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톡. 톡. 톡톡. 톡…….
의자에 앉아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두드리는 것은 깊은 생각을 하는 영친왕의 버릇이었다.
넓은 그의 전각 안에는 그가 의자의 팔걸이를 두드리는 소리만 크게 울렸다.
톡톡톡. 톡톡. 톡…….
“하아…….”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영친왕이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하필이면… 개방은 황실이랑 무슨 인연이 이리도 질긴지 원…….”
중얼거리던 영친왕은 불만스럽게 혀를 찼다.
“쯧! 황제가 거부하지 않는 유일한 여인이야. 상황을 봐서 비를 들이면 되지. 이것도 언제 마음이 바뀔지 모르니 서둘러야 해. 밀어붙여야지.”
생각을 마친 영친왕은 벌떡 일어나 황제의 궁으로 향했다.
연천은 며칠 만에 자신을 찾은 영친왕을 바라보았다.
그도 며칠 동안 생각한 바가 있었다.
“숙부님! 오셨습니까?”
“네. 긴히 의논드릴 일이 있어 왔습니다.”
“저도 숙부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황제께서 제게요? 말씀하십시오.”
“석명이를 곁에 두게 해 주십시오.”
“네? 그 아이를 왜……?”
석명은 영친왕과 정실부인 서씨 사이에 난 아들이었다.
영친왕은 아들이 혹여 황제의 자리라도 탐할까 저어되어 대전 근처에는 얼씬도 못 하게 각별히 조심시켰다.
“제가 황실 생활이 아직도 낯설어 가까이 말벗으로 두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허락해 주시지요.”
“흠…….”
영친왕이 잠시 생각했다.
황제가 아닌 황족은 황제의 충실한 신하가 되어야 했다.
‘석명이도 머리가 굵어지는데, 언제까지 권력에서 멀리 밀어낼 수만은 없지. 차라리 황제 가까이 두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어.’
영친왕은 황제의 생각에 동의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연천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황제의 표정을 보며 목을 가다듬은 영친왕이 입을 열었다.
“음! 길일을 잡았습니다. 날짜가 촉박하기는 하나, 간소하게 하면 혼례를 준비하는 데 부족한 시일은 아닐 것입니다.”
“숙부님!”
황제의 언성이 높아졌다.
“혼례는 황제께서 정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황실 어른인 제가 결정할 일입니다!”
“하오나, 제 혼례입니다!”
“황제께 결단을 내리시라 여러 번 간언하였습니다.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습니다!”
영친왕은 이번에는 절대 물러설 마음이 없었다.
“제가 싫다지 않습니까?”
“황제의 자리에서 원하시는 일만 하실 수는 없습니다. 황후로 간택된 이는 어려운 사람을 도울 줄 아는 고운 성품을 가졌고, 지혜로운 여인입니다. 황제께서도 마음에 들어 하실 겁니다.”
“글쎄 저는 생각이 없습니다!”
황제의 단호한 목소리에도 영친왕은 자신의 할 말을 이어 나갔다.
“신의의 제자로, 지금은 황제 폐하의 의원으로 있는 여인입니다. 황제께서도 가까이서 보아 온 여인이니, 마음의 부담이 적으실 겁니다.”
“……?!”
혼례를 격하게 반대하던 황제가 놀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흠…….”
영친왕이 황제의 표정을 살피며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그 의원과 뭔가가 있었구나.’
“…….”
“오월 스무날입니다. 간소하게 할 것이나, 그렇다 해도 준비할 것이 적지는 않을 겝니다.”
왠지 힘 빠진 것 같은 영친왕의 말에 연천은 숙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 * *
자신을 안내하는 상궁을 따라 새로 배정받은 전각을 구경하는 걸화는 신이 났다.
‘이거 갑자기 너무 좋은 곳으로 바꿔주는 거 아니야? 와― 사숙님의 전각보다 더 좋다.’
비단 잉어가 노니는 작은 연못까지 있는 전각을 기분 좋게 돌아보던 걸화의 얼굴은 연천을 떠올리며 새침하게 변했다.
‘칫! 자기도 나한테 미안한 건 아는가 보지? 다시 만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가주도 아니고 황제? 이제는 진짜 남이고 모르는 사람이야.’
중얼거리던 걸화는 후원에 붙은 예쁜 정자를 보고 뛰어 올라갔다 내려왔다. 그리고 제법 큰 전각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자신의 방으로 들었다.
