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다시 몇 달 후.
어지간한 집채만 한 비단 이불 홑청을 빨아서 널어 말린 마유선은 터덜터덜 걸었다.
단검을 잡아 손바닥마다 박혔던 굳은살은, 방망이질을 해대며 더 단단해졌다.
매일같이 온몸에 물을 뒤집어쓰고 빨래나 해대고 있어야 하는 것이 답답하기만 했다.
마음 같아서는 황후가 눈에 뵈기만 하면 당장 아작내고 싶은데 황후궁 구석에서 빨래나 해대는 자신이 황후를 만날 길이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쓸데없는 방망이질이나 해대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세답방에 들어 저 멀리 상궁 사지가 보였지만, 오늘은 다가가지 않았다.
지금 마음은 빨랑 자신을 황후의 침전으로 보내 달라고 그녀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만 싶었기에.
“유선아!”
마유선의 마음을 모르는 사지가 그녀를 불렀다.
“네! 마마님!”
오늘은 쳐다보고 싶지도 않은 사지의 부름에 마유선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왜? 왜 부르는데?’
“오늘부터 네가 침전으로 이불을 옮기도록 해라.”
사지의 말에 마유선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정말요?”
“당분간만이다. 나인 초련이 휴가를 간 동안만.”
“네! 네네! 감사합니다. 마마님!”
마유선이 고개를 꾸벅이며 답했다.
그것이 마음에 든 것인지 사지가 빙그레 웃으며 작게 말했다.
“네가 하는 것이 마음에 들면 계속할 수도 있고.”
짧은 말을 남기고 자리를 옮기는 사지의 손가락에는 마유선이 쥐여준 옥가락지가 끼여져 있었다.
마유선이 환희에 찬 미소를 흘렸다.
‘며칠이면 족해, 주변을 확인하고 목표물을 제거하는데 충분해. 며칠 후면 이 짓도 끝이야.’
마유선은 혼자서 생각했다.
그날 해가 질 무렵.
마유선은 커다란 이불 채를 황후의 침구를 나르는 작은 가마에 넣었다.
내시들이 가마를 옮기고 상궁 사지와 마유선을 포함한 나인들이 가마의 뒤를 따랐다.
경비가 과도하게 삼엄한 황후전 주변을 제외한 황후궁의 경비의 수와 교대 시간, 도망갈 경로까지 이미 파악이 끝난 지 오래였다.
마유선은 떨리는 마음으로 황후의 침실이 있는, 가장 내밀한 곳에 위치한 전각으로 발을 내디뎠다.
황후전이 가까워지면서 압도적으로 늘어나던 경비의 수는, 황후전 안에는 오히려 많지 않았다.
아마도 소수의 고수들로만 배치되어 있으리라.
‘전각 입구에 둘, 전각 마당에 서른둘.’
마유선은 빠르게 눈동자만을 돌리며 호위의 숫자와 그 위치를 파악했다.
전각 앞마당에 가마가 멈추자, 마유선과 나인들이 이불 채를 꺼내어 몇몇이 맞잡았다. 요를 싼 비단 보따리와 베개를 담당하는 나인들이 각각 챙겨 들었다.
사지가 앞장서고 나인들이 그녀를 따랐다.
마유선의 눈동자가 더욱 빠르게 돌아갔다.
‘하나, 둘, 셋…….’
복도를 따라 걸으며 호위의 숫자를 세었다.
복도 끝에 침실의 문이 열리자 커다란 방이 나왔고, 그곳에도 고수의 무인들이 여섯 명이나 서 있었다.
‘여섯!’
중간 문을 하나 더 열고 들어가자 호위는 없고 상궁 둘과 나인 네 명만 있었다.
‘여긴 호위가 없군.’
마지막 방의 제일 안쪽 문이 열리고 화려하게 조각된 커다란 침상 위에 금빛 휘장이 처진 황후의 침실이 나왔다.
세답방의 나인들은 이미 깔린 이불을 곱게 개어서 비단 천에 싸고, 가지고 갔던 이불을 새로이 깔았다.
사지는 나인들이 이부자리를 정리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나인들의 정리가 끝나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한 후 몸을 돌렸다.
사지를 따라 세답방의 나인들과 마유선이 황후의 전각을 빠져나왔다.
마유선은 신경을 곤두세워 보이지 않는 곳에 숨은 호위가 없는지 확인했다.
