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귀부인】
마당으로 나오던 걸화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했다.
‘그렇게 말을 했는데도 못 알아먹고! 이놈의 개방도들! 또 몰래 숨어서 사람을 훔쳐봐? 내 이번에는 가만 안 둘 게야…….’
잔뜩 골이 난 얼굴로, 씩씩대며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다.
거지들은 걸화의 심상치 않은 얼굴에 밖을 흘끔거렸다.
걸화는 망설임 없이 걸어, 진료소 입구에서 멀지 않은 아름드리나무 앞까지 다가갔다.
그녀의 입술은 한껏 비틀려 있었다.
잔뜩 짜증을 내며, 나무 뒤편으로 걸어간 걸화는 당황해서 걸음을 멈추었다.
“어?”
커다란 나무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 있는 사람은, 중년의 귀부인이었다.
당연히 이번에도 개방도가 숨어서 자신과 진료소를 엿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걸화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누, 누구…십니까?”
“아… 죄송합니다. 저는……. ”
귀부인이 놀란 얼굴로 우물쭈물했다.
“……?”
걸화는 거지촌과 안 어울려도 너무나 안 어울리는 이 귀티 나는 부인이 누구일지 생각했지만, 전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어… 의원님의 소문을 듣고 돕고 싶어 왔는데, 막상 들어갈 엄두가 안 나서…….”
한참을 머뭇거리던 귀부인이 무안한 낯으로 답했다.
“아― 그러셨어요? 아이구! 저 때문에 놀라셨지요? 저는 다른 사람인 줄 알고… 누추하지만 들어가세요.”
걸화는 처음 봤지만, 어쩐지 친근감이 드는 여인을 진료소로 이끌었다.
거지들과 교준, 영영과 미령, 성소… 아무튼 진료소에 있는 모든 이들이 걸화와 함께 드는 귀부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부유하고 곱게만 살아온 모습이 역력한 귀부인은 도저히 거지촌 같은 곳에 발걸음 할 것 같지가 않았기에.
“이분은… 아!! 성함이……?”
귀부인을 거지들에게 소개하려던 걸화가 부인에게 물었다.
“마부인이라고 불러주세요.”
귀부인이 걸화에게 작게 말했다.
“이분은 진료소에 도움을 주시려고 오셨대요. 마부인이십니다.”
걸화가 자신들을 보고 있는 이들에게 크게 말했다.
거지들은 품위 있고, 기품이 넘치는 여인의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얼마 전 은월이 다녀가긴 했지만, 그녀는 거지들에게는 관심 따위 없었다.
잠깐 왔다가 걸화만 데리고 가버렸으니.
한데, 저 귀부인은 진료소에 도움을 주겠다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그런지 여인은 진료소와 거기에 버글대는 거지들과 미령, 교준과 백공 한 사람 한 사람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교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마부인을 오래도록 뜯어보았다.
입을 작게 벌려 말하는 입과 가볍게 움직이는 몸놀림, 조용한 미소… 이 모든 것을 말이다.
갑자기 나타난 마부인이라는 존재가, 그녀가 뿜어내는 표현하기 힘든 그 무언가가 교준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 * *
마부인은 처음 진료소에 든 그 날 이후 매일같이 찾아와, 어울리지도 않는 진료소의 일을 돕고 있었다.
“아휴… 그냥 계셔도 됩니다. 이런 일은 제가 합니다. 손 버려요.”
미령이 자신을 도우려는 마부인을 말렸다.
“제가 돕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니 무슨 일이든지 하게 해주세요.”
마부인의 말에 미령은 마지못해, 간단한 일을 내어주곤 했다.
손에 물 한방을 묻히지 않고 살았을 것 같은 마부인은 진료소의 허드렛일을 하는데 몸을 아끼지 않았다.
더러운 거지들에게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도 않았고, 코 묻은 영영의 얼굴도 그녀의 깨끗한 손수건으로 쓱쓱 닦아주었다.
그런 그녀를 누가 마다하겠는가?
돈 많고 마음까지 넉넉해서 어려운 사람을 돕고 싶어 하는 그녀를 모두 좋아했다.
걸화는 말할 것도 없고, 미령도 영영도 성소도 거지들도 백공도 말이다.
마부인는 매일 아침 일찍 진료소에 와서 저녁이 되면 돌아갔다.
“의원님!”
교준이 걸화를 조용히 구석으로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무겁고 진지했다.
“대협! 왜요? 무슨 일 있어요?”
걸화가 심각한 그의 얼굴을 보고 물었다.
“의원님… 저 부인을 전에 만난 적이 있습니까?”
교준이 묵직하게 물었다.
“없어요. 그날 진료소 앞에서 처음 만났어요. 그날 교준 대협은 없었나?”
