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으흠…….”
마화명은 자신의 여식과 자식, 삼장로와 자리한 이들을 하나씩 바라보며 생각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받아들인다.”
“저, 저…….”
삼장로와 몇몇의 장로가 불만 가득한 표정이 되었지만, 살막주의 명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대신! 임무에 나서면 살막과 관계된 모든 연줄을 끊을 것이다. 실패하면 혼자 죽는 것이고 성공하면 막주의 후계자가 된다.”
막주 마화명의 말에 마유선과 마부현의 시선이 마주쳤다.
“누가 가게 될지는 이 자리에서 정한다.”
말을 끝낸 마화명이 손가락을 튕기자 회의실을 비추고 있던 불빛이 사라지며 사방이 깜깜하게 변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마유선과 마부현은 순식간에 기척을 숨겼다.
곧이어, 가볍고 작은 움직임이 회의장 주변을 맴돌았다.
마화명은 조용하고 은밀한 동작을 감지하기 위해 어둠 속에서 눈을 감았다.
유연하고 나긋한 몸짓, 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은신술, 바람을 가르며 민첩하게 움직이는 서늘한 두 개의 칼날… 여식 마유선이었다.
마유선 보다는 인기척이 더 드러났지만, 기민하게 움직이고 사라진 듯 멈추었다 다시 빠르게 자세를 바꾸는 마부현은 누이보다 둔한 동작을 보완하기 위해 행동의 변화를 최소한으로 줄였다.
그의 손등을 감싸고 있는 휘어진 칼날은 몸의 일부처럼 움직였다.
챙―!
챙챙챙―! 채앵~
쇠붙이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챙!챙!챙챙챙챙―!
소리가 커지고 빨라지고 있었다.
“흣!”
“윽…….”
낮은 기합 소리와 짧은 탄성이 터지고 난 후, 두 사람의 움직임이 멈추고 회의장은 고요했다.
“흠…….”
마화명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
다시 불을 켠 회의장 한편에는 마유선이 마부현의 목에 짧은 단도를 들이대고 있었다.
마부현은 일그러진 얼굴로 누이를 노려보았다.
“쯧!”
삼장로가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찼다.
막주 마화명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마유선이 한다!”
아버지 막주의 말에 유선은 동생의 목에 들이대고 있던 단도를 내리며 의기양양한 얼굴이 되었다.
마부현의 얼굴에는 절망이 가득했다.
황제의 스승이라는 황사의 의뢰, 황후를 없애 달라는 그 의뢰를 살막은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 * *
마유선은 어머니의 방으로 들었다.
살막의 막주인 아버지가 반한 여인은 자그마한 얼굴에 눈이 크고 코와 입이 오목조목하게 자리 잡은 미인이었다.
미인박명이라는 옛말이 맞는 것인지, 건강하지 못한 그녀는 자리를 보전하고 누워서 지내는 날이 더 많았다.
마유선은 밝은 얼굴로 어머니의 침상에 다가갔다.
“어머니!”
마유선의 부름에 임하연은 기운 없는 미소를 지으며 딸아이를 바라보았다.
“몸은 좀 어떠세요?”
“많이 좋아졌다.”
임하연의 핏기없는 새하얀 얼굴은 전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 임무를 나가면 좀 오래 걸릴 것 같아서 어머니 얼굴 많이 보고 가려고…….”
마유선이 파리한 임하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꼭, 너까지 그 일을 해야 하니?”
“에이… 막주의 딸이 어찌 놀고만 있겠어요?”
임하연의 못마땅한 말에 마유선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넌 안 했으면 좋겠어. 결혼해서 아이 낳고, 아이들 키우면서 그리 살면 좋겠다.”
임하연의 말에 마유선은 멋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머니가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마유선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살막의 막주가 되어서, 살막을 더욱 크고 단단한 조직으로 키우고 싶을 뿐이었다.
“히… 좋은 사내가 생기면…….”
마유선이 어색하게 웃었다.
“꼭 네가 가야 하니?”
임하연의 말에 마유선은 겸연쩍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금방 다녀올게요.”
