에서 흐릿하기는 하지만 무엇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하진아, 두려우냐?”
기대협이 어린 아들에게 말했다. 하진이라고 불린 사내아이는 똘망똘망한 눈망울에 뽀얀 피부, 그리고 도톰하고 붉은 입술을 한 귀공자 상을 하고 있었다.
“아니에요. 아버지. 두렵지 않아요!”
어린 소년은 작은 입술을 꽉 깨물며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듯했다. 마당에는 칼에 맞아 죽은 시신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대부분 집안에서 부리는 종복들과 호위무사들이었다. 시신들에서 흘러나온 피가 빗물에 씻겨 마당이 온통 시뻘건 핏물이었다. 비릿한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백여 명에 달하던 기 장원의 호위무사들이 한 명도 남김없이 다 전사하고 말았다. 이백 명도 넘게 살던 그 넓은 장원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기 장주의 가족 세 사람뿐이었다.
기 대협의 아내 방 부인은 어린 아들을 꼭 안더니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진아, 무조건 살아남아야 한다. 알겠지? 우리 착한 아들, 꼭 살아남아야 해?”
방 부인은 참지 못하고 결국 눈물을 보이며 아들을 다시 한번 품에 안았다.
“여보, 서둘러야 하오. 적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소.”
기 대협의 검이 부르르 떨렸다. 다급한 기 대협의 목소리에 방 부인은 얼른 아들에게서 몸을 떼고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는 아들을 작은 독에 넣더니 뚜껑을 닫고 다른 독들 사이에 세워놓았다.
“하진아,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나더라도 절대 소리를 내어서는 안 된다. 알겠지?”
“네. 어머니. 염려 마세요.”
물기가 어렸지만 다부진 아이의 목소리가 독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래. 엄마는 우리 아들 믿어.”
독 안에 들어간 하진의 눈에 독의 깨진 틈으로 눈물을 훔치며 몸을 돌리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어머니 앞에서는 울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독 안에 혼자 있게 되자 눈물이 절로 핑 돌았다.
잠시 후, 빗속을 뚫고 검은 무복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제 겨우 두 사람만 남은 건가?”
제일 앞에 있던 사람이 기 대협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냉소를 지었다. 사내의 얼굴에는 칼자국이 나 있어 한 번 보면 잊기 어려운 인상이었다.
“우리 신교에 대항하면 어떻게 되는지 이제 잘 알겠지?”
사내의 말에 기 대협이 노성을 질렀다.
“시끄럽다, 이 마교 놈들아! 잔말 말고 어서 오너라. 벽력검이 상대해 주마!”
기 대협의 말에 사내는 우습다는 듯이 껄껄 웃더니 기 대협을 노려보았다.
“네놈이 무림맹의 편에 서서 신교를 적대시할 때부터 이런 결과는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는 걸 알았어야지. 오너라. 섬서 무림명숙이라는 벽력검의 수준이나 한번 보자꾸나. 클클클.”
사내는 백련신교의 사대주 중 하나인 탈명대주 마립이었다. 백련신교는 지난번 무림맹과의 싸움에 참패한 뒤, 그에 대한 보복으로 무림맹의 편에 섰던 정파 무림을 은밀히 각개 격파하고 있었다.
마립이 검을 휘두르자 검에 부딪친 빗방울이 미세한 침처럼 기 대협에게 쏟아졌다. 기 대협은 자신의 절기, 벽력검을 시전하며 마립의 검을 막아내었지만, 어느 틈엔지 마립의 검이 자신의 옆구리를 관통하고 있었다.
“여보!”
기 대협이 마립의 검에 찔리자 방 부인이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방 부인은 기 대협을 끌어안고 울부짖었다.
“여보, 죽지 말아요. 여보!”
오열하는 방 부인의 얼굴로 빗방울이 쏟아졌다. 눈물인지 빗물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 순간, 고통 속에서 신음하던 기 대협이 눈을 번쩍 뜨며 소리를 질렀다.
“안돼!”
마립의 검이 순식간에 방 부인의 몸을 가르고 지나간 것이다. 기 대협을 안고 있던 방 부인의 손이 스르르 풀리더니 방 부인은 폭우가 쏟아지는 마당 위로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여보!”
기 대협이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헉! 독 안에 숨어서 이 모든 광경을 보고 있던 기하진은 울음소리와 비명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얼른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독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때문에 다행히 마립은 자신이 방금 낸 소리를 못 들은 것 같았다. 어린 기하진의 눈이 새빨개지더니 기어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기하진은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네놈 저승 가는 길이 외롭지는 않겠구나. 이것도 우리 신교의 자비니라.”
마립의 검이 다시 한번 기 대협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곧 목에서 선혈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여... 보....”
기 대협은 바람이 빠지는 듯 미약한 소리를 내고는 아내를 따라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감지 못해 부릅뜬 두 눈 위로 빗줄기가 인정사정없이 내리꽂혔다.
그날 기하진은 한꺼번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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