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마철용과 혈풍단은 벌융이 아무렇게나 파헤쳐 놓은 비무단을 메우고 단단하게 다졌다.
그리고 피 묻은 벌융의 무기와 침, 파헤쳐진 흙을 치우고 다시금 단을 평평하게 수리했다.
정리가 끝이 나자, 마철용과 그의 단원들은 단 아래로 내려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다음 비무를 구경할 준비를 했다.
이번에는 정리할 것 없이 좀 깨끗하게 싸움이 끝나기를 바라면서.
마철용은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연천과 모충일은 천마대전의 마지막 날에 나타날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계속 그들을 의식하고 있었다.
근처에 오기는 왔을 텐데 어디까지 왔는지, 어떻게 오고 있는지, 교에 도달하기까지 곳곳에 자리한 장치들은 무사히 넘을 수 있을지 등으로 신경이 자꾸만 교 밖으로 쏠렸다.
정리된 비무단 위에 올라선 환긍이 다음 비무 상대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서열 68위 흑석단의 부단주 염사휘가 서열 49위 혈풍단의 단주 마철용에게 도전장을 냈습니다. 두 사람 올라오십시오.”
‘……?’
마철용의 고개가 환긍에게로 획 돌아갔다.
‘아… 지금은 하고 싶지 않은데…….’
천마대회를 개최해야 한다고 소무군을 설득한 것은 마철용이지만 그에게 이 대회는 서열 상승을 위한 것도, 마교의 단합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혈영천마의 제자 백연천을 본인의 자리에 앉히기 위한 것이었고, 자신은 그것을 위해 준비하는 중이었다.
신경이 온통 교 밖 연천이 있을 만한 곳에 쏠려 있는 지금, 나가서 싸우고 싶지 않았다.
“혈풍단의 단주 마철용은 포기하는 겁니까?”
마철용을 향한 환긍의 외침이 들렸다.
마철용은 어기적거리며 비무단 위로 올라갔다.
“도전에 응하시겠습니까?”
환긍이 마철용을 바라보며 물었다.
마철용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네…….”
아무리 하기 싫어도 천마대회에서 도전을 받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곧 스스로 자신의 서열을 포기하는 것이었고, 모든 마교도들로부터 멸시를 받는 길이었다.
이것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환긍이 물러가자, 염사휘는 바로 등에 맨 두 개의 중도를 뽑아 들고 마철용에게 달려들었다.
마철용이 검을 들어 막으며 생각했다.
‘주군을 기다려야 하는데…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그는 싸움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
염사휘와 맞댄 마철용의 검이 하얗고 환한 빛을 내더니, 눈이 부시도록 크게 퍼지며 마철용과 염사휘를 감쌌다.
“어휴…….”
구경하던 마교도들이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뭐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려고 미간을 찌푸리고 빛 너머를 보려 집중했지만, 심하게 밝은 빛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도 힘들었다.
잠시 후.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바닥에 드러누워 숨을 헐떡거리는 염사휘와 가만히 서서 그를 내려다보는 마철용이 있었다.
염사휘의 이마와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마철용이 천천히 검 끝을 내려 염사휘에게 가져다 대어도 염사휘는 미세하게 몸을 떨며 급하고 거칠게 숨을 쉬기 바빴다.
마철용의 검이 염사휘의 가슴께에서 멈추자 사위가 조용해졌다.
마철용이 염사휘를 어떻게 처리할지 기다리는 이들의 눈동자는 기대감에 가득 찼다. 하지만, 마철용은 염사휘를 찌르지도 베지도 않고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져, 졌소…….”
염사위가 겨우 말을 내뱉었다.
“마철용 승!”
환긍이 외쳤다.
그 말에 검을 내린 마철용이 작게 묵례하고 단을 내려갔다.
고개를 들어 자신에게 향한 마철용의 검만을 바라보던 염사휘가 힘을 빼고 바닥으로 몸을 널브러트렸다.
많은 이들의 시선이 담담한 마철용에게 돌아갔다.
마철용은 그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단 아래 한쪽에 자리 잡고 외부에서 교내로 들어올 수 있을 만한 곳을 슬쩍 쳐다보았다.
