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모충일은 며칠째, 아침 일찍 나와서 하염없이 하늘만 바라보았다.
오늘도 점심 식사 시간이 훌쩍 넘었음에도 밥 먹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맑은 하늘만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응?”
저 멀리 검은 점 하나가 보였다.
하늘 높이에서 움직이던 점은 점점 더 커지며 제 모양을 드러냈다. 회백색의 새 한 마리가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날아와 모충일의 팔 위에 앉았다.
모충일은 새의 가느다란 다리에 달린 작은 원통을 떼어내, 그 안에 들어 있는 종이 조각을 꺼냈다.
종이에 쓰인 글자를 읽어 내리던 모충일의 표정이 변했다.
그는 서둘러 연천의 전각으로 들었다.
“내달 초아흐레입니다.”
모충일이 가타부타 설명 없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연천은 굳은 표정으로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주름진 얼굴로 미소 짓던 스승님이 그를 내려다보는 것만 같았다.
* * *
무림맹 회의실에 앉은 문주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불만스러웠다.
이건 뭐 전쟁을 하자는 건지 말자는 건지.
전쟁을 치르기로 결정을 하고 여기저기서 지원을 받고 이야기가 되었으면 어서 일을 진행시키지 않고서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으니 처음 먹었던 마음이 점차 흐려지고 있었다.
“대체 출정일이 언제입니까?”
남궁현섭이 맹주 여송에게 따지듯 물었다.
“으흠…….”
여송도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답답했다.
“악을 처단해야 한다고 그리 말씀하시더니 어쩌자는 겁니까? 계속 이렇게 미루고만 있을 것이라면 우리 곤륜은 이번 전쟁에서 빠지겠습니다.”
곤륜의 문주 구강경이 말했다.
그는 처음부터 평화를 깨고, 제자들이 줄줄이 죽어나갈 것이 뻔한 이런 전쟁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어허… 어찌 이리들 성급하십니까?”
여송이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을 이었다.
“이 일이 그리 급하게 달려든다고 될 일입니까? 우리 모두의 목숨이 달린 일입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도 모자랍니다!”
여송이 문주들을 돌아보며 꾸짖듯이 말했다.
“그럼 언제까지 기다리자는 말씀이십니까?”
백리진헌이 물었다.
“우리 모두가 십만대산으로 가야 합니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위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한데 마음만 급해서야 되겠습니까? 철저하게 확인하고 대비를 해야지요!”
여송의 말에 불만을 표하던 문주들이 입을 다물었다.
맹주의 말은 십만대산과 마교에 대해서 더 확실하게 조사해서 대비하자는 말이었다. 그 말을 반대하고 급하게 출정하자고 우길 수는 없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전쟁으로 인한 피해의 책임을 모조리 뒤집어쓸 수도 있었다.
“훗…….”
종남의 공엽방이 맹주와 문파 대표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혼자 코웃음을 쳤다.
공엽방은 맹에 상주하는 화산의 장로 운문이 장문인을 설득하겠다고 화산으로 가고, 그 뒤에 맹의 지각주까지 비밀리에 화산으로 걸음한 것을 알고 있었다.
이번 전쟁에 함께하자고 그렇게 회유하는데도 화산의 장문인이 버티고 있는 것이리라.
공엽방은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며, 어떻게 하면 화산을 이번 전쟁에 참여시킬 수 있을지 고민했다.
“으흠…….”
여송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당장 출정을 해도 모자람이 없이 정마대전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딱 하나, 화산을 빼고 말이다.
화산을 빼고 전쟁을 치르면 맹에서 화산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일이 된다. 화산이 무림맹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맹의 역량이 줄어드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봉문한 화산만 두고 전쟁을 치르게 되면, 화산을 제외한 모든 문파는 세력과 힘이 줄어들 것이다.
정마대전 후, 무림 정파의 힘의 균형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참전하지 않은 화산을 중심으로 말이다.
반드시 화산과 함께해야 했다.
