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황궁, 대전으로 든 상국, 승상, 장군, 수백의 고위 관료들은 관복을 입고 서 있는 영친왕을 보며 의아하게 생각했다.
잠시 후.
“황제 폐하 드십니다.”
내관의 목소리에 황룡포를 입은 사내가 저벅저벅 걸어와 단 위에 자리를 잡고 앉는 게 아닌가.
고관들은 황룡포를 입은 이를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영친왕이 알 만하다는 듯이 관리들을 보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간 황제께서 건강하지 못하시어, 신하된 자로서 걱정이 많았습니다. 다행히 오랜 병상 생활을 털고 이리 일어나시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
영친왕이 말을 멈추자 수백의 관리들이 있는 커다란 대전은 조용했다.
“그동안은 황제 폐하를 대신하여 제가 정사를 보았으나, 이제 폐하께서 쾌차하셨으니 여러 대신들께서는 폐하를 보필하는 데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
영친왕이 말을 마치자, 대전 안은 고요했다.
연천은 거북한 표정으로 고개 숙인 대신들을 둘러보았다.
군사력과 모든 권력을 거머쥐고 있는 영친왕이 인정한 황제였으니 반대하지는 못하겠지만, 지금껏 얼굴 한 번 제대로 본 적 없는 황제였다.
강자에게는 한없이 나약하지만, 누구든 조금만 틈을 보이면 밟고 올라서는 것이 습성인 관리들은 영친왕의 눈치만 살피며 조용히 있었다.
* * *
연천은 자신의 전각에 앉아 가만히 밖을 바라보았다.
“영친왕께서 드십니다.”
잠시 후, 영친왕이 전각으로 들어 연천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폐하! 무엇을 하시고 계셨습니까?”
연천을 보는 영친왕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저 가만히 있었습니다.”
황궁에서 연천의 일이 그랬다. 가만히 있는 것뿐이었다.
“가만히 앉아 보기만 해도 좋지요. 이 모든 것이 다 폐하의 것입니다.”
“흠…….”
연천이 작게 숨을 내뱉었다.
영친왕은 연천의 한숨을 모른 척, 두툼한 책자를 꺼내 내밀었다.
“이리 혼자 계시니 한숨이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서 황후를 맞이하시고 황자를 낳아 황실을 튼튼히 하셔야지요.”
“…….”
연천은 영친왕이 내민 책자를 불편한 표정으로 내려보았다.
“부끄러워하실 것 없습니다. 자자! 보십시오.”
영친왕이 직접 책자를 넘겨 여인의 초상이 잘 보이게 연천에게 내밀었다.
“이 여인은 대장군의 둘째 여식입니다. 잘 보십시오. 미색이 아주 곱지 않습니까?”
“…….”
영친왕의 말에도 연천은 심드렁했다.
영친왕은 연천의 표정을 못 본 척 다시 책장을 넘겼다.
“이 여인은 대학사의 막내 여식인데, 아비를 닮아 지혜롭고 글월을 어찌나 훌륭하게 쓰는지 한번 읽어보시면 가슴이 절절해지지요.”
“제가, 제가 따로 보겠습니다.”
“보지만 마시고, 결정을 하셔야지요. 혼례를 치른 후에도, 마음에 드는 여인이 있으면 후궁으로 들여도 되니 편하게 보십시오.”
“숙부님!”
연천이 영친왕의 말을 끊고 진지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왜 저를 이 자리에 앉히신 겁니까?”
연천이 불만스럽게 물었다.
“누가 폐하를 그 자리에 앉힙니까? 폐하께서는 황제이고, 그 자리의 주인으로 태어난 겁니다.”
영친왕이 힘을 주어 말했다.
“하아…….”
연천이 불편한 숨을 내쉬었다.
“책자를 보고 여인을 고르십시오. 황후가 불편하면 후궁부터 들이셔도 됩니다. 아니면 제가 골라볼까요?”
“제가 보겠습니다.”
“황실을 위해서는 황제의 자손이 필요합니다. 제가 다 알아서 할 터이니 낳아만 주십시오.”
“숙부님. 천천히 볼 터이니 오늘은 그만하십시오.”
“황후와 황자는 황실에 꼭 필요합니다. 더 이상 미루지 마소서.”
