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고매혼:바람에_홀린…-210화 (210/230)

210화

며칠 전.

이제 갓 서른을 넘긴 배천상은 개방의 북경 분타로 들었다.

말이 개방이고 북경 분타이지, 남들 눈에는 그저 다리 밑에 오글오글 자리 잡은 움막촌일 뿐이었다.

“아! 형님! 형님이 여긴 왜 오셨수?”

천상을 본 거지, 채방의 첫 마디였다.

“개방도가 개방 분타에 왔는데 그게 뭐가 어때서? 꼭 내가 못 올 데 온 것처럼 말한다.”

천상이 삐딱하게 답했다.

“총타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여기 있으니 그렇지요. 형님이 방주님하고 대판 싸우고 집을 나갔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채방이 놀리듯 웃으며 말했다.

“내가 나가긴 어딜 나가고 스승님이랑 싸우긴 뭘 싸워? 그냥 돌아다니는 거지!”

“에이~ 방주님이 차기 방주가 되라고 했더니, 싫다면서 엄청나게 싸웠다고 그러던데.”

채방의 말에 천상이 인상을 팍 썼다.

“시끄럿!”

천상은 채방에게 퉁박을 주고는 아무 움막에나 들어가 벌렁 드러누웠다.

잠시 후, 개방의 북경 분타주 궐모가 천상이 있는 움막으로 들어오며 그를 불렀다.

“천상아!”

“네에.”

누워있던 천상이 불만스럽게 일어나 앉았다.

“너 여기 있으면 어쩌냐? 방주님이 그렇게 찾고 있는데.”

“으흠…….”

“그동안 어디에 있었냐?”

“그냥 뭐… 여기저기…….”

천상이 말끝을 흐렸다.

“방주가 왜 싫은데? 나 같으면 얼씨구나 좋다 하고 하겠구만.”

“아! 분타주님은…….”

천상이 입을 삐죽거렸다.

“총타엔 언제 갈 거야?”

“스승님한테 나 여기 있다고 이를 거죠?”

“그게 어떻게 이르는 거냐? 보고지 보고!”

“조금만 있다 갈게요.”

천상이 체념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방주는 할 거야 말 거야?”

“내가 무슨 방주가 된다고 그래요?”

“네가 어때서? 너만 한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궐모의 말에 천상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으흠… 조금만 있다 갈게요.”

“그래, 그래라.”

궐모는 답을 하고는 움막을 나왔다.

“휴우…….”

천상은 다시 긴 숨을 내뱉으며 자리에 드러누웠다.

오늘 자신이 북경 분타에 온 것은 당장 스승님이 계신 총타에 전해질 것이다.

몇 달 전, 천상은 개방의 방주인 스승님과 다투고 총타를 나와버렸다.

나오고 보니 어디 갈 곳도 없고, 그렇다고 가고 싶은 곳도 딱히 없었다. 그저, 정처 없이 길거리를 쏘다녔다.

거지가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이 뭐가 힘든 일이겠는가? 한데 그것이 꼭 집 없는 사람처럼 뭔가 허전하고 개방이 자꾸만 신경 쓰이고 돌아가고 싶어지는 것 아닌가?

총타로 가기는 뭣하고 해서 다니던 중 가까운 분타로 온 것이었다.

‘스승님은 왜 나 같은 놈한테…….’

천상이 혼자 구시렁댔다.

그리 오래 산 것은 아니지만 천상은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결정해보거나 뭔가를 원해서 이루어 본 적이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거지였고, 어쩌다 보니 개방도가 되었다.

그저 자신 앞에 주어진 상황에 열심히 살았다. 그렇게 살다 보니 지금에 이른 것이다.

그런 천상이 처음으로 확고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다. 방주가 되기 싫다고.

방주의 제자라고 해서 무조건 차기 방주가 되는 것은 불합리한 처사라고 생각했다.

‘진짜 능력 있는 사람이 방주가 되어야지. 내 까짓 게 무슨…….’

누가 뭐래도 천상은 자신을 보듬어 준 개방이 좋았고, 개방이 더 발전하기를 바랐다.

자기처럼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방주가 되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스승님은 아직도 정정하시면서 왜 벌써 나한테… 휴…….’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잘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두려웠다.