걸화는 방 안까지 따라 들어오는 상궁 근진을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상궁은 걸화가 자리에 앉자,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말을 꺼냈다.
“오월 스무날까지 궁중의 예법을 모두 익히셔야 합니다.”
“제가요? 예법을요?”
‘아… 예를 지킨다고 지켰는데 그렇게 하는 게 아닌가? 사숙님이랑 똑같이 한 거 같은데…….’
“황후가 된다는 것은 황제를 정성껏 보필하여 성군이 되도록 힘써야 함은 물론이고, 이 나라의 국모이며 내명부의 수장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언제나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상궁의 바른말에 걸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렇죠.”
‘근데 저 얘기를 왜 나한테 하는 거야?’
“그럼 앉는 자세부터 배우시지요. 허리를 곧게 펴고 목은 길게 뻗고 시선은 이 장 앞의 허공에 고정한 채 눈꺼풀은 약간 아래로 내려오게 하셔야 합니다.”
상궁이 걸화에게 가까이 와 자세를 잡아주며 말했다.
“네? 꼭 이렇게까지 해야 돼요?”
걸화가 엄청 불편하게 목을 빼며 말했다.
“마마! 시일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며칠 뒤에 국태부인께서 드실 것입니다만, 예법은 제가 담당을 하고 있으니 지금부터 익히셔야 합니다.”
“국태부인이 누구세요?”
“마마님의 어머님 아니십니까?”
“어머니요? 아…….”
걸화가 눈을 끔뻑였다.
“…….”
“그런데 왜 자꾸 마마라고 부르세요?”
“이미 간택이 끝났으니 마마라고 부르는 것이 옳습니다.”
“간택요?”
“마마께서 황후로 간택되시지 않으셨습니까? 모르셨습니까?”
의원이었던 걸화가 황후로 간택된 것을 궁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는데, 정작 본인은 알지 못했다.
“네에? 제가 뭐요? 황후요? 제가요?”
걸화가 눈을 크게 벌리고 황당하다는 얼굴로 상궁 근진을 바라보았다.
* * *
국태부인이라는 이름으로 걸화의 새로운 전각에 든 마부인은 공손했다.
“어머니! 아버지는요?”
걸화가 기운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영친왕과 말씀 중입니다.”
“헉……! 어머니. 정말 제가 황제와 결혼을 하는 게 맞아요?”
걸화가 자기 옆에 딱 달라붙어서 떠나지를 않는 상궁을 불편한 듯 흘깃거리며 물었다.
“네. 감축드립니다.”
“하아…….”
걸화가 한숨 섞인 숨을 내쉬었다.
요 며칠간 잘 때조차도 그녀 옆에서 버티고 있는 상궁 근진 때문에 피곤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거기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에도 어찌나 잔소리를 늘어놓는지, 몇 날 며칠 밤을 새우며 환자를 돌보았을 때보다 더 큰 피로가 쌓이고 있었다.
“에효…….”
걸화는 상궁이 내내 입에 달고 있는 국모고 내명부고 그딴 것은 모르겠고, 다시 자신에게만 향하는 연천의 배려심 가득한 눈을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힘든 교육을 참아내고 있었다.
끈덕지게 걸화의 옆에 붙어 있는 상궁 때문에 고달프기만 했던 시간은 하루하루 흘러 오월 스무날, 드디어 그날이 왔다.
혼례식은 해 질 무렵에 열렸다.
걸화는 금은보화로 장식된, 목이 떨어져 나갈 것같이 무거운 봉관을 머리에 쓰고, 소매가 넓고 바닥에 질질 끌리는 예복을 입고 천천히 걸었다.
굽이 높은 신은 발이 아프고, 혼례식 전에 상궁이 강조한 어깨와 허리를 편 자세는 불편하고, 목은 부러질 듯 무겁고, 과하게 수를 놓은 옷은 거추장스러웠다.
‘아우, 저기까지 걸어가야 돼? 사람 잡겠네. 아우, 다리야. 아우, 허리야. 목 아파…….’
걸화는 수많은 이들의 시선들을 받으며 꼿꼿한 자세로 걸었다.
언짢은 얼굴을 하고 있는 아버지 천상과 그 옆에서 눈물을 훔치는 어머니인 마부인이 보였다.
‘아버지는 표정이 왜 저러셔?’
걸화는 아버지의 불편한 표정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배걸윤도 왔구나.’
걸화는 그녀를 신기한 듯 바라보는 걸윤을 슬쩍 흘겨보았다. 그 옆에는 듬직한 걸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도 계속 걸었다.