말을 마친 영친왕이 황제의 전각을 빠져나갔다.
연천은 황제야말로 그 어떤 것보다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자리라고 생각했다. 하루하루 숨이 턱턱 막혀왔다.
* * *
걸윤은 발길 닿는 대로 중원을 누비며 돌아다녔다.
잘 곳이 필요하면 아무 분타나 찾아들거나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길거리에서 대충 자고 적당히 먹었다.
색 바래고 나달나달한 무복을 입고 아무렇게나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있었지만, 세상을 향한 호기심 어린 눈동자는 반들반들하고, 살짝 올라간 입꼬리에는 유쾌함이 묻어 있었다.
걸윤은 그 특유의 느른한 걸음으로 북경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딱히 정해진 목적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걸음이 이끄는 대로, 그의 눈에 띄는 곳으로 향했다.
정처 없이 움직이던 걸윤은 길가의 높고 긴 담을 따라 걷다가 뭔가 생각난 듯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걸윤은 황궁의 정문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문 앞에 선 군사, 장현이 걸윤을 막았다.
“무슨 일로 오셨소?”
교육받은 바가 있어, 완전히 말을 놓지는 않았지만 장현은 구질구질한 걸윤을 향해 위협적인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이곳은 네깟 놈이 얼씬거릴 곳이 아니라고.’
“황제를 뵈러 왔소.”
걸윤은 장현의 눈빛이 어쩌건 상관하지 않고 말했다.
“뭐? 뭐야? 하아…….”
장현은 어처구니가 없는 웃음을 흘렸다.
‘저런 미친놈을 봤나.’
가끔 저런 놈들을 볼 때마다 황궁 군사의 예의고 뭐고 없이, 흠씬 쥐어패서 쫓아내 버리고 싶었다.
“내가 황제의 친우요. 배걸윤이 왔다고 전해 주시오.”
“저, 저…….”
장현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걸윤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고민했다. 이걸 안에 전해야 하는지, 자기 선에서 적당히 보내야 하는지 말이다.
“황제의 친우가 찾아오면 보고하라는 지시가 있지 않았나? 일단은 보고하지.”
다른 군사가 걸윤을 쳐다보며 말을 마치고는, 안으로 들었다.
장현은 떠름한 표정으로 걸윤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제대로 씻지도 않고, 아무렇게나 돌아다닌 꼬라지를 보니 알 만했다.
미친놈이 맞다.
‘제정신이 박혔으면 저 꼴로 황제의 친우라고 찾아오겠는가.’
쫓아내라는 명이 내려올 게 뻔했다. 그러면 사람 귀찮게 하는 놈에게 제대로 황궁 군사의 맛이 어떤지 보여 주리라.
한참 후, 황제 직속 호위가 나타났을 때 장현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드시지요.”
그가 거지 같은 거지놈에게 공손하게 말을 하는데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내가 뭐 실수한 거 없나? 엄청 띠꺼운 표정으로 쳐다봤는데. 아이 씨! 황제의 친우가 뭐 저 모양이야…….’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정현의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다행히, 황제의 친우라는 거지는 장현의 표정 같은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호위를 따라 궁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허억…….”
걸윤이 호위를 따라 궁 안으로 들어가자, 다리에 힘이 풀린 장현은 휘청거렸다.
* * *
연천은 자신의 전각으로 드는 걸윤을 보며 오랜만에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주변을 모두 물리고 걸윤과 둘이 마주하고 있자니 그간의 답답했던 속이 풀리며 마음이 편안해졌다.
“야아― 너는 볼 때마다 신수가 더 좋아지는구나. 이제는 하다 하다 황룡포까지 입고.”
걸윤이 놀렸다.
“너는 볼 때마다 용모가 더 지저분해지는구나.”
연천도 맞받아쳤다.
“난 원래 거지라니깐. 거지가 거지처럼 다니는 걸 뭐.”
“씻고 한잔할래?”
연천의 말에 걸윤이 반색을 했다.
“이야― 여긴 보은장보다 더 맛있는 게 많겠네. 히히.”
걸윤의 말에 연천이 피식 웃었다.
“우―와아! 이야아!”
