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걸화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뼈가 몸을 뚫고 나오고 내장이 다 드러난 환자를 보아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걸화의 눈에서 눈물이 쉴새 없이 떨어져 내렸다.
“형… 형!!”
걸화가 걸부에게 달려들어 그의 상태를 살피고 맥을 짚으려고 했다.
“의원님! 제가 하겠습니다. 의원님!”
백공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걸화를 말리며 말했다.
“…제가…….”
걸화가 눈물이 흘러내리는 와중에도 걸부를 치료하려 하고 있었다.
교준이 걸화를 잡아 말렸다.
침착함을 잃고 크게 동요하고 있는 걸화는 걸부의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잘못했다가 실수라도 하면 걸부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백공이 걸부의 맥을 짚고 그의 옷을 벗기고 치료를 시작했다.
“…….”
걸화는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백공이 치료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 * *
걸화는 며칠 동안 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다.
진료소의 거지를 진료하는 것도 모두 백공이 하고 있었다.
걸화도 이런 적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는 것도 힘겹고 잠도 오지 않고, 입으로 아무것도 넘길 수 없는 상태는.
누워있는 걸부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만 바라보고 있었다.
걸부가 진료소에 업혀 온 지 나흘째 되는 날.
“으음…….”
신음을 내던 걸부가 천천히 눈을 떴다.
“형!”
걸부가 뭐라 하기도 전에 걸화가 그에게 달려들며 그를 불렀다.
“…….”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걸부가 얼굴을 찌푸렸다.
“무리하지 마, 형 지금 몸에 성한 데가 없어.”
걸화의 말에도 걸부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개방! 개방에 연락을 넣어! 어서! 아버지께 연락을 드려야 해.”
의식을 차린 걸부의 첫마디에 걸화는 다른 말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거지 하나를 시켜 가까운 개방 분타에 연락을 보냈다.
곧 동정호 분타주 왕하적이 다녀가고 걸부는 그를 통해 방주인 아버지께 직접 서찰을 써 보냈다.
얼마 뒤, 총타와 다른 분타에 긴급소집 명령이 내려졌다.
* * *
걸윤은 서둘렀다.
평소와 다르게 거지 복장을 하고 보은장 자신의 전각에서 나왔다.
급하게 걸음을 옮기던 걸윤은 자신의 전각으로 향하고 있는 연천과 마주쳤다.
연천은 말없이 걸윤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뭐? 뭐? 왜? 뭘 봐?”
걸윤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연천에게 말했다.
“어디가?”
“음! 개방에 일이 있어서 급하게 가야 돼.”
걸윤이 대충 말하고 갈 길을 가려는 것을 연천이 막았다.
“무슨 급한 일?”
“나 바쁘다니깐.”
걸윤이 그답지 않게 서두르고 있었다.
“네가 급한 것도 있네, 그럼 빨리 얘기해주고 가.”
연천의 말에 걸윤은 얼굴을 찌푸렸다.
“형님이 사파 무리의 공격을 받아서 많이 다쳤대. 형님을 도와주셨던 분은 잡혀가고. 개방에서 긴급소집을 했어, 그래서 빨리 가봐야 해.”
걸윤이 간단하게 자신이 서두르는 이유를 설명했다.
“나도 같이 가자.”
연천이 말했다.
“뭐어? 네가 왜?”
“너는 내 일에 마음대로 끼어들어서 같이 다녀놓고는 나는 왜 안돼?”
“안돼! 개방일이야, 다 거지들만 있다고. 네가 그런 꼴로 옆에 있으면 더 이상해.”
걸윤이 비단 장포를 차려입은 연천을 보며 말했다.
“…….”
연천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걸윤을 쳐다보았다.
“아이참! 나 가야 돼! 비켜!”
걸윤은 연천을 지나쳐서 서둘러 보은장을 벗어났다.
“흠…….”
연천의 머릿속에 자신에게 따박따박 바른말을 하던, 듬직한 풍채를 가지고 인상 좋은 걸부가 떠올랐다.
