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사형들】
“그럼 북경엔 언제 갈까?”
사홍이 물었다.
“네에? 북경요?”
이야기를 듣던 걸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응. 대사형의 진료소가 북경에 있어. 스승님이 대사형에게 너를 좀 더 가르치라고 했으니, 사형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말을 따를 게야.”
가룡이 말했다.
“가르침을 받건 아니건 대사형에게 인사를 드리고, 넷째…도 볼 수 있으면 보고. 한 번은 북경에 가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사홍의 말에 걸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신의라 불리는 스승님께 자신 이전에 네 명의 제자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독립하기 전에 스승님이 사형들을 찾아보라는 이야기까지 했으니.
걸화도 그들 모두를 만나보고 싶기는 했지만, 그러면 또 백공이 혼자 진료소를 봐야 했다.
혼자서 사람 많은 진료소를 보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을 알기에 망설여졌다.
“갈 거지?”
가룡이 고민하는 걸화에게 맑은 얼굴로 물었다.
“가고 싶어요. 하지만 진료소를 또 비워도 될 지…….”
걸화가 걱정스럽게 말을 하는데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렸다.
이야기하던 세 사람이 깜짝 놀라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열린 문으로 백공이 머리를 내밀었다.
“비워도 됩니다! 되고말고요! 제가 있잖아요. 걱정 말고 처언천히 다녀오세요. 제가 진료소는 자―알 보고 있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백공이 침을 튀기며 말했다.
걸화와 가룡, 사홍이 뻥한 표정으로 방 안으로 머리만 들이밀고 있는 백공을 쳐다보았다.
세 사람이 방으로 들어와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백공이 문밖에서 엿들은 모양이었다.
창호지를 바른 방문이 워낙 얇아서, 문 앞에 서 있기만 해도 어지간한 목소리는 다 들을 수 있었기에.
사홍이 목만 내밀고 있는 백공을 쳐다보다, 시선을 걸화에게 돌렸다.
“걱정 말라고 하니, 너는 우리와 가자.”
“네에. 사형.”
걸화도 물론 사형들을 따라가서 대사형과 넷째 사형도 만나보고 싶었다.
하지만, 자꾸만 자리를 비우게 되니, 백공이 힘들 것 같아서 미안했다.
그런 걸화에게 사형들과의 만남이 필요하다고 열을 올려 설득하는 이는 백공이었다.
밥을 먹는 걸화에게 다가온 백공이 말했다.
“아휴우! 의원님! 진료소는 걱! 정! 마시라니깐요. 사형제들과의 만남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꼭 가야지요. 꼭이요!”
환자를 진찰하는 걸화에게 백공이…….
“아니. 지금껏 사형제들 얼굴도 모르고 사셨습니까? 큰일 납니다. 그러다 사형인 줄도 모르고 길에서 싸움이라도 하게 되면 어찌합니까?”
거지들이 캐어 온 약초를 살피는 걸화에게 백공이…….
“크으~ 북경 참 좋은 곳이지요. 많은 이들이 일부러 여행도 가는 곳입니다. 대사형이 거기 있는데 안 갈 이유가 있겠습니까?”
백공은 걸화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그녀를 설득했다.
“알겠다니깐요! 그만 좀 하세요. 갈 겁니다. 가요! 북경에 간다고요!”
급기야 걸화가 백공에게 짜증을 냈다.
사형제들을 보러 갈 마음도 있고, 이미 가겠다고 했는데 백공이 옆에서 자꾸 보채니 무진장 성가셨다.
“이히…….”
백공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
걸화는 뜨악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걸화와 진료소의 사람들은 백공을 이미 거지촌 진료소의 의원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백공은 자신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더 증명해 보이고 싶어 했다.
교준도 걸화가 사형들을 만나러 가는 것에는 찬성을 했지만, 여전히 그녀를 혼자 보내는 것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제가 안 가도 되겠습니까?”
교준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저도 없는데 교준 대협마저 진료소를 비우면 백공 의원이 힘들 겁니다.”
걸화가 말했다.
옆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가룡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작게 속삭였다.
“비밀이지만, 저한테 믿음직한 비밀 호위들이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지요.”
가룡의 가벼운 말투에 그 말이 사실일 것이라는 믿음이 눈곱만큼도 생기지 않았다.
“저도 무공을 좀 배웠습니다. 사형은 몰라도 막내는 제가 지킬 것이니 걱정 마십시오.”
사홍이 듬직하게 말했다.
“나는? 나는 안 지켜줄 거야?”
사홍의 말에 가룡이 끼어들었다.
“사형은 알아서 하슈.”
사홍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교준은 신의의 제자임에도 어쩐지 신뢰가 가지 않는 걸화의 두 사형을 보며 몰래 쫓아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 * *
며칠 뒤, 걸화는 백공의 바람대로 간단하게 짐을 싸서 사형들과 함께 진료소를 나섰다.
