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고매혼:바람에_홀린…-223화 (223/230)

223화

“으흠…….”

대사형, 이훈이 사제들의 말에 가만히 생각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너희들의 생각이 그렇구나. 무릇 약속이라 함은 앞으로의 일을 미리 정해 두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것의 중요함은 수만 번 강조해도 모자라다…….”

“흠…….”

가룡이 낮게 숨을 내쉬었다.

“…….”

사홍이 눈을 풀고 대사형을 바라보았다.

“…….”

걸화가 눈을 뜨고 허리를 세운 채 졸기 시작했다.

“공자의 제자인 증자께서는 아내가 아들을 달래기 위해 한 작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돼지를 잡으셨다.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약속을 한 번 어기는 것은 그 사람을 속인 것이요. 그로 인해 다시는…….”

이훈이 이야기하고 세 명의 사제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의원님! 사람 좀 살려 주십시오!!”

갑자기 진료소 입구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가룡이 벌떡 일어났다.

“대사형! 급한 환자인가 봅니다. 제가 돕겠습니다.”

사홍도 따라 일어났다.

“저도 돕겠습니다.”

“저, 저도…….”

걸화도 엉거주춤 일어나서 가룡과 사홍을 따라 진료소 입구로 향했다.

“하아암…….”

걸화는 두 사형을 따라나서며 길게 하품을 했다. 잠을 덜 잔 것같이 흐리멍덩하고 머리가 띵 했다.

비척비척 걸어서 따뜻하고 온화한 대사형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가룡과 사홍이 왜 북경까지 와서 이틀이나 객잔에서 묵으며 망설였는지, 왜 진료소 입구에서 쉬이 안으로 발을 들여놓지 않았는지 이제는 너무나 이해가 되는 걸화였다.

거지촌, 자신의 진료소가 그리웠다.

요란한 소리를 들었는지, 멀리서 대사형의 제자인 고담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서는 환자의 가슴께에서 피가 뚝뚝 떨어져 내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으흑…….”

걸화보다 앞서 걷던 사홍이 갑자기 허물어지듯 바닥으로 쓰러졌다.

“사형!”

걸화가 깜짝 놀라, 사홍에게 달려갔다.

“쯧쯧…….”

걸화의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던 가룡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혀를 차더니, 다시 환자에게 향했다.

걸화는 몸을 낮추어 사홍을 살폈다.

입가에 새하얀 거품을 물고 있는 사홍은 의식이 없었다.

“사형! 사형! 정신 좀 차려요! 사형!”

걸화가 사홍의 뺨을 두들겼다.

어느새 다가온 이훈이 걸화와 사홍을 내려다보았다.

“대사형! 셋째 사형이…….”

걸화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대사형, 이훈을 올려다보았다.

“으흠…….”

이훈이 씁쓸한 얼굴로 두 사람을 쳐다보더니, 사홍과 걸화를 지나쳐 환자에게로 걸어가며 입을 열었다.

“고담아! 셋째 좀 옮기거라!”

전혀 동요하지 않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의 제자에게 지시했다.

곧, 가룡과 이훈이 환자를 데리고 걸화와 쓰러진 사홍 옆을 지나쳤다.

“아휴! 얘는 여기서 또… 고담아! 얼른 좀 치워라! 입구 걸리적거린다!”

가룡이 고담을 재촉했다.

“네!”

어느새 사홍과 걸화에게 다가온 고담은 시종과 함께 익숙하게 사홍을 들어 방으로 옮겼다.

걸화는 걱정스러운 마음과 셋째 사형이 쓰러졌는데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다른 사형들에 대한 서운함과 배신감을 느끼며 의식 없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사홍의 맥을 짚었다.

맥박이 정상보다 조금 느리기는 했지만, 특별한 이상은 없었다.

아무리 집중을 해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셋째 사형, 사홍이 갑자기 쓰러진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걸화는 자신의 무능함에 우울했다.

의원이라는 자가 사형이 쓰러진 원인을 알아내지 못해서 울적했고, 따뜻하고 인자한 대사형과 가벼워 보이지만 사형제들을 아낀다고 생각했던 둘째 사형이 멀게만 느껴졌다.