“이번에 갔다 오면 정말 그만두고 결혼을 생각해 보거라.”
“네~네~! 어머니는 몸 잘 챙기세요. 저는 잘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오거라.”
딸아이만이라도 살막의 일을 하지 않기를 바라는 임하연의 목소리는 불편했다.
“네, 어머니.”
마유선은 어머니 임하연에게 서둘러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섰다.
더 있으면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할지 알았기에.
어머니에게 인사를 한 마유선은 막주의 집무실로 들었다.
장로들과 동생 마부현도 함께 있는 집무실의 분위기는 묵직했다.
마유선이 막주인 아버지 앞으로 가서 서자, 마화명이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마유선은 살막의 사람이 아니다. 네가 이곳을 나서면 너와 연결된 살막의 모든 흔적을 지울 것이다.”
“네!”
“하지만 황후를 없애는 이번 일을 성공하고 돌아온다면, 너는 살막의 후계자가 된다.”
“네!”
“네가 잘하리라 믿는다.”
“꼭 성공해서 돌아오겠습니다.”
마유선은 막주에게 답하고 장로들과 마부현에게 인사했다.
“몸 조심히 다녀와.”
마부현이 짧게 말했다.
누이가 막주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이번 일이 성공하지 못했으면 하는 마음과 살막의 위상이 높아지기를 바라는 마음, 누이가 무탈하게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상반된 마음으로 마유선을 바라보았다.
“잘 다녀오마.”
마유선도 마부현에게 말했다.
그녀 역시 막주가 되고 싶은 마음과 동생에게 미안한 두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유선은 적당히 인사를 마무리하고 살막을 떠나 황궁으로 향했다.
그 어떤 때보다도 힘든 이번 임무를 해결하기 위해.
* * *
몇 달 후.
마유선은 맨발에 치마와 소매를 둥둥 걷어붙이고 나무 방망이를 내리치고 있었다.
물방울이 얼굴과 앞섶으로 튀었지만, 신경 쓰지 않고 혼자 구시렁댔다.
“어휴우! 뭔 놈의 이불을 매일같이 빨아 재끼냐? 아구우!!”
황후는 한여름에도 꼭 솜을 넣어 만든 두툼한 이불을 사용했다.
하룻밤 황후가 사용하는 금구는 이불과 처네, 요와 베개가 있었다. 한 번 사용한 이불을 뜯어내면 깃과 동정, 내공으로 나누어졌는데 새것처럼 깨끗하기만 한 그 모든 것을 매일매일 빨아야 했다.
정말 짜증 나는 것은 한번 사용한 이불을 다시 쓰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깐 마유선은 황후가 한번 사용하고 처박아 놓을 것을 힘들게 세탁하고 있었다.
신경질이 묻은 방망이질이 거세졌다.
궁녀들 사이에서 힘 좋다는 칭찬이 자자할 만했다.
그녀는 몇 달 전, 궁에 들어온 지 15년이 지나 계례를 치르고 황후의 궁으로 들어가는 시녀의 신분으로 위장했다.
수방과 생과방, 소주방을 전전하며 음식 솜씨 없음과 손재주 없음을 확인하다 결국에는 힘이 좋다는 이유로 세답방에 배속되어 허구한 날 빨래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섬세함과는 거리가 먼 크고 무거운 이불 빨래를 말이다.
“쳇! 뱃속에 들어가면 똑같은 것 가지고… 까탈스럽게 굴지를 않나, 거 쓸데도 없는 자수는 왜 그렇게 놓는 건데?”
수라간과 수방에서 쫓겨나다시피 해서 이곳까지 온 것이 못마땅해서 툴툴거렸다.
“어휴유… 혼자 자는데 이불은 또 뭐가 이렇게 커…….”
입은 구시렁댔지만, 쉬지 않고 빤 것을 길게 만들어놓은 줄에 널어 탈탈 털었다.
털레털레 걸어 세답방으로 든 마유선은 불편한 표정으로 빳빳하게 풀 먹인 새 비단 홑청에 새로 탄 솜을 넣어 꿰매고 있는 궁녀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런 이불을 덮고 자다가 사람이 베이겠네…….’