걸윤이 감탄을 연발하며 탁자 위의 음식을 게걸스럽게 씹어 넘겼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연천은 오랜만에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근데 넌 얼굴이 왜 그 모양이냐?”
걸윤이 술을 홀짝거리며 물었다.
“내 얼굴이 뭐?”
또 뭔 소리를 하며 놀리려나 싶어서 걸윤을 쳐다보았다.
“죽지 못해 사는 얼굴이잖아.”
“음!”
아무도 하지 않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연천이 제일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걸윤은 손등으로 입술을 대충 훑어 닦아냈다.
“하기 싫으면 하지 마! 뭘 그렇게 억지로 버티냐?”
“숙부님은 나를 위해 오랜 시간 동안 이 자리를 지키셨어. 나도 그분께 최소한의 보답을 해야지.”
“그런 게 어딨냐? 넌 참 힘들게 산다니깐. 그렇게 남한테 보답을… 보답?”
걸윤이 쩝쩝거리며 하던 말을 멈추고 연천을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소리를 하려고 사람을 그렇게 쳐다봐?”
“나한텐 보답 안 해? 나도 네 보답을 받고 싶네.”
걸윤이 샐샐 웃으며 말했다.
“아…….”
걸윤을 만나 오랜만에 따뜻하게 데워졌던 연천의 피가 식는 것 같았다.
‘걸윤인 좀 다를 줄 알았는데. 거지라도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줄 알았는데 보답을? 뭘 원하는 걸까? 돈? 벼슬?’
“안 해 줄 거야?”
“뭘 원하는데? 말해 봐.”
연천이 지금까지와 다르게 굳은 얼굴로 물었다.
“여기 의원 자리 하나 없냐?”
“뭐? 의원?”
연천이 걸윤을 빤히 쳐다보았다.
“네가 보기에 내 꼴이 거지 같지? 나는 걸화에 비하면 진짜 사람답게 하고 사는 거야. 걔 좀 어떻게 해 봐라. 신의의 제자가 됐으면서 왜 그러고 사는지……. 나는 걔를 진짜 모르겠다.”
“진료소를 차렸다면서? 황궁으로 부르면 진료소는 어찌해?”
“걱정 마! 그 진료소에 아주 열과 성을 다하는 의원이 하나 더 있어. 난 걸화가 그렇게 사는 게 싫어.”
“흠……! 넌? 넌 나한테 바라는 거 없어?”
“나?”
눈을 끔뻑이던 걸윤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갈 때 이 술 두어 병 챙겨 주면 잘 받아 갈게.”
걸윤의 말에 연천이 웃었다. 그는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 * *
몇 달 뒤.
걸화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관리를 따라 황궁으로 향했다.
‘황궁에는 의원도 많으면서 왜 하필이면 나를 불러? 내가 신의의 제자라서? 그럼 사형들 중에 부르면 되지? 왜 나냐고? 아! 진짜! 황제라는 사람은 원래 이렇게 지 멋대로인가?’
걸화가 혼자서 구시렁거렸다.
갑자기 거지촌에 있는 걸화에게 궁으로 들라는 황명이 떨어졌다.
아쉬운 마음을 숨기고 모두 축하를 했지만 걸화는 싫었다. 자신을 오라 가라 하는 황제의 명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망을 갈 수도 없고. 쯧!’
영광스러운 일이라며 눈물을 글썽거리던 미령과 아쉬워하는 거지들의 얼굴이 눈앞에 삼삼하며 짜증이 났다.
마차에 앉아 황궁의 커다란 정문을 통과하는 걸화는 언젠가 영친왕의 호위무사가 되겠다고 연천과 걸윤과 함께 황궁으로 들었던 때가 생각났다.
이제는 추억으로 바래 버린 그때의 충만한 기대감과 순수했던 즐거움의 감정이 솟구치며 연천의 얼굴도 함께 떠올랐다.
지금 생각하면 그녀 자신조차 부끄러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그것을 보듬어 주던 사람이었다.
잊고 있었던 그의 따뜻한 미소와 부드러운 눈빛이 마음속 어디선가 훅 다가오며 연천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쯧! 괜히 궁에 와서…….’
걸화는 고개를 흔들어 속에서 일렁이는 감정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