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걸부가 굳은 얼굴로 천천히 걸화에게 다가왔다.
“괜찮으냐?”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물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잠겨서 매끄럽게 나오지 못했다.
“으…응… 형이 여기는 어쩐 일이야?”
걸화가 얼떨떨 얼굴로 물었다.
“근처에 일이 있어 왔다가…….”
껄끄럽게 겨우 말을 내뱉고 있는 걸부의 미간이 깊게 패어있었다.
걸화는 그의 어딘가가 아픈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 그런데 형이 마부인을 어떻게 알아?”
걸화가 붉어진 걸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오래전에 인연이 좀 있었다.”
걸부가 불편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평소와 다른 걸부에게 마부인과의 그 인연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녀를 언제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그녀와의 사이가 거북해 보이는데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한 것들을 묻지 못했다.
조금만 더 말을 시키면 걸부가 당장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걸화는 오랜만에 보는 오라비가 왠지 멀게 느껴졌다.
“들어가, 내 진료소에 온 거 아니야?”
“그래, 가자.”
걸부가 마른 입술을 벌려 억지로 웃었다.
걸화는 걸부의 팔짱을 끼고 진료소를 향해 걷다가, 마부인이 사라진 방향을 한번 쳐다보고 걸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불편하게 굳어 있었다.
걸화는 뭔가 찝찝한 기분으로 걸부와 함께 진료소로 들었다.
* * *
걸화의 진료소에서 겨우 하루를 묵은 걸부는 다음날 바로 개방 총타로 향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걸화는 훨씬 더 잘 지내고 있었다. 자신이 걱정할 일도 오랫동안 지켜볼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여러모로 많이 성장한 모습이었다.
혹여 개방도인 자신을 알아보는 이가 있을까 봐, 친 오라비라고 말하지 않고 그저 가까운 지인이라고만 소개했다.
진료소는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진료소뿐 아니라 거지촌의 많은 이들이 걸화를 믿고 그녀를 따르고 있었다.
철없고 애 같던 걸화의 성장이 신기하고 기특했다.
걸화를 생각하며 설핏 미소를 걸치고 있던 걸부의 표정이 어느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표정 없이 앞만 바라보며 걷던, 걸부가 사람이 없는 한적한 숲길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만 나오시죠.”
조용히 말했다.
그 소리에 아무도 없는 것 같던 나무 뒤에서 조용히 사람이 나타나더니 걸부 앞으로 다가갔다.
“알고 있었느냐…….”
걸부에게 가까이 와서 말하는 사람은 고개 숙인 마부인이었다.
“이제 와서 왜 나타나신 겁니까?”
걸부가 그답지 않게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찌 사는지… 보고 싶어서…….”
마부인이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으흠…….”
걸부가 한숨을 내쉬었다.
“잘 지내는 것 같아서 좋구나.”
걸부를 보는 마부인의 얼굴에 설핏 미소가 비치었다.
“…….”
가만히 마부인을 바라보던 걸부의 미간이 좁아졌다.
“…….”
걸부를 향해 있던 마부인의 아련한 눈빛도 한순간에 변했다.
눈이 가늘어지며, 걸부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해 신경이 집중된 그녀의 양손에는 어느새 짧은 단검이 들려있었다.
서로를 마주하고 있는 걸부와 마부인 주위로 긴장감이 감돌았다.
잠시 후.
어디선가 우르르 몰려온 엄청난 숫자의 무인들이 걸부와 마부인을 몇 겹으로 둘러쌌다.
그 한가운데 사흥문의 문주인 사마경이 서 있었다.
“살막의 막주께서 이런 곳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었소? 아하! 젊은 정인을 몰래 만나고 계셨구만… 흐흐흐흐.”
사마경이 마부인을 보며 느물거렸다.
“…….”
마부인은 답 없이 사마경을 노려보았다.
“허! 정인이 걱정되시오?”
사마경의 말에 걸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살수 단체인 살막은 워낙에 자신을 드러나지 않는 곳이었다.
의뢰를 받아 사람을 제거하는 일을 했지만, 의뢰인에게도 얼굴을 보이지 않았고 일 또한 쥐도 새도 모르게 조용히 해결하기로 유명했다.