* * *
연천이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눈앞의 두 노승을 바라보았다.
그들도 뭔가 켕기는 것이 있는지 연천의 눈을 피했다.
“저희를 어찌 보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주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아이는 소림의 아이입니다.”
“그 아이가 어찌 소림의 아이입니까? 허성이는 보은장 사람입니다.”
연천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 답했다.
소림의 승려들이 허성을 유심히 볼 때부터 이런 일이 생길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소림의 무공을 쓰지 않습니까?”
연천은 말하는 운상대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시정에 퍼진 소림의 무공을 좀 흉내 내었다고, 소림의 아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조금 흉내 내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그 아이가 누구에게 소림의 진신무공을 배우기라도 했다는 겁니까?”
연천이 힘을 주어 말했다.
“으흠…….”
운상대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연천을 쳐다보았다.
“…….”
연천이 무표정으로 운상대사를 응시했다.
“으으음…….”
운상대사가 앓는 소리를 내었다.
“…….”
“으흐흐흠…….”
운상대사는 더욱 길고 심란한 숨을 내뱉었다.
도원대사가 불안한 얼굴로 운상대사를 바라보았다.
연천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두 노승을 응시했다.
“그…그러니깐… 그 가주… 음…….”
“…….”
“가주…….”
“말씀하시지요.”
“으흠… 그 아이의 스승이라는… 취한이라는 자가 금월대사요…….”
운상대사가 불편한 목소리로 말했다.
“금월대사? 무림의 영웅이었던 그 금월대사를 말씀하시오?”
연천이 몰랐다는 듯이 되물었다.
“지금은 파문되었고 무림에서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그 금월대사요. 상관량에게 속아서 민가를 치고… 본인은 속죄를 하고자 한 모양이오.”
“…….”
연천이 운상대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연천은 이미 허성을 소림으로 보낼 마음을 먹고 있었다.
자신이 계속 보은상회의 가주로 있다면 모를까, 마교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허성의 스승인 금월대사를 없앤 것은 마교였다. 그를 더 이상 자신 가까이 두는 것은 옳지 않은 듯싶었다.
“그 아이는 소림의 아이지 않소? 보내주시오.”
“으흠…….”
“소림에 들어오는 것이 그 아이한테도 좋은 일 아니겠소?”
“내 이야기해 보지요. 하지만, 장담은 못 하오.”
연천이 딱딱하게 답했다.
“고맙소. 그럼 아이와 이야기해 보고 전갈을 주시겠소? 그럼 내가 다시 오리다.”
“그리 하시지요.”
연천은 그렇게 자신을 찾아온 두 소림승을 돌려보냈다.
* * *
오랫동안 눈치를 보고 사는 것에 익숙한 허성은 연천의 심상치 않은 표정에 잔뜩 주눅이 들었다.
“뭘 또 그리 눈치를 봐. 이리 가까이 오거라.”
연천의 말에 허성이 슬금슬금 다가가 연천 앞에 앉았다.
“무슨 일 있습니까요?”
허성이 연천의 얼굴을 보고 씨익 웃으며 물었다.
그가 그렇게 웃으면, 생각이 많던 연천도 굳은 표정을 풀고 미소를 보내곤 했다.
“녀석…….”
허성은 오늘 연천의 미소가 평소와 다르게 불편하다고 생각했다.
“헤헤…….”
“허성아. 나는 너와 이리 인연이 되어 참으로 좋았다.”
연천이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가주님도 참… 꼭 헤어질 것처럼 말씀하세요.”
“사람은 다 제 뿌리가 있다. 그 뿌리에서 자라야 편하고 잘 자라는 법이지.”
“네…….”
허성이 전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연천을 보았다.
“너도 네 뿌리 곁으로 가야 되지 않겠느냐?”
“에? 스승님이 돌아가신 지가 언젠데 그 무슨…….”
“음! 너의 스승이신 취한이라는 사람이 실은… 소림의 금월대사라는 분이다.”
“네에? 말도 안 돼…….”
