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뒷이야기】
1년 뒤,
개방의 태상방주 배천상은 온 가족이 함께 있는 모습에 괜스레 울컥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것인지, 작은 일에도 감정이 복받치곤 했다.
“어머니! 어찌 그리 식사를 못하세요. 제가 맥을 짚어 봐 드릴까요?”
걸화가 차를 마시는 마부인에게 물었다.
“아니, 괜찮아. 얼마 전에 다른 의원이 다녀갔어.”
마부인이 말했다.
“어디가 안 좋으세요? 그러고 보니 낯빛도 좋지 못합니다.”
걸윤도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게, 좀…….”
마부인이 완전히 부인하지 않고 말끝을 흐렸다.
“어머니 혹여 지병이 있으셨어요?”
걸부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
마부인은 손사래를 쳤으나, 시원하게 답하지 않았다.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혹여 어머님 건강을 위해 필요한 것이 있다면 제가 온 나라를 다 뒤져서라도 찾아오겠습니다.”
연천도 마부인을 보며 말했다.
자식들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쏠리자, 마부인은 얼굴이 점점 붉어지기만 할 뿐 말을 하지 못했다.
말 못 하는 마부인을 향한 자식들의 표정은 점점 불안해졌다. 혹여 큰 병에 걸린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마부인을 대신해서 입을 연 것은 천상이었다.
“음! 병은 아니니 걱정하지 말거라. 어머니의 뱃속에 너희 막냇동생이 있어 그런 것이다.”
“에?”
걸화가 천상과 마부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우와― 우리 아버지 정말 대단하시다. 저 애가 막내는 맞겠지?’
걸윤이 속으로 생각했다.
“…….”
말없는 마부인의 얼굴은 부끄러움으로 물들어갔다.
“축하드립니다. 어머님.”
연천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고맙네.”
마부인이 작게 답했다.
“뭐 입덧이 심하거나, 특별한 점은 없으세요?”
걸화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애쓰며 물었다.
“입맛이 조금 없고……. 걸화를 가졌을 때처럼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고 싶구나.”
마부인이 쑥스러운 듯 말했다.
“저를 가져요?”
걸화가 눈을 껌뻑이며 물었다.
“아…….”
걸부의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걸화와 걸윤이 어리둥절해서 마부인을 바라보자, 잠시 생각하던 걸부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가 우리 셋을 낳아 주신 친모이시다.”
걸부의 덤덤한 말에 걸화와 걸윤은 멍한 얼굴이 되었다.
* * *
3년 뒤,
혈교의 혈마 가룡은 언제나처럼 어슬렁어슬렁 걸어서 교를 벗어났다.
그의 호위들이 조용히 뒤를 따랐다.
가룡이 나가고 며칠 뒤, 혈교도 몇이 자리에 모였다.
“우리가 어찌 지킨 혈교인데 혈마께서 저리 밖으로만 나돌아 다니시게 두어서야 되겠습니까? 교에 뭐가 제대로 되는 것이 없습니다.”
삼장로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상황이 좋지 않을 때 혈마 자리를 물려받으셨으면 교에 더 신경을 쓰셔야 하는데 지금 교에 혈마가 계신지 안 계신지 헷갈릴 지경입니다.”
혈망대 대주였다.
“우사! 우사께서 혈마께 말씀을 좀 해 보십시오. 지금도 겨우 명맥만 이어가고 있는데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삼장로가 모인 이들 중 제일 서열이 높은 우사에게 말했다.
“으흠…….”
우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전대 혈마가 타계하시면서 지금의 혈마께 자리를 물려주는 것까지 옆에서 지켜보았다.
아주 오래전, 갑자기 교내로 습격해 온 혈영천마로 인해 혈교는 완전하게 와해가 되었었다.
그때, 우사와 좌사는 혈교도 몇과 함께 심하게 다친 혈마를 모시고 겨우 탈출에 성공했었다.
그 후, 혈마가 죽고 혈교라는 단체가 중원 땅에서 사라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실, 그때 혈마께서는 돌아가시지 않았었다. 하지만 돌아가신 것과 진배없었다.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그저 생명만 이어가고 있을 뿐이었으니.
혈마의 목숨은 계속 이어갔지만,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깨어나지 못했고, 몇 안 되는 혈교도 중에서 혈마를 새로 뽑아야 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나왔었다.
하지만, 남은 혈교도들은 자리만 보존하고 있는 혈마를 지키며 십여 년을 버텼다.
