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궁으로】
“대체 언제까지 이리 기다리기만 하라는 말입니까? 종남은 더 이상 이곳에서 대기만 하고 있지 못하겠습니다!”
종남 공엽방의 불쾌한 목소리는 높았다.
“하아… 황상께서 아직 천산에 머물고 있다지 않습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봅시다.”
맹주 여송이 달래듯이 말했다.
“종남은 돌아가겠습니다. 황상께서 환궁하시어 진격하게 되면 연락을 주십시오. 그럼 그때 오겠습니다!”
공엽방이 말했다.
‘어쩌면 잘되었어. 돌아갔다가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전갈을 받으면 그때 눈치를 봐서 오는 게야. 그럼 우리 종남의 희생도 줄고, 전쟁에 참전도 하게 되는 것이니 일석이조이지.’
전쟁으로 종남의 세력이 줄어 화산에 밀리게 될까 봐 내내 불안하던 공엽방이 그렇게 생각했다.
“어허…….”
여송이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우리도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언제까지 이곳에서 대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곤륜의 구강경이었다.
“예정대로라면 지금쯤은 전쟁이 끝나야 합니다. 저희도 각자 할 일이 있습니다. 이리 많은 제자들을 모두 이곳에 모아놓고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어서야 문파가 제대로 돌아가겠습니까?”
소림의 운상대사도 이때다 싶어 거들었다.
벌써 몇 달째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십만대산을 바라만 보고 있는 정파 제자들의 불만이 커져 가고 있었다.
마교라는 악의 근원을 중원에서 제거하겠다는 의협심과 정의감이 점차 흐려지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으흠…….”
여송이 긴 침음을 흘렸다.
정마대전을 계획한 것은 여송 자신이었다.
화산과 소림, 무당에 대한 혐오의 감정을 잠재우기 위해서 말이다.
한데, 무엇 하나 뜻대로 되지 않는 여송은 짜증스러웠다.
화산은 봉문을 해서 전쟁에 참전하지도 않고, 화산 때문에 미루고 미루다 겨우 결행한 일이 또 이렇게 미뤄지고 있었다.
“문주님들의 말씀이 맞습니다. 황상께서 천산을 떠나시면 그때 다시 날을 잡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개방의 배걸부가 말했다.
그는 처음부터 이 전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번에 회군하면 다시 결행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으흠”
여송은 또다시 깊은 침음을 흘렸다.
* * *
거지촌에서도 제일 구석진 곳에 위치한 움막의 주인인 발량은 80이 넘은 나이의 거지로 노쇠하여 오늘내일하고 있었다.
그의 움막도 주인처럼 명이 다한 것을 겨우 이어가고 있는 터라, 유난히 후줄근하고 남루해서 서 있는 것도 불안불안했다.
걸화는 벌써 이레째 이 움막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크게 치료할 게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발량의 숨이 끊어질 듯 겨우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발량의 작은 움막 구석에서 쪽잠을 자며 그를 보살피고 있는 걸화는 꾀죄죄한 몰골로 움막 밖으로 나왔다.
걸화는 목덜미를 벅적벅적 긁어댔다.
“아… 또 벼룩이 옮았구나. 아아… 간지러워…….”
걸화는 구시렁대면서 등과 어깨를 벅벅 긁었다.
진료소에는 성격 깔끔한 영감님이 있어서 괜찮았지만, 왕진만 오면 이나 벼룩이 옮는 것은 예삿일이 되어 있었다.
진료소로 돌아가서 약물로 목욕하면 금방 나을 테니 유난 떨 일은 아니었다.
“하아암…….”
길게 하품을 하자, 며칠 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충혈된 눈에서 눈물이 찔끔 삐져나와 지저분한 얼굴로 흘렀다.
“응?”
걸화는 인기척이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지촌 외곽에서 혼자 살고 있는 발량의 움막에 며칠이나 머물렀지만, 교준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찾아오는 이가 없었다.
교준도 며칠에 한 번꼴로, 진료소의 일을 다 끝내어 놓은 저녁이나 되어서야 찾아왔다.
걸화는 교준과는 다른 기척에, 고개를 쭉 빼고 가까이 오는 이를 바라보았다.
“어어?”
발량의 움막으로 다가오는 이를 보는 걸화의 눈이 커졌다.
“하!”
걸화에게 가까이 온 이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여긴 어떻게 왔어?”
걸화가 찝찝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걸윤에게 물었다.
“어쩌다 보니 왔어. 너는 의원이라면서 꼴이 대체 그게 뭐냐?”