옆에서는 깨끗한 이불을 다시 뜯어내고 있었다.
‘허구한 날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마유선으로서는 쓸데없기만 이런 일에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매달려 있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뚱한 표정으로 있던 마유선은 작업을 둘러보는 나이 많은 상궁과 눈이 마주치자 표정을 싹 바꾸고 빠르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마마님! 이리 서 있으시면 다리 아프지 않습니까? 여기 좀 앉으십시오.”
의자까지 가져온 마유선이 싹싹하게 말했다.
“…….”
상궁 사지는 마유선이 내민 의자에 슬그머니 앉았다.
“어머! 어깨 뭉친 것 좀 보세요. 피곤하시지요.”
마유선이 어깨를 주물러대며 말했다.
“…….”
상궁 사지는 마유선이 자신의 어깨를 주무르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고 있었다.
저런 나인들이 있었다.
자신에게 잘 보여서 편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거나 승진을 하고자 하는 아이들.
사지의 눈에는 마유선도 그런 이들 중 하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 아부가 싫지는 않았지만, 모두를 다 그들이 원하는 곳에 배치할 수는 없었다.
지금 자신의 어깨를 주무르는 나인 마유선은 잘 웃고 싹싹하고 덩치는 작으면서 힘은 좋아서 써먹을 곳이 많았다.
세답방 상궁 사지는 싫지 않은 표정으로 안마를 받으며 궁녀들이 움직이는 것을 둘러보았다.
“마마님!”
마유선이 사지의 눈치를 보며 그녀를 불렀다.
“…….”
사지는 말 없이 고개를 까딱였다. 할 말 있으면 하라고.
“그… 침전에 이불을 들고 가는 걸 보는 데 어찌나 힘들어하던지. 어휴… 제가 너무 돕고 싶지 뭡니까?”
“훗!”
사지가 알만하다는 듯이 작게 실소를 흘렸다.
매일 새로 만든 황후의 침구는 커다란 비단 천에 싸서 황후의 침전으로 옮겼다.
황후궁 제일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침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이는 상궁 사지와 이불과 베개, 요를 담당하는 나인 열 명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것이 꽤 무게가 있고 시간도 딱 맞춰야 하고 신경을 쓸 게 많은 일이라 아주 쉽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이 돕고 싶다니.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말이었다.
빨래하는 것 대신 황후의 침전으로 침구를 옮기는 일로 바꿔 달라는 말 아닌가.
세답방의 제일 밑바닥 일이 직접 물에 손을 담가 가며 빨래하는 것이고 그다음이 다듬이질과 다림질, 바느질 순으로 진급하여 황후의 침전으로 옮기는 것은 제일 큰 승진이었다.
“제가 빨래를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옵고, 너무 힘이 들어 보여서 정말 좀 돕기만 하겠다는 뜻입니다. 보시고 잘하는 것 같으면 옮겨주셔도 좋고… 헤헤.”
마유선이 웃어 보이며 말했다.
“음… 조금 더 생각해 보마.”
마유선은 처음 세답방에 들 때부터 황후의 침전으로 이불 옮기는 일을 하고 싶어 했다.
윗전과 가까운 일일수록 출세하기 쉬웠으므로 다들 원하는 것이었다.
사지는 일이 끝나기만 하면 가까이 와서 입안의 혀처럼 구는 마유선이 싫지 않았다. 거기다 얼마 전 그녀가 조용히 선물한 노리개는 꽤 값이 나가는 것이었다.
자리가 비기만 한다면 마유선을 넣어줄 마음이 있긴 했지만 당장은 누구를 빼내기도 마땅찮았기에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네! 마마님!”
‘어휴우! 그냥 좀 후딱후딱 옮겨주면 되지 뭔 생각을 또 한다고. 뭘 좀 더 쥐여주어야 하나…? 에잇!’
마유선은 혼자 속으로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생글생글 웃으며 손에 힘을 주고 사지의 어깨를 주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