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황제가 기거한다는 광활한 전각으로 들어서는 걸화는 지나치게 넓은 궁도 빽빽하게 서서 자신을 쳐다보는 호위도 다 마음에 들지 않고, 짜증스럽기만 했다.
내관을 따라 끝도 없을 것 같은 길을 걸어 자신이 돌봐야 한다는 황제를 알현하러 갔다.
‘황제가 당장 죽을 병에라도 걸렸나? 아니야, 그럼 스승님을 부르지 나를 부를 리는 없을 텐데… 그러니깐 나를 왜?’
생각을 해도 답은 없고 불만스러울 뿐이었다.
‘자기 방으로 가는데 이렇게 걷다가는 발병이 나겠네. 쯧!’
길고 긴 복도를 걸어 황제가 있다는 방으로 들었다.
눈이 아프도록 화려한 금으로 장식한 방에는 황룡포를 입은 황제가 높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걸화는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의원 배걸화가 황제를 뵙습니다.”
“예까지 와 주어서 고맙네. 내가 아주 신뢰하는 사람이 그대를 황실 의원으로 추천했어.”
‘어떤 놈이? 설마 스승님이? 에잇!’
생각하던 걸화는 낮게 숨을 내쉬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황제의 상냥한 목소리에 오는 내내 짜증스럽던 감정이 사그라들었다.
“소신이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걸화가 그럴듯하게 답했다.
“오느라 곤하였을 것이니 어서 가서 쉬시게.”
“성,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걸화는 고개 숙여 답하고 내관을 따라 황제의 전각을 빠져나왔다.
‘뭐… 의원이 환자를 가려서 보면 쓰나. 거지도 보고 황제도 보고 하는 게지.’
생각보다 황궁 의원의 일이 나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화였다.
* * *
걸화는 며칠 동안 그녀가 배정받은 방에서 쉬었다.
거지촌의 방보다 몇 배는 더 큰 방에서 시녀의 시중을 받고, 좋은 재료로 만든 음식을 먹는 게 나쁘지는 않았지만 종종 거지촌의 진료소가 떠올랐다.
‘백공 의원이 잘하고 계실 게야.’
걸화는 자신 앞에 펼쳐진 넓은 황궁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황제를 맡아서 보는 지금의 어의는 신의의 사제이자, 걸화의 사숙인 해길이었다.
오늘은 황제를 진찰하러 가는 해길을 따라나섰다.
“사숙님! 사숙님은 언제부터 궁에 계셨어요?”
세상을 초월한 것 같은 신의와 다르게 대화가 통할 것 같은 해길에게 물었다.
“사형이 궁을 나가고 난 후에는 내가 계속 있었지.”
“그럼 계속 황제만 돌본 거예요?”
걸화의 별생각 없는 물음에 해길이 잠시 주춤했다.
진짜 황제인 연천이 황궁으로 들어온 것은 겨우 몇 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외부에는 건강하지 못해 자신의 전각에서 두문불출한 것으로 되어 있었으니.
“그래. 내가 치료했다. 황제께서 이제라도 건강을 되찾아서 다행이야.”
“…….”
걸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해길과 함께 황제의 전각으로 들었다.
매일 황제의 건강에 이상이 없는지 맥을 짚었고, 황제의 상태에 따라 식사의 재료를 결정하고 보약을 달여 올리기도 했다.
해길과 걸화는 황제 앞에 고개를 숙였다.
“어의 해길이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어의가 고개 숙여 말하고, 기다렸다.
황제의 주위를 지키던 호위와 시녀들이 자리를 피했다.
황제의 건강 상태는 황실의 극비 중 하나였기에.
해길이 황제에게 다가가자 걸화도 주춤거리다 그를 따랐다.
걸화는 고개를 숙이고 황제가 내민 그의 팔을 잡아 두툼한 팔걸이에 올리고 조심스럽게 황룡포의 소매를 걷어 해길이 맥을 짚기 편하도록 했다.