그들 덕분에 느꼈던 흡족하고, 기꺼웠던 마음이 사그라들며 쓸쓸함이 다가왔다.

‘사제가 쓰러졌는데 이렇게들 무심할 수가…….’

드르르륵.

한참 후, 방문이 열리며 둘째인 가룡이 들어왔다.

걸화가 새치름하게 가룡을 쳐다보았다.

“막내 여기 있었구나. 이리 있지 않아도 돼. 한 시진쯤 지나면 깰 게야.”

가룡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셋째 사형에게 무슨 지병이 있어요?”

걸화가 서글픈 목소리로 물었다.

“음… 그것도 병이라면 병이지.”

가룡이 주억거렸다.

“…….”

걸화는 말없이 가룡을 쳐다보았다.

“나가서 이야기하자. 셋째는 한숨 푹 자게 두고.”

가룡이 말을 하며 일어섰다.

걸화도 가룡을 따라 일어서며, 여전히 의식 없는 사홍을 한 번 더 보고 방에서 나섰다.

“셋째 사형의 병이 뭐예요?”

걸화는 가룡이 묵고 있는 방에 앉자마자 물었다.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자신도 의원이었기에 사형의 병을 치료해 주고 싶었다.

자신은 원인을 찾지 못했지만, 자기보다 훨씬 더 대단한 실력을 가진 가룡은 사홍의 병이 무엇인지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으흠… 그러니깐 그 녀석은 일종에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게지.”

가룡이 천천히 말했다.

“네에? 그게 무슨 병인데요?”

걸화가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어떤 큰 병이기에 대단한 의원인 사형이 저리 쓰러지는지 걱정이 되어, 가룡의 답을 기다리는 그 짧은 순간에 뒷목까지 뻣뻣해져 왔다.

“저놈은 피를 보면 저리 게거품을 물고 쓰러진다.”

가룡의 답에 걸화는 멍청한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네에? 아, 아니… 의원이 피를 보고 쓰러진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그렇지. 말이 안 되지. 그러니 저 녀석이 의원을 포기하지 않은 것도 대단한 게지.”

가룡이 걸화의 말에 수긍하며 답했다.

“그럼 환자는 어찌 봐요?”

“그때 봤잖아. 환자 가까이 가지 않으려고 침을 던지고, 손목에 실을 묶어 맥을 짚고… 쯧! 그래도 안 돼.”

가룡이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허억…….”

걸화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그 침술과 무명실을 이용해서 맥을 짚는 것이 다 그런 이유에서였다니, 놀라움과 함께 사홍에 대한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참으로 딱하지. 그 녀석이 노력하는 것을 보면 눈물이 날 지경이야. 침술의 재능은 또 얼마나 대단한데…….”

가룡이 말을 흐렸다.

걸화가 침울한 얼굴로 가룡을 쳐다보았다.

“스승님도 알고 계세요?”

“알지. 스승님, 사형, 사제 다 알고 있어. 고쳐 보려고 무던히 애를 썼었지.”

“그런데도 못 고쳐요?”

“몸이 아픈 게 아니고 자기가 피를 보면 무서워서 그런 것이야. 마음의 병이라니깐. 우리가 어찌 고칠 수가 없어.”

“…….”

가룡의 말에 걸화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도 훌륭한 침술을 가지고 있고, 밝게 웃던 사형에게 이런 비밀이 있을 줄이야.

“저런 상태로 지금껏 의원을 포기하지 않은 녀석이니 알아서 잘 할 게야. 막내 너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얼마 전엔 제자도 들였다고 하더구나. 잘 가르칠 게야.”

가룡이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사홍에 대한 믿음이 담겨 있었다.

걸화는 뭔가 복잡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히이…….”

의식이 깬 셋째, 사홍이 걸화를 보고 씨익 웃었다.

“괜찮으세요?”