연천은 자신의 전각으로 돌아가 곽림과 허성에게 며칠 일이 있어 혼자 다녀올 곳이 있다고 말하고 흔한 무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말을 타고 걸윤의 뒤를 쫓았다.
우신과 영친왕의 무인들이 소리 없이 그를 따랐다.
* * *
집무실에 앉은 천상의 얼굴은 무겁고 어두웠다.
염문강은 불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차라리 붉그락푸르락해서 소리를 지르는 편이 나은 것 같았다.
오늘처럼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차곡차곡 쌓으며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방주의 모습은 낯설고 더 두려웠다.
걸윤의 표정도 좋지 못했다.
함께 자리한 다른 개방도들도 마찬가지였다.
걸부는 앞으로 차기 방주가 될 사람이었지만, 현재 개방의 큰 축이기도 했다.
아직 후개인 걸부였으나 방주의 자리만 물려주지 않았을 뿐, 차기 개방주로서 입지를 굳히며 수많은 개방도들에게 인정을 받고 있었다.
이것은 사흥문에서 단순히 걸부 한 사람을 건드린 것이라 볼 수 없었다. 개방에 도전장을 내민 것과 같았다.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해야 했고, 개방의 무서움을 알려야 했다.
염문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사파의 음! 그 사흥문을 치는 것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요즘 자주 모이는 사파들이 힘을 모아 대적한다면 저희로서도 힘들 겁니다. 싸우지 않고 사흥문을 압박할 방법을 생각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살막은? 살막을 살펴보았느냐?”
천상이 염문강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감정 없는 목소리로 새로이 물었다.
염문강이 이번 일에서 천상의 지시 중 가장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저것이었다.
걸부가 사흥문의 공격을 받았고, 옆에 함께 있던 여인이 잡혀갔다.
사흥문을 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살막을 살피라는 것은 도저히 그 의중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방주가 시키는 일이니.
“그것이 살막이 워낙 은밀하게 움직이는 곳인데, 최근에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보였습니다. 대놓고 마방파를 공격하기도 하고.”
“으흠…….”
“그것이 너무 드러내놓고 습격을 한지라 오히려 더 이상합니다.”
“그래, 알았다.”
“대체 살막에서 움직이는 것하고 이번 일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가자!”
천상은 염문강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일어섰다.
염문강은 불편한 얼굴로 천상을 바라볼 뿐이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의 감정이 속에서 폭발할 듯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기분대로 표현하고 감정을 터트리는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 * *
거지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주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장터나 길거리에 자리 잡고는 그곳이 마치 제집인 양 편안하게 늘어져 구걸했다.
그깟 거지 놈들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꼴이 마음에 안 든다면 물 한 바가지 퍼붓거나 욕지거리 좀 해서 쫓아내면 그만이었다.
그게 개방이라고 해도 내 가게 앞, 내가 다니는 길에 있는 게 불편하다고 토로하면 대부분은 툴툴 털고 일어나서 어딘가 다른 곳에 자리를 잡곤 했다.
그러니, 거지 몇 놈이 주변에 있어도 그다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한데, 지금 이 사태는 그냥 넘어갈 수준이 아니었다.
사흥문이 자리한 심천에 최근 들어 거지들이 좀 많다 싶은 느낌이 들더니 어느 순간부터 그 숫자가 폭발하듯 늘어나 이제는 길바닥에 행인보다 거지들이 더 많은 지경에 이르렀다.
구질구질한 놈들이 장터를 꽉 메우고 있으니 객들도 객잔이나 식당을 이용하기 뭣해서 서둘러 떠나버렸다.
분위기도 흉흉해져 마을 사람들도 어지간해서는 집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사흥문의 문주 사마경은 눈을 내리감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으흠…….”