해길이 가만히 황제의 맥을 짚고 손을 치우자, 걸화는 걷었던 황룡포의 소매를 다시 내렸다.
해길은 다시 바닥으로 내려가 고개를 숙였다.
걸화도 그 뒤를 따랐다.
“신체에 이상은 없으시나, 마음이 안정되지 못합니다. 약을 쓸 정도는 아닌 듯하니 안정을 주는 따뜻한 차를 식사 후에 올리겠습니다.”
“그리하라.”
고개 숙인 걸화는 황제의 짧은 답에 왠지 섭섭함을 느끼며 전각을 빠져나왔다.
해길은 황제의 식사가 끝이 나면 직접 준비한 차를 황제에게 올렸다. 그의 뒤를 따라가 가만히 있다 나오는 것이 걸화 일의 전부였다.
거지촌의 진료소에 비하면 너무 하는 일이 없어서 심심할 지경이었다.
“오늘은 네가 차를 올리거라.”
어느 날, 해길이 말했다.
“어? 사숙님은요?”
“오늘은 네게 차를 올리라고 하더구나. 그 정도는 혼자서도 할 수 있지?”
“그럼요! 저도 의원인데.”
걸화는 그 별것도 아닌 일을 하는 것에도 기분이 좋아서 말했다.
“그래. 그럼 다녀오거라.”
걸화는 이제는 익숙해진 길을 걸어 황제의 전각으로 들었다.
그녀가 들자, 방에 있던 호위와 시녀들이 밖으로 물러났다.
걸화는 조심스럽게 황제 앞에 놓인 탁자에 차를 올리곤 고개를 숙여 기다렸다.
“흠…….”
황제의 한숨 소리에 걸화가 움찔했다.
‘뭐 잘못했나? 사숙님이 한 거랑 똑같이 했는데? 이게 아닌가? 뭘 빠트렸나?’
고개 숙인 걸화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
황제는 차를 들지 않았다.
‘아이… 뭘 잘못했구나. 뭐지? 뭐지? 나 이제 쫓겨나나? 혹시 목을 베고 그러지는 않겠지? 헉! 유배 같은 걸 보내려나?’
황제의 작은 인기척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걸화의 속이 바짝바짝 타는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라.”
황제의 명에 걸화는 고개를 조금 들어 자신이 올린 차를 바라보았다.
“…….”
암만 봐도 뭐가 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를 보거라.”
‘망했다.’
걸화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조금 더 들었다가 살그머니 눈을 떠 황제를 바라보았다.
“헉?!”
잔뜩 웅크리고 있던 걸화의 눈이 커졌다.
“언제 알아보나 기다렸다.”
연천이 미소를 담은 얼굴로 걸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
자신을 보며 따뜻하게 미소를 담고 있는 연천의 모습에 걸화의 마음속에서 그간 꼭꼭 눌러놓았던 감정이 봇물 터지듯 밀려왔다.
사무치는 그리움이 전신으로 퍼지며,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왜 우느냐?”
연천이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 주려고 손을 내밀자 걸화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공손하게 다시 고개를 숙였다.
연천이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내렸다.
요 며칠 자신의 전각으로 드는 걸화를 보며 풋풋했던 옛 생각에 즐거웠다.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면 어찌 나올지 내내 궁금했다.
언젠가처럼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낼지, 악담을 퍼부을지 기대했다.
한데 저렇게 거리를 두고 예법을 지키는 것이 아닌가.
연천이 걸화를 쳐다보아도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답지 않게 들떴던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오랜만에 즐거운 생각으로 들떴던 감정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
“…….”
“그만 나가보아라.”
묵묵한 연천의 말에 걸화는 조심스레 그의 전각을 빠져나갔다.
‘으흠…….’
연천은 묵직한 숨을 내뱉었다.
* * *
걸화는 매끼 식사가 끝나면 따뜻한 차를 가지고 와 연천이 다 마실 동안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기다렸다.
