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살막주가 안전함을 확인한 천상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마경만이 쓰러져 있을 뿐이었고, 당조와 그 주변을 지키던 측근들은 벌써 도망가고 없었다.
들끓는 화를 참지 못한 천상은 쓰러진 사마경을 타구봉으로 내리쳤다.
“으악!”
기절했던 사마경이 비명을 질렀다.
천상은 멈추지 않고 사마경을 두들겨 팼다.
사마경의 몸에 살이 터져 피가 흐르고, 의식이 들어갔다 나갔다를 반복하면서 비명을 질러대도 천상은 멈추지 않았다.
감히 개방의 후개를 공격하고 거기다 살막주까지 잡아 온 것을 생각하면 쓰러진 사마경 하나 아작내는 걸로 분이 풀리지 않았다.
“이제 그만하십시오.”
침착한 목소리로 천상을 말린 것은 살막주였다.
“으흠…….”
천상은 여전히 불쾌한 얼굴로 타구봉을 내리고, 살막주를 쳐다보았다.
“…….”
“…….”
그리고 살막주를 데리고 사흥문을 빠져나갔다.
사흥문은 그렇게 싱겁게 함락되었다.
사흥문의 수하 대부분은 도망가거나 숨었고, 어쩌지 못하고 성에 갇힌 꼴이 된 녀석들도 그저 살려달라고 빌 뿐 사흥문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지 않았다.
태수 적부개는 피를 줄줄 흘리며 의식도 없이 쓰러진 사마경 앞에서 그의 죄목을 조목조목 일러주고는 의미도 없어 보이건만 오랏줄까지 매어서 잡아갔다.
후에 들리는 얘기로, 옥에 갇힌 사마경은 제대로 치료받지도 못하고 의식이 오락가락하다 결국 옥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몇 달 뒤, 적부개는 그렇게도 기다리던 황제의 명을 받았다.
그는 관리해야 하는 심천의 무뢰배들에게 뇌물을 받고 그들과 결탁하여, 백성을 돌보는 것을 소홀히 한 죄로 전 재산이 몰수되고 관직에서 쫓겨났다.
* * *
개방 총타가 아닌 깊은 산 속, 개방의 안가에 도착한 천상이 살막주를 바라보았다.
살막주도 천상을 올려다보았다.
오랜만에 본 그의 얼굴은 이전과 다르게 주름지고 흰머리도 나 있었지만, 사람을 안심시키던 푸근한 미소와 따뜻한 눈빛, 든든하던 풍채는 변함이 없었다.
살막주는 천상을 처음 만났던 젊은 시절의 자신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오래전 그때로 말이다.
* * *
30여 년 전.
황제 주원의 굳은 얼굴은 흙빛이 되어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스승인 황사 원교의 표정 또한 어두웠다.
“어찌… 어찌 이리도…….”
황제는 ‘지독할 수 있단 말이냐’라는 말을 삼켰다.
태황후는 성미가 까다롭고,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발끈거리고, 인정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야박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황후는 그 모든 것을 능가했다.
후궁이 낳은 아이들을 흉물스러운 벌레 보듯 대했던 태황후는 지금의 황후에 비하면 인품이 훌륭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황후가 또 황제 주원의 아이를 살육했다.
회임한 빈이 배 속에 아이를 품은 채 죽은 것이 이번이 세 번째였다.
그 누구도 입 밖으로 그 일을 끄집어내지는 않았지만, 이번 일 역시 황후의 소행임을 궁의 모든 이들이 알고 있었다.
얼이 빠진 것 같은 황제가 중얼거리듯이 말을 내뱉었다.
“황후가 사라졌으면 좋겠소… 내가 살려면… 내 아이들이 살려면 황후가 없어져야만 해…….”
“폐하!”
황사 원교가 급히 황제의 입을 막았다.
지금은 황제의 공부 시간이었기에 황제와 원교 두 사람밖에 없지만, 궁에는 벽에도 텅 빈 허공에도 잘 다져진 바닥에도 황후의 눈과 귀가 붙어 있었다.
조심, 또 조심해야 했다.
황제가 망연한 얼굴로 원교를 바라보았다.
“으흠…….”
원교는 깊은 침음을 흘렸다.
* * *
궁 밖으로 나온 원교는 유림에서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제자 몇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안 될 일이었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하는 도리나 천륜이라는 것이 있었다.
비록 다른 여인의 배 속에 있는 아이라고는 하나, 황제의 아이이면 황후의 자식이기도 했다.
‘한데 어찌…….’
사악하고 잔인하고, 자신의 이익 밖에 챙길 줄 모르는 황후는 나라를 위해서라도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수많은 역사가 말해주고 있었다.
부패하여 안에서 썩어들어가는 나라의 끝이 어찌 되는지.
자기 한 사람의 권력과 집안의 이익만을 위하는 권력자가 나라를 어디로 이끄는지.
황제와 태어나지 못한 아이들뿐 아니라, 이 나라를 위해서도 황후를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황후의 뒷배를 믿는 자들은 어디서건 안하무인이었다.
관직 매매가 성행했고, 관직을 산 자들은 밀어 넣은 돈을 뽑아내려고 백성을 쥐어짜고 온갖 비리를 저질렀다.
나라가… 아니, 세상이 삐뚤어져 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이미 기울대로 기운 나라가 망국의 길을 걸을까 봐 겁이 났다.
황제의 스승 된 자로서 이리 둘 수는 없었다.
궁에서 나오며 이미 결심은 섰다.
제자들을 바라보는 원교의 눈빛은 비장했다.
“황후를 이대로 두고 볼 수가 없다.”
원교는 자리한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둘러보고 다시금 입을 열었다.
“황후를 제거해야겠다.”
그의 입에서 나온 낮고 무거운 목소리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움마저 느끼게 했다.
