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번쩍번쩍 빛이 나는 최고급 갑옷을 걸치고 윤기가 좔좔 흐르는 매끄러운 말 위에 앉은 심천의 태수, 적부개가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는 느릿했다.
그의 뒤를 따르는 관군의 수는 많았지만, 정리되지 않은 대열과 더딘 걸음, 느슨한 자세에는 위용이나 기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투구 아래 적부개의 얼굴에는 연신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흐흐흐! 이번에 무뢰배 놈들을 잡아넣으면 사마경에게 꽤나 큰돈을 받아낼 수 있을 텐데… 으흐흐흐.’
다물려고 해도 입이 자꾸만 벌어져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서두를 필요 따위는 없었다.
‘이번에 크게 한몫을 받으면 뭘 할까나…? 서향루에 새로 온 기녀 향이가 그렇게 곱다고 하던데… 흐흐흐흐.’
적부개는 혼자 헤실거렸다.
* * *
천상은 굳은 얼굴로 사흥문을 향해 앞으로 나아갔다.
길을 꽉 막은 거지들이 양옆으로 도열하며 가운데 길을 터주는 모습은 어떤 의미로는 장관이었다.
성큼성큼 걷던 걸음은 사흥문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오래되어 낡긴 했지만, 상황이 좋았던 조부 때에 지은 사흥문의 건물은 높고 컸다.
불안한 마음으로 천상을 기다리고 있던 사마경은 사흥문의 높은 건물 꼭대기의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태수가 당도하지 않았다.
사마경은 태수가 올 때까지 개방의 방주를 잘 어르고 달래어 시간을 벌어볼 심산이었다.
“개방의 방주께서 이 누추한 곳까지 어찌 걸음 하시었소?”
사마경이 건물 높은 곳에 서서 아래에 있는 천상에게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당장 막주를 내놓아라!”
“……?”
천상의 단호한 고함에 사마경은 고개를 돌려 조용히 당조에게 물었다.
“후개 일 때문에 복수하러 온 것 아니야? 막주는 왜 내놓을래?”
사마경의 물음에 당조가 가만히 생각하다 답했다.
“개방에서도 살막을 이용하려고 그러는 걸까요?”
“살막을? 개방에서? 에이… 그게 말이 돼?”
“음… 아! 막주와 그 방주 아들놈의 관계가 예사롭지가 않았습니다.”
“다 늙은 막주랑 개방 후개랑? 근데 그걸 개방주가 내놓으라 한다고? 아… 그것도 이상한데…….”
사마경과 당조가 쑥덕거리는 것을 참지 못한 천상이 타구봉에 내공을 실어 바닥을 내리쳤다.
천상의 주변에서부터 바닥이 흔들리며 요란한 소리와 울림이 사흥문 꼭대기까지 전해졌다.
그제야 사마경이 다시 천상을 내려다보았다.
“거참! 방주! 성질도 급하시오!”
천상에게 대꾸한 사마경이 수하에게 조용히 명했다.
“막주를 데리고 와라.”
“네!”
수하가 사라지자 다시 천상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거… 막주가 방주의 며느리요?”
사마경의 자신 없는 물음에 천상의 얼굴이 붉그락푸르락하게 변했다.
개방의 방주가 왜 살막주를 내놓으라고 하는지를 알아야 시간을 끌든,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것도 저것도 마땅치가 않아 사마경은 답답했다.
“당장 내놔라!!”
천상의 내공을 실은 사자후가 사흥문이 자리한 월려산 전체에 퍼지며 산이 울렁거렸다.
작은 새들이 놀라 후드득거리며 하늘 높이 날아가 버렸다.
“거참! 왜 막주를 내놓으라는지 말을 해야 나도 뭐라고 대꾸를 할 것이 아니오…….”
천상의 기세에 예삿일은 아닌 것 같아 사마경의 말끝이 흐렸다.
“네 이노옴!!”
천상의 고함에 사마경이 당조를 바라보며 작게 물었다.
“태수는 아직이더냐?”
“조금 전에 월려산 중턱을 지났다고 합니다. 곧 모습이 보일 겝니다.”