따뜻하게 몸속으로 스미는 찻물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갑게 식어가는 것 같았다.
그에게 즐거움과 세상의 재미를 가르쳐 준 배걸화는 이제 없었다. 그저 의원 배걸화가 있을 뿐이었다.
연천은 그녀가 들어와도 더 이상 주변을 물리지 않았다.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잔을 내려놓을 뿐이었다.
걸화는 빈 찻잔을 들고 조심스레 물러났다.
“흠!”
연천이 자신의 전각을 빠져나가는 걸화를 보며 짜증스럽게 숨을 내뿜었다.
그녀가 의원이라는 자신의 직분을 다하는데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에게 억지를 쓰고 생떼를 부리는 것보다, 바르게 행동하는 지금 그녀의 모든 것이 불만스러웠다.
“쯧!”
못마땅한 감정에 혼자 혀를 찼다.
걸화가 나간 곳으로 영친왕이 성큼성큼 들어오고 있었다. 연천은 눈을 깊게 감았다가 다시 떴다.
며칠에 한 번씩 자신을 찾는 숙부가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연천은 아무렇지 않은 척 영친왕을 맞이했다.
“의원께 들으니, 마음이 혼란하여 안정이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
연천은 의외의 말을 하는 영친왕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베갯머리에서 하루의 힘들었던 것을 모두 털어내는 기쁨을 몰라서 그러시는 것입니다.”
“숙부님!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연천이 이미 몇 번이나 똑같은 말을 했다. 아직은 혼례 같은 것을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어느 나라의 황제가 자신이 원할 때, 원하는 여인만을 들일 수 있답니까? 그것 또한 황실을 위해 꼭 필요한 중차대한 일이라는 것을 왜 모르시는 겁니까?”
“그렇다고 어찌 알지도 못하는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입니까?”
“제가 그 마음을 이해하니 이렇게 도와드리는 것 아닙니까? 마음에 드는 여인을 골라, 불러들이시면 됩니다. 얼굴도 보고 이야기도 해 보시라지 않습니까?”
“그리했다가 제 마음에 차지 않으면요? 그리해 제가 내치면요? 저와 이야기 몇 마디 나눈 죄로 그 여인은 평생 지아비를 받아들일 수 없을 텐데 그리하라구요?”
“황후를 꿈꾼 대가입니다.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으흠…….”
연천이 불편한 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아는 여인을 고르십시오. 저는 어떤 여인이라도 황제께서 원하기만 하시면 좋습니다. 저기 저! 저 시녀는 어떻습니까?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계시질 않습니까?”
“숙부님…….”
“정녕 황실의 대를 끊기라도 하실 작정입니까?”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언제요? 제가 죽고, 황제께서 후사 없이 늙으면 황제께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저들이 가만히 있을 줄 아십니까? 저들은 언제든 그 자리를 빼앗으려 할 겁니다. 저 상궁은 어떻습니까?”
영친왕이 그를 위해 다과를 내어오는 상궁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만하십시오.”
연천이 말했다.
“저는 세상 모든 여인을 다 데리고 와서라도 황제의 마음에 드는 여인을 찾아낼 겁니다. 그럼 조금 전에 나간 의원은 어떻습니까? 매일 보시지 않습니까?”
“…음!”
“…응……?”
영친왕이 지금까지와 다른 반응을 보이는 황제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말에 반대하던, 황제의 표정은 지금까지와 다르게 상기되어 있었다.
“…….”
“…….”
언성을 높이던 두 사람이 입을 다물자 커다란 황제의 전각은 고요했다.
“…….”
“오늘은. 음! 오늘은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쉬십시오.”
영친왕은 생각지 못한 황제의 반응을 황당한 얼굴로 바라보다 그의 전각을 빠져나왔다.
영친왕은 자신의 전각으로 향하며 그의 내관에게 명했다.
“새로 온 의원에 대해 알아보아라. 하나도 빠짐없이.”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