“저 다녀오겠습니다.”
걸화가 진료소에 있는 모두에게 인사했다.
“진료소 걱정은 마시고 처언천히 다녀오십시오.”
백공은 ‘천천히’라는 말을 아주 느리게 강조하며 말했다.
걸화는 영영과 성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진료소를 나와 가룡, 사홍과 함께 대사형이 있다는 북경으로 향했다.
가룡과 사홍은 서두르지 않았다.
마차를 타고 가다가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 있으면 멈춰서 걷기도 하고, 좋은 음식 냄새를 풍기는 고급식당에서 느긋하게 식사를 하기도 했다.
걸화는 가룡과 사홍의 느릿한 모습에 언제나 여유만만하던 스승님이 겹쳐 보였다.
두 사람 모두 스승님만큼이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천천히 움직였다.
성질 급한 걸화는 두 사람의 느슨한 걸음과 행동거지가 답답했다.
그러다가, 그것이 의원의 덕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원의 덕목까지는 아니더라도 신의의 덕목쯤은 되려나?’
스승님과 두 사형이 모두 느릿느릿하기에.
얼른 일을 마치고 다시 진료소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조급하던 걸화도 어느새 사형들의 여유로움에 천천히 물들어 갔다.
세 사람은 별다른 일 없이 어정어정 북경으로 향하고 있었다.
북경에 가까워질수록 사람은 많아졌고, 객잔과 식당, 점포의 외관은 화려해지고 규모도 커졌다.
셋은 북경의 꽤 시설이 좋은 객잔에서 묵었다.
“우와― 여기 엄청 크고 좋다.”
걸화가 객잔의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반질반질하게 옻칠이 된 탁자와 의자, 곳곳에 멋스럽게 매달린 둥근 홍등, 붉은 비단 천을 덧댄 미닫이문, 속이 보일 듯 말 듯 비치는 붉은 휘장…….
모든 것이 근사하고, 보기 좋았다.
걸화도 중원을 돌아다니며 많은 객잔을 보았지만, 그녀가 본 어떤 곳보다 세련되고, 말쑥하고 품위 있게 장식되어 있었다.
걸화는 자신도 모르게 계속 객잔을 두리번거렸다.
“하하, 막내가 신기한 게 많구나.”
식당으로 내려온 가룡이 눈을 반짝이며 주위를 살피는 걸화에게 말했다.
걸화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사홍이 점소이에게 적당히 몇 가지 음식을 주문했다.
“우와―”
걸화는 탁자에 차려지는 음식을 보고 또 한 번 감탄을 내뱉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볶고 튀긴 고기 요리를 보면서 말이다.
“막내야, 많이 먹어라.”
사홍이 흐뭇한 얼굴로 걸화를 보며 말했다.
“히이… 네! 걱정 마세요.”
걸화의 젓가락이 음식들을 향해 달려들려는 찰나,
“…으…으윽…….”
옆 탁자에 있던 누군가가 앓는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의 일행들이 놀란 눈으로, 쓰러진 이를 흔들었다.
“갑자기 왜 이래!”
“정신 차려!!”
“이것 봐!! 나를 보라고!”
걸화와 가룡, 사홍의 시선이 쓰러진 사내에게 향했다.
주위 다른 탁자들에 자리 잡은 이들도 호기심과 염려 섞인 얼굴로 쓰러진 이를 쳐다보았다.
몇몇이 기절한 사내 주변으로 다가갔고, 웅성대는 소리는 점점 멀리 퍼지고 있었다.
“거 비켜들 보이오. 내가 의원이오.”
사홍이 환자를 둘러싼 이들에게 낮고 울림이 큰 목소리로 점잖게 말했다.
그 소리에 몰려든 사람들이 자리를 터 주며, 자칭 의원이라는 사홍에게 눈을 돌렸다.
“으흠…….”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사홍은 여전히 음식이 놓여 있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서 꼼짝하지 않았다.
대신 사람들이 자리를 터 준 곳을 통해, 목을 쭉 빼고 환자를 쳐다보았다.
“이것 좀 환자의 손목에 매어 주시오.”
사홍이 품에서 주섬주섬 무명실을 꺼내어 사람들에게 내밀었다.
환자의 일행 중 한 사람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실을 받아, 쓰러진 자의 손목에 매었다.
“어… 어! 어! 됐소. 됐소. 그 정도면 되었소.”
사홍이 실 한쪽 끝을 잡고 한껏 집중을 했다.
환자의 일행도, 그 주위를 둘러싼 이들도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사홍을 지켜보았다.
사홍은 잠시 뒤 실을 내려놓았다.