수하의 말에 초조하던 사마경의 얼굴이 기세등등하게 변했다.
“방주도 참… 막주를 뭐 때문에 며느리로 보려고 그러시오? 차라리 내가 젊고 예쁜 여자를 소개해 드리리다. 에잇! 어디 여자가 없어도 다 늙은 막주를…….”
“으아악!!”
잔뜩 격양된 천상이 타구봉을 들어 사흥문 앞을 막고 있는 놈들에게 휘두르려는 찰나,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발소리를 내며 태수 적부개의 군사들이 개방의 뒤를 에워쌌다.
비록 적은 수는 아니지만, 천상과 개방도들은 앞은 사흥문에, 뒤는 적부개의 군사들로 포위가 된 셈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벌겋게 달아올랐던 천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으며 피가 식은 것처럼 하얗게 변했다.
옆에 있는 염문강은 불안했다.
좀처럼 볼 수 없는 천상의 새하얗고 무표정한 얼굴은 누구 하나 반쯤 죽여 놓지 않고는 상황이 끝나지 않을 것이다.
거기다 염문강은 지금 방주와 사흥문의 문주가 하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갑자기 살막주를 내놓으라니? 막주가 뭐? 며느리?’
염문강은 이 이상스러운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방주를 말리면서 사흥문을 벌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하하하하! 어찌 이리 늦으셨소? 저기 저놈들이오!”
사마경이 만족스럽게 웃어 재끼며 말했다.
그 말에 적부개가 근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대낮에 아무런 죄 없는 민간인에게 폭행을 가하고, 아녀자까지 힘으로 제압해서 납치한 죄인 사마경은 당장 밖으로 나와 지엄한 국법의 심판을 받으라!”
적부개의 말에 사마경이 심하게 눈을 깜빡였다.
“아, 아니. 저, 저놈이 미쳤나? 네놈이 나한테 받아 처먹은 것이 얼만데 이제 와서 헛소리를 지껄이는 게야!!”
“…….”
사마경의 말에 적부개가 급하게 손짓을 했다.
어서 빨리 놈을 잡아 저 입을 틀어막으라고 말이다.
“자, 자잠깐!!”
사마경이 다급하게 소리치더니, 살막주를 끌고 나와 턱 밑에 단도를 들이대는 것 아닌가.
우드드득.
사마경을 올려다보는 천상의 이 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 * *
반 시진 전.
사흥문을 향해 움직이고 있긴 했으나, 사흥문 놈들이 누구랑 싸우건 말건 관심 없는 적부개의 걸음은 느릿했다.
하지만, 이번에 새로 맞춘 갑옷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역시 돈과 시간이 들어도 그 장인에게 맡기길 잘했어. 이번에 사마경에게 돈을 받으면 한 벌 더 맞출까? 지금 가면 너무 빠르지 않을까? 어디서 가서 좀 쉬었다 갈까?’
삐까뻔쩍한 갑옷을 차려입고 빼어난 말을 타고 구시렁대며 나아가는 적부개의 앞을 누군가가 막아섰다.
“쯧!”
적부개가 불쾌한 얼굴로 자신의 앞을 막는 무리를 쳐다보았다.
수수하고 눈에 뜨이지 않는 무복을 입은 자들은 어디 소속인지 뭐 하는 놈들인지 알 수가 없었다.
“웬 놈들이냐! 이분이 누구인 줄 알고 감히 그 앞을 가로막는 게야!! 치도곤을 당하고 싶지 않거든 썩 물렀거라!!”
적부개의 뒤를 따르던 관군 하나가 길을 막은 자들에게 호통을 쳤다.
관군의 으름장에도 앞을 막아선 자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천천히 팔을 들어 옥패를 보였다.
“헉!”
적부개의 눈이 크게 벌어지더니, 허둥지둥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었다.
그의 뒤를 따르던 군사들도 모두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 그금의위의 지, 진무사께서 어찌 이 누추한 곳까지…….”
당황한 적부개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곳에 힘없는 민간인을 괴롭히는 간악한 무리들이 있다 하여 그들을 처벌하러 왔다.”
