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마유선은 저녁이 되어서야 움막으로 돌아온 천상을 바라보았다.
따뜻함과 포근함이 다가와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자신의 마음을 온통 다 가져가 버린 이 사내의 미소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가슴이 벅찼다.
“힘드시오? 얼굴이 좋지 않소.”
천상이 마유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흐음…….”
마유선은 천상이 가득 채웠던 충만한 감정을 낮게 내뱉었다.
오늘은 오랫동안 생각했던 것을 그에게 말해보기로 했다.
개방의 조직에 살막의 정보체계를 접목해서 개방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면 좋을지에 대해서 말이다.
마유선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생각해보겠소.”
긴 이야기를 끝낸 마유선을 향한 천상의 따뜻한 미소와 이해심 가득한 눈빛은 여전했지만, 그녀는 그가 생각이 많아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 * *
산달이 다가오면서 마유선의 배는 터질 듯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녀는 부른 배를 조심스럽게 잡고 불편한 걸음으로 걸어 총타의 한 움막 앞에 섰다.
선뜻 안으로 들지 못하고 망설이던 마유선은 결심한 듯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계십니까? 마유선입니다.”
“…음! 들어오너라!”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마유선은 거적을 들치고 움막으로 들어갔다.
위공보는 자신의 움막으로 든 마유선을 아무런 감정 없이 바라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아이를 품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아끼는 천상의 아이를 말이다.
최대한 편하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에 굳은 얼굴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오랫동안 문안 인사를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으흠…….”
위공보가 한숨을 내쉬었다.
혼례를 올리고 마유선의 배가 크게 불러와 위공보가 만류하기 전까지 그녀는 꼬박꼬박 그에게 아침 문안을 올렸다.
그것은 마유선이 자신을 천상의 부모로 여긴다는 의미였고, 그를 공경한다는 뜻이었다.
“배가 그새 더 불렀구나. 몸은 좀 어떠냐?”
위공보가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말했다.
“가만히 쉬고 있는 저는 괜찮습니다. 단지…….”
잠시 망설이던 마유선이 말을 이었다.
“상공께서 힘들어하시는 것이 마음에 걸려…….”
마유선은 말끝을 흐렸다. 자신 때문에 천상이 힘들게 된 것 같아 그에게 미안했다.
천상이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그가 스스로 한 결정이라고 말해도 마유선의 마음은 불편했다.
“으흠…….”
그녀가 찾아왔을 때부터 용건이 무언인지 예상할 수 있었다.
천상을 방주 자리에서 퇴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천상이 총타의 돈을 탈탈 털어 개방 분타 인근에 점포를 냈다. 정보 장사를 하겠다나 어쩌겠다나.
무소유를 실천하고, 의를 숭상하는 개방이 사파 나부랭이들이나 장사치처럼 정보를 모아 판다니.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천상을 쫓아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올법했다.
“그분을 방주 자리에 앉히신 분이 태상 방주님 아니십니까? 어찌 그러셨습니까? 그분을 믿으니 그리하신 것 아닙니까?”
마유선의 말에 위공보는 속이 답답해졌다.
위공보는 누구보다 천상을 가까이서 오랫동안 보아왔다. 그랬기에 그에게 방주 자리를 물려 준 것이다.
대체 어쩌자고 천상이 그런 짓을 하는지 아무리 이해해보려고 해도 힘들었다.
어디서 귀신이라도 씌어 개방을 말아먹을 작정을 하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느냔 말이다.
“믿었다. 한데 지금은 모르겠구나.”
“조금만 더 그분을 믿고 지켜보시면 안 되겠습니까? 정말 그분의 선택으로 개방이 잘못되면 그분 스스로 물러날 겁니다. 그분을 아시지 않습니까?”
천상도 자신이 하려는 일에 반대가 있을 것을 예상했기에, 아주 빠르게 일을 진행 시키고 있었다.