그러다 만난 것이 지금의 혈마인 의원 가룡이었다.
가룡 덕분에 혈마께서 의식을 차린 것이다. 비록 얼마간이었지만, 눈을 뜨고 말씀도 하셨다.
그렇게 의식을 차린 혈마께서 혈교 무공을 익히기에 최적인 사령지체를 가진 가룡에게 혈마 자리를 물려주고 세상을 떠났다.
모든 이들이 새로운 혈마에게 엄청난 기대를 걸었었다. 다시금 혈교를 부활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한데, 새로운 혈마는 혈교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나돌아 다니기 바빴다.
“우사! 말씀을 해 보십시오.”
삼장로의 목소리에 생각에 빠졌던 우사가 그를 쳐다보았다.
“일전에 좌사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었는가?”
우사의 호통에 삼장로가 미간을 찌푸렸다.
“좌사는 아직도 혈마께 눈도 못 마주치네. 혈교를 이렇게라도 계속 유지하고 싶거든 그런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도 마시게!”
“하아…….”
누군가가 답답한 숨을 내쉬었다.
* * *
10여 년 뒤,
걸화와 연천은 동정호가 보이는 객잔에 앉아 대물잉어찜을 안주 삼아 홍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캬~ 역시 동정호 홍주가 최고예요.”
“술맛도 술맛이지만 동정호를 바라보는 게 참 좋구나.”
연천은 반짝반짝 빛을 내면서 잔잔하게 출렁거리는 동정호를 내려다보았다.
동정호는 동정호 그 자체의 경치도 훌륭하여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그것 외에도 유명한 세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대물잉어찜과 홍주 그리고 약초촌이었다.
동정호가 보이는 곳에 즐비하게 자리 잡은 객잔과 식당에서 파는 대물잉어찜과 홍주는 무림인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했다.
그리고, 전 중원에서 유명한 것이 약초였다.
동정호가 보이는 곳에서 안쪽으로 쭉 들어가면 약방과 의원이 다닥다닥 붙은 약초촌이 나왔다.
그들 중에 동정호에서 제일 처음 의원을 차렸다는 백공의약방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의 멧돼지 영단은 중원 전체로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오랫동안 병치레한 환자, 무리하게 수련해서 피곤한 무인, 장사하느라 지친 상인, 누구든 한 알만 먹으며 멧돼지 같은 기운이 솟아난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가장 많이 팔려 나가는 곳은 중원의 유명한 기루들로, 매달 대량으로 구입해 갔다.
백공의약방 의원인 백공이 사람들 몇에게 둘러싸여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우리가 이 약초촌에 제일 처음 진료소를 차린 게 맞다니깐 그러네. 원래 계시던 의원님이 차렸고, 내가 그 뒤에 같이 한 게야. 여기 처음에는 진료소고 약방이고 아무것도 없었다니깐”
“여기가 옛날에는 거지촌이었다는데 맞아요?”
누군가가 물었다.
“그게…….”
백공이 말을 하려는 찰나 누군가 그를 불렀다.
“아버지!”
“아이고! 우리 딸 영영이!”
백공이 제법 어른 티가 나는 여자아이를 예뻐 죽겠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식사하러 오시래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그럼 가야지.”
백공이 여식 영영과 그의 진료소 방향으로 몸을 틀며 물었다.
“영감님은?”
“영감님은 앞집에 내기 장기 두러 가셨어요. 식사도 하고 오신대요.”
“그래? 오늘은 뭐 맛있는 걸 해 놨을려나아―”
의원 백공이 실실 웃으며 여식과 함께 그의 진료소로 들었다.
* * *
20여 년 뒤,
정광천마 마철용은 상석에 앉아 있었다. 어깨가 벌어지고 체격이 좋은 천마에게 흑룡포가 썩 잘 어울렸다.
“천마대회를 3년에 한 번 개최하고 있고, 교인들의 무공 증진을 세심하게 살핀 덕분에 마교 전체의 힘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개인의 실력이 높아지면서 비공식적인 비무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천마의 책사로 있는 흑수 소강이 말했다.
“비공식적인 비무로 인해 올 한해만 해도 죽어나간 교인들의 숫자가 백이 넘습니다.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힘을 발산할 곳이 필요합니다.”
철마대 대주 극화랑이 말했다.
“그래서 뭘 어찌하자는 말이오?”
측진 장로가 물었다.