자신이 방주가 될 만한 사람이 못 되는 것 같다는 결론은 총타를 나올 때와 똑같았다.

“야! 천상아!”

“…….”

궐모가 천상 옆에서 재촉했지만,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야?”

“분타주님은 제가 여기 있는 게 싫어요?”

“그게 아니고. 총타로 가야 할 거 아니냐?”

“스승님이 오래요?”

“아니, 그건 아닌데…….”

궐모의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궐모는 천상이 북경 분타에 있다는 것을 총타에 보고하면, 당장 그를 총타로 보내라고 할 줄 알았다.

한데 방주는 천상이 이곳에 있는 줄 알고 있으면서도 별다른 지시가 없었다.

거리가 멀지도 않은 총타와 북경에 있는 두 사람은 그들만의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럼 좀 있으면 되죠.”

“…….”

천상의 말에 궐모가 그를 가만히 쳐다볼 뿐이었다.

궐모가 생각해도 천상만큼 차기 방주로 적합한 인물도 없었다.

현재 방주의 제자에다 의협심 높고 힘든 일은 나서서 하고, 두루두루 관계도 원만하며 거지임에도 인물도 풍채도 좋고… 여러 가지 이유로 말이다.

“…….”

천상은 말없이 멀리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파란 하늘에 새하얀 구름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언제까지 분타를 전전할 수는 없지만, 지금은 총타로 돌아갈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 * *

천상은 뒤숭숭하게 잠에서 깨어났다.

총타를 나온 후로 계속 마음이 불편했기에, 아침이 개운하지 못했다.

어젯밤에는 막주를 한잔 걸치고 자서 그런 것인지 유난히 몸과 마음이 거북했다.

“응?”

자리에서 일어나던 천상은 자신의 몸에 꼭 붙어 있는 무언가를 느끼면 거적을 들어 올렸다.

“으응?”

깜짝 놀란 천상은 거적을 내리고 움막을 둘러보았다.

거지 채방과 평재, 서중이 누워있는 언제나와 똑같은 움막 안의 모습이었다.

천상은 다시 조심스럽게 자신이 덮고 있는 거적을 들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거지도 아닌 웬 여인이 자신의 거적 아래에 누워있었다.

천상은 허공을 바라보며 다급하게 눈을 껌뻑였다.

‘이게 무슨 일이람.’

잠자는 거지들과 거적 밑의 여인을 번갈아 보던 천상은 거적으로 여인을 조심스럽게 덮어주고 자고 있는 거지들을 깨웠다.

“야! 야! 아침이야! 일어나!”

“에에? 형님! 조금만, 조금만 더 잘게요.”

채방이 투덜거렸다.

“안 돼! 일어나! 얼른!”

천상은 실눈을 뜨고 꿈틀거리는 거지들을 끌어다가 움막 밖으로 내몰았다.

“아! 형님! 꼭두새벽부터 대체 왜 이래요?”

평재가 툴툴거리며 다시 움막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천상이 움막 앞을 막아서며 잠 덜 깬 평재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댔다.

“절대로 여기 들어오면 안 된다. 딴 놈도 들이면 안 돼!”

“에?”

평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천상을 쳐다보았다.

“아무도 못 들어오는 거다!”

단호하게 말한 천상은 움막 안으로 사라졌다.

“저 형님이 요즘 제정신이 아니야…….”

평재와 같이 쫓겨난 채방과 서중은 목을 벅적벅적 긁어대며 다른 움막으로 기어들어 가 다시 잠을 청했다.

천상은 움막으로 들어 자신의 거적을 조심스럽게 치웠다. 흐트러진 까만 머리카락이 여인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천상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걷어 올리고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인의 얼굴은 창백했고 손과 몸 곳곳에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누운 바닥의 거적은 피가 흥건했다.

천상은 핏물로 범벅이 된, 상처를 동여맨 천을 풀었다. 옆구리에 깊은 검상이 나 있었다. 아직도 피가 슬금슬금 흐르고 있는 상처는 꽤나 심각해 보였다.

“으흠…….”