우신이 옥패를 집어넣고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멀지 않은 곳에 선 연천이 우신과 적부개를 지켜보았다.
“간악한 무리… 제, 제가 지금 처단하러 가는 길입니다. 제게 맡겨주십시오. 이런 일에 어찌 진무사께서 나설 필요가 있겠습니까? 제가 알아서 깔끔하게 처리하겠습니다요.”
적부개가 연신 고개를 굽실거리며 말했다.
“대낮에 민간인을 잡아 폭행하고, 아녀자까지 납치한 사마경과 그의 무리들을 처단하러 가는 길이라고?”
우신의 물음에 적부개의 머리가 다급하게 돌아갔다.
‘사마경?’
그에게 받는 돈이 워낙 커서 아깝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깟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번 기회에 북진무사에게 잘만 보인다면, 황궁에까지 들어가지 말란 법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 내가 이런 촌구석에서 푼돈이나 받아먹으며 썩을 인물은 아니지.’
“그렇습니다. 이미 그놈들의 악행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요. 지금 놈들을 국법에 따라 처벌하기 위해 가는 길입니다.”
적부개가 비굴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단 말이지, 그럼 이번 일은 심천의 태수 적부개에게 맡기겠다. 아녀자를 구하기 위해 온 개방도들과 함께 사마경 무리를 처단하고 그들에게 잡힌 인질을 무사하게 구해내라. 내 그대의 능력을 지켜보겠다.”
“네!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천금 같은 기회에 적부개의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 * *
적부개는 인질을 잡고 있는 사마경을 노려보며, 사흥문을 치라는 명을 일단 물렸다.
그는 인질이 죽든지 말든지 상관없었지만, 북진무사의 명에는 인질을 무사히 구하라는 것도 있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다치기라도 했다가는 황궁으로 들어가는 원대한 꿈이 막힐 수도 있었다.
사마경은 급변한 상황에 이를 갈면서도 일단은 무사히 성을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살막주를 끌고 뒷문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적부개 이 썩을 놈아! 네놈이 그동안 받아 처먹은 돈이 얼마인데 나를 배신해? 내 꼭 다시 돌아와서 네놈의 사지를 갈라주마! 내게 받아먹은 돈만큼 갈가리 찢어줄 게야아아!!”
적부개를 향해 저주의 말을 퍼부은 사마경이 살막주를 끌고 뒤로 걸음을 움직이려는 찰라.
갑자기 맑은 하늘에서 날벼락이 치더니 사마경의 백회부터 단전을 훑고 발끝까지 내리꽂히는 것이 아닌가.
사마경은 길게 생각하지도 못하고 단도를 떨어뜨린 채, 몸을 부르르 떨다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눈을 까뒤집고 입에 게거품을 문 채로 몸을 떨어대는 사마경을 본 걸윤은 몸을 돌려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눈에 적부개의 군사들 뒤, 저 멀리에 선 연천의 모습이 들어왔다.
걸윤은 피식 웃으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천상은 손에 든 타구봉을 휘둘러 자신의 주위에 걸리는 사흥문 무인들을 되는대로 쳐내고는 곧장 성의 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두 손과 두 발에 공력을 실어 사마경이 있던 사흥문의 꼭대기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걸윤과 개방도들도 눈앞의 무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를 본 적부개는 혹시라도 공을 빼앗길까 봐 마음이 급해졌다.
적부개의 다급한 출격 명령에 군사들도 질세라 사흥문의 수하들을 쳐내고 성으로 들이닥쳤다.
사흥문의 수하들은 관군과 개방을 막을 생각보다 도망가기에 더 바빴다.
이미 문주인 사마경은 날벼락을 맞아 쓰러졌고, 상대는 구파일방의 개방과 심천의 태수였다.
수적으로도 열세했고, 관군을 상대로 끝까지 저항한들 득이 될 게 하나도 없었다.
사마경이 쓰러진 곳에 당도한 천상은 살막주에게 먼저 다가갔다.
“괜찮소?”
천상의 물음에도 살막주는 제대로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