원교를 바라보는 제자들의 눈동자가 흔들리다 이내 제자리를 찾았다.
그를 가까이서 보필해 온 제자들은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평생을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하는 바에 대해 설파했고, 백성을 이롭게 하고자 궁에 들어가신 분이었다.
그의 눈에 황후는… 인간의 가죽만 뒤집어쓴 짐승에 불과하리라.
원교의 방안은 조용했고, 공기는 무거웠다.
한참 만에 그것을 깨고 입을 연 것은 원교의 두 번째 제자 상현이었다.
“사람을 은밀히 제거하는 데는 독만 한 것이 없습니다. 독을 알아볼까요?”
스승인 원교의 그 무서운 의견에 대해 찬성을 한다는 말조차 없이, 어찌 그 일을 해야 할지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독은 힘들 겁니다. 황후도 독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대비를 할 것이고, 무엇보다 황후의 측근들 중에 독에 대해 잘 아는 이가 몇이나 있습니다.”
제일 큰 제자 유강이었다.
유강의 말이 맞았다.
황후가 후궁들을 없앨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 독이었다.
그리 자유롭게 독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잘 아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독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들이 어설프게 사용하기 힘들었다.
“진천뢰는 어떻습니까? 가까이 가지 않고 멀리서 던지면 되고, 잘만하면 황후뿐 아니라 그 주변인들도 한 번에 처리할 수 있습니다.”
넷째 제자 마오의 말에 원교는 생각에 잠겼다.
“황후 주변에 무공이 뛰어난 자들이 많아. 우리 힘으로 그들을 뚫고 황후에게 닿기 힘들게야.”
큰 제자 유강의 말에 마오도 입을 다물었다.
“차라리 그런 일을 전문으로 하는 곳에 맡기는 게 어떻겠습니까? 듣자 하니 중원에는 은밀히 사람을 없애주는 곳도 있다고 합니다.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셋째 제자 신단의 말에 원교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래, 알아보거라. 절대 신중해야 한다.”
원교의 묵직한 목소리에 제자들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살막의 막주 마화명의 심각하기만 하던 얼굴은 여식을 바라보며 슬며시 풀렸다.
두 개의 단검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무재와 가벼운 움직임, 예리한 눈빛 특히 기감을 순식간에 숨기는 뛰어난 은신술은 자신의 젊은 시절을 똑 닮아 있었다.
아닌 척하려고 해도 자꾸만 여식에게로 쏠리는 마음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살막주의 시선은 삼장로 가백곤의 큰 목소리에 그에게로 향했다.
“이번 일은 절대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으흠…….”
마화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위험하다고 거절하고, 쉬운 일만 한다면 살막의 위상은 바닥으로 떨어질 겁니다.”
여식 마유선의 말이었다.
“살막의 존폐가 달린 일입니다! 실패하면 임무를 나간 자뿐 아니라, 살막 전체가 위험하다는 것을 아셔야지요!”
가백곤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성공하면 되지 않습니까?”
마유선이 삼장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가 저리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많은 나이가 아님에도 살수로서 그녀의 공적이 크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임무에 실패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최소한의 흔적만을 남기고 표적을 없애는 대단한 실력, 뒤탈 없는 깨끗한 마무리까지.
그녀는 살수가 되기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될 만큼 모든 면에서 완벽한 능력을 보이고 있었다.
“…….”
삼장로가 불쾌한 얼굴로 마유선을 쏘아보았다.
“의뢰를 받아들여야 한다는데는 저도 찬성입니다. 살막은 지금껏 위험하다고 의뢰를 거절한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번 일을 성공만 한다면 살막의 명성이 더 높아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살막주 마화명의 자식 마부현이었다.
마부현의 실력 또한 부족하다고 할 수 없었으나, 누이인 마유선에게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어린 시절 병약한 어머니를 대신해 그를 보살펴주던 누이였지만, 그녀와 살막주 자리를 두고 경쟁을 해야 하는 것을 알게 된 후, 마부현은 빠르게 어른이 되었다.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살막주가 되기 위한 실력을 쌓는 데에만 매진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살막주인 아버지의 젊은 시절 모든 것을 빼닮았다는 누이를 이길 수 없었다.
삼장로의 얼굴이 마부현에게로 획 돌아갔다.
“대체 정신이 있는 게야! 그 대상이 황후라고! 황후!! 황후를 없애려 했다가 우리 살막이 중원 땅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도 있음을 왜 모르는 게야!”
“제가 가겠습니다. 살막의 마유선이 아닌, 개인으로 이번 일을 하겠습니다. 실패해도 이번 일은 살막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니 살막과 관계된 저의 모든 흔적을 지워 주십시오.”
마유선이 삼장로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허!!”
삼장로가 뭐라 대꾸하지는 못하고 마유선을 쏘아보았다.
“대신 성공하고 돌아오면 저를 후계로 인정해 주십시오!”
마유선이 삼장로를 포함한 회의 자리에 있는 이들을 하나하나 돌아보며 말했다.
“저…….”
삼장로는 여인인 마유선이 이렇게 중요한 회의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그녀의 실력이 뛰어나고, 막주가 마음에 들어 한다고 해도 여인이었다.
삼장로는 절대 여인인 마유선에게 살막을 맡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제가 하는 게 맞지요! 제가 가겠습니다. 후계도 그렇습니다. 아들인 내가 있는데 어찌 누이가 그 자리를 탐합니까? 제가 후계가 되지 못할 사유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누이는 누이의 본분을 생각하세요!”
마부현은 언젠가부터 누이와 살막의 후계자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저렇게 따박따박 존대를 했다.
“네가 나보다 실력이 못하잖아?”
마유선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
마부현의 얼굴이 굳었지만, 대꾸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