허성이 얼어붙은 것처럼 굳어서 연천을 쳐다보았다.
“지난번에 보았던 소림의 승려께서 너를 알아보시고 소림으로 데려가고 싶어 하신다. 내 생각에도 네가 소림으로 가는 게 좋을 듯싶구나.”
“왜, 왜… 뭐가 좋아요?”
“소림이지 않느냐? 대문파야. 앞으로 너의 삶에 큰 그늘이 되어줄 게다.”
“싫어요! 저는 대문파 같은 거 필요 없어요. 평생 가주님 옆에서 살래요.”
“으흠…….”
“제가 뭐 잘못했어요? 가주님은 제가 옆에 있는 거 싫어요?”
“소림이 너의 자리야.”
“소림으로 가기 싫어요. 가주님이 내치시면… 그러면 걸윤 형님이라도 찾아갈래요. 차라리 거지로 살래요.”
허성이 지금 보은장에 없는 걸윤을 따라가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천천히 생각해 보거라.”
“생각할 것도 없어요. 싫어요.”
“왜 싫다는 것이냐? 대문파의 제자가 되면 네 앞날이 편할 텐데.”
“소림이잖아요. 고기도 못 먹고, 머리도 깎고, 장가도 못 가고… 싫어요!”
“허…….”
연천은 허성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연천과 헤어지기 싫다거나 걸윤이 좋아서 그런다면 설득을 해 보겠지만, 승려의 계율을 지키기가 싫다는데 어쩌겠는가?
* * *
이런저런 이유로 교 밖으로 떠돌던 마교인들이 하나씩, 둘씩 돌아왔다.
마교는 그들만의 축제를 준비하느라 오랜만에 기분 좋게 술렁거리며, 하나같이 알 수 없는 기대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소무군은 교내에서 서로 싸우고 죽이는 이런 대회가 뭐가 좋은지 와닿지가 않았다.
그의 스승인 상관단월도 그랬었다. 혈영천마가 매년 천마대회를 열겠다는 것을 극구 말리신 분이었으니.
천마대회 자체에 대한 그의 생각과 상관없이 교내를 휩싸고 있는 긍정적인 열기에 마철용의 의견을 수용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천마대회 준비 대부분을 마철용에게 맡겼다.
천마대회가 개최되는 동안 교주가 앉아 있을 자리를 모두가 잘 보이는 높은 곳에 만들어 놓은 것에 소무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기회에 교주의 권위를 보여 주려는 것이겠지. 젊은 사람이 생각이 깊어. 일도 잘하고.’
교주도 크고 묵직한 의자가 놓인 자신의 자리가 꽤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그간의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소무군은 혈풍단에게 뭔가를 지시하고 있는 마철용에게 다가갔다.
“어찌 되고 있나?”
“아! 오셨습니까? 비무장도 단을 올려 만들까 합니다. 그래야 어디서건 잘 보이지 않겠습니까?”
넓고 평평한 단을 사람의 머리보다 높이 올려 만든 것이 보였다.
비무단의 위치가 교주 자리의 정면에 있으면서 교주의 자리와 높이가 비슷했다.
“아무리 비무를 하는 이들이 중하다 하지만, 교주님이 앉을 자리가 더 높아야 되지 않겠나?”
소무군이 넌지시 물었다.
“저도 처음에는 그리 생각했지만, 교주님의 마지막도 이 비무단에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지막?”
“아, 마지막 말씀 말입니다. 아무리 앉은 자리를 높인다 한들 이 비무단보다 좁을 수밖에 없습니다. 넓은 비무단 한가운데 서 있는 것이 더 위엄 있어 보이지 않겠습니까?”
마철용의 말에 소무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의자에 앉은 교주의 모습보다 사방이 트인 넓은 비무단 위에 서 있는 교주의 모습을 더 우러러볼 듯싶었다.
“그럼 수고해 주시게.”
“네!”
마철용은 소무군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다시 비무단을 단단하게 세우고 있는 혈풍단과 소강에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