걸화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괜찮아. 하루 이틀 이러는 것도 아니고. 너한텐 이런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사홍이 쑥스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

걸화는 사홍에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선뜻 결정하지 못했다.

“둘째 사형이 걱정 많이 했어요.”

“뭐? 사형이? 치잇! 사형이나 잘 살라지. 뭘 내 걱정씩이나.”

사홍은 싫지 않은 얼굴을 했지만, 말로는 툴툴댔다.

“둘째 사형이 왜요?”

‘항상 밝은 얼굴을 하고 있는 둘째 사형에게 뭔 걱정이 있다고… 아! 대사형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얼굴빛이 좀 바뀌긴 했지.’

“사형은 언젠가부터 자꾸 밖으로 나돌았어. 난 처음에는 대사형 때문인 줄 알았지. 우리야 대사형하고 겨우 몇 년 같이 살았지만, 둘째 사형은 거의 십 년을 같이 살았거든.”

“…….”

사홍의 말에 걸화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게 무슨 뜻인지 며칠 만에 너무 이해가 되었기에.

“대사형 참 좋은 사람인데 말이지. 약간 고지식하고… 살짝 답답하고… 말이 조금… 많지.”

사홍은 걸화에게 대사형을 흉보는 것 같아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니요! 말이 엄청 많아요.”

“크허허허허. 맞아. 말이 너무 많아”

걸화의 말에 사홍이 껄껄 웃었다.

“크크아하하하.”

걸화도 낄낄거렸다.

“둘째 사형은 내 눈에는 천재였어. 나는 수십 번을 봐야 이해하는 것을 사형은 단번에 이해하고, 암기하고, 응용까지 한다니깐.”

사홍이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

걸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홍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한데… 의술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면서부터 흥미를 잃은 것 같아.”

“그래요?”

“기존 의술에서는 재미가 없는 거지. 사형 성격에 이해가 되기도 해.”

“…….”

걸화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 * *

사홍이 정신을 차리고도 걸화와 가룡, 사홍은 대사형인 이훈의 진료소에서 지냈다.

이훈의 진심 어리고 따뜻하고, 엄청 긴 가르침을 받으면서 말이다.

걸화의 기술은 나날이 늘어갔다.

옆에서 봐도 잠이 든 건지, 깨어 있는 건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대단한 경지에 올랐다고나 할까?

이훈이 사형제 관계의 중요성과 약속의 참뜻에 대해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넷째는 오지 않았다.

달포가 다 되어 가자 대사형인 이훈도 더 이상 사제들을 잡아둘 수 없었다.

의원인 사제들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막내야!”

이훈이 자신 앞에 있는 사제들 중 걸화를 콕 집어서 불렀다.

“네. 대사형!”

대사형의 부름에 걸화가 긴장했다. 또 무슨 말을 얼마나 오랫동안 할지 걱정이 되어서 말이다.

낮에 하도 졸아댔더니, 요즘 밤에 잠도 잘 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가룡과 사홍은 돌아가야 할 것 같다. 너는 여기 남아서 의술 공부도 하고 넷째를 더 기다려 보도록 하자꾸나.”

대사형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에, 걸화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저, 저기… 대사형…….”

걸화의 목구멍에 뭔가가 콱 막힌 것 같았다.

안 된다고, 자기도 돌아가야 한다고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너그럽고 훈훈한 대사형의 미소 띤 얼굴을 바라보며 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대사형! 막내도 자기 진료소가 있습니다. 계속 비워 두면 안 되죠.”

가룡이 끼어들어 걸화를 대신해서 말을 해 주었다.

“그래? 음… 대신 봐줄 사람도 없느냐?”

대사형의 물음에 걸화도, 가룡도, 사홍도 입을 꽉 닫았다.

백공이 걸화의 진료소를 보고 있음을 알고 있지만 아무도 거기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하.하.하. 대사형! 자기 진료소는 자기가 봐야죠.”

사홍이 뒷목을 긁적거리며, 애매하게 답을 했다.

“그렇구나. 그럼 어쩔 수 없지. 막내야! 힘들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찾아오거라.”

대사형의 인자한 말에 걸화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