“전쟁을 일으킵시다. 마교가 중원을 차지하는 겁니다. 혈영천마께서 계셨던 그때의 영화를 되찾는 거지요. 지금 마교의 실력이라면 아주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힘이 커지면서 교내에서 일어나는 충돌을 밖으로 돌릴 수 있습니다.”
“전쟁?”
측진이 묘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계속 교내에서 서로를 죽이는 일을 두고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극화랑이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허!”
교주 마철용이 못마땅한 얼굴로 콧방귀를 뀌었다.
자리한 모두의 시선이 교주에게 돌아갔다.
“태상교주께서 그리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조용히 있으라고요. 우리가 전쟁을 일으킨다면 제일 먼저 태상교주님을 상대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마철용의 말에 자리한 이들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이 자리에 있는, 마철용을 포함한 10인은 태상교주 백연천이 실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교주님 말씀이 맞습니다. 태상교주님께서는 절대 반대하실 겁니다.”
소강이 교주의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서로 죽을 때까지 싸우는 일이 너무 잦습니다. 묵과할 수는 없습니다.”
극화랑이 뒤로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
“으흠…….”
마철용이 턱을 쓰다듬으며 깊이 생각했다.
“…….”
자리한 상위 서열의 마교도들도 교주의 얼굴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중원이 아닌 곳으로 영역을 확장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중원에서 떨어진 세외지역으로 손을 뻗는 것입니다. 교내의 일도 바빠지고 신경 쓸 곳이 많아지면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소강의 말에 마철용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우선은 그렇게 해 보세요. 해 보고 안 되면 천마대회를 매년 열든지 다른 방법을 강구해 보도록 합시다.”
“존명!”
* * *
30여 년 뒤,
소림의 방장 청건은 소림산 높은 봉우리에서 반듯하게 정좌를 하고 있었다.
흐트러짐 없는 몸가짐과 가볍게 뜬 눈에는 선기가 어렸다.
청건은 청아한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소림에 들어온 지가 벌써 30년이 넘었구나. 남들보다 늦은 나이였지.’
‘하아… 그때 가주가 그렇게 말해도 버티는 거였는데, 소림에 들어가서 생활해 보고 힘들면 다시 나오면 된다는 말에 진짜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나도 참 어리석었지.’
한때 허성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소림의 방장은 출가하기 전을 떠올렸다.
‘난 그래도 가주를 믿었는데, 대문파가 뭔 대수라고 나를 이런 곳에 넣어두고 가주는 다리 뻗고 잠을 자겠지? 다리 뻗고 자는지 어쩌는지는 몰라도 최소한 매 끼니마다 고기 반찬은 먹을 게야.’
방장은 입맛을 쩝쩝 다셨다.
‘내가 고기랑 생선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생선을 입에 넣어 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가물가물하구나.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간간하게 구우면 참 맛이 좋지……. 소림의 풀떼기뿐인 밥상은 더 이상 쳐다보고 싶지도 않아. 쩝…….’
‘하아……. 지난번에 걸윤 형님이 나를 보러 소림에 들르면서 가져온 곡주는 맛이 참 좋았지. 또 온다고 하셨는데 언제 오시려나.’
방장의 고른 숨이 잠시 깊어졌다.
‘걸윤 형님은 여전히 여인들한테 인기가 좋은가? 부럽다. 그때 차라리 형님을 찾아서 따라다녔으면, 고기도 먹고 잘하면 고운 연인을 만나서 장가도 들 수 있었는데.’
‘성불을 하면 뭐 하냐? 죽어서도 머리 깎고, 고기도 못 먹고, 여인도 못 만나고 살아야 하는데. 차라리 잠시 지옥에서 살다가 윤회의 길로 드는 게 낫지.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서 고기도 실컷 먹고, 여인도 잔뜩 만나면서 살아보는 게야.’
평온한 방장의 얼굴에 설핏 미소가 번졌다.
멀리서 방장 청건을 올려다보는 소림승 하나가 말했다.
“방장께서 또 무상도에 드셨구나.”
“어찌 저리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하늘 아래에서 명상에 드실 수 있을까?”
옆에 있는 소림승도 높은 봉우리에 앉아 깨끗한 하늘을 등지고 있는, 방장 청건을 올려다보았다.
“방장님의 깨달음의 깊이는 대체 어느 정도일꼬. 살아 있는 부처님이 따로 없어. 내 방장님 같은 분을 모실 수 있어서 더없는 영광이야.”
“관세음보살…….”
다른 소림승은 멀리 보이는 방장 청건이 불상이라도 되는 양, 그를 향해 경건한 자세로 합장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