걸윤이 걸화를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명을 달리할까 걱정이 되어 씻으러 가지도 못하고 더러운 움막에서 발량만을 돌본 걸화의 꼴은 거지보다 나을 것도 없었다.
“내가 뭐?”
걸화가 몸을 벅적벅적 긁었다.
“…….”
걸윤이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걸화를 바라보았다.
“야! 너 잘 왔다. 여기 좀 긁어 봐라. 여기! 등에.”
걸화의 말에 걸윤이 찝찝한 표정으로 다가가 걸화의 등을 긁어 주었다.
“좀 더 세게. 빡빡 긁어 봐. 벼룩이 옮았나 봐. 아이… 간지러워.”
“뭐? 넌 대체 뭘 하고 살고 있는 거야?”
걸윤이 짜증스럽게 물었다.
“뭘 하긴! 의원이 뭘 하겠냐?”
“넌 네 꼴이 의원이라고 생각해? 아주 상거지가 따로 없네.”
“아이참… 넌 왜 여기까지 찾아와서 시비를 거냐?”
“쯧… 이거! 너 가져다주래.”
걸윤이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진료소에서 싸 가지고 온 음식을 내밀었다.
걸윤이 걸화의 진료소로 찾아온 것은 어제 아침이었다. 왕진을 갔다는 걸화가 올 생각을 하지 않자 그가 직접 찾으러 온 것이었다.
“우와! 밥이다! 건식량만 먹었더니 엄청 헛헛했어.”
며칠간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보지 못한 걸화는 달려들어 걸윤이 가지고 온 것을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넌! 에휴…….”
걸윤이 짜증스럽게 내뱉으려던 말을 멈추고 크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거지 발량은 보름을 더 살다가 유명을 달리했다.
걸화는 끝까지 그의 움막을 지키다, 진료소 거지들과 함께 조촐하게 그의 장례를 치러주었다.
걸윤은 불편한 얼굴로 내내 걸화 주변을 맴돌며 그녀와 말싸움을 해대다, 걸화가 진료소로 돌아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어디론가 가 버렸다.
* * *
2년 후.
마교의 교주 백연천은 뿜어내는 기운이 마교도는 물론이고 웬만한 정파인들보다 깨끗하다 하여 밝고 깨끗하다는 뜻의 철(哲)정(淨)이라는 별호가 붙었다.
무겁고 커다란 의자에 앉아, 붉은색 용포를 걸치고 있는 철정천마 백연천은 우신을 통해 받은 영친왕의 전갈을 생각하며 낮은 숨을 내뱉었다.
벌써 다섯 번째였다. 이번 전갈에는 영친왕의 인내심이 바닥에 도달했음이 더욱 명확히 드러나 있었다.
‘계속 천산에 머무르신다면, 직접 모시러 가겠습니다.’라는 문구가 특히 마음에 걸렸다.
그가 아는 숙부, 영친왕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겨우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마교의 모든 것을 다시 흔들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숙부와 한 약속은 그도 알고 있었고, 교주 자리에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저벅, 저벅, 저벅
연천은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그가 부른 마철용과 소강이 다가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마철용이 천마를 뵙습니다.”
“천마를 뵙습니다.”
연천은 마철용과 소강을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혈풍단의 단주는 소강이다. 마철용은 늘 하던 대로 연무장으로 오라.”
“존명!”
“존명!”
마철용과 소강은 머리를 조아려 답하고 천마의 집무실을 나섰다.
소강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마철용을 쳐다보았다.
“축하한다.”
마철용이 소강에게 말했다.
“내가 혈풍단의 단주라고?”
소강의 목소리는 얼떨떨했다.
“그래. 너는 잘 할 거야.”
마철용이 덤덤하게 소강을 격려했다.
“네게는 무슨 일을 맡기시려고 하는 거지? 하긴, 서열이 8위인데 혈풍단을 맡고 있는 것은 좀 너무하긴 했어.”
“어쩌다 8위가 된 걸 가지고…….”
마철용은 아직도 자신의 서열에 적응이 안 되는 듯 중얼거렸다.
“넌 너의 실력이나 서열에 너무 자각이 없어. 서열 49위와 8위는 명백하게 달라. 주군께서도 그걸 아시니 네게 큰일을 맡기시려는 것이겠지.”
“…….”
마철용은 대꾸 없이 소강을 쳐다보았다.
