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아우! 머리야… 욱! 속도 안 좋아…….”
금빛 이불이 들썩거리며 걸화가 꿈틀거렸다.
“헉!!”
갑자기 걸화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나 어제 혼례를 치르고… 미쳤어! 미쳤어!!’
자리에 앉은 걸화가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넓은 침상에는 걸화 혼자만 있을 뿐, 연천은 없었다.
‘하… 배걸화! 내가 못 살아. 내가 나땜에 못 산다…….’
어젯밤의 일에 대한 후회와 죄책감이 일며 불편한 속이 더욱 불편하게 울렁거렸다.
“마마, 상궁 근진이옵니다.”
문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걸화는 한숨을 내쉬고 답했다.
“들어오세요.”
“약 드시지요. 폐하께서 마마 기침하시면 꼭 챙기라 이르셨습니다.”
상궁 근진이 탕약을 내밀며 말했다.
“네…….”
걸화는 약을 받아 들이켰다.
곧 궁녀들이 대거 들어와 걸화를 닦이고 머리를 빗기고 옷을 갈아입히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걸화는 모든 것을 체념한 얼굴로 그들이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잠시 후, 어젯밤 그녀가 술을 마셨던 탁자에 아침 식사가 차려지고 연천이 방으로 들어왔다.
“헥…….”
걸화가 발딱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일어나셨소?”
“네…….”
걸화가 민망해서 연천의 시선을 피했다.
“식사하시고, 영친왕께 문후 드리러 가십시다.”
“네…….”
걸화는 얌전하게 자리에 앉아 조심스럽게 식사를 시작했다.
“…….”
연천은 낯선 걸화의 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 * *
영친왕은 흐뭇한 얼굴로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황제와 황후를 바라보았다.
‘그래……. 짝을 지어 준 것만으로도 나는 큰일을 한 게야.’
“황후께서는 밤새 좋은 꿈 꾸셨습니까?”
“네에? 네, 네…….”
영친왕의 물음에 걸화는 안절부절못했다.
밤늦게까지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시느라 꿈 같은 것 꿀 틈이 없었다는 것을 영친왕이 알까 봐 말이다.
“황제와 황후께서는 아무것도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후사를 보는 것에만 전념해 주십시오.”
영친왕의 말에 걸화의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제가 친정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으나, 숙부님 말씀대로 후사에 신경을 쓰려면 소홀함이 있을 것입니다. 숙부께서 이전처럼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연천이 자신이 들어온 후 정사에서 서서히 손을 뗀 영친왕의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그럼요! 도와야지요. 두 분은 아무 걱정 마시고 힘든 일은 다 이 숙부에게 맡기세요.”
“감사합니다. 숙부님.”
연천이 미소를 지었다.
“…….”
영친왕은 황궁에 들어온 이후 내내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황제의 미소에 마음이 놓였다.
‘혼례를 올리기를 잘했어. 황제의 얼굴이 저리 폈으니 말이야.’
* * *
걸화가 연천과 혼례를 올린 지 반년이 지나갔다.
“히…….”
걸화는 자수틀을 앞에 두고 한껏 집중해서 자수를 두고 있었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닌 걸화 스스로가 원해서 하고 있는 것이었다.
돌아가신 유모가 이 사실을 안다면 저승에서조차 깜짝 놀랄 일이었다.
그녀가 연천을 위해 손수건에 수를 놓고 있는 것은 한 쌍의 원앙이었다.
대대로 원앙은 금실 좋은 부부를 상징했다. 연천과 다시는 헤어지지 않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 싶은 마음에 그녀로서는 아주 노력하고 있는 것이었다.
걸화는 방으로 드는 연천을 보고 과하게 입을 벌려 웃었다.
“기분 좋은 일이 있었소?”
연천도 걸화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히… 제가 선물을 준비했어요.”
걸화가 씨익 웃으며 며칠 동안 고생해서 수를 놓은 손수건을 내밀었다.
연천은 천천히 걸화가 내민 것을 펼쳐보았다.
속이 비치도록 얇은 비단 천 위에 금색과 붉은색, 푸른색이 어우러진 두 개의 정체 모를 덩어리가 수놓여 있었다.
“하하하하하.”
연천이 소리 내어 웃었다.
“왜 웃어요?”
“직접 수를 놓은 것이오?”
연천이 걸화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물었다.