마유선은 다음날도 황후의 침실 전각으로 들면서 어제와 같이 호위들의 위치와 숫자, 그리고 숨어있는 무인은 없는지 확인했다.
마유선 그 후로 며칠 동안 황후의 침전을 들며 확인하고 또 확인했지만, 호위의 배치나 숫자, 상궁과 나인의 수가 달라지지 않았다.
얼마 뒤.
마유선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자신의 주변을 정리했다.
궁에서 지낸 것은 1년이 다 되어 가지만 조심을 한 터라 자신을 알릴 만한 것은 없었다.
그날은 밥도 물도 먹지 않고 몸을 가볍게 만들었다.
그리고, 평소처럼 세답방에 들어 사지의 지시에 따라 방망이질을 해댔다.
그것이 손재주 없는 마유선이 빨래 다음으로 잘하는 일이었다.
해가 지고 술초시가 넘어가자 세답방 상궁과 나인들은 낮 동안 준비해 둔 황후의 침구를 챙겨 들고 황후의 침전으로 향했다.
지금쯤 황후는 잠자리에 들기 전 목욕을 하고 있으리라.
황후의 욕실까지 따라다니는 호위와 상궁, 나인들이 더 있을 것이다.
일단은 황후의 침실에 숨어서 며칠 상황을 지켜볼 예정이었다.
황후의 침상을 정리하고 상궁인 사지가 먼저 앞장서고 서열이 높은 나인들 순서대로 황후의 침전을 빠져나갔다.
제일 끝에 선 마유선은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다 기척을 숨기고 미리 보아두었던 침실의 굵은 대들보 위로 올라가 몸을 숨겼다.
세답방 상궁과 나인들이 나간 곳으로 지밀상궁과 나인이 들어와서 이부자리를 한 번 더 확인하고 황후의 침실 밖의 방으로 가서 자리했다.
마유선은 걸치고 있던 나인의 옷을 벗고 살수들이 입는 검은 무복에 검은 복면을 쓰고 황후를 기다렸다.
반 시진 후.
멀리서 여러 명이 걷는 진동이 대들보를 통해 느껴졌다.
아마도 황후가 목욕을 마치고 침실로 오는 것 같았다.
‘바깥방 문.’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에 마유선은 생각했다.
‘중간방문… 침실문…….’
곧 침실의 문이 열리고 황후와 두 명의 상궁과 네 명의 나인이 따라 들어왔다.
황후는 익숙하게 침실 한편의 의자에 앉았다. 상궁과 나인들이 침의를 준비해 옷을 갈아입히고 길게 풀어헤친 머리를 빗겼다.
나인 하나가 차를 내어오자 황후는 상궁 한 명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물렸다.
그것이 일상인 듯 상궁과 나인은 밖으로 나가, 침실 바로 밖의 방에 자리를 잡았다.
황후는 천천히 차를 마셨다. 차를 다 마시자 침실에 남아 있던 상궁이 황후가 침상에 누울 수 있게 도왔다.
“불을 끄고 나가보거라.”
황후의 말에 상궁은 황후의 이부자리를 다시 확인하고, 작은 불을 끄고 옆의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마유선은 숨소리도 줄이고 침상에 든 황후를 내려다보았다.
황후의 침실 옆방에 많은 상궁과 나인이 있었음에도 기침 소리 하나, 침 넘기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밤은 깊어만 갔고, 황후의 침실을 지키는 이들은 있는 듯 없는 듯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황후는 잠이 깊이 든 모양이었다.
상황을 지켜보며 실행할 때를 정하기로 했던, 마유선은 홀로 잠이 든 황후를 바라보며 바로 결행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고운 가루를 흩뿌렸다.
수면 효과가 강한 가루가 황후의 침실에 가득 차기를 기다렸다.
마유선은 황후를 최대한 조용히 흔적 없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게 없앨 생각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황후가 도중에 깨면 곤란하므로 깊이 잠을 재웠다.
다시 반 시진 후, 마유선은 조용히 바닥으로 내려왔다.
그녀는 가늘고 긴 침을 꺼내 들었다. 그것으로 황후의 백회 깊숙이 찔러넣을 생각이었다.
침의 끝조차 흔적 없이 머릿속에 꽂아 넣으면 어지간한 의원도 황후의 사인을 밝혀내기 힘들 것이다.