잠시 생각하던 천상은 움막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평재는 착실하게 움막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평재야! 평재야! 가서 괴화 가루하고 깨끗한 천하고 따뜻한 물 좀 구해와라.”

천상이 평재를 깨우며 말했다.

“에? 갑자기 그건 왜요?”

잠이 덜 깬 평재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잔말 말고 얼른!”

평재는 떠름한 얼굴을 했지만, 주섬주섬 일어나서 천상이 말한 것을 구하러 나섰다.

잠시 후, 평재는 모두 잠든 움막 이곳저곳을 뒤져서 천상이 말한 것을 가지고 돌아왔다.

“고맙다. 어디 가지 말고 여기서 아무도 못 들오게 지키고 있어.”

천상의 심각한 얼굴에 평재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천상은 뜨거운 물에 손을 씻고 깨끗한 천으로 여인의 피를 닦았다. 혈 자리를 눌러 지혈을 하고 넓게 벌어진 상처에 괴화 가루를 뿌렸다. 소독과 지혈의 효과가 있는 가루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것으로 부족할 것 같았다.

천상은 깨끗한 천을 대고 상처를 꼭 묶었다. 팔과 몸의 다른 곳의 상처에도 괴화 가루를 뿌리고 천으로 묶었다. 그리고 다시 움막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평재야!”

“네…….”

평재가 입이 찢어질 듯 크게 하품을 하고 대답했다.

“…너 옷 좀 벗어라.”

“에?”

움막 앞의 흙바닥에서 꾸벅꾸벅 졸며 여전히 정신이 덜 든, 평재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눈으로 천상을 쳐다보았다.

“…….”

천상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은 단호했다.

“아, 아니 옷은 왜요?”

“필요해, 넌 다른 거 입으면 되잖아. 네가 입고 있는 그것이 필요해.”

“아이참… 형님! 어제 뭘 잘못 드셨수?”

평재는 차마 옷을 벗지 못하고, 그렇다고 거절하지도 못하고 구시렁댔다.

“내가 꼭 필요해서 그래. 부탁 좀 하자.”

천상이 진지하게 부탁했다.

“에잇… 쯧…….”

평재는 구시렁대면서 주섬주섬 옷을 벗었다. 그것을 옷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너덜너덜한 천 조각 몇 개를 겹쳐서 걸친 그의 옷은 어지간히 색이 진하고 더러운 것이 묻어도 표가 안 날 만큼 이미 더러웠다.

바지는 차마 받아들기 불편할 정도로 역겨운 냄새가 풍겨댔다.

“그리고 있다 분타주님 깨시면 나 총타로 갔다고 해라.”

“지금 가려고요? 분타주님 깨시면 인사하고 가지…….”

“됐다, 고맙다. 너는 얼른 옷 구해서 입고 다른 곳에서 좀 더 자라.”

“이번에 가면 진짜 방주가 돼서 보는 거요?”

평재의 말에 천상은 다시 생각이 많아졌다.

“글쎄…….”

“난 웬만하면 형님이 방주가 되면 좋겠소.”

찝찝한 색의 속곳만 걸친 평재의 말에 천상이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얼른 가서 옷 입어라.”

“그럼 조심히 가슈.”

평재는 천상을 한번 쳐다보고는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속곳 바람으로 움막촌 사이의 어딘가로 걸어갔다.

다시 움막으로 든 천상은 평재의 옷을 여인에게 입히고, 남은 천으로 바닥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 주변을 정리했다.

완전히 핏자국이 사라지지 않은 자리에 새로운 거적을 깔았다.

그리고 더럽고 냄새가 유난히 심한 천 뭉텅이를 덮어 여인의 모습을 완전히 가린 후, 그녀를 들쳐업고는 북경 분타를 나와 걸었다.

황궁이 있는 북경을 빠져나오는 데는 두 차례의 검문이 있었지만, 거지에 대한 검문은 소홀한 편이었다.

군사들이 거지들 가까이서 자세하게 살피는 것을 꺼렸기에.

천상은 여인을 업고 다리에 내공을 실어 총타로 달렸다.

이 여인의 상처는 자신이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의원이 필요했다.

자신이 아는 믿을 만한 의원은 총타에 있는 장로 우광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