혹시라도 꼬리가 밟혀 누군가와 맞닥뜨려도, 맞서 싸우기보다는 몸을 숨기는 쪽을 택하는 이들이었다.
그런 살막이 마방파를 공격하고, 살막주의 모습이 노출되는 것은 아주 이례적이었다.
사마경의 눈에는 살막이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드러내는 일련의 행보들이 영단을 위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영단은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거지촌 의원의 뒤를 봐주는 게 살막이었구먼… 거, 아무리 의원의 영단이 탐이 나도 그렇지 마방파를 그리 멸문까지 시키는 건 너무하지 않았소?”
“…….”
“의원은 우리가 잘 모실 테니 막주께서는 정인과 편하게 가시오.”
사마경은 이 말과 함께 손을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사흥문의 흑연단과 철황단이 걸부와 살막주 마부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양손에 단검을 든 살막주는 사흥문의 무인을 찌르고 그 형상이 사라졌다가 저 멀리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살막주와 그의 무인들이 얽혀있는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는 사마경에게 당조가 다가와서 조그마하게 말했다.
“막주를 없앨 것이 아니라 잡아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럼 살막을 우리 뜻대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당조의 말에 사마경이 고개를 끄덕이다 명했다.
“막주는 생포해, 그리고 저놈은 없애버려!!”
그 말이 걸부와 살막주에게 달려드는 무인들의 손길이 더욱 거세졌다.
특히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진 걸부에게는 인정사정없는 공격을 가했다.
걸부의 손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움직이자, 그를 에워싼 사흥문의 무인들이 뒤로 나자빠졌다.
쓰러지는 무인들 뒤에 선, 새로운 이들이 걸부에게 달려들었다.
걸부는 몸을 크게 돌리며 자신에게 진격하는 무인들을 쳐냈다.
하지만,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사흥문의 무인들은 쉬지 않고 걸부에게 덤벼들었다.
걸부는 표정 없는 얼굴로 손과 다리에 내공을 실어 자신을 공격하는 적들을 쓰러트렸다.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무인들이 걸부를 둘러싸고 공격하는 통에 살막주의 눈에는 걸부가 보이지 않았다.
기척이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하며 자신이 죽는지도 모르고 죽어 나가는 사흥문 무인들을 상대하는 살막주의 온 신경은 걸부에게 쏠려있었다.
사마경은 입을 꾹 다물고 예상보다 싸움이 길어지고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살막이 거지촌 의원의 뒤를 봐주고 있었다니…….’
무림에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최대한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살막도 어지간히 영단에 욕심이 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오죽하면 살막주가 거지촌을 드나들기까지 하겠는가.
걸부를 바라보는 사마경은 흑연단 뿐 아니라, 철황단까지 끌고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걸부가 쏜 장에 바닥으로 쓰러진 수하들이 즐비했다.
계획에 없던 살막주의 정인은 아직 젊은데도 꽤나 무공이 출중하여 맨손으로 사흥문 무인들의 온 갖가지 애병들을 쳐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사람인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사흥문 쪽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기에 점점 힘이 빠지는 것이 보였다.
걸부 하나를 상대로 공격하는 무인들은 끝이 없었다.
“허어…….”
집중력이 흐트러진 것인지 어느 순간, 뒤에서 가슴을 찔러오는 것을 피하지 못했다.
걸부는 피를 흘리면서 손바닥에 강기를 실어 주변의 적들을 날려버렸다.
걸부를 둘러싼 한 떼의 무인들이 또 쓰러지자, 뒤에 선 이들은 주춤거리며 금방 달려들지 못했다.
그 틈에 도망가도 될 듯싶었지만, 걸부는 양손에 단검을 들고 홀로 칼춤을 추고 있는 살막주를 보며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던 사흥문 무인들은 다시 걸부를 둘러싸고 달려들었다.
걸부가 지쳐가는 것을 느낀 무인들은 더욱 격렬하게 무기를 들어 걸부에게 쑤셔댔다.
처음에는 작게 하나씩 생채기가 생기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점점 더 크고 깊은 상처를 남겼다.
“윽!”
어깨에 깊이 박힌 검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모양이 제각각인 쇠붙이가 걸부를 향해 찔러 들었다.
걸부의 몸에서 새빨간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그 모습에 싸우면서도 내내 걸부를 신경 쓰고 있던 살막주가 두 손을 쳐들며 소리쳤다.