“당연하죠!”
걸화가 아주 자랑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음… 그러니깐 이것이… 음…….”
“원앙이잖아요.”
걸화가 참지 못하고 냉큼 답했다.
“그렇지. 원앙! 나도 그렇게 생각했소.”
“히이…….”
걸화가 뿌듯한 표정으로 입술을 크게 벌려 웃었다.
“황후가 수놓은 이 원앙처럼 다복하고 금술 좋은 부부로 삽시다.”
연천이 걸화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네…….”
걸화가 연천의 가슴에 얼굴을 부비며 답했다.
“내가 황후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소.”
걸화를 떼어내며 연천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뭐요?”
걸화가 고개를 들어 연천을 보며 물었다.
“혹, 선택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지금처럼 황후로 사는 것이 좋소? 예전처럼 중원을 여행하며 사는 것이 좋소?”
“에이, 그걸 뭘 물어요? 당연히 여행을 다니는 것이 좋죠.”
걸화의 말에 연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여행을 다니면, 길에서 잘 때도 있고 밥을 굶기도 하고 시중을 들어주는 이도 없는데 괜찮소?”
“이건 비밀인데…….”
걸화가 망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맨날 나를 쫓아다니는 상궁 때문에 불편해 죽겠어요. 가끔은 깜짝깜짝 놀란다니깐요. 난 흙길에서 자도 좋고, 맨날 만두만 먹어도 좋아요. 둘이서 이전처럼 중원을 다 돌아다니고 싶어요.”
걸화의 답에 연천이 입을 크게 벌려 미소 지었다.
“나도 그렇소. 우리 그렇게 살아봅시다.”
연천은 그렇게 말을 하고는 다시금 걸화를 꼭 끌어안았다.
* * *
황제는 오랜만에 대전으로 들었다.
건강하지 못해서 공식적인 자리에 얼굴조차 제대로 내민 적이 없던 황제가 1년 반쯤 전부터 대전에 나타나 열심히 정사를 보더니, 반년 전쯤 혼례를 올린 이후로 다시금 자신의 궁에서 나오질 않았다.
그런 황제가 거의 반년 만에 대전으로 든 것이다.
황제보다 나라의 대소사를 더 잘 알고 있는 영친왕이 있었기에 그의 공백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도 대신들은 황제보다, 군권을 모조리 가지고 있고 성격이 칼 같은 영친왕의 눈치를 더 보았다.
영친왕이 진심으로 황제를 아끼고 있음을 알기에 황제를 모시는 것이지, 영친왕만 없다면 황제는 대신들에게 허수아비와도 같았다.
영친왕은 황제를 따라 대전으로 드는 아들 주석명을 탐탁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영친왕은 석명이 정사에 관여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그가 대전에 드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황제는 유난히 화려하고 바닥에 길게 내려오는 황룡포를 입고 있었다.
늘 딱딱하게 굳었던 얼굴이 오늘은 편안해 보였다. 대신들은 황제가 혼례를 올려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리에 앉은 황제가 미소를 머금고 대신들을 둘러보았다.
멀리 자리한 관리들 하나하나까지 천천히 돌아보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대전에 들었습니다. 그간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까?”
황제가 근 반년 만에 대전에 들어서 한다는 소리였다.
“그간 영친왕께서 국무를 보시었습니다.”
재상 양강주가 답했다.
“영친왕이시라면 믿고 맡길 수 있지요.”
황제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영친왕은 황제의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다고 느꼈다.
‘황후가 들어온 이후에 확실히 뭔가가 바뀌었어.’
“오늘은 제가 대신들께 할 말이 있습니다.”
자리한 관리들은 그저 고개를 조아리고 황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건강하지 못한 내가 계속 황제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것은 이 나라를 위해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라 사료됩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게지?’
고개 숙인 영친왕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나 제게는 후사가 없습니다. 해서 저의 사촌 아우이자 영친왕의 아드님인 주석명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고, 저는 쉬도록 하겠습니다.”
“……?”
황제를 따라와서 그의 옆에 섰던 주석명은 어리둥절했다.
“황제와 황후의 춘추가 어립니다. 얼마든지 후사를 이을 수 있습니다!”
영친왕이 큰소리로 외쳤다.
“제가 미령하여 언제 후사가 있을지 모릅니다.”