외상을 찾을 수 없음은 물론이었다.
그러면 황후의 사인이 돌연사가 될 확률이 높았다.
마유선은 한 손에 천을 말아 쥐고 황후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두툼한 소가죽 골무를 낀 다른 손에 침을 들고 황후의 백회로 가지고 갔다.
골무 낀 손에 힘을 주려는 순간.
상궁과 나인들이 있는 방이 아닌, 반대쪽 벽이 뚫리며 끝이 날카로운 비수가 침을 든 마유선의 팔뚝을 긋고 문에 박혔다.
마유선은 몸을 틀었다. 비수가 날아온 벽이 깨지듯 열리더니 무인 하나가 마유선에게 달려들었다.
‘아차!’
숨겨진 방에 황후의 호위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도 여러 번 숨은 기척을 살펴도 알아채지 못했다. 아마도 엄청난 고수일 것이다.
마유선은 단도를 양손에 쥐고 사내의 공격을 막았다.
사내는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으며 그녀의 단도를 쳐내고 그녀의 가슴을 향해 검을 꽂았다. 몸을 비튼 마유선의 어깨에 사내의 검이 깊이 박혔다.
“마마!”
상궁과 나인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고, 곧 바깥방과 복도에 있던 호위들까지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마유선은 벽을 뚫고 들어온 사내, 태무령과 반대쪽에서 몰려오는 한 떼의 호위들을 번갈아 보다 태무령에게 달려들었다.
태무령은 마유선의 숨통을 단숨에 끊어놓을 심산인지 곧바로 그녀의 복부를 공격했다.
마유선은 태무령이 내리치는 검을 똑바로 보며 몸을 틀어 옆구리를 내어주고, 태무령이 들어온 비밀의 방으로 뛰어들었다.
그녀는 비밀의 방에 나 있는 문을 보고 바로 그쪽으로 달아났다.
그녀의 등 뒤로 태무령과 황후의 호위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독주머니를 뒤로 던진 마유선은 몸을 피하며 빠르게 지혈했다.
혈흔과 혈향이야말로 도망치는 자에게 치명적이었기에.
마유선은 눈에 익은 궁의 길로 들어 미리 봐두었던 경로로 빠르게 궁을 벗어났다.
* * *
마유선은 무조건 궁에서 멀어졌다.
지혈을 했지만 상처가 벌어지며 피가 자꾸 배어 나왔다.
특히, 도망을 치기 위해 희생한 옆구리의 상태는 심각했다. 몸에 힘이 빠지고 정신마저 혼미해지고 있었다.
다시 지혈하고 옷자락을 찢어서 상처를 꽉 묶었다. 그리고 몸을 움직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황후의 군사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비틀비틀 몸을 움직이던 마유선의 눈에 다리 밑에 거지들의 움막이 보였다.
더 이상 도망갈 기운도 없는 마유선은 움막으로 내려갔다.
제일 안쪽에 자리한 움막으로 가서 거적을 들치자 토악질이 나올 것 같은 역한 냄새가 확 끼쳤다.
“이쪽! 저기 저쪽도 확인해!”
코앞까지 쫓아온 황후 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움막 안에는 거지 몇이 거적을 덮고 바닥에 뒹굴어 자고 있었다.
마유선은 제일 덩치가 커 보이는 거지의 거적 안으로 기어들어 가 몸을 웅크렸다.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긴 사네?”
황후의 군사들이 투덜거리며 움막을 뒤지는 소리가 들렸다.
마유선은 양손에 단검을 들고 몸을 최대한 작게 웅크려 옆의 거지에게 몸을 붙였다.
그녀가 몸을 숨긴 움막 입구의 거적이 확 들추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휴! 냄새야!”
거적을 들친 황후의 군사가 궁시렁거리며 횃불로 움막 안을 한번 비추어 보더니 금방 사라졌다.
움막의 거지들은 이런 일이 익숙한 듯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았다.
북경 분타는 궁과 가까워 이런 일이 종종 있었다. 궁의 군사들이 찾아와 거지촌을 뒤지는 척을 하고 돌아가는 일 말이다.
놈들도 위에서 시키니 어쩔 수 없이 둘러보는 시늉이라도 하는 것이리라.
팽팽하게 마유선의 신경을 잡아당기던 긴장감이 풀리며 몸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마유선의 의식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