“내가! 내가 가겠소! 가겠으니 그분은 놓아주시오!”
막주의 말에 사흥문의 수하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사마경을 쳐다보았다.
온몸에 피범벅이 되어 겨우 서 있는 걸부를 바라보는 살막주의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음… 좋아! 막주를 잡아!”
그 한마디에 사흥문의 수하들은 저항도 없는 막주의 혈도를 막고 그녀를 포박했다.
“…….”
걸부는 피범벅이 된 몸으로 막주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누군가가 움직이는 걸부를 가격했다.
“으윽…….”
걸부는 신음을 흘리면서도 막주를 향해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막주가 완벽하게 포박된 것을 본 사마경이 외쳤다.
“그놈은 없애!”
그 말에 살막주의 눈이 사납게 변했으나, 그녀는 이미 그들을 공격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는 개방의…! 개방의 후개요! 개방의 후개를 건드리고 무사할 것이라 생각하시오!”
막주의 말에 사마경이 다시 손을 들어 올렸다.
걸부에게 달려들던 무인들이 멈추었다.
“그만.”
사마경이 모두에게 들리게 명했다.
혹시라도 자신이 개방의 후개를 없앴다는 말이 새어나가면 곤란했다.
하지만, 걸부가 살아나간다면 그것 또한 그에게는 문제였다.
개방에서 복수하려 든다면 골치가 아파질 것이니.
사마경이 당조에게 작게 말했다.
“입 무거운 녀석 몇을 데리고 가서 조용히 묻어, 뒤끝 없게.”
사마경의 말에 당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마경과 그의 수하들이 살막주를 끌고 갔다.
막주는 끝까지 고개를 돌려 피범벅이 된 걸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시뻘건 핏발이 섰다.
사흥문의 무인들이 사마경과 살막주를 따라간 자리에는 당조와 그가 믿는 두 명의 부하만이 서 있었다.
걸부는 희미해져 가는 의식을 부여잡으며 사흥문 일행이 사라진 곳을 향해 팔을 뻗어 비틀비틀 움직였다.
당조와 남은 수하들이 걸부를 빠르게 잡아챘다.
“저쪽으로 가자.”
당조의 말에 그들은 걸부를 산 깊은 곳으로 끌고 갔다.
“흔적도 없이 해결해야 하니 땅을 파라, 깊게.”
당조의 말에 그의 수하들이 땅을 파기 시작했다.
걸부는 의식을 잃고 널브러져 있었다.
저 정도면 크게 손 볼 것도 없었다. 목이든 심장이든 확실한 곳을 찔러넣고 곱게 묻기만 하면 되었다.
“아이고! 땅은 파도 팔 때마다 꼭 이렇게 해야 하나 싶네…….”
땅을 파던 수하 하나가 지껄였다. 땅 파는 것이 귀찮으니 그냥 없애버리고 적당히 숨겨놓고 가고 싶다는 소리였다.
“어허!! 확실하게 처리하라고 하셨다!”
“…….”
당조의 나무라는 소리에 입을 다물고 계속 땅을 팠다.
그때였다.
“거기 뭐요?”
저쪽 멀리 숲 풀이 움직이며 거지 하나가 몸을 쑥 내밀어 그들을 바라보는 것 아닌가?
“저… 저기… 개방…….”
그와 동시에 숲 여기저기서 거지들이 나타났다.
“이런, 벌써 개방이…….”
“……?”
거지들은 호들갑을 떠는 당조와 부하들을 뻔히 쳐다보았다.
숲 곳곳에서 고개를 내미는 거지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더니, 당조와 그 수하들의 몇 배는 더 되었다.
“수가 너무 많아! 도망쳐! 얼른!!”
당조와 부하 둘은 다리에 내공을 실어 빠르게 그곳을 벗어났다.
그들이 사라지고 약초를 캐던 마강과 진료소 거지들이 피범벅이 된 걸부에게 슬금슬금 다가갔다.
“헉! 이분은 그… 의원님의 지인이라던 그…….”
“어서! 어서 진료소로 모셔!”
약초를 캐고 있던 마강과 진료소 거지들은 서둘러 걸부를 등에 메고 걸화의 진료소로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