천상이 바꾼 일에 대한 결과가 어떤 식으로든, 곧 나타날 것이다.
“으흠…….”
위공보야말로 누구보다 천상이 그 자리를 지키기를 바랐다. 자신이 내세운 자신의 제자가 퇴출되지 않기를 바랐다.
어떻게든 무마시켜 보려 해도 천상이 저지른 일이 커도 너무 컸다.
“장로들을 설득해보겠다마는 그게 될지 모르겠구나…….”
위공보 자신도 납득하지 못한 일이었다. 장로들을 회유할 자신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마유선은 확신 없는 위공보의 말에도 감사했다.
얼마 후, 마유선은 천상을 똑 닮은 아이를 출산했다. 개방에서는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작은 아이의 출생은 고인 듯 멈춰있는 개방의 공기에 새로운 바람을 밀어 넣은 것 같았다.
위공보의 설득도 있었지만,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마유선과 막 태어난 아이를 생각해서 당장 천상을 퇴출하자는 말은 들어갔다.
천상이 하는 일에 대한 불만은 여전히 많았지만, 장로들도 한동안은 지켜보기로 했다.
* * *
천상이 벌인 일에 대한 결과는 엄청난 금전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총타로 들어오는 돈이 불운을 몰고 오는 액이라도 되는 양 꺼림칙해 하던 장로들은 변해가는 개방의 모습에 하나둘씩 태세를 바꾸었다.
“아휴우! 뜨끈한 방에서 자고 일어났더니 몸이 어찌나 개운한지 이러다 내가 회춘하겠네.”
아담하지만 깨끗하게 지어진 전각에서 자고 일어난 장로가 허리를 두드리며 만족스러워했다.
“내가 무엇만 먹으면 탈이 나는 통에 평생 뼈에 가죽만 달고 살았는데, 요즘은 통 배탈이 안 나더니 평생 안 붙던 살이 다붙었다니깐.”
총타에 생긴 식당에서 만든 음식을 먹은 개방도의 말이었다.
“겨울만 지나면 얼어서 죽고 굶어 죽는 녀석들이 그리도 많더니 요즘에는 통 그런 이야기가 없구먼.”
천상이 분타로 내려보내는 생활비 덕분에 전체적으로 개방도의 삶이 나아지고 있었다.
“어찌나 개방 덕분에 살았다고 고맙단 인사를 하던지 내가 참 민망해서… 허허허.”
흉년이 든 마을과 수해를 입은 곳, 돌림병이 돈 취락에 도움을 준 개방에 감사의 인사를 해대니 개방도들은 멋쩍기만 했다.
원래도 타인을 돕는 일을 꾸준히 해오던 개방이었지만 돈이 많은 만큼 그 규모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개방도들은 변해가는 개방의 생활에 익숙해져 가며 천상을 칭송했다.
개방을 세웠다는 초대 개방주 개방지존 이후, 가장 존경받는 방주로 말이다.
세월이 흐르며, 개방의 체계는 더욱 단단해졌고 들어오는 돈은 더 많아지고 그만큼 일도 많아졌다.
마유선은 잠든 둘째 아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사내아이인데도 어쩜 이렇게 오목조목 예쁘게 생겼는지 모르는 이들에게 딸이 아니냐는 소리를 많이도 들었다.
마유선은 둘째를 볼 때마다 그녀의 어머니가 생각났다.
황후를 제거하는 임무에 나서는 그날부터, 그녀는 살막의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인 살막주는 그녀와 살막이 관계된 모든 연결을 끊고 흔적도 지웠다.
이제 그녀는 개방 방주의 안사람일 뿐인데, 어머니를 너무도 닮은 둘째 아들을 볼 때마다 살막이 떠올랐다.
‘살막의 일을 그만두고, 혼례를 올리고 아이를 낳고 살기를 바랐던 어머니는 지금의 나를 보면 잘했다고 하실까?’