사흥문 앞은 자신의 수하들보다 더 많은 숫자의 개방도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차라리 사흥문 안으로 넘어 들어오려고 하면 뭐라도 할 텐데, 딱 애매한 위치에 자리를 잡고 있는 통에 쫓아내기도 뭣하고 그렇다고 자고 일어나면 알 까듯이 숫자가 늘어나는 놈들을 보고 있자니 짜증스러웠다.
“사흥문의 강서와 광주지부에서도 난립니다. 거지들이 무서울 정도로 몰려오는 통에 점포에 장사가 되지 않아 세를 걷기도 힘들 것이라고 도움을 청하고 있습니다.”
당조의 말에 사마경은 다시금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으흠…….”
‘지금 내 코가 석 자인 판에 어딜 돕는다는 말인가.’
사흥문 안에 갇혀서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지가 벌써 며칠이나 되었다.
새삼 일 처리를 엉성하게 한 당조에게 화가 치밀었다.
“그 개방의 후개라는 놈을 살려두어서 이리 뒤탈이 나는 게 아니야!!”
“조용히 처리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알고 개방에서 달려드는 통에…….”
당조가 개방에서 자신들을 공격했다고 말하며 뒷말을 흐렸다.
실상은 숲 곳곳에서 약초를 캐고 있던 진료소 거지들을 개방으로 착각해 지레 겁을 먹고 도망을 친 것이었지만.
여하튼 그 일에 실패했을 때부터, 지금 같은 상황이 어느 정도는 예견된 것이었다.
“아무리 거지라고 해도 수가 너무 많아, 힘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야. 방주에게 실수라고 사과하면 무마가 될까?”
“안 됩니다, 그냥 개방도도 아니고 후개입니다. 실토하면 우리 쪽에서 먼저 명분을 만들어 준 꼴이 됩니다. 무조건 아니라고 잡아떼야지요.”
“그런다고 해결이 될까?”
사마경이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성 앞 개방도의 수가 어제보다 확연히 늘어나 있었다.
“개방에서도 언제까지 저리 있지는 못할 겁니다. 가만히 있으면 제풀에 지치겠지요. 한 몇 달 장사를 접을 각오를 하고 버티면 됩니다.”
“그래…….”
사마경이 편치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뭐어?”
당조의 보고를 듣는 사마경의 얼굴이 짜증스럽게 뒤틀려 올라갔다.
사흥문 앞에 진을 치고 있는 개방의 숫자가 점차 늘어나더니, 이제는 아예 마을로 내려가는 길조차 보이지 않게 거지들이 꽉 메우고 있었다.
사흥문 주변을 에워싼 거지들이 뭔 공격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흥문으로 쳐들어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하는데도 사마경은 그들의 존재에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엄청난 중압감에 신경이 잔뜩 예민해져서는 밤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입맛도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데, 이번에는 방주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것 아닌가.
뭔가 큰 사달이 날 터였다.
그저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도 조치를 취해야 했다.
“태수께 연락을 넣어라.”
“네!”
당조가 답하고 사라졌다.
“에이… 이번 일로 또 얼마나 뜯어갈지… 쯧!”
심천의 태수 적부개를 떠올리던 사마경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혀를 찼다.
적부개는 사흥문이 있는 광동 심천을 관리하는 태수였는데, 사마경은 평소 그와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데 그 태수 놈이 나라의 녹을 먹으면서 얼마나 돈에 환장했는지, 사마경만 보면 어떻게든 돈을 뜯어내려고 온갖 구실을 가져다 댔다.
근처 기루에 기녀가 새로 들어오기만 하면 적부개가 누구보다 먼저 달려갔는데, 그때마다 사마경이 술도 사고 기녀에게 돈까지 쥐여주어야 했다.
이건 이름만 태수지 날강도가 따로 없었다.
‘에잇… 그게 다 이럴 때 써먹으려고 그런 거지…….’
놈한테 나가는 돈이 아깝긴 했지만, 이번 일에 적부개가 나선다면 사흥문은 개방과 직접적으로 맞설 필요도 없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해결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