저 앞, 자신의 도착지에는 연천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긴장한 것인지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연천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얼굴이 왜 저래? 좀 웃지……. 나랑 결혼하는 게 그렇게 싫은가?’
걸화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연천 옆에 섰다.
걸화는 마주 보고 절을 하면서 그녀의 시선을 피하는 연천 때문에 마음이 더욱 상했다.
‘저럴 거면 결혼을 하지를 말지. 씨……. 이걸 계속해도 되는 거야? 안 할 수는 없잖아.’
식이 진행될수록 걸화의 마음은 무거워졌다.
긴 예식을 마치고, 커다란 침실에 앉은 걸화의 온몸은 묵직하고 어디 한 곳 쑤시지 않은 데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불편한 것은 그녀의 마음이었다.
눈 한 번 마주치지 않고, 내내 무거운 얼굴로 일관하던 연천 때문에.
“에효오.”
침상 옆의 의자에 앉은 걸화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속이 상하는 것은 자신이 결정하고 선택한 것 하나 없는, 연천과의 이 결혼이 그녀는 너무 좋다는 것이었다.
‘씨이… 나쁜 놈!’
첫날밤부터 뭘 하는지 나타나지도 않는 연천을 원망했다.
오래전 그와 함께했던 때를 떠올리며, 들떴던 스스로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걸화는 탁자에 차려놓은 술병을 들어 잔에 채워 들이켰다.
‘크으… 술맛은 좋구나.’
연천은 예식이 진행되는 동안 계속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던 천상의 모습이 못내 마음이 쓰여, 침실로 들기 전에 그와 독대했다.
한 나라의 황제이지만, 한 여인의 지아비로서 그 여인의 아버지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제가 걸화를 지키고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천상을 향한 연천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 아이가 워낙 철이 없어서… 황궁이라는 곳이 고단한 곳 아닙니까?”
천상은 걸화가 황후가 되는 것이 하나도 좋지 않았다. 그 제멋대로인 성격에 무슨 짓을 저지를까 걱정부터 앞섰다.
황궁에서의 잘못은 그저 혼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을 게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수도 있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잘 살피겠습니다.”
“…….”
연천의 말에도 천상의 굳은 표정은 쉬이 펴지지 않았다.
걸화가 있는 침실로 향하는 연천의 걸음은 바빴다.
천상과의 이야기가 생각보다 늦어졌기 때문이었다.
침전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던 궁인과 호위는 침실이 가까워지며 줄어들더니 침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연천이 자신의 침전 가까이에는 아무도 있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직접 침실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선 연천은 걸음을 멈추었다.
오늘 예식을 마치고 황후가 된 걸화가 화려한 자수가 놓인 붉은 예복을 절반쯤 풀어 헤치고 벌건 얼굴로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문을 닫고 걸화에게 다가가는 연천의 발에 무언가가 챘다.
그것은 금과 은, 진주와 보석으로 장식한 봉관이었다. 양쪽으로 금봉황이 달린 관이 바닥에 데구루루 구르다 멈추었다.
쾅―!
연천을 본 걸화가 벌떡 일어나며 그녀가 앉았던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어! 형님!!”
“허……!”
연천은 언젠가 본 것 같은 광경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난 형님이 안 올 줄 알았는데…….”
걸화가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신랑이 어찌 신부를 혼자 둬? 첫날밤인데 어찌 이리 과음을 한 것이냐.”
“치!! 식 내내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있어 놓고는…….”
“하아… 그래서 기분이 안 좋아서 이리 마셨느냐?”
“처음에는 그랬던 거 같은데 지금은 기분이 너무 좋아요. 하하하하! 형님도 한잔해요.”
걸화가 연천의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허……. 그래!”
연천이 쓰러진 의자를 제자리에 놓아 걸화를 앉히고 자신도 옆자리에 앉아 술을 받아 마셨다.
“완전 맛있죠? 나는 동정호에 홍주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술인 줄 알았는데 세상은 넓고 맛 좋은 술은 많은가 봐요.”
“그런가 보다.”
연천이 걸화를 바라보며 정말 오랜만에 웃었다.
이상하게도 배걸화라는 아이와 이야기를 하면 그렇게도 재미있고 웃음이 나왔다.
“또 형님이랑 무림 여행을 다니면 좋겠다.”
“그래. 나도 그러면 좋겠구나.”
“음… 그러면 정말 너무 좋겠다…….”
걸화는 씨익 웃으며 천천히 의식을 잃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