그녀는 젖어가는 눈을 꼭 감았다.
마유선과 아이들이 있는 전각의 방문이 열리며, 천상이 그녀를 안심시키는 미소를 머금고 다가왔다.
“쉿!”
마유선이 천상에게 조용히 하라는 뜻을 전했다. 아이들이 이제 막 잠이 들었으니 말이다.
천상과 함께, 자는 두 아이를 바라보는 마유선의 가슴 속에서 따뜻한 열기가 피어오르며 새삼 행복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리 살면 되었어, 이리 좋은 것을… 살막은 부현이가 잘 이끌게야…….’
마유선은 고개를 흔들어 살막의 생각을 지웠다.
* * *
세월은 더 흘러갔다.
천상과 개방도들은 여전히 바빴고 개방의 삶은 점점 더 풍족해졌다.
마유선은 셋째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다.
가끔 들르는 산파는 배가 작고 동그란 것이 이번에는 딸일 것이라고 했다.
또 아들이어도 괜찮았지만, 딸아이가 있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첫째와 둘째 때보다 유난히 거센 태동을 느끼며 어쩌면 산파가 틀렸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누구보다 기운차고 활달한 아들인 것 같다고 말이다.
거기다 앞서 낳은 아이들을 가졌을 때와는 다르게 가만히 있는 것이 갑갑하고 산으로든 들로든 돌아다니는 것이 속이 편안했다.
느긋하게 총타 뒤, 소령산 초입을 걷던 마유선은 익숙하지 않은 기척에 걸음을 멈추고 두 아이의 어머니가 아닌, 살수의 눈빛을 발하며 촉각을 곤두세웠다.
마유선은 유난히 수풀이 우거진 곳에 자리 잡은 나무 한 그루를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곧, 나뭇잎 몇 개가 떨어져 내리더니 아무도 없는 곳에서 복면을 한 사람이 나타났다.
마유선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복면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습관처럼 단검을 찾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검 같은 것은 없었다. 두 개의 단검도, 수련도 손을 놓은 지 오래였다.
산 초입이지만 개방의 총타 내였다. 자신을 해할 사람이 있을 것이라 생각지는 않았다.
지금 그녀는 살막의 마유선이 아닌, 개방 방주의 안사람일 뿐이었기에.
마유선의 매서운 눈발을 받으며 다가온 사내가 천천히 복면을 내렸다.
마유선의 눈이 더 할 수 없이 커지며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복면을 내린, 파리한 얼굴을 한 사내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잘 지냈어?”
“…….”
대답하지 않는 마유선의 눈에 물방울이 그렁그렁 맺히더니 커다란 눈물방울이 뚝뚝 흘러내렸다.
사내가 더 가까이 다가와 우는 마유선을 끌어안았다. 마유선의 몸이 크게 들썩이며 목을 놓아 울어댔다.
말없이 마유선을 안고 그녀의 울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는 사내의 눈도 촉촉이 젖어 들었다.
한참 만에 울음을 그친 마유선은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들어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얼굴이 왜 이리 상했어……?”
무언가가 아프게 짓누르는 목을 넘어 나온 목소리는 흔들렸다.
“몸이 좋질 않아.”
마유선을 바라보고 있는 사내, 마부현의 낮은 목소리는 담담했다.
“아직 젊은 녀석이 어쩌다…….”
마유선은 젖은 눈을 동생에게서 떼지 못했다.
“…….”
마부현은 마유선의 얼굴과 그녀의 부른 배를 보며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
마유선은 가만히 동생을 바라보았다.
이제 와서 마부현이 자기를 찾은 것은 뭔가 용건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으흠…….”
마부현은 낮게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아. 무슨 일이야?”
그녀는 더 이상 살막의 사람이 아니었지만, 동생이 부탁하는 일이 있다면 그녀가 할 수 있는 한 도와줄 생각이었다.
혹시라도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을 한 번쯤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