“허허… 그렇지 않아도 비장과 위장이 좋지도 않은 사람이 무얼 그리 신경 쓸 일이 많은 겐지. 비위가 제 기능을 하지도 못하는데 그리 음식을 밀어 넣으니 갑자기 식체가 온 게지… 쯧쯧…….”
사홍이 혼잣말인 듯, 아닌 듯 중얼중얼거리며 침통을 꺼내 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사홍의 손과 그가 든 침통에 들러붙었다.
사홍은 누가 쳐다보든지 말든지, 두툼한 손가락으로 침을 꺼내 침 끝을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환자를 향해 가볍게 침을 던졌다.
“어허…….”
구경하던 사람들의 입에서 괴상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걸화도 놀라서 눈도 깜빡이지 않고 사홍이 던진 침이 날아가는 것을 쳐다보았다.
사홍은 주위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침을 몇 개 더 던졌다.
날아간 침은 휘듯이 환자의 정혈과 십선혈, 합곡혈과 토수혈에 정확하게 꽂혔다.
“우와―”
걸화의 입에서 탄성이 튀어나왔다.
환자 주변을 에워싼 이들은 무심한 표정의 사홍과 그가 대충 던진 침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북경에는 대단한 의원도 많았지만, 사기꾼 또한 많았기에.
잠시 후,
“으…으음…….”
쓰러진 이가 신음을 흘리며 무겁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깨어난 환자에게 그의 일행들이 다가가려고 하자, 사홍이 말렸다.
“비키시게. 비키시게.”
환자에게 다가가던 그의 일행들은 사홍의 눈치를 보며 주춤거렸다. 대단한 의원이 이번에도 뭔가 엄청난 의술을 행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사홍은 환자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손짓을 해서 침을 회수했다.
“오호…….”
“우와…….”
의심스러운 눈으로 사홍을 보던 사람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경이로운 눈으로 사홍을 쳐다보고 있음에도, 그는 볼일 다 봤다는 듯 고개를 돌려 침을 챙겨 넣었다.
“사형! 정말 너무 멋있습니다. 그거 어떻게 하는 겁니까?”
걸화가 반들반들한 눈으로 사홍을 보며 물었다.
“뭐… 내공을 다룰 수만 있으면 힘든 일도 아니지. 침이 무거운 것도 아니고. 조금만 연습하면 누구든 할 수 있어.”
사홍이 겸손하게 답했다.
“가르쳐 주세요. 사형. 저도 배우고 싶어요!”
걸화가 눈을 반짝였다.
‘조금만 연습하면 누구든 할 수 있다고 하는데 당연히 배워야지!’
“말이 쉽지, 저게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침 자리는 머리카락 하나 굵기처럼 세밀해. 정확하게 그 자리에 침을 놓기 위해 저놈이 얼마나 연습했는데. 겸손이 지나쳐서 막내가 오해하지 않느냐?”
가룡이 말했다.
“그렇구나. 사형! 정말 대단합니다.”
걸화가 존경심 가득한 눈으로 사홍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단은 무슨. 대체 저게 뭐 하는 짓인지. 탄지신공으로 침 놓는 놈은 세상에 너 하나밖에 없을 게다. 내공 낭비, 시간 낭비. 다 낭비지, 낭비. 쯧쯧!!”
가룡이 걸화의 들뜬 기분을 확 깨며 말했다.
“…….”
사홍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
걸화는 못마땅한 얼굴로 가룡을 쳐다보았다.
엄청나게 멋있는 침술을 낭비라고 하는 사형을 말이다.
가룡은 말을 이었다.
“막내야! 그래도 저 녀석이 침술에 대해서만큼은 스승님 못지않으니, 셋째와 있는 동안 배워 두면 좋을 게다. 침 던지는 그런 쓸데없는 거 말고, 이 녀석이 알고 있는 침구술이나 침의 요법, 치료법 같은 것을 배워 보아라. 크게 도움이 될 게야.”
늘 가볍게 말하던 가룡이 어른스럽게 말했다.
“네. 사형…….”
걸화가 떨떠름하게 답했다.
‘탄지신공? 대단한 거 아냐? 나는 그거 배우고 싶은데.’
“히히…….”
가룡의 칭찬에 사홍은 쑥스러운 듯, 커다란 덩치를 옹송그리며 웃었다.
“쯧쯧쯧. 넌 여전히 힘들게 사는구나. 고생이 많다. 많아.”
가룡이 고개를 저으며, 사홍을 가엾게 쳐다보았다.
“왜요? 뭐가 힘들어요?”
걸화는 뭔가가 있는 것 같은 가룡의 표정을 보고 물었다.
“그런 것이 있다. 그만 식사 하자꾸나.”
가룡이 걸화의 물음에 적당히 대꾸하고 젓가락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