마부인이 처음 진료소에 든 날을 떠올리며 말했다.
“음…….”
교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요?”
“믿을 수 있는 분입니까? 신분은 확실하구요?”
교준의 물음에 걸화가 코웃음을 쳤다.
“대협도 참! 여기 신분이 확실한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래요?”
그건 걸화의 말이 맞았다. 집도 절도 없는 이들이 모이는 곳인데, 신분이라니.
“저 부인은 왜 이곳에 오는 것일까요?”
교준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
“사람들이 나한테도 왜 거지촌에 진료소를 차렸냐고 이상한 눈으로 물어요.”
걸화의 말에 교준은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
한데, 아무래도 뭔가가 마부인을 볼 때면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그 뭔가가 교준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 * *
천상은 큰아들을 바라보았다.
어려서부터 속 한번 썩인 적 없는 아들은 이제 자신보다 더 크게 자라서 그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었다.
걸화가 신의에게 쫓겨났단 말에 당장 달려가고 싶었지만, 걸부가 말리는 바람에 못 간 일은 지금도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신의는 걸화를 다시 불러들였고, 배움을 마치고 독립까지 했으니 말이다.
지금은 걸화의 진료소에 한번 가보고 싶은데 그것이 마음처럼 쉽지가 않았다.
무림맹의 회의가 하도 자주 열리는 통에 말이다.
걸화가 걱정되어 동정호 분타에 개방도의 수를 크게 늘이고, 소분타도 여러 개를 새로 만들었다.
천상이 그 핑계로 걸화의 진료소에 직접 가보고 싶었건만, 또! 무림맹 회의 날짜가 잡혀서 결국에 걸부를 보내기로 한 것이다.
“가는 김에 걸화가 어찌 지내는지 보고 오거라.”
천상이 걸부에게 말했다.
표면상으로는 동정호 분타와 새로 만든 소분타를 시찰하러 가는 것이지만, 실상은 걸화가 어떻게 지내는지 너무도 궁금해서 걸부를 보내는 것이었다.
동정호 분타주 왕하적은 천상이 아주 신뢰하는 개방도였고, 그의 보고는 상세하고 정확했다.
왕하적의 보고에 의하면 걸화는 거지들만 버글대는 진료소를 그럭저럭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개방을 나가서 신의의 제자가 되었으면, 번듯한 환자들을 받으며 살 것이지 왜 또 거지촌으로 들었는지 원…….’
이제 다 큰 여식이지만, 아직도 걸화만 생각하면 마음이 놓이지 않는 천상이었다.
“총타를 비워둘 수 없으니, 무림맹 회의 전에 다녀오겠습니다.”
천상의 마음을 아는 걸부가 말했다.
“아니다, 좀 비우면 어때서. 장로들도 있고 강이도 있는데 천천히 둘러보고 오거라.”
걸화가 어떻게 사는지 자세하게 보고, 길게 있다 오라는 말을 저렇게 하는 천상이었다.
“네, 방주님.”
걸부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자세히! 꼼꼼하게 잘 살펴보고 오너라.”
천상은 무엇을 보라는 말도 없이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었다.
“독립해서 자기 진료소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걸화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아는 걸부가 천상을 안심시켰다.
“그래… 알지… 알아. 그래도 어찌 이리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천상이 한숨을 섞어 낮게 말했다.
“잘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그래, 그래…….”
천상이 믿음직한 아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 *
찬 바람이 불면서, 해는 빨리 기울었다.
바닥에 붙어 있는 작고 낮은 움막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거지촌의 일몰은 잔잔하고 아름다웠지만, 해가 지면 순식간에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하면 밤을 맞을 준비를 서둘러야 했다.
거지들이야 준비고 뭐고 없었다. 그저 머리 댈 곳만 찾아들면 그만이니.
“후우…….”
교준은 깊은숨을 길게 내쉬었다.
오늘로 세 번째였다.
집으로 가는 마부인의 뒤를 쫓다 놓친 것이 말이다.
‘내가 손을 놓은 지 너무 오래되었나? 수련을 게을리하긴 했지…….’
미간에 골이 깊게 난 교준의 얼굴에는 좌절감마저 담겨 있었다.
걸화 말대로 거지촌 진료소에 든 귀부인이 뭘 훔쳐 갈리도 없고 거지들에게 잘 보여서 덕 볼 것도 없었지만, 마부인을 볼 때마다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에 참지 못하고 그녀의 뒤를 밟았다.
그저 뉘 집의 부인인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한데, 걸음이 빠르지도 않고 의복도 그럭저럭 눈에 뜨이는 색이며 나이도 꽤 있는 부인의 뒤를 밟다가 놓친 것이다.