연천이 오려면 며칠이 더 있어야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마철용의 마음은 초조했다. 머릿속에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그때였다.
교주인 상관량 뒤에 앉아 있던 이들 중 한 명이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내가 혈풍단의 단주 마철용에게 도전하겠소!”
“에엥?”
마교인들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교주인 상관량 뒤에 앉은 이들은 교내 서열 9위까지의 장로였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일어선 것이다.
“응?”
“헉!”
“일 났다…….”
자리에서 일어선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한 마교도들이 웅성거렸다.
마철용에게 도전을 하겠다고 일어선 이는 마교 서열 8위의 장로 측진이었다.
무공 딱 하나만 본다면 그의 서열은 8위가 아닌 그 이상이었지만, 무공 외의 모든 면에서 그의 능력은 봐줄 만한 게 없었다.
측진의 별호가 광무였는데, 그의 무공에 대한 도량이 넓어 광(廣) 무(武)라 불린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극히 일부였고, 그를 아는 대부분은 그의 별호를 광(狂) 무(武)라고 이해했다.
무인이라면 무에 대한 애착이 강한 것은 당연했으나, 마공만으로 지금의 경지에 이른 그의 무에 대한 집착은 무서울 정도였다.
언제고 어디에고 자신을 성장시킬 만한 기회가 있는 곳이라면 달려갔고, 정말 목숨을 걸고 수련했다.
그랬기에 자신보다 높은 경지에 이른 자라고 판단이 되면 그가 정파의 사람이건, 이름 없는 낭인이건 상대를 인정하고 정중히 대했다.
그것이 상관량과 측진의 사이를 나쁘게 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측진은 상관량의 무공 실력이 자신보다 우위라고 인정하지 못했기에 진심으로 상관량을 따르지 않았다. 그것을 아는 상관량이었기에 어지간하면 측진을 교에 있지 못하게 밖으로 내몰았다.
그런 측진이 교내 마교도들의 무공 실력을 보고자 이번에 들어온 것이었다.
방금 전 마철용의 비무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마철용과 꼭 검을 맞대어 보고 싶었다.
환긍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자, 측진이 교주에게 말했다.
“천마대회는 서열에 상관없이 누구든 누구에게나 도전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 말에 교주가 엄청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본 환긍이 크게 말했다.
“대신! 장로께서 이번 비무에서 패하신다면 49위인 마철용과 서열이 바뀌게 되는데도 도전하시겠습니까?”
“하다마다. 무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에만 급급해서는 절대 성장할 수 없다네. 어린아이에게도 배울 것이 있으면 배워야 하는 법이지. 나는 혈풍단 단주에게 배우고 싶은 것이 있네.”
장로 측진의 말에 마철용은 몹시 거북한 표정으로 자신의 친우이자 혈풍단의 부단주인 소강을 쳐다보았다.
‘나는 싸우기 싫은데… 어떡하지?’
마철용의 마음을 아는 소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떡하긴, 싸워서 이겨야지!’
걸화의 영단을 먹은 이후, 마철용의 내공은 하루가 다르게 깨끗해져 갔고 또 빠르게 커 갔다.
소강은 이전과 비교도 되지 않게 성장한 마철용의 실력을 한 번쯤은 확인하고 싶었다.
어쩌면 이번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교내에서도 한 손가락에 들어갈 정도로 대단한 측진과 비무를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내키지 않는 마철용이 밍기적거렸다.
‘야! 가! 빨리 가!!’
소강이 마철용에게 전음을 보냈다.
‘안 하고 싶어. 지금 이럴 때가 아니잖아. 그분을 기다려야 되는데…….’
‘내가 기다릴 테니깐, 너는 가! 어서! 어서어서!’
먼저 비무단 위에 올라선 측진이 마철용을 기다리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마철용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송아지처럼 어그적어그적 올라갔다.
“마철용 대주는 도전을 받으시겠습니까?”
환긍의 물음에 마철용은 답하지 않았다.
하위 서열의 도전을 거부하는 것이야 비웃음을 살 만한 일이지만, 측진의 서열은 무려 8위였다.
‘이것은 거절해도 되지 않을까?’