옆에서 아무리 뭐라고 해도 서열 8위는 자신에게 과분한 것 같았다. 그저 요행히 얻게 된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 * *
연무장에서 기다리던 마철용은 연천이 나오자 고개를 숙였다.
“편히 하자니깐.”
연천의 말에도 마철용은 꿋꿋이 예를 다한 자세를 유지했다.
“흠! 그럼 운공해 보아라.”
연천이 가볍게 말했다.
마철용은 연천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내공을 운공하기 시작했다.
그의 주위로 붉은색이 도는 밝은 빛이 번져 나갔다.
마철용은 연천이 교주가 되고 얼마 뒤부터 그에게 이름이 뭔지도 모르는 무공을 배우고 있었다.
연천은 마철용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한참 만에 마철용이 눈을 뜨자 연천이 말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내 너에게 맞는 검 한 자루를 주고자 하니 내일 사초 시에 대연무장으로 오거라.”
“존명!”
마철용의 답에 연천은 자리를 떠났다.
다음 날, 마철용은 대연무장에 빽빽이 줄지어 서 있는 마교도들을 보며 의아해했다.
‘무슨 중요한 일이 있나?’
소강을 찾은 마철용이 물었다.
“오늘 무슨 일 때문에 이리 모인 거야?”
“나도 잘 모르겠어. 그저 교주님께서 이 시간에 나오라고 지시했대.”
“그래?”
마철용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뒤.
“천마께서 드십니다.”
누군가의 목소리에 모든 마교도들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제는 천마라는 자리에 제법 익숙해진 연천이 걸어 나와 그의 자리에 앉았다. 그 뒤를 평소 얼굴 보기도 힘든 원로원의 장로들이 줄줄이 따랐다.
연천이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모두들 자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여러분을 모이라고 한 것은 서열 8위 청마 마철용에게 새로운 직분을 내리고자 함입니다.”
자리한 마교도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건 마철용의 서열은 교내 8위였다. 혈풍단의 단주로 있기에는 서열이 너무 높았다.
천마대회에서 변경된 서열로 새로이 직무가 개편이 되었으나, 어쩐 일인지 마철용은 계속 혈풍단의 단주로 있었다.
새로운 교주가 마철용을 적대시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가까이 두고 교의 여러 가지 일을 의논하기도 하고 무공도 가르쳐 주고 있었다.
그것을 아는 이들은 교주가 마철용을 크게 쓰려고 그런 것이라고 짐작만 했다.
‘대체 무슨 일을 주시려고 2년이나 뜸을 들이신 겔까?’
자리한 이들은 궁금했다.
마철용은 자신에게 겨우 직분 하나를 내리는데, 마교도들을 몽땅 다 부른 것이 부담스럽기만 했다.
“마교 서열 8위 청마 마철용은 이리 오시게.”
교주의 명에 마철용은 조용히 앞으로 나가 무릎을 꿇었다.
“내가 이야기했지. 검을 하나 주겠다고. 앞으로 이 아이를 잘 부탁하네.”
연천이 손잡이에는 손때 묻은 회색 가죽 천으로 꼼꼼하게 감싸여 있고, 제법 사용감이 있는 회빛 가죽 검집에 들어 있는 검을 마철용에게 내밀었다.
마철용은 무릎을 꿇은 채로 공손히 검을 받아들었다.
교주가 내리는 검을 받는 것은 마교도로서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그가 존경하는 분에게 검을 하사받자니, 감격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검을 내린 교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철정천마 백연천은 청마 마철용에게 천마신공과 천마검을 하사하였다. 오늘부로 마교의 교주는 청마 마철용이다.”
“……?!”
교주의 말에 연무장 전체가 술렁거렸다.
“네에?”
가장 놀란 것은 검을 쥐고 있는 마철용이었다.
“교주님!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마철용이 고개를 바닥까지 숙인 채, 다급하게 말했다.
“어허! 뭣들 하느냐? 교주를 이리 두어서야 되겠느냐?”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마철용이 다시 외쳤다.
“부교주 상관단월께서 교주 자리를 고사하시었다가 마교가 어찌 되었는지를 잘 생각해 보거라.”
“…….”
연천의 단호한 말에 마철용은 명을 거두라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모두 교주를 잘 모시도록 하라!”
“존명…….”
“존명!”
“존명.”
자리한 마교도인들은 얼떨떨해하면서도 교주의 명에 습관처럼 답했다.
“이제 나는 본래 자리로 가야지.”
가볍게 말을 마친 연천이 자리를 떠났다.
마철용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바닥에 고개를 숙인 채 굳은 듯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