눈앞에 있던 부인의 기척이 사람들 사이에 섞이는 순간 감쪽같이 사라지며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첫날은 자신의 실수라 여겼지만, 벌써 3일째 같은 일이 반복되니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부인에 대한 의심이 짙어지기만 했다.
교준은 묵직한 패배감을 안고 털레털레 진료소로 돌아왔다.
그간 수련을 게을리한 스스로를 질책하면서.
* * *
강서 분타주 왕하적은 분타로 드는 걸부를 보고 기분 좋은 미소를 흘렸다.
감정 표현이 거의 없는 왕하적으로서는 대단히 반가워하는 모습이었다.
젊은 시절 천상과 함께 뒹굴며 지냈던 왕하적은 다 큰 걸부를 보고 그 시절의 천상을 떠올렸다.
쩍 벌어져서 넓은 어깨와 듬직한 풍채, 사람 좋은 얼굴은 자신과 함께 구걸하고 무공을 익히던 그 시절의 천상을 그대로 보는 것 같았다.
걸화가 동정호 거지촌에 진료소를 차렸으니, 천상이 한 번쯤은 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왕하적은 천상이 직접 오지 않고 걸부를 보낸 것을 보고 슬며시 웃었다.
여식이라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천상이 어지간히 걸부를 믿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고, 그 성질 급한 양반이 이제는 방주라는 자신의 위치를 생각하고 행동하는구나 싶기도 해서 말이다.
“분타주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걸부가 왕하적에게 인사했다.
“못 본 사이에 많이 컸구먼.”
왕하적이 걸부의 어깨를 두드렸다.
10년 전쯤에 걸부가 무림행을 다닐 때 보았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때도 많이 컸구나 했었다.
당시에는 덩치는 컸지만, 완전히 아이의 티를 벗지 못했었는데 이제는 오롯한 한 사람의 성인이 되어 있었다.
왕하적은 육체뿐만 아니라 눈빛에서도, 몸짓에서도 노련한 어른의 모습을 담고 있는 걸부를 대견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걸부도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어린 시절 왕하적을 아저씨라고 부르며 매달리고 응석을 부렸던 것이 생각이 나서 말이다.
미소를 거두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걸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분타와 새로운 개방도들은 어떻습니까?”
왕하적은 몸만큼 생각도 마음도 자란 걸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변화한 동정호의 사정에 대해서 걸부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 * *
“아―이― 진짜…….”
걸화가 구시렁거리며 진료소로 들어왔다.
잠시 후, 후다닥거리며 진료소 밖으로 뛰어나갔다가 다시 찜찜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왜 그러십니까?”
교준이 요사이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진료소 안팎을 왔다 갔다 하는 걸화에게 물었다.
“교준 대협! 누가 있죠?”
“예?”
“아! 밖에서 누가 우리를 훔쳐보고 있잖아요. 좀 됐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걸화의 말에 교준은 자기도 모르게 마부인에게로 시선이 돌아갔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마부인과 교준의 눈이 딱 마주쳤다.
“……!!”
흠칫 놀라던 마부인은 곧 그녀 특유의 인자한 미소를 띠더니 고개를 돌려버렸다.
“내가 얼핏 봤는데 거지들이 아니던데요.”
걸화는 당연히 개방도들이 자신을 훔쳐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숨어있다 급하게 사라지는 이들은 아무리 봐도 개방이 아니었다.
“흠…….”
교준은 마부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일을 하고 있는 척했지만, 귀를 열어놓고 걸화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 뻔히 보였다.
“아… 뭐지?”
걸화가 혼자서 구시렁댔다.
“음! 거 혹시, 마부인의 호위가 아닙니까?”
교준은 마부인이 들으라는 듯이 크게 말했다.
그는 마부인의 미간이 잠시 일그러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엥? 진짜요? 마부인! 진짜예요?”
걸화가 마부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 그… 네, 맞습니다. 신경 쓰이게 해서 죄송합니다.”
마부인이 잠시 당황한 듯 말을 더듬다, 이내 평정을 되찾고 침착하게 답했다.
“아, 아니에요. 진즉에 말씀하시지요. 저는 다른 이들인 줄 알고…….”
걸화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닙니다, 저도 불편했습니다. 내일부터는 신경 쓰이지 않게 하겠습니다.”
“괜찮은데…….”
한동안 진료소 주변의 숨은 기척들이 엄청 신경 쓰였던 걸화가 작게 답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부터 정말 주변을 훔쳐보던 알 수 없던 기척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걸화는 마부인의 말대로 그녀를 지키던 호위가 더 이상 따라오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마부인은 계속 진료소를 찾아왔고, 아침에 와서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갔다.