마철용이 혼자 생각했다.
‘대답해! 한다고 대답해! 어서! 좋다고 해!!’
소강의 전음이 정신 사납게 마철용의 머릿속에 울렸다.
“내 자네의 무공에 매료되어 한수 배우고자 하네. 이 비무에서 자네가 내게 진들 자네가 잃을 것이 무엇이 있겠나? 내 절대 죽이거나 크게 다치게 하지 않겠네. 그러니 내게 배움을 주시게.”
측진은 마철용이 거부할까 싶어서 애타는 눈빛으로 점잖게 부탁했다.
비무단 아래의 마교도들이 기대에 찬 눈으로 마철용을 바라보았다.
‘죽이지도 않는다잖아! 하겠다고 말해! 어서!’
소강의 전음이 끈질기게 마철용에게 들러붙었다.
“네…….”
“우와아아아아!!”
마철용의 대답에 전에 없는 비무를 구경하게 된 마교인들이 기대감에 찬 환호성을 질렀다.
‘후우…….’
마철용은 조용히 답답한 숨을 내뱉었다.
“흐흐, 그럼 잘 부탁함세.”
측진이 포권을 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마철용도 포권하고 고개를 숙였다.
‘장로님의 말씀이 맞아. 나야 손해 볼 것 없지. 적당히 맞추어 드리다 내려가서 그분을 기다리면 되는 게야.’
마철용이 천천히 검을 뽑으며 측진을 바라보았다.
장로 측진이 눈을 가볍게 내리감고,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몇 번의 호흡 사이에 그의 피부색은 죽은 사람의 것처럼 검푸른 빛을 띠며 창백하게 변했다. 윤기 없는 메마른 살결에 입술은 검붉은 빛을 띠었고, 번들번들한 검은 눈동자가 비정상적으로 확대되어 흰자위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꿀꺽.
마치 강시로 변한 것 같은 측진의 모습에, 마철용은 마른침을 삼키며 검을 다잡았다.
푸석푸석한 측진의 몸에 유일하게 윤기가 흐르는 새까만 눈동자가 마철용에게 고정되었다. 잠시 마철용을 응시하던 측진이 한쪽 손을 앞으로 뻗었다. 마철용이 몸을 피했다.
측진의 손끝에서 생겨난 어두운 기운이 그대로 뻗어나가 마철용을 넘어 마교를 둘러싼 절벽 바위에 부딪혔다.
바위의 일부가 검게 변하며 바스라져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측진은 쉬지 않고 마철용을 향해 어두운 기운을 뿜어냈고, 마철용은 유연하게 몸을 움직이며 그것들을 피하고 있었다.
“어허!!”
커다란 고함 소리와 함께 측진의 얼굴이 빠르게 본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진심으로 싸우고자 하는 상대에게 성심을 다하지 않는 이런 무례가 어디 있는가?”
측진의 외침에 공격을 피하기만 하던 마철용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거 적당히 해서 될 일이 아니겠구나…….’
마철용이 포권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측진 장로가 화를 낼 만도 했다.
“죄송합니다. 장로님! 지금부터는 제대로 하겠습니다.”
“흠!”
불쾌한 숨을 내뱉은 측진의 얼굴은 다시 검푸른색으로 돌아왔다.
‘이제 도망 갈 수도 없다. 죽기 살기로 해 보는 수밖에.’
마음을 다잡은 마철용에게 측진은 두 손을 뻗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커다란 기운이 마철용에게로 다가왔다.
마철용은 빠르게 검을 휘둘러 기막으로 그 기운을 막았다.
새까만 측진의 기운과 새하얀 마철용의 기운이 부딪히며 주변의 공기가 울렁거렸다. 어느 한쪽으로도 밀림이 없는 전혀 다른 두 개의 기운이 팽팽하게 맞붙었다.
더욱 공력을 끌어올려 어두운 기운을 뿜어내는 측진의 몸에 검은 핏줄이 거미줄처럼 돋아났다.
입을 꾹 다문 마철용도 내력을 한껏 끌어올렸다. 그와 검 주위로 똑바로 바라보기 힘든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두 사람의 기운은 점점 더 커지고 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