“이제 혼례를 치른 지 겨우 반년입니다. 무엇이 그리 급하십니까? 그동안은 제가 국무를 보면 되지 않습니까?”
“네, 맞습니다. 든든한 숙부님이 계시지요. 하니 숙부님께서는 황제가 되신 아드님께서 정사를 맡아보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도와주십시오.”
연천이 편안하게 말했다.
“폐하!”
영친왕이 화가 난 목소리로 황제를 불렀다.
“하하하하! 그리 고사하실 필요 없습니다. 대신들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연천은 영친왕의 마음을 모르는 척 대신들에게 물었다.
“황제께서 육체 미령하신데 계속 무리하시면 안 되지요. 쉬셔야 합니다.”
“맞습니다. 소신도 황제 폐하의 건강이 저어됩니다.”
영친왕 몰래 연천과 미리 말을 맞춘 몇몇 신하들이 말했다.
“주석명은 비록 지금까지 국무를 본 적은 없으나, 모든 국사를 꿰고 있는 영친왕의 아드님이십니다. 결코 모자람이 없으실 겁니다.”
“황제께서 저리 원하시는데 신하된 도리로 그 명을 받들어야지요.”
황제의 명이 당연히 영친왕과 미리 이야기가 된 것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대신들도 앞 다투어 찬성의 뜻을 표했다.
‘영친왕께서 아드님께 황제 자리를 주고 싶으셨구먼.’
‘숙부가 힘으로 황제를 몰아내는 것보다 보기에 좋긴 해.’
‘역시 영친왕의 생각을 따라갈 수가 없다니깐.’
대신들은 각자 생각했다.
“이… 이……!”
영친왕은 여유로운 얼굴로 앉아 있는 황제에게 화가 났다.
그간 순리에 따르기 위해, 그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 자신이 얼마나 애를 썼는데 그걸 순식간에 이렇게 흩트리니 말이다.
황제의 사촌 아우인 주석명이 새로운 황제로 등극하는 데 반대한 대신은 영친왕 딱 한 사람뿐이었다.
영친왕이 반대를 해도 그저 냉큼 아들을 황제 자리에 앉히는 것이 민망해서 그러는 것이라 생각하는 대신들 덕분에 주석명은 빠르게 황제로 등극했다.
영친왕이 연천의 처소에 들어 길길이 날뛰었지만, 연천은 편안한 얼굴로 숙부를 바라볼 뿐이었다.
황제 주후는 30이 조금 넘은 나이에 태상황이 되었다.
권력을 몽땅 내어주고도 불안함은커녕 더욱 얼굴이 좋아 보이는 황제와 황후는 북경에서 멀리 떨어진 별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얼마 후, 여행을 다녀오겠다는 짧은 서찰만을 남기고 태상황과 태황후가 별궁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영친왕은 화가 나서 펄쩍펄쩍 뛰었지만, 어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저 어서 태상황과 태황후를 찾아 호위하라는 명을 내릴 수밖에.
* * *
수수한 무복을 입은 사내와 여인이 길을 걸었다.
사내의 허리에 흔한 검 한 자루가 매달려 있었지만, 그의 유순한 얼굴은 무와 거리가 있어 보였다. 함께하는 여인은 춤이라도 추는 듯 흥에 겨워 촐랑촐랑거리며 걸었다.
“사천 옆에 중경이라는 지역의 만두가 그렇게 맛이 좋대요. 안에 고기 육즙이 듬뿍 들어 있어서 먹을 때 조심해야 된대요. 우리 거기 가 봐요.”
여인이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가 보자. 가서 만두를 실컷 먹어 보자.”
“히히히. 섬서 위쪽에 영하라는 지역에는 맛이 좋은 양념을 곁들인 돼지고기 튀김이 그렇게 유명하대요. 우리 그것도 먹으러 가요.”
“그럼 가 봐야지.”
“거기서 쭉 내려오면 귀주라는 지역이 있는데 거기는 보리, 찹쌀, 수수… 암튼 좋은 것을 몽땅 넣어서 만든 황주 맛이 그만이래요.”
“가 보자. 우리 둘이서 전 중원을 다 돌아보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술도 잔뜩 마시자꾸나.”
“히히히히.”
“하하하하.”
함께하는 사내와 여인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어디선가 불어온 따스한 바람이 두 사람을